|
211215. 묵상글 들 ( 대림 제3주간 수요일. - 행복도 불행도. 등 )
----------------------------------------------------
211215. 대림 제3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행복도 불행도
"내가 주님이고 다른 이가 없다.
나는 빛을 만드는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
나는 행복을 주는 이요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
나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룬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밖에는 주님이 없기에
당신이 빛과 어둠, 행복과 불행의 주님이시라고 하십니다.
빛과 어둠, 행복과 불행의 원인을
당신 아닌 다른 것에서 찾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에게서 찾지 말아야 함은 물론 다른 신에게서 찾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많은 사람이 사람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기에 불행하고,
사람 덕분에 행복하려고 하다가 불행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람에게 의지하는 사람의 행복은 사람에 의해 불행해집니다.
누군가에 기대어 서 있는 사람은 그가 몸을 빼면 쓰러지고,
누군가의 손에 매달린 사람은 그가 뿌리치면 떨어지겠지요?
그러므로 자기의 행복을 누구에게 의지하고
누군가에 의해 좌우되게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지난달 타계한 존 아티스는 19세 때에 백인 3명을 살해했다는 누명으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 난치병에 걸려 손가락 발가락 7개를 잃고
15년 만에 가석방됐지만, 통증을 견디려고 코카인에 의지했다가 다시
체포돼 6년형의 가중 처벌을 받았고 끈질긴 항고와 유전자 검사 끝에
88년 연방대법원 판결로 살인 누명을 벗는데 그때 그의 나이 44세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주 정부와 검찰을 상대로 한 국가배상 소송을 거부했는데
"그들(정부)은 내 삶을 보상할 수 없다...나는 수감 기간 1년당 2억 달러를
원한다. 아니 하루당 2억 달러를 원한다.. 나는 그들에게 내 삶의 값어치를
결정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얼마나 헐한
존재로 생각하는지 이미 지겹게 봐왔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얘기했지요.
이 얼마나 대단한 자존심입니까?
자신의 행복이 남에 의해 좌우되는 것을 결코 허용치 않겠다는,
자기의 불행에 대해 남 탓하거나 남에게 불평하지 않겠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존심이 아닐까요?
그런데 오늘 이사야서는 사람의 행복이 사람은 물론 주님이 아닌
다른 신에 의지해서도 안 된다고 하고, 더 나아가서 불행도
다른 신 때문이라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빛과 함께 어둠도 주님께서 주시고,
건강과 함께 병도 주님께서 주시고,
생명과 함께 죽음도 주님께서 주시고,
행복과 함께 불행도 주님께서 주시니
주님 아닌 다른 신에게서 구원을 찾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의롭고 구원을 베푸는 하느님,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땅끝들아, 모두 나에게 돌아와 구원을 받아라."라고 권고하는데
땅끝의 우리도 이 구원에 초대받는 대림절의 우리입니다.
----------------------------------------------------
211215.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루카 7,19)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루카 7,19)
“오실 분”은 메시아를 가리킵니다(시 118,26;다니 7,13;9,25-27;말라 3,1;사도 19,4;히브 10,37;묵시 1,8;4,8). 그런데, 요한의 이 의구심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아마도 그는 감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혼란에 빠졌고, 예수님께서 과연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인지 확인하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자신이 선포했던 ‘메시아 상’과는 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요한은 타작마당에서 곡식을 가려 쭉정이를 불태울 심판자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쁜 나무를 찍는 도끼의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과 함께 고통당하는 사랑을 말씀하셨고, 죄인을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을 구하기 위해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메시아 예수님께 대한 의혹과 혼란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혼란과 의구심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메시아 상’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이 다급한 물음, 곧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라는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그렇다. 내가 그다’라는 분명한 대답을 주지 않으시고, 예언된 말씀의 실행을 통해, 자신이 “오실 분”임을 증언하십니다. 곧 당신이 손수 하신 일을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증언하십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하시는 일을 보고 사람들이 당신이 누구신지를 깨달아 알도록 인도하십니다.
“눈 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걷고, 나병한자들아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듣고, 죽은 이들이 일어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루카 7,22)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루카 7,23)
이는 의심을 품지 말라는 아주 냉혹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자신의 기존 표상과 관념에 따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질책과 경고의 말씀입니다. 자신 안에서 먼저 자기 관념을 깨부수라는 철퇴입니다. 동시에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혼란에 빠지지 않는 사람에게 들려주는 행복선언입니다. 곧 자신이 생각했던 메시아의 표상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는 복되다는 진복선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의심을 품지 않는 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처럼, 말씀의 실행을 통해 자신의 신원을 증언하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루카 7,19)
주님!
당신께서는 말씀의 실행을 통해, “오실 분”임을 보여주십니다.
제가 당신의 제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게 하소서.
말씀의 실행을 통해, 제가 누구인지를 증언하게 하소서.
당신이 하시는 일을 보고 사람들이 깨달아 알도록 하셨듯이,
제가 하는 일을 보고 제가 당신의 제자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
211215. 대림 제3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본연의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시는 예수님
우산 장수인 큰아들과 짚신 장수인 작은아들을 둔 어머니는 늘 걱정 속에 살았습니다. 비가 올 때는 작은 아들을 걱정하고, 맑은 날에는 큰아들을 걱정하니 하루도 걱정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맑은 날에는 작은아들이 짚신을 많이 팔 것이니 좋고, 비가 오는 날에는 큰아들이 우산을 많이 팔 것이라 생각하니 늘 기뻤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져 보입니다.
여러분은 새소리를 들으면 ‘노래한다’고 하십니까? 아니면 ‘운다’고 하십니까? 같은 소리를 들어도 듣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법입니다. 주님께서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셔도 어떤 이는 감사할 줄도 모르고 불평 불만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아주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기뻐합니다. 마음이 열려있는 까닭입니다. 그는 항시 은총을 담을 그릇이 준비되어있으니 은총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당신 모상을 닮은 사람을 만드시고 당신의 영을 불어넣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하느님의 걸작품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기뻐해야 합니까? 그 감사와 기쁨을 잊어간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잃어버린 은총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만물을 근본으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질병과 비참함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을 자유롭게 해주셨습니다. 악령을 물리치시고 사람들을 하느님과의 화해로 인도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저마다 본연의 모습을 되찾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르치고 또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이미 이사야 예언자가 선언한 그대로입니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이사29,18).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라”(이사35,5-6).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이사61,1).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11,6. 루카7,23). 스승을 의심하지 않는데 제자의 행복이 있습니다. “내 비록 스승에게 속아서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나는 그의 가르침대로 산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내가 기대하고 그리는 모습이 꼭 일치하지 않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본연의 모습에로 인도하십니다. 당신의 걸작품이 훼손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근심걱정이 있다면 생각을 바꾸어 보십시오. 골치덩이를 통하여 더 큰 것을 예비하시니 미리 감사하고 기뻐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분명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귀한 것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서도 흔들림 없기를 바랍니다.
