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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6),양선(갈 5:22-23,6:7-10)
오늘은 성령의 6번째 열매인 양선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양선’을 한자어로 풀이하면, ‘어질 량’(良)자와 ‘착할 선’(善), 즉 성격이나 몸가짐이 ‘어질고 착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선함", 공동번역성경에서는 "선행"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선함”은 도덕적인 선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맺혀지는 성령의 열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지는 선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선행이 바로 우리가 구원받은 목적입니다. 엡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선행을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어둠에 속한 세상에서 빛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바로 선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함으로 빛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행이고 착함이고 양선인 것입니다.
(엡 5:8-9)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여기에서 '전에는'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을 말합니다. 에베소서 2장 1절 이하에 보면 예수 믿기 전의 삶을 어둠이라고 규정하고 그 특징을 5가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1)허물과 죄로 죽었던 생활입니다. 2)세상풍속을 따랐고 3)공중의 권세잡은 자, 곧 마귀를 따라다니는 생활이었습니다.
4)육체의 욕심을 따라 생활하였습니다. 5)그러니 자연히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처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어둠에 속하였으니 마치 어둠의 안경을 쓴 것같이 모든 것이 어둡게 보입니다. 그것의 실체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판단의 기준이 바로 나입니다. 내 생각입니다. 아람나라 나아만장군이 나병에 걸려 이스라엘에 엘리사 선지자는 찾아가 의뢰했더니 요단강에 가서 일곱번 목욕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때 (왕하 5: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자기 생각에는 엘리사가 자신의 상처에 안수해 줄 것으로 알았는데 목욕만 할 것을 명하니까 화가 나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만약 그가 자기 생각을 계속 고집했다면 나병을 고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자존심을 버리고 목욕했더니 깨끗하게 치료되었습니다.
이처럼 내가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중심의 생활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두움의 실체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빛되신 예수님을 모심으로 빛의 사자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혀 죽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가 내 생명이 되셔서 내 중심안애 살아계신 것입니다. 중심의 전환이 이루어졌습니다.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둠에서 빛이 된 것입니다.
주님 중심으로 살았던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롬 14:7-8)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주의 자녀로서 빛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여기서 빛은 바로 우리가 맺어야 할 양선의 열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양선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1. 내가 내 안에 사시는 예수님으로 살아야 합니다.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이미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할 때 나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정욕과 탐욕이 나를 주장하게 한다면 결국 어떤 열매가 맺히게 됩니까? 갈라디아서 5장 19절 이하를 보십시오.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원수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짖는 것, 분열, 이단, 투기, 술취함, 방탕함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맺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데도 여전히 정욕과 탐심에 끌려다니면 결코 성령의 열매는 맺을 수 없습니다. 입으로는 주여주여 하면서도 실제로 삶의 현장에서 자기가 주인인 삶을 살아가면 주변의 사람들이 압니다. 아, 이 사람은 가짜 그리스도인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이 탄식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능력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여기서 착한 행실이 바로 세상의 빛입니다. 이 빛이 드러날 때 비로소 어둠이 도망가고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빛이 드러나려면 반드시 그 자체가 녹아 없어져야 합니다. 촛불이 빛을 내려면 초가 녹아 없어져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의 빛을 나타내려면 내 정욕과 탐심이 죽고 없어져야 합니다. 여기서 정욕과 탐심은 바로 내 생각, 내 자존심, 내 욕심입니다. 이 내가 죽어야 예수님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기에 십자가의 도가 있는 것입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믿습니까?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내 안에 사시는 예수님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선함을 이루려고 하는데 잘 안됩니다.
