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5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정당 전쟁 》
창 14:13~16
〈 오펜하이머 〉
2023년 8월 15일에 한국에서 개봉한 미국 영화 한 편이 있습니다.
제목이 ‘오펜하이머’입니다. 오펜하이머는 사람 이름입니다. 미국인 과학자입니다.
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인데요, 한 마디로 원자폭탄 개발과 투하를 그려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2년에 미국이 ‘맨해튼 계획’을 추진합니다.
이 프로젝트로 원자폭탄이 만들어지고, 두 발이 일본의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투하됩니다.
결국 일본이 항복하고, 한국은 일제 강점기 35년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변곡점입니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천재과학자 오펜하이머의 일생을 그립니다.
2차대전 당시 물리학의 발전은 원자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연합군 수장 미국은 독일과 일본에 맞서고 있었습니다.
연합군과 독일군은 모두 원자폭탄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원자폭탄을 먼저 제조하는 진영이 승리하게 되리란 사실은 자명했습니다.
미국과 독일, 그리고 소련이 원자폭탄 제조 경쟁을 합니다.
먼저 제조하는 쪽이 승리하리란 사실을 절감한 과학자 중에서 선두주가 오펜하이머입니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 제조 프로젝트의 현장 실험 책임자가 됩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가운데 진행되는 프로젝트이니, 참가자의 사상검증은 필수입니다.
자칫 정보가 독일이나 소련으로 새어 나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펜하이머는 공산당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공산주의에 빠졌던 전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의심을 받지만, 맨해튼 계획에 꼭 필요한 인물이라서 책임을 맡깁니다.
원자탄 투하로 2차 세계대전은 끝났지만, 오펜하이머를 기다린 것은 의회 청문회입니다.
미국은 1953년에 오펜하이머의 혐의를 인정하고 ‘비밀정보, 보안 접근권’을 박탈합니다.
오펜하이머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가슴에 한을 안고 1967년 사망합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2022년 미국은 오펜하이머 사후에 그의 명예를 회복시켜줍니다.
그에게 보안접근권한을 박탈한 것은 잘못이라고 바로잡습니다.
☞ 한국의 조작된 간첩 누명을 쓰고 살다가 사후에 복권된 일이 연상됩니다.
〈 기독교인과 전쟁 〉
오늘 설교 제목이 《 정당 전쟁 》입니다.
설교 제목을 정하고, 오늘 이 설교를 하는 이유는, 호국보훈의 달 6월이라서입니다.
금년이 우리 한국이 겪은 동족상잔, 6.25 발발 74주년입니다.
6.25는 어떤 전쟁이었는지, 왜 우리가 6.25를 겪어야 했는지, 6.25는 어떤 의미인지…
6.25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1953년에 휴전협정을 했을 뿐입니다.
전쟁을 잠시 쉬는 중입니다. 그래서 6월이 오면 깊은 상념을 하게 됩니다.
☞ 우리는 기독교인입니다.
하나님을 주님으로 섬깁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배합니다.
우리의 경전은 성경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주님의 자녀입니다.
성경은 전쟁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아는 것은 기독교인의 책무이기도 합니다.
6.25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5년 지나서 터진 전쟁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당사국입니다.
2차 대전을 일으킨 일본의 식민지로 35년을 살았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대한민국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5년 지나 이번에는 동족상잔의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물론 6.25전쟁은 우리로 하여금 전쟁에 대해 생각케 합니다.
한국민으로서, 기독교인으로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전쟁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계신지 알아야 합니다. 할렐루야~
기독교라는 이름을 쓰는 종파 중에 여호와의 증인이 있습니다.
이들은 총을 드는 것을 거부합니다. 차라리 감옥에 가겠다 합니다.
성경을 경전으로 하는데,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 있어서 이렇게도 다를 수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것이 현실입니다.
하나님은 전쟁을 어떻게 보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전쟁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전쟁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 성경에는 정당한 전쟁 개념이 있습니다. 이른바 ‘정당 전쟁’입니다.
〈 믿음의 조상 아브람의 전쟁 〉
마침 창세기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치른 전쟁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에 대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힘이 전쟁에 어떻게 응대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전쟁 후에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4정에 나오는 서사를 통하여 우리는 전쟁에 대한 관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고향과 친척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가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12장부터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은 우리에게 매우 귀한 삶의 근거를 제공합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함께 고향을 떠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조카 롯을 축복해 주셔서 많은 식솔과 재산을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함께 기거할 수 없게 됨을 알고 조카를 분가시킵니다.
조카 롯에게 선택권을 줍니다.
창 13: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롯은 요단 동편에 있는 소돔과 고모라 지역을 택합니다.
자연히 아브라함은 요단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삼촌과 조카가 이렇게 분가하여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조카 롯 일가가 전쟁에 휘말렸습니다. 침략자들에게 사로잡혀갔습니다.
삼촌으로서, 어른으로서,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조카를 구해 내야지요!
창 14:14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15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16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삼촌 아브라함이 이렇게 행한 일은 후대 믿음의 자손들에게 전쟁에 대한 지표가 됩니다.
☞ 여기서 기독교인은 전쟁을 이해하고 전쟁에 대한 관점을 확립할 수 있습니다.
〈 1. 방어전쟁 〉
기독교에서는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전쟁을 “정당 전쟁”으로 부릅니다.
이를 정당 전쟁으로 칭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시는 전쟁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무조건 반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집총을 거부하라” “전쟁을 대비하는 군입대를 거부하라” 하시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을 떠난 이후, 전쟁도 불가피한 현상이 되었습니다.
선악과로 인한 죄악은 필연코 전쟁을 불러옵니다.