‘자살’을 거꾸로 읽어보면 ‘살자’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본연의 모습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 나 자신을 의탁해야 하겠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히브11,1)해 주기 때문입니다. 더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11215.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의롭고 구원을 베푸는 하느님,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언어는 현실의 거울입니다. 말은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하지만, 좌우가 바뀐 채로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동족들을 향하여 하느님께 대한 가르침을 새삼스레 전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동족들의 신앙 생활이 마치 하느님 없는 듯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신관 교육은 매우 기초적입니다. “나는 빛을 만드는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 하늘아, 위에서 구원의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의 비를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의로움도 함께 싹트게 하여라. 나 주님이 이것을 창조하였다”(이사 45,6-8).
또한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영주를 비판하다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루카 3,20)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여쭙게 하였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루카 7,18). 이때 요한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낀 듯 하고, 자신이 예수님의 신원을 몰라서라기보다는 이제 그분의 신원을 자신의 제자들로 하여금 직접 확인시켜주고자 이런 질문 심부름을 시킨 듯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직접적인 대답을 하시는 대신에 선문답을 하듯이 당신이 하신 일을 그대로 전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루카 7,22). 그리고 그 다음의 내용은 이미 이사야가 메시아가 오실 때 일어날 일이라고 내다보았던 일들이었습니다. 요한과 예수님은 이 정도의 성서적 대화만으로도 충분히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사이였습니다.
이사야가 발설한 예언 언어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상태를 반대로 보여주는 비판의 말이었고, 요한이 던진 질문 언어는 간접 대화를 통해 자기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야말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심을 강력하게 암시하는, 또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을 기다리지 말고 그분을 따라가라고 촉구하는 무언의 명령과도 같았습니다.
이런 이치에 따라서 생각해 보면, 최근에 전 세계의 신자들에게 프란치스코 교황이 ‘신앙 감각’과 ‘공동합의성’에 대한 문서를 발표한 것은, 지금의 교회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기보다는 반대로 쇄신을 촉구하는 비판의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이끌어주시는 신앙 감각을 서로 존중하는 교회를 만들어가자는 뜻이고, 또한 더 이상은 군주제 모형의 교회로는 하느님을 전할 수 없으니 공동으로 합의하는 민주적인 모형의 교회를 만들어가자는 호소입니다.
요한의 언어로 이 호소를 알아듣자면, 신앙 감각이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일과, 또 각자의 신앙 감각으로 이 시대의 징표를 식별함으로써 의롭고 거룩한 일을 개별적으로 실천하는 일, 그리고 여럿이서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공동으로 합의하고 실천하는 교회가 되는 일이야말로 이 시기에 필요한 대림의 자세요 영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의 언어로 이 호소를 풀이하자면, 이 자세와 영성이야말로 하느님의 이름은 알고 있어도 믿지는 않는 이 거대한 무신론 사조 속에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신성을 증거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이 말씀을 듣는 신자들이 이 시대의 징표를 알아듣는 신앙 감각을 발휘하고, 또 그에 따라서 개별적으로나 공동으로 의롭고 거룩한 실천을 하게 될 때, 그 옛날 이사야가 전해 준 하느님의 이 말씀은 우리의 현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의롭고 구원을 베푸는 하느님,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이사 45,21).
----------------------------------------------------
211215.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어느 자매의 사연을 책에서 읽었습니다. 이 자매가 한밤중에 심한 통증이 찾아왔습니다. 너무 아파서 끙끙댔지요. 어머니를 깨워 병원에 갈까 했지만, 이렇게 끙끙대도 나오지 않으시는 것을 보니 피곤하신 것 같아서 혼자서 아픈 몸을 이끌고 병원 응급실로 갔습니다.
다음 날 저녁, 어머니에게 어젯밤 너무 아파서 병원에 다녀왔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어머니는 “알고 있었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딸은 기가 막혀서, “알고 있는데도 나와 보지 않았어?”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엄마가 새벽 일찍, 일 나가야 하잖아.”
딸은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엄마가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엄마의 잘못된 모습만 계속 기억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엄마도 완벽한 인간은 아니다.’
사실 완벽한 인간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단지 완벽한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일 뿐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완벽함만 요구한다면 어떨까요?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하게 되고 힘들어지는 것은 그런 생각을 하는 ‘나’일 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예언자적 생활과 하느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전함으로써 예수님보다도 먼저 많은 제자가 따랐고 그 세력도 꽤 컸습니다. 그래서 헤로데가 요한을 위험인물로 여겨 체포한 것입니다.
더욱이 세례자 요한은 엄격한 영성 생활을 했고, 그의 말은 자뭇 준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사랑 중심의 말씀으로 한없이 부드럽기만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의 생활은 일상생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도 어울리고 금기의 집에도 드나들었습니다. 이 모습에 세례자 요한은 혼란을 겪었나 봅니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에서는 감옥에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당신이 누구신지 신분을 밝혀 달라고 질문합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루카 7,22)
세례자 요한도 자신의 틀에만 갇혀 있어서 예수님을 알아뵐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다른 사람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주님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
마음을 자극하는 단 하나의 사랑의 영약, 그것은 진심에서 오는 배려다(메난드로스).
------------------
중요한 것.
학창 시절에 담임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으로 기억됩니다.
“선진국인지 아닌지는 화장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화장실 청소를 깨끗하게 하도록 했던 말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의 화장실과 요즘의 화장실을 비교하면 천지 차이임이 분명합니다.