예배 끝나고 사람들 만나면 좋은 이야기를 합니까? 수다를 떨고 나면 선한 열매가 맺힙니까?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험담하며 웃고 좋아들 합니다. 그러면 선한 열매가 맺힙니까? 혼자서 집에 있으면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묵상합니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칭찬하기보다는 험담하기 좋고, 성경 보고 기도하기보다는 놀러 다니고 쾌락을 쫓아다니기를 좋아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자기 스스로 안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주 이중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마음에 갈등이 생길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내가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핍박을 해도 이미 예수님 안에서 죽은 자로 믿는 것입니다. 자존심도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존심 때문에 못 죽습니다. 욕심도, 인기도, 명예도, 인정받고 싶은 욕구도 다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의 복음을 깨닫고 예수로 살아가면 모든 주재권을 주님께 맡겨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선한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순교의 자리에서 선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까? 내가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예수님이 나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내 명예를 회복시켜 주고, 그 예수님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데 내가 살아서 힘을 주니까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순간순간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말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고 눈빛이 달라집니다. 주님이 기뻐하는 말을 하고 주님이 하라고 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주님을 의식하고 살면 선한 사람이 되어집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서 살면 우리도 선해집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었습니까?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는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지음받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양선의 열매를 맺으려면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살아나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원하시는 양선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힐 수 있습니다.
선한 행위를 해서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하신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셔서 선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선한 행위가 나오는 것입니다.
2. 성령 충만을 받아야 양선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힐 수 있습니다.
갈 6:8절,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성령의 열매는 도덕적 노력에 의해 맺혀지는 열매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사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맺혀지는 열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육체의 소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마음을 육체를 위해 심는 자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로 구별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녀도 이 두 마음이 늘 싸우고 있습니다. 육체를 위해 심으면 양선의 열매는 맺을 수 없습니다. 육체를 위해 심을 때 맺혀지는 열매에 대하여 디모데 후서 3장 1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딤후 3:1-5)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그래서 마지막 때가 되면 고통하는 때가 된다는 것입니다. 19개의 특징중에 첫 번째 특징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고 두 번째가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관계가 깨어집니다. 그 결과가 바로 육체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죄악의 열매입니다. 마지막 열매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한다고 하였습니다, 겉은 그리스도인인데 속에 그 능력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육체의 열매를 맺으면 영육이 고통합니다.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성령 충만하지 못하면 마음속에 심겨진 죄악의 씨가 자라서 수시로 몸밖으로 뛰쳐나와 악하고 더러운 열매를 주렁주렁 맺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은 영적 전쟁입니다. 참으로 선하게 살았던 사도 바울이 이 싸움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롬 7: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롬 7:18,19)“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라고 고백합니다.
결국 자기 스스로 선하게 살려고 하지만 안된다는 것입니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힐 수 있겠습니까?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성령의 법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됩니다.
이제 우리안에 성령이 거하시면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제 성령의 인도하심, 감동하심앞에 우리가 합력하는 것입니다.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생각나면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성령과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양선의 열매인 것입니다. 성령충만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합력하여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순종하는 것이 바로 선행인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성령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도록 합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적하려고 쫓아다녔던 사울이 성령충만하니까 선한 열매를 풍성히 맺는 사도 바울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저주하고 도망했던 베드로가 성령충만을 받으니까 가는 곳마다 성령의 선한 열매 풍성히 맺는 주인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성령충만을 사모하십시오. 성령님과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삶의 현장에서 말씀에 순종할 때 양선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힐 수 있습니다.
