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교실 제6장 전주사범 생물부
(1) 생물교실 /
나는 중학과 3학년 때 미술에 흥미를 가졌다.
내가 그린 수채화가 미술실 게시판에 몇 번인가 붙여졌기 때문에 장차 미술가가 되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송주택(宋柱澤) 선생님이 생물반을 모집한 뒤 생각이 바뀌었다.
생물반 모집의 게시판을 보고 선뜻 응모하여 생물실에 출입하였다.
이때가 46년 봄으로 기억된다.
송 선생님은 한글판 생물책을 구해서 생물반 학생을 위하여 열심히 강의하셨다
(그때에는 한글판 교과서를 구입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5월의 어느 일요일에 식물 채집하러 덕진못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풀가방〔胴亂〕과 뿌리삽과 전정가위를 나눠주셨다.
할일 없는 일요일이므로 덕진까지 걸어가서 식물을 채집하고 이름을 외우며 하루를 지냈다.
이렇게 식물채집을 한 일요일이 내 일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시발이 되었음을 그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식물 이름을 하나하나 외우는 것이 무척 재미있었다.
봄에 꽃피는 냉이, 꽃다지, 반하 등 하루에도 수십 종류의 이름을 외우게 되었다.
기숙사에서 표본을 신문지에 누르고 종이를 갈아주고는 하였다.
영어 단어보다 식물 이름이 훨씬 외우기 쉬웠다.
나는 헌 책방에서 무라고시〔村越三千里〕식물도감을 사서 그 그림에 맞추어 식물표본을 동정하였다.
2~3개월 뒤에는 학교와 야산에 나는 식물을 모두 구별할 수 있었다.
송 선생님으로부터 식물향명집(植物鄕名集)을 빌려 식물 도감의 그림 옆에 우리말 이름을 써넣었다.
그 유서 깊은 도감을 나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이렇게 하는 동안에 식물계(植物界)의 분류 체계가 머릿속에 어렴풋이 떠올랐다.
식물 한 종을 새로 알게 되면 분류 체계의 빈자리를 메우는 듯 싶었다.
전주사범의 특별교실, 특히 생물실은 준비실과 실험실이 따로 있고, 준비실에는 수많은 표본,
특히 선태식물과 해산동물 표본이 많았다.
일제시대의 생물 교사가 선태식물을 전공하였고, 이동권 선배(심상과 1회․별세)가 해산동물을 채집하였다고 한다.
여러 가지 도감을 포함한 생물책, 인체모형, 괘도, 현미경, 해부기 등 생물학 실습에 손색이 없었다.
심지어 밖에서 비치는 햇빛을 파이프를 통하여 실험실 내 현미경의 반사경에 비치도록 프리즘 장치가 되어 있었다.
나는 생물부에 들어온 뒤 생물책 사기에 열을 올렸다.
기숙사에 밥값으로 내기 위하여 가져온 쌀 중에서 남는 것을 가지고 책방으로 가서 책을 샀다.
이때는 쌀이 귀하여 책방 주인이 돈으로 쳐서 책을 주었던 것이다.
47년 9월 20일에 샀던 미요시〔三好學〕저 「최신 식물학 강의(1911년 판)」,
나가노〔中野治房〕저「식물생리급 생태실험서(1933년 판)」,
고토〔後藤格次〕저「생물 유기화학」등이 아직도 서가에 꽂혀 있다.
이러한 책을 읽으며 중등교사 자격시험을 치르려고 골똘하게 공부한 적이 있었다.
생물부에서는 공휴일과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생물채집이나 생물학 실습을 다녔다.
오목대 오르막 철길
(2) 무악산 식물 채집 /
학교림, 남고사, 증바우 등은 아침저녁으로 다녔고, 기린봉, 고덕산, 무악산은 일요일의 하루거리로 다녔다.
송 선생님을 따라 무악산 채집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아침 일찍 전주를 출발하여 무악산의 북사면을 오르고 정상에서 점심을 먹은 다음 남사면을 거쳐 금산사,
금구에 이르렀다. 전주행 막 버스를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금구에서 전주까지는 30리 길. 걷기로 작정하고 출발하였는데 도중에 비가 억수로 퍼붓지 않는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일행은 길을 재촉하여 자정이 넘어서야 전주의 송 선생님 댁에 도착하여
선생님의 헌 옷을 얻어 입고, 그러고도 힘이 남았는지 채집물 정리를 한 다음에 잠에 들었다.
(3) 내장산 식물 채집 /
47년 가을(10월 12일)에는 송 선생님이 인솔하여 내장산 채집을 떠났다.
이 채집에는 김봉곤, 송형호, 진희성, 성규철, 송대권, 전병영 등 20명이 참가하였다.
교통편이 나쁜 때라 일행은 누에머리 고개에서 버스를 기다리기로 하였는데
마침 학교 후원회 트럭이 장작을 나르러 가는 길이어서 편승할 수 있었다.
후원회 간부는 원평에서 배를 푸짐하게 사 주었다.
정읍에서 내장산까지의 10리 길을 걸어서 갔다.
내장산은 단풍이 들기 직전이었다. 마음껏 채집하여 야책(野冊)에 누른 식물 표본이 큰 짐짝 크기였다.
단풍에 취하고 기암괴석에 넋을 잃고 머루와 다래에 입맛을 돋우는 신나는 하루를 넘겼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다래를 보며 달콤한 맛을 알았다.
야산의 채집과는 달리 울창한 내장산의 채집은 나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다음 날은 내장산에서 백양사를 거쳐 사거리 역에서 기차를 타기로 계획이 잡혀 있었다.
많은 채집물을 등에 지고 사거리 역까지 가기에는 벅찬 노정이었다.
백양사를 앞에 둔 고갯마루에서 땀에 젖은 일행은 씨름판이 벌어졌다.
진희성 군(경희대 명예교수)이 천하장사로 뽑혔던가?
백양사는 구경하는 둥 마는 둥 지나치고 기차 시간에 대기 위하여 사거리까지는 뛰다시피 하였다.
이렇게 해서 나는 대자연과 접촉하는 기회를 키워나갔던 것이다.
월요일에 느지막이 학교에 돌아오니 친구들 말에 담임인 황 선생님이 무단 결석했다고 노발대발하셨단다.
다음 날 새벽에 가위에 눌린 가슴을 안고 담임 선생 댁을 방문하여 백배사죄.
황 선생님은 듣기와는 달리 부드럽게 대해주신다. "다음부터 그러지 마 !"
호남 제일성 남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