당시는 주로 재래식 화장실이었지요. 야외 건물에 듬성듬성 칸막이해놓고 직사각형 구멍만 뚫려 있었습니다. 밑에는 구더기가 꿈틀대고 무엇보다 코를 찌르는 듯한 냄새가 대단했습니다. 지금의 수세식 화장실은 완전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당시에 냄새난다고 또 지저분하다고 화장실에 안 갔을까요? 오히려 웃으면서 친구들과 화장실에 갔었습니다. 생리적인 문제가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것보다 더 급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안에도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참 많습니다. 더럽고 냄새나는 일도 많고 그래서 커다란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역시 받아들이면서 더 중요한 것을 실천하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수적인 것들을 우위에 두면 중요한 것들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은 이 중요한 것을 사랑 실천이라고 하셨습니다.
----------------------------------------------------
211215.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에서 손님이 왔는데 공항에서 “BTS 공연 보러 왔느냐?”라고 물었답니다. 한국의 BTS가 미국에서 공연하는데 그것을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공항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기생충, 오징어게임, 미나리’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의 문화가 한국을 넘어 국제적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2년째 팬데믹 상황을 지내는 과정에서 한국은 ‘추적, 검사, 치료’라는 체계적인 대응으로 코로나의 파도를 잘 견뎌냈습니다. 국민들의 자발적인 협조로 백신접종도 80%를 훌쩍 넘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습니다. 한국은 원조 받는 나라였습니다. 한국의 수출품은 가격이 싸기 때문에 경쟁력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문화는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일본의 물건은 섬세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독일의 제품은 튼튼하였습니다. 유럽의 도시는 그림 같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문화, 시민의식, 예술, 경제, 정치에서도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분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가톨릭평화신문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독자들의 구독과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신문이 사랑받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미주 지역 공동체의 활동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보편교회의 가르침과 소식을 충실하게 전해야 합니다. 신문의 인쇄상태가 좋아야 합니다. 신속하게 배송되도록 해야 합니다. 구독자를 늘리기 위해서 홍보를 열심히 다녀야 합니다. 노력은 하고 있지만 부족함이 많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성장하기 위해서도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사제가 주어진 직분에 충실해야 합니다. 강론을 성실하게 준비하고, 성사를 거룩하게 집전해야 합니다.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합니다. 예비자를 모집하고 잘 가르쳐야 합니다. 말씀이 중심이 되어 가정에서 복음이 자라야 합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지역 공동체의 가난한 이, 병든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미국과 유럽을 비롯해서 한국교회에도 적신호가 켜지고 있습니다. 교회 구성원의 고령화, 성소자의 감소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교황님은 ‘시노달리타스’를 통하여 경청, 식별, 참여의 과정을 거쳐서 교회가 직면한 문제를 풀어가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지혜가 모여지지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사람을 보내서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주님께서 바로 오시기로 하신 메시아입니까?’ 예수님께서는 표징으로 대답하셨습니다. ‘귀 먹은 자가 듣게 되고, 눈이 먼 자가 보게 되고,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갇힌 이에게 해방이 선포되고, 묶인 이는 자유를 얻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죽은 이들이 되 살아날 것입니다.’ 내가 보여주는 표징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그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도록 하십시오.” 어떤 이는 들의 꽃에서도, 하늘의 구름에서도 하느님의 손길을 느낀다고 합니다. 매일 기도하시는 어머니는 날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고 계십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한다면, 미움을 사랑으로 바꿀 수 있다면, 가난한 이에게 도움을 주었다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 바로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빛을 만드는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 나는 행복을 주는 이요,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 나,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룬다.’ 이사야 예언자는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고, 비록 고난 중에 있었어도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세상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감사할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대림시기에는 저의 세례명인 가브리엘 천사가 자주 등장합니다. 성모님에게도 나타나고, 요셉에게도 나타나고, 즈카리야에게도 나타났습니다. 같은 운동경기라도 우리나라 선수가 나오는 경기에 더 관심이 있듯이 저도 저의 세례명인 가브리엘 천사가 등장하는 성서 말씀을 들을 때 더 관심을 갖곤 합니다. 가브리엘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라고 합니다. 그냥 사람이 아니고 ‘대천사’라고 합니다. 저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라는 의미를 좋아합니다. 제가 만나는 사람, 제가 있는 공동체, 또 제 자신에게도 기쁜 소식을 전해 주고 싶습니다. 저의 말과 행동이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전하는 지식과 지혜가 기쁜 소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의 존재 자체가 기쁜 소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쁜 소식은 어떤 일의 결과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기쁜 소식은 우리의 전 존재가 하느님을 닮는 것입니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통이 교차하는 세상입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나의 지식과 지혜가, 내 삶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기쁜 소식’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
211215.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소서, 주 하느님”
- 하느님 체험 -
“오소서, 주 하느님!”
요즘 제가 즐겨 호흡에 맞추어 드리는 짧은 기도문입니다. 바꾸어 “오소서, 주 예수님!” 또는 아람어 그대로 “마라나타!”로 바꿔도 좋겠습니다. ‘체험하라’ 있는 하느님이요 ‘만나라’ 있는 하느님입니다.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자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하느님을 찾아 수도원에 온 우리 수도자들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하루의 일과도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느님으로 끝나는,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나는 우리의 일과입니다.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필생의 과제가 하느님을 체험하고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을 체험하라고 신비가로 불림받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사실 눈만 열리면 어디서나 살아계신 하느님의 신비체험입니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순수의 전조前兆’라는 시의 첫연도 생각납니다.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의 손바닥에 무한을 쥐고/찰나의 순간에 영원을 담아라.”
바로 사소한 일상에서 이렇게 깨어 삶의 신비를 체험하며 깊이 사는 이가 신비가입니다. 사랑의 눈이 열리면 곳곳에서 만나는, 체험하는 하느님입니다. 특히 우리 정주의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에게 평범한 일상의 삶의 제자리에서의 하느님 체험은 중요합니다. 어느 트라피스트회 수도승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장소에 대한 사랑! 나는 그것이 정주의 핵심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내 삶의 자리에 대한 애정이자 사랑이요 애착이다. 내 경우, 나를 끌어들인 것은 수도승들도 아니고, 삶의 방식도 아니고, 전통도 아닌 장소였다.”