갈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거둘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다 낙심하고 포기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변하지 않습니다. 이웃들이 변하지 않습니다. 자신만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전 3:1-3)"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선을 심으면 반드시 거둘 때가 옵니다. 또한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오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갈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직역하면 "너희는 미혹되지 말라. 하나님께서 조롱받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만일 사람이 뿌린 이것을 또한 그가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열심히 회사에서 일했는데 사장님이 알아주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승진시켜 주는데 자신은 한직으로 보냅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했는데 목사님이 알아주지 않고 교인들이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 우리의 형편, 우리의 헌신, 우리의 무능력, 우리의 눈물, 우리의 기도, 우리의 말, 우리의 행동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뿐 만 아니라 우리가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심은 대로 거두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거둔다는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7절에 "그대로 거두리라" 8절에 "거두고 거두리라" 9절에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라고 말씀합니다. 8절,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 6:8)" 사람이 선을 행하다 낙심하고 포기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이 기대한 바를 거두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대가 없으면 낙심도 없는 것입니다. 자식에 대한 기대, 부모에 대한 기대, 목사와 장로에 대한 기대, 성도들에 대한 기대가 있었는데 그 기대가 거품으로 끝날 때 낙심하고 포기합니다. 선한 것을 심었으면 반드시 선한 열매를 거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 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마지막 하나님앞에 서는 날 심판에 대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25장에서 심판에 대해 3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그 중에 하나가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거기서 심판을 하시는데 그 기준이 얼마나 선행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마 25:42-46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날을 의식하면서 오늘을 살아가야 지혜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한 일을 많이 했습니까? 소외된 이웃들에게 착한 일을 많이 베풀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듯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는 내가 아무리 주어도 돌아올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선한 일을 많이 쌓으세요. 좋은 일을 많이 쌓으세요. 그것이 세상이 빛이 되고 양선의 열매를 맺는 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설교를 많이 듣고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그 말씀대로 행하는 삶이 없으면 그것은 속빈 강정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교회의 여집사님이 몸이 이상해서 진찰을 받아보았더니 간암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달밖에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이 집사님은 남은 2개월을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내 인생의 남아있는 두 달동안 어떻게 살면 좋을까요?" 기도를 하는 중에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난 제일 커다란 후회가 '사랑하지 못한 것,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것'이 제일 후회가 되더랍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동안 등을 지고 살았던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그들을 찾아가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 집사님은 뚜렷하게 등진 사람은 아니지만 마땅히 사랑해야 할 만큼 사랑하지 못하고 격려해 주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찾아가서 일일히 격려해 주고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재산정리를 시작했습니다.
지은 빚을 깨끗이 청산하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한번도 돈을 가치있는 일에 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선교사들을 위해서 선교헌금을 하고 구제헌금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생각하면서 자녀들에게 남길 최소한의 것을 남기고 그들에게 남길 유언을 쓰기 위해 성경을 읽으면서 마지막 유언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두달이 다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몸이 더 나빠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다른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더니 간암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진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집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집사님 돈 많이 쓰신 것 후회되지 않습니까?" "아니요, 목사님 지금까지 저의 생애를 통해서 이 두 달처럼 그렇게 의미있고 가치있게 산 때가 없었습니다. 저는 앞으로의 시간도 이 마음가짐으로 계속 살 것입니다.“
복음 성가 가운데 '오늘 나는'이라는 찬송을 아시지요? 이 찬송은 최용덕집사님의 작사,작고한 복음송입니다. 이 집사님이 시골교회에 있었을 때 자기가 전도한 사람과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했다고 합니다. 그 일로 소원해졌습니다. 교회에 가면 화해해야지 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집사가 먼저 용서를 청하며 손을 내 밀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꼭 끌어앉은 채 진정으로 화해를 했습니다.
그리고 한달만에 그 친구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식을 마치고 얼마 있다가 그 부인이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일기장을 발견했다면 일기장의 한 대목을 보여 주었습니다. ”내가 예수님 다음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최용덕집사다. 왜냐하면 나를 그 교회로 전도하여 예수믿게 했고 나에게 용서와 사랑을 가르쳐 믿음을 강하게 해 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글을 읽고 머리를 방망이로 얻어 맞은 것같은 영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몸부림치며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 친구가 손을 내밀기 전에 자기가 먼저 손을 내밀고 화해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음이 가슴을 쳤습니다. 그 친구를 생각하면 그날밤 밤새 통곡하며 이 찬송을 썼다고 합니다.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 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 내밀기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기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 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오 간교한 나의 입술이여 오 더러운 나의 마음이여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 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 볼 수 없는가
오늘 나는 오늘 나는 주님 앞에서 몸 둘 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며 서있네
어찔 할 수 없는 이 맘을 주님께 맡긴 채로.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양선을 실천하는 삶은 후회없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원리는 주고받는 것(Give and Take)입니다. 주어야 받습니다. 그러나 양선은 받을 것 생각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죽을 죄악에서, 멸망 받을 죄악에서 구원받은 것이 너무 기뻐서 내가 받은 기쁨을 감사의 마음으로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것 이것이 양선입니다.
거기에 성도의 바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선한 일을 많이 하십시다. 성령의 여섯번 째 열매 양선의 열매를 많이 맺으십시다. 그래서 세상의 빛의 사명을 감당합시다. 주변에 예수향기를 발합시다. 양선의 열매가 여러분의 삶과 가정, 삶의 현장에 풍성히 맺어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