선악과 이후 사람들은 전쟁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물론 전쟁을 싫어하십니다.
전쟁이 없는 세상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선악과 후유증 가운데 전쟁이 빠지지 않습니다.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된 세상에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전쟁의 태세가 있습니다.
전쟁 중에서 정당 전쟁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는 전쟁이 정당 전쟁입니다.”
☞ 정당 전쟁에는 2가지 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원칙은 “방어 전쟁”입니다.
둘째 원칙은 “회복 전쟁”입니다.
“방어 전쟁”은 상대의 부당한 침략에 맞서서 자기를 지키고 보호하는 전쟁입니다.
방어 전쟁은 선제공격이나 확산 전쟁을 불허합니다.
자국의 현상 유지와 인접국가와 선린 유지, 그 중에서 자국의 발전을 위한 방어입니다.
그렇다고 무기를 만들거나 보유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인접 국가와 군사력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방어전쟁입니다.
힘의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상대방의 침공을 방어할 수 있습니다.
방어 전쟁은 국가간의 군사력에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군사력을 가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아브라함은 이를 위해 38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14절)
군사력 보유는 국가간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전쟁을 억제하고 적국의 침공을 방어합니다.
전쟁도발은 정당전쟁이 아닙니다.
상대가 부당하게 일으킨 전쟁으로부터 자국을 방어하기 위한 전쟁이 정당전쟁입니다.
〈 2. 회복전쟁 〉
군사력 균형을 맞추지 못하여 부당한 침공을 받아 피해를 입었을 경우가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아브람의 조카 롯이 인접국가의 침공을 받아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런 경우 손실 회복을 위한 전쟁이 있습니다.
롯의 숙부 아브람은 조카가 당한 전쟁 피해로부터 회복을 위한 전쟁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전쟁을 ‘회복 전쟁’이라 하겠습니다.
조카 롯이 만일 부당하게 침략한 전쟁에서 패했다면, 거기에 회복 전쟁 원칙은 배제됩니다.
조카 롯이 적국으로부터 부당하게 침략을 받았고,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 손실을 숙부 아브람이 회복시키기 위한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정당 전쟁입니다.
다행히 아브람은 조카 롯의 손실을 회복합니다.
현대 국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는 정당 전쟁은 여기까지입니다.
☞ “방어 전쟁” “회복 전쟁” 2가지의 정당 전쟁 원칙에 비추어, 6.25는 어떻습니까?
북한이 먼저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침공했습니다.
남한의 입장에서는 방어전쟁의 원칙에서 맞대응해야 합니다.
그러나 힘이 딸려 낙동강까지 밀렸습니다.
이때 마치 아브람이 롯을 돕듯이 유엔군이 참전하여 회복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6.25는 정당전쟁입니다.
멕아더 장군이 북한지역 대부분을 점령한 후에 ‘만주 폭격’을 주장했습니다.
만일 만주 폭격을 감행했더라면 이는 ‘회복 전쟁 원칙’을 깨는 것이 됩니다.
이를 ‘과잉 전쟁’이라 하겠습니다.
6.25 전쟁사에서 일단 ‘과잉 전쟁’을 하지 않고 다시 원점으로 회귀했습니다.
원래 있었던 38선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지만, 겨우 남북한은 평온을 찾았습니다.
불완전한 평온이지만 휴전 협정이래 71년간 전쟁이 재발하지 않았습니다.
〈 과잉 전쟁 〉
설교를 시작하면서 ‘오펜하이머’ 영화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은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그 중에서 2발을 터뜨려 종식되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전쟁에서 원자폭탄을 쓴 것은 과잉 전쟁이 아니냐는 논락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과잉 전쟁입니다.
지금 온 세계는 핵무기로 인한 위험에 빠져있습니다.
2차 세계 대전에서 개발된 핵무기가 온 인류를 멸망시킬 수도 있습니다.
1945년 7월, 맨해튼 계획에서 핵무기 제조가 완료되었습니다.
투하지역을 결정해야 합니다.
이때 일부에서 육지에 투하하지 말고 도쿄만에 투하하자는 의견이 있었다고 합니다.
도쿄만에 투하하면 인명피해는 줄이되 인류최초 핵무기의 위력을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일본이 항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대두되었습니다.
확실히 일본으로부터 항복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2곳에 투하했습니다.
전쟁은 종식시켰지만, 과잉전쟁이 분명했습니다.
그 이후 소련이 수소폭탄을 제조하자 미국도 추가로 수소폭탄까지 제조합니다.
인류가 핵무기를 보유했다는 자체가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과잉 전쟁’의 산물입니다.
〈 탈리온 법칙 〉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원칙이 있습니다.
탈리온 법칙입니다.
얼른 생각하기에 탈리온 법칙은 관용이 없는 끔찍한 법칙인 듯 하지만, 안 그렇습니다.
딱 당한만큼만 되갚아주는 것이 탈리온 법칙입니다.
그런데 인류는 당한 것의 ‘백배, 천배’로 갚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빨 한 대 부러졌는데, 가해자에게 32개의 이빨을 모두 부러뜨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잉 전쟁’입니다.
전쟁은 어쨌든 선이라고 할 수 없는, 분명한 악입니다.
전쟁이 악이라고 해서 상대방이 침공하는데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도 온당치 못합니다.
성경은 그래서 우리에게 ‘방어 전쟁’ ‘회복 전쟁’의 원칙을 천명해 줍니다.
인류는 그러나 방어 전쟁, 회복 전쟁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기도해야 합니다. 애통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죄로 물든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내는 전쟁, 그 전쟁의 억제를 위한 기도, 쉴 수 없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