이 트라피스트 수도승은 평범한 정주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체험했음이 분명합니다. 제 삶의 자리에 대한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체험에 직결됨을 봅니다. 이것은 정주의 수도자뿐 아니라 인간의 공통적 정서입니다. 그리하여 죽기 전에는 고향을 찾고, 또 자기가 살던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하는가 봅니다. 그러나 과연 세상을 떠나기전 자기가 사랑하던 정주의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행복한 이들은 몇이나 될까요.
인간의 근원적 마음의 병인 무지는 바로 하느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면 나도 모르고 너도 모릅니다. 안다해도 피상적으로 알뿐입니다. 평생을 살아도 하느님을 모르거나 까맣게 잊고 살았다면 얼마나 허망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겠는지요! 허무와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하느님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존재 이유도 하느님을 만나 참 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경하는 모든 성인들은 물론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음은 바로 하느님의 존재 증명입니다. 참 행복도 하느님께 있음을 시편 저자는 고백합니다. 시편 모두가 하느님 체험의 고백입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 밖에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 역시 실감나는 하느님 체험의 고백입니다. 바로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 참 잘 드러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분은 바로 이런 하느님입니다. 키루스를 임금으로 세우신 하느님의 자기 고백입니다.
“내가 주님이고 다른 이가 없다. 나는 빛을 만드신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 나는 행복을 주는 이요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 나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룬다.
하늘을 창조하신 분, 그분께서 하느님이시다. 땅을 빚어 만드신 분, 그분께서 그것을 굳게 세우셨다. 그분께서는 그것을 혼돈으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살 수 있는 곳으로 빚어 만드셨다. 내가 주님이다. 다른 이가 없다.
나 주님이 아니냐? 나밖에는 다른 신이 없다. 의롭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땅끝들아, 모두 나에게 돌아와 구원을 받아라. 나는 하느님, 다른 이가 없다. 이스라엘은 모든 후손들은 주님 안에서 승리와 영예를 얻으리라.”
후렴처럼 끊임없이 반복되는 “내가 주님이고 다른 이가 없다”라는 하느님의 자기고백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우리 인간의 평생공부가 하느님 공부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인간인 나를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모든 비극과 불행은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무지에 눈먼 사람, 바로 인간에 대한 정의같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사람을 찾는 하느님, 바로 이게 답이자 복음입니다. 우리를 찾아 오셨기에 비로소 만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하느님입니다. 바로 이를 요약한 제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이런 하느님을 만납니다. 바로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찾아 오신 겸손한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을 통해 당신을 궁금해 하는 요한은 물론 우리에게 자신의 신원을 알립니다.
“너희가 가서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않는 이는 행복하다.”
바로 인간의 궁극의 치유와 구원은 하느님과의 만남에 있음을 봅니다. 마지막 말마디,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말씀이 화두처럼 들립니다. 참으로 ‘사람을 찾아 오신 하느님’이 예수님 당신임을 깨닫는 이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비중의 신비가 ‘사람을 찾아 오신 하느님’, ‘사람이 되신 하느님’인 강생의 신비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대로 하느님과의 만남이 됩니다. 강생의 신비에 감격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고백입니다.
“그처럼 크신 하느님이, 그처럼 작은 아기가 되었다니!(So great a God, so tiny an infant!)”
바로 이런 주 하느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은총의 대림시기입니다. “저절로 오소서, 주 하느님”, “오소서, 주 예수님!” 기도하는 마음이 됩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찾아 오시는 주님을 만나는 대림이자 성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만나 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선물하십니다. 대림시기는 물론 매일 미사 은총을 상징하는 화답송 후렴, 이사야서 말씀입니다.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의로움도 함께 싹트게 하여라.”(이사45,8). 아멘.
----------------------------------------------------
211215.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
211215.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감옥에 갇혀 있는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서 오시기로 약속되신 분이신지 여쭙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예수님께서는 여섯 부류의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심으로,
당신께서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밝히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임박한 세상 종말의 심판을 바탕으로 하는
회개를 가르치기에, 심판자 메시아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심판하시기보다 병든 이들과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죄인들을 불러 모으시어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복음을 선포하실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잔치를 벌이십니다.
심판자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던 세례자 요한에게
심판보다는 자비를 베푸시는 예수님은 아마도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제자들을 보내어,
당신께서 오시기로 한 그분이신지를 여쭙는 것입니다.
성탄은 예수님의 생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림 시기는 생일을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우리는 매우 친밀한 관계일 때 누군가의 생일을
준비하고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의 생일잔치에 함께하려면 예수님을 더 잘 알고,
예수님을 더 귀하게 여기며, 그분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이를 잘 생각해 보면 대림 시기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더 알려고 노력하고,
그분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 더 알아보고, 그 일을 귀하게 여겨
나도 그렇게 하려 노력하고,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입니다.
----------------------------------------------------
211215.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오늘 복음에 보면 요한은 감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전해 듣고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19절) 하고 묻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오실 분”을 예고한 바 있다.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요한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한 것 같다. 세례자 요한이 생각했던 그 오실 분은 마지막 심판자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내가 메시아다.’라고 대답하는 대신, 당신이 ‘오실 분’임을 보여주는 기적들을 일으키신다.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셨다.”(21절)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당신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당신의 위대하심을 깨닫고 당신의 권능과 능력에 감탄하게 만드셨다. 그리고는 깨달아 알도록 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22절) 바로 옛날 예언자들이 한 예언이 이루지는 것, 즉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걷고,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듣고, 죽은 이들이 일어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고 들은 것을, 여러 시대에 예언자들이 예고한 일들이 당신의 힘과 능력으로 이루어졌다고 전하라는 말씀이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23절) 유다인들이 그분을 의심한 것은, 신비의 깊이를 몰랐거나 그것을 알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 당신을 낮추시어 이 땅에 그 모습을 나타내실 것이라 예언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에게 걸려 넘어지고 바위에 부딪혀 쓰러지고(참조: 이사 8,14; 로마 9,33),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참조: 루카 20,18)
그들은 그분이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통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영광과 위엄을 가지신 그분을 보고도 그분께 돌을 던지며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요한 10,33)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신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요한 10,37-38) 그리스도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 곧 그를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하느님의 뜻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의 자세를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도 역시 이 요한의 질문과 같은 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렇게 기도를 하는데도 들어주시지 않는 걸 보면, 정말 하느님이 계신가? 계시지 않는 것 같다.”라고 불평을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지 하느님이 우리를 따르시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을 기계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내가 변하는 기적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
211215. 대림 제3주간 수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루카 7, 22)
기다림의
정점에 있는
만남이다.
그 만남으로
시달리며
아파한 우리의
시간들이
다시
뜨거워지며
되살아난다.
간절함의
막바지에는
언제나
새로운
삶이 있다.
기다림과
그리움이 만든
복음의 시작
성탄이다.
복음은
또 다른
삶의 기쁨을
일깨워준다.
사람이
사람이
되는 것은
철이 드는
깨달음의
여정이 있기
때문이다.
수 많은
부딪힘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진정 찾게된다.
가난함과
진실함에서
만나게되는
기다림의
참된 고백이다.
고백의 계절에서
우리의 가난함을
구구절절 만난다.
가난하기에
복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복음은
서로의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된다.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어떤 사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살고 있는지를
아프게 반성하는
시간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는 엄청난
이 사실과
아픈 이들이
제대로 걷고
제대로 보고
다시 깨끗해지고
되살아나는
행복의 이야기를
이제 우리가
나누는 것이다.
우리의 행복이
주님의 행복이다.
우리의
간절함으로
주님의 탄생은
뜨거운 심장이
된다.
새로운 고백
새로운 깨달음
새로운 행복의
노래로 삶은
더이상 메마르지
않다.
심정(心情)과
심장(心臟)
사이의 고백이며
그 고백이
복음을 믿는
우리 모두의
행복이다.
어느
누구도 아닌
우리 모두의
살아있는
복음이다.
----------------------------------------------------
211215.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요한은 자기 제자들 가운데에서 두 사람을 불러 주님께 보내며,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쭙게 하였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이 저희를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쭈어 보라고 하셨습니다.’(루카 7,18ㄴ-20)”
이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의심을 품었고,
그런 요한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23절).”
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정말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의심했을까?
요한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2-34).”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한 일은,
하느님의 계시를 직접 받아서 한 일입니다.
만일에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의심했다면, 그것은 자신이 받은 계시를
의심한 것과 같고, 그 계시를 내려주신 하느님을 의심한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예언자 자격이 없습니다.
또 만일에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고 있었다면,
그는 증언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서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라고
묻게 한 것은, 요한 자신이 못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안 믿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아마도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하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직접 본다면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 입장에서는 제자들이 모두 자기를 떠나서
예수님에게로 가기를 바랐을 것입니다(요한 3,28-30).
안드레아 사도는 원래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는데,
요한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요한 1,35-42).
안드레아 사도 외에도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이 더 있었을 텐데, 그 수는 별로 많지 않았던 것 같고,
요한의 제자들은 대부분 요한 곁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로 믿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셨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루카 7,21-23)”
여기서 예수님의 답변은 당신이 하시는 일들을 그대로 나타낸 말씀이기도 하고,
이사야서에 있는 예언들을 인용하신 말씀이기도 한데,
당신이 바로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메시아라는 것을 드러내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중요한 점은,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 그렇게 되고 있다.” 라고 말씀하셨다는 점입니다.
‘메시아의 구원’은 현재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부터 시작된 일이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일이고, 종말에 완성될 일입니다.
(“내가 ‘지금’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께서 구원과 자비를 ‘지금’ 나에게
베풀어주시기 때문이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성탄절은 아주 먼 옛날에 이루어진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지금’ 내가 맞이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에게는 모든 날이 대림절이고, 모든 날이 성탄절입니다.
그렇다면 왜 특정일을 성탄절로 정해서 경축하고 있는가?
사실 12월 25일이라는 특정 날짜는 인위적으로 정한 것이기 때문에,
그 날짜 자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날’이 아니라, 그 날이 가리키는 그 ‘일’입니다.
그 ‘일’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나를 구원하려고 찾아오신 일입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이는 복되다.”이고,
뜻은 “나를 믿는 이는 복되다.”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이른바 신들이 있다 하지만 - 과연 신도 많고 주님도
많습니다만 -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5-6).”
우리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것은, ‘예수님만’을 메시아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메시아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얻는 것만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짜 신, 가짜 메시아에게 속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보다
세속의 권력이나 재물이나 명예 같은 것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그래서 그것들을 따라가게 만드는 ‘유혹’입니다.
그 유혹들을 물리쳐야 예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습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라는 말씀에서 요한복음에 있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라는 말씀이 연상됩니다.
기도가 금방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예수님에게 의심을 품지 않고 믿는 것,
또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총들이 눈에 선명하게 보이지 않더라도
그냥 믿는 것, 그 믿음이 우리를 궁극적인 은총으로 인도해 줍니다.
‘궁극적인 은총’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완성입니다.>
----------------------------------------------------
211215. 대림 제3주간 수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을 실천하며 기다리는 메시아 ♣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루카 7,22)
마카에루스 감옥에 투옥된 세례자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쭙게 합니다(7,19). 그렇게 한 것은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을 보고 불안해하는 제자들을 위한 배려였을 수도 있지만, 예수님 안에서 메시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를 알아보았지만 식민통치로부터의 해방 등 현실문제를 해결해줄 강력한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되어주는 자비의 메시아로서 행동하십니다(17,21-22). 의로움과 구원은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이사 45,21) 몸소 증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성과 논리로 따지지 않으시고 행동으로 직접 메시아의 본질을 보여주시며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17,23)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 자신의 삶을 성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혹시 내 문제를 해결해줄 메시아,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나 나에게 상처와 피해를 준 사람에게 나를 대신하여 복수해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은연중에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때에 나서주시고 내가 기부하고 봉사하고 기도한 만큼 보답해주시는 메시아를 바라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메시아는 나의 도구나 상거래 대상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은 빛과 어둠을 창조하시고, 행복과 불행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며(이사 45,7), 의롭고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45,21). 우리는 하느님을 이용하려 들지 말고 메시아의 본질인 자비와 해방을 온 세상 모든 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대림은 그렇게 수동적인 관망(觀望)이 아니라 능동적인 사랑의 기다림입니다.
나는 무엇으로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습니까? 실천하는 행동 없이, 구체적으로 나누는 사랑 없이 말만 앞세우는 ‘빈 깡통 같은’ 요란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지 성찰해보아야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들음으로써 믿음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동으로 표현되는 믿음입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야고 1,22).
우리 모두 말이 아닌 행동으로 메시아의 본질인 자비를 실천하며 오시는 메시아를 기다렸으면 합니다. 한편으로는 ‘착한 가게’, ‘달콤 창고’, ‘서스펜디드 커피’ 등에서 보듯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말없이 배려하고 위로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선을 위해 연대하여 불의에 맞서나가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반겨주실 것입니다.
----------------------------------------------------
211215.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공동체 역시 구구절절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삶으로, 세상 앞에 서야겠습니다!
저희가 운영하는 주말 힐링 피정에 참석하셨던 한 수녀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박삼일간 저희와 함께 숙식하시며 피정하신 수녀님께서는 시골 영감 수도자들이 외딴 바닷가에서 알콩달콩, 아옹다옹, 깔깔깔깔, 재미있게 살아가는 모습에 느낀 바가 많으셨나 봅니다. 식탁에서 하시는 말씀, “우리 공동체 식사 시간도 이렇게 재미있었으면...”
깜짝 놀란 저는 수녀님께 여쭈었습니다. “아니, 왜요? 수녀님? 수녀님네는 식사 시간이 어쩐데요? 많이 썰렁한가요?” “썰렁한 걸 넘어서 완전 시베리아예요. 소화가 잘 안 될 지경이예요.”
저는 농담 겸 위로 겸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수녀님, 너무 우울해하지 마세요. 사실 저희도 별반 다를 바 없어요. 도진개진이예요. 수녀님들 떠나시면 저희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모두 염원하는 충만하고 역동적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적 삶이 어떤 것인지 묵상해봅니다. 무엇보다도 마음 편히 식사할 수 있는 편안한 공동체, 그래서 구성원 모두 소화가 잘 되고 건강한 공동체, 상호 간의 용서와 친교, 희생과 나눔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체, 다른 무엇에 앞서 주님께서 주인공이시며, 그분의 말씀과 뜻을 경청하는 공동체, 그래서 공동체 존재 자체로 세상의 등불이요 희망이요, 치유의 원동력인 공동체...
오늘 복음에 소개되고 있는 예수님의 공동체가 딱 그랬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셨다.”(루카 복음 7장 21절)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제자 두 명을 예수님께 보내어 질문하게 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그들의 물음 앞에 예수님께서는 말로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공동체적 삶으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요한의 두 제자는 역동적 치유의 현장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목격합니다. 질병과 병고와 악령의 시달림으로 인해 오랜 세월 고통당하던 이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해방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고, 이를 통해 그분의 메시아성을 명료하게 인식합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 역시 구구절절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삶으로, 구체적 사랑의 실천으로 세상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어야겠습니다. 오늘날의 특별한 질병, 사랑의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는 세상 사람들이, 친교와 일치로 충만한 우리의 공동체적 삶을 보고, 즉각적으로 치유되는, 그런 우리 공동체를 건설해나가야겠습니다.
----------------------------------------------------
211215.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예수님께 자주 질문하는 것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
오늘 복음도 역시 세례자 요한에 관한 내용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제자 두 명을 불러 예수님께 보냅니다.
그리고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묻게 합니다.
이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의심해서가 아닙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어린양임을 알고 있었고 세례 때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오시며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인정하시는 목소리도 들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없는 이들을 예수님께 직접 보내어 그분께 질문하고 직접 답을 들을 수 있도록
인도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질문 안 하기로 유명합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세계 각국의 기자들이 모인 가운데서 특별히 한국 기자들에게만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몇 번이나 질문하라고 했지만, 한국 기자들은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한국말로 해도 된다고 했지만 그래도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한 동양인 기자가 일어나 아시아를 대표해서 자신이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중국 기자였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금 한국 기자들의 시간이니 앉으라고 했지만, 그 기자는 한국 기자들이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게 기회를 넘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인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었고 아무도 질문하지 않자 결국엔 중국인 기자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어떤 교수님이 첫 대학 강의를 하기 위해 긴장된 상태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선배가 아주 좋은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괜찮아. 학생들은 아무도 질문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 조언은 적중했습니다.
그는 그저 말하고 학생들은 받아적었습니다.
“질문 있습니까?”란 교수의 말은 “수업 끝났으니 가방 싸세요”와 같은 말이었습니다.
저도 외국에 나가 수업을 듣다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독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질문하지 않는 이유는 겸손해서일까요? 질문할 필요가 없는 교만의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는 부모가 해야 하는 일을 다 알려주고 세상으로 나가면 남이 하는 대로 하면 됩니다.
질문할 이유도 없고 여유도 없습니다.
질문은 누군가 믿는 사람에게 하게 되어있습니다. 거짓말쟁이에게 질문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학생들이 질문하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을 믿지 타인을 믿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질문하지 않으면 이 세상을 이기고 구원될 기회도 잃을 수 있습니다.
영화 ‘페르마의 밀실’(2007)입니다.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네 명의 수학자가 위대한 수수께끼를 풀어달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초대로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 놓인 것은 제한 시간인 1분 이내에 문제를 풀지 못하면 사방이 오그라드는 밀실뿐입니다.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문제를 푸는 것뿐이지만 아무리 천재들이라 해도 역부족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네 명 중 한 명이 이 장치를 만들어 꾸민 짓이었습니다.
35년 동안 어떤 가설을 증명하려 했는데 증명 10일 전에 그 기회를 젊은 수학자에게 빼앗겨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 젊은 수학자는 골드바흐 가설을 증명하지 못했었습니다.
그저 관심을 끌려고 풀었다고 한 것뿐이었던 것입니다.
일인자가 되지 않는 이상 함께 죽기로 작정하고 이런 일을 벌인 그 사람을 어떤 사람이 분노로 기절시켜버립니다.
방은 점점 줄어들어 시간은 없는데 유일하게 나갈 방법을 안 사람을 기절시킨 것입니다.
그 방을 만든 사람이 그 방과 함께 죽기를 원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람이 자신들에게 이 고생을 시키고 있다며 유일한 탈출구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묻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알아서 해결해보겠다고 하느님을 자신 안에서 기절시킵니다.
하지만 하느님도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자녀가 주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면 이제 자녀들이 하느님께 질문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나 혹은 자기 자신에게 묻게 됩니다.
아이가 사춘기가 되면 부모는 자신보다 아는 게 없다고 여기게 되고 하느님께 물을 줄 모르게 되면 이제 자기 자신에게 묻고 자기 자신이 내린 해답대로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나에게 묻고 내가 내린 답대로 하면 그것이 교만입니다.
아이가 부모를 믿고 부모에게 이것저것 다 물어볼 때 아이는 행복합니다.
이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녀를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줍니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 위에 내리는 구름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성막도 이동하고 이스라엘 백성도 이동하였다고 합니다.
성막을 만들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막은 감사의 봉헌으로 내 안에 만들어진 주님의 집입니다.
그곳에서 주님을 만나는데 주님께서는 그때그때 나를 향한 당신의 뜻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그분의 뜻에 나를 맡길 때 내가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뜻이 일치하면 그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질문을 하느냐와 누구에게 질문하느냐가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참다운 스승은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지, 누구에게 질문해야 할지 제대로 알려주는 스승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커져 온전히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행복한 길임을 믿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스승이요, 부모가 됩니다.
하느님께도 질문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만 믿는 교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분은 하느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주 예수님께 질문을 던져야 교만에서 벗어나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 믿음과 깨달음과 구원을 얻게 됩니다.
자주 예수님께 질문합시다.
----------------------------------------------------
211215.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대림 제 3 주간 수요일-묵상과 기도
라틴어 Adventus는 곧 그분이 '도착'하신다. 뜻입니다. 곧 오시는 구세주 아기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면서 성찰과 회개, 믿음과 희망으로 오시는 구세주를 기다립니다. 무엇보다도 기도에 마음을 두며 사랑 실천을 잊지 않습니다. 미사와 성사 참여, 그리고 선한 지향으로 자선을 행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은 빛과 어둠을 창조한 이, 행복과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 모든 것을 이루는 주님이다. 그분 밖에 없다. 의롭고 구원을 베푸는 하느님, 그분 말고는 아무도 없다. 그분께 돌아와 구원을 받아라. 다른 이가 없다. 합니다.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신원을 묻는 요한의 제자에게 눈먼 이가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가 들으며 죽은 이들이 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요한에게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창조하시는 주님, 의롭고 구원을 베푸시는,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모든 이를 고쳐주시는, 곧 해방과 구원을 이루시는 주님, 그리스도 구세주이십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시간과 현장을 되돌아봅니다. 나와 이웃, 그들과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그리고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내가 주님이고 다른 이가 없다. 나는 빛을 만드는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 나는 행복을 주는 이요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
나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룬다.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의로움도 함께 싹트게 하여라. 나 주님이 이것을 창조하였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을 창조하신 분, 그분께서 하느님이시다. 땅을 빚으시고 땅을 만드신 분, 그분께서 그것을 굳게 세우셨다. 그분께서는 그것을 혼돈으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살 수 있는 곳으로 빚어 만드셨다. 내가 주님이다. 다른 이가 없다.
나 주님이 아니냐? 나밖에는 다른 신이 아무도 없다. 의롭고 구원을 베푸는 하느님,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땅끝들아, 모두 나에게 돌아와 구원을 받아라. 나는 하느님, 다른 이가 없다.
내가 나 자신을 두고 맹세한다. 내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으니 그 말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정녕 모두 나에게 무릎을 꿇고 입으로 맹세하며 말하리라.
“주님께만 의로움과 권능이 있다. 그분께 격분하는 자들은 모두 그분 앞에 와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리라. 이스라엘의 모든 후손들은 주님 안에서 승리와 영예를 얻으리라.” 이사 45,6ㄴ-8.18.21ㅁ-25
그때에 요한은 자기 제자들 가운데에서 두 사람을 불러 주님께 보내며,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쭙게 하였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이 저희를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쭈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셨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루카 7,18ㄴ-23
실천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준비합니다. 주님의 성탄을 고대하며 해야할 첫째는, 창조하시는 하느님, 의롭고 구원을 이루시는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둘째, 하느님의 외아드님 주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 구세주심을 믿고 셋째, 예수님은 당신께 다가오는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모두를 고쳐주시는 치유자이심을 믿으며 넷째, 예수님은 모든 세대, 모든 나라, 모든 백성 온세상의 임금님이신 임금님, 심판주이심을 믿습니다.
오시는 예수님의 성탄을 준비하면서 기도가 우리의 한 가운데 있도록 하며, 죄와 악습에 대한 성찰과 회개, 그것을 기워 갚을려는 희생과 사랑, 거룩한 성사와 전례에 대한 참여, 구체적인 자선과 나눔을 실천합니다. 물음 불을 끄고, 자선은 죄를 없앱니다. 그 희생가 사랑으로 주님의 오심 도착을 준비합니다.
마침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
211215. 대림 제3주간 수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제1독서 (이사45,6ㄴ-8.18.21ㅁ-25)
"나는 빛을 만드는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 나는 행복을 주는 이요,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 나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룬다." (6)
바빌론(페르시아)의 종교는 빛과 어둠을 적대적인 것으로 취급하지만, 주님은 그 모두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런 상태들에 대한 주권적 통치에 있어서, 이원론을 극복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사야 예언서 후반부는 바빌론 유배와 유배 이후의 상황을 언급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군대와 왕들을 이용해서 해방을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거만, 고집불통과 우상 숭배는 이제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는 바빌론의 이방 왕인 고레스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내려 오도록 종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통치하고 있는 이방 왕의 말은 듣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주님은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움직이시기 위해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방법으로 이방 왕을 들어 쓰셔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꼼짝달싹 못하게 하신다.
8절의 "의로움"은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들을 이루시는 방법을 선택하시는 주님의 주권적 정의라는 표현으로써 이스라엘이 아닌 페르시아 왕을 선택하는 주님의 선택의 합법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러한 사상이 21절의 "의롭고 구원을 베푸는 하느님"에게도 그대로 통용되고 적용되고 있다. 주님은 자신이 유일하신 하느님, 미래를 정확하게 예언하시는 분임을 나타내시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고레스를 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신다.
이 선택이 의롭고 적법한지는 이스라엘을 위해 성취하실 구원을 통해서 나타날 것이다.
주님은 역사적인 세력들을 지배하시는 의로우신 주인일뿐 아니라 구원자이시기도 하다.
23-24ㄱ 에서 고레스는 페르시아의 관할로 주장되는 영토에서 모든 자에게 충성이 요구된다고 선포한다. 그러나 고레스는 오직 주님을 통해 이 '의로움과 권능'이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고백한다.
24ㄴ-25절에서 고레스와 이스라엘은 모두 대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보호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고레스와는 달리, 이스라엘은 주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축복들에 대해서, 정치.경제면에서 고레스와의 관계를 초월하는 대접을 받을 수 있다.
내가 주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지 않을 때, 주님은 내 자신이 매여 있고 나를 지배하는 다른 상위 계층을 통해 역사하시며 나에게 메시지를 줄 수 있다. 그만큼 내 자신이 회개하기를 원하시고, 주님의 주권적 통치를 받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그 주님의 통치는 '의로움과 구원'을 가져오는 무상의 선물이다.
주님은 나에게 있어 어떤 존재이며, 얼마만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사오 바오로처럼, "그리스도는 내 전부" 라고 말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아침에 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잘 먹으면 혼탁한 내마음과 영이 깨끗해 질 것이다.
(루카7,18ㄴ-23)
18 요한은 자기 제자들 가운데에서 두 사람을 불러
= 헤롯에 의하여 감옥에 갇힌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치유와 기적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제자들을 부른 것이다.
19 주님께 보내며,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쭙게 하였다.
= 세례자 요한은 분명 자신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언했었다.
(요한1,27.29)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9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하느님께서 보내신 속죄 제물인 어린양, 그 구원자 예수님을 자신이 선포하고는~ 그 확신이 흔들리고 있다. 왜? 자신이 생각했던 예수님이라면 자신을 감옥에 그냥 놔두실 리가 없다는 것이다. 자신을 모른 척 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20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이 저희를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쭈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21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셨다. 2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하신 일이다. 곧 예수님께서 이사야29,18 35,5- 등에 예언되었던 메시아, 그리스도가 맞다는 말씀이시다.
말씀을 율법으로 받아 나무 하나의 희생(대속)으로 받는 생명, 용서, 그 하느님의 진리의 계명(탈출15,25)을 몰라 불구가된 그 영적 불구자들을 예수님께서 올바르게 고쳐주신 것이다. 당신의 십자가 복음으로~(요한3,16/14,6- 로마 3,21-/8,1-참조)
23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 요한은 왜 의심을 했을까? 감옥에 갇혀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시련이 없을 때에는 자신이 예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어렵고 힘든 상황, 사건 앞에서는 자신의 본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이라 하신 요한이다. 모든 인간은 다 그렇다는 것이다.
주님을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 놓겠다고 했던 베드로가 주님께서 잡혀 가셨을 때, 주님을 모른다고, 거짓말이면 천벌을 받겠다 하며 맹세로 그렇게 세 번이나 배반 했쟎은가.(마르14,71)
세례자 요한도 베드로도 성령받기 전의 모습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왜 그냥 내버려 두셨을까? 그것은 세례자 요한이 해야 할 일을 다 했기 때문이다. 곧 구약의 끝이라는 것이다. 신약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세례자요한을 메시아로 생각 했었다. 그래서 두 메시아(머리)가 존재하면 안 되기에~ 구약의 요한이 머리가 잘려 죽는 것이고(마르코6,27), 그것이 신약의 시작임을, 곧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뜻, 하늘의 진리의 시작임을 알리는 것이다.
(에페1,9-10) 9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 10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1베드1,20) 20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뽑히셨지만,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의 말씀이 어렵다.
(이사45,7-8) 7 나는 빛을 만드는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 나는 행복을 주는 이요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 나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룬다.
= 창조, 첫째 날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다. 빛과 어둠은 하늘나라 라는 의미다. 낮과 밤이 하루이듯, 우리 인생에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왜 빛만 있으면 안될까? 그것은 어둠, 밤이 없으면 선(용서)을 모른다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과 베드로의 그 어둠(의심, 죄)의 본성이 드러났기에 그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품으시고 대신 빛으로 선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이다. 드러나지 않아 몰랐다면 그대로 어둠에 묶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밖으로 드러난 것은 모두 빛이라고 하는 것이다.(에페5,13~)
喜怒哀樂, 기쁨과 슬픔, 그 모든 것이 구원을 위한 재료라는 것이다.
(로마8,28) 28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구원)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사45,8) 8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의로움도 함께 싹트게 하여라. 나 주님이 이것을 창조하였다.
=생명은 위에서 이슬로 내린다. 의로움도 구름이 주신다. 곧 이슬, 구름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다. 모든 것은 말씀으로 거룩해진다.(1디모4,5참조)
(이사55,10-11) 10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11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에덴의 선이 악을 품고 대신 죽어 생명을 주는 어린양, 곧 그 십자나무의 예수님, 그분의 그 대속의 길을 구원의 진리로, 생명의 말씀으로 믿고 받으면, 먹고 마시면~ 그 하늘의 빛, 진리, 생명이신 예수님으로 빛, 진리, 생명이 되는 나의 구원인 것이다.
그러니 어둠으로 빛을 깨달아 빛이 되었다면 어둠은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불행을 통해 하늘의 참 행복을 주시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래서 빛을 만드시고 어둠을 창조하셨다는 것이고 행복을 주시기 위해 불행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이 어려운 말씀을, 그 하느님의 뜻을 인간의 지혜로 어떻게 알아듣겠는가~
오늘 영성체송(이사40,5)처럼 하느님께서 마음의 눈과 귀를 열어주시고 성령께서 깨닫고 믿게 해주셔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인간의 지혜로 깨달아 하늘 아래의 빛(義)과 행복(福)에 머문다면 그것이 어둠이고 불행인 것이다.
(마태6,23) 23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 그러니 교우여러분! 내안에 어둠을 드러내어 율법(계명)에 죽읍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아드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빛으로 살리십니다. 깨닫게 됩니다.
(갈라2,19) 19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려고, 율법과 관련해서는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