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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조선왕실 최고 요양소 '온양행궁'
종기·피부병 심했던 현종은 온천욕 마니아
'영괴대기 (靈槐臺記)'에 실려있는 '온양별궁전도'. 왕의 침소인 내정전(內正殿)과 집무실인 외정전(外正殿)은 물론 홍문관, 승정원, 상서원, 사간원, 수문장청 등의 건물과 수라간이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궁궐 외에 왕들이 임시로 거처하는 궁궐인 행궁이 있었다. 군사적 요충지인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에 행궁이 있었고, 정조가 아버지 무덤을 수원에 조성한 후 이 곳을 자주 찾기 위해서 화성행궁을 짓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곳보다 조선시대 왕들이 많이 찾은 행궁은 온양행궁이다. 짐작은 하겠지만 바로 온천 때문이다. 조선시대 왕들의 온천 행차 이야기로 들어가 본다.
# 온천을 자주 찾은 조선 전기 왕들
'조선왕조실록'에는 첫 왕 태조부터 온천을 자주 찾은 기록이 나타난다. 태조가 즐겨 찾은 온천은 황해도 평산, 태조 때에는 평주로 불렸던 곳이다. 태조는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8월 21일 대간 '중방(重房)'사관 각 1명씩과 의흥친군위 군대를 거느리고 평주 온천에 거둥하였다. 1393년 4월에 태조는 또 평주온천에 다녀왔다. '하찮은 병으로 온천에 목욕하고 돌아와서 몸이 몹시 피곤하다'고 토로한 것으로 보아 신병 치료를 위해 온천에 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에도 태조의 온천 행차는 계속되었는데 일부 신하들은 평주 온천이 새 도읍지(한양)와는 300리나 떨어져 있으므로 자제할 것을 청하기도 했다. 이에 태조는 자신의 병을 걱정하지 않는다고 신하들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1396년(태조5)의 '태조실록'에는 '임금이 충청도 온천으로 행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정확한 지명을 표기하지는 않았지만, 온양온천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조선 태조 때부터 온양온천이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온양군'의 '온천'조항에서도, '질병 치료에 효험이 있어서 우리 태조, 세종, 세조가 일찍이 이곳에 거둥하여 머무르면서 목욕하였는데, 유숙한 어실(御室)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태종은 아버지 태조를 뵙기 위해 평주 온천을 수 차례 찾았으며, 자신 역시 풍질(風疾)이 심해지자 평주, 이천 등지의 온천에 거둥하기도 하였다.
세종 역시 평산, 이천 등지의 온천을 찾았으며, 온천은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데 효력이 있다고 믿고, 서울과 가까운 경기 지방에 온천이 있는 곳을 찾게 하여 찾은 자에게는 후한 상을 내릴 것을 약속하기도 했다. 1443년(세종 25) 3월 1일 세종은 왕비와 더불어 충청도 온양 온천에 거둥하였다. 평소 피부병과 안질로 고생하던 세종이 왕세자와 의정부, 육조의 대신 등 대규모 관리들을 거느리고 온양행차를 결심한 것을 보면, 온천욕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 최고의 온천욕 장소, 온양행궁
조선시대 최고의 온천욕 장소로 각광을 받았던 곳은 온양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평산과 이천 온천에 왕들이 거둥하기도 했지만, 온양온천의 뛰어난 치료 효능과 지리적 여건은 이곳에 행궁을 조성하고 일부 정사를 보게 하는 공간이 되게 하였다. '평산 온천은 너무 뜨겁고 이천은 길이 험해 온양으로 정한다'는 '현종실록'의 기록은 온양이 왕들의 온천으로 완전히 정착되어 가는 상황을 보여준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온양행궁에 행차하여 장기간 머물렀던 왕은 세종, 세조, 현종, 숙종, 영조 등 5명이 있으며 사도세자도 갔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세종과 세조, 현종 등이 모두 피부병으로 고생한 전력이 있음을 감안하면 국왕의 온양 행차는 온천욕을 통해 병을 치료하고 휴식을 취하기 위한 목적이 가장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의 왕 중에서 온양행궁을 가장 많이 찾은 왕은 현종이었다. 재임 기간 내내 종기와 피부병으로 시달렸기 때문이다. 현종은 치료차 온양행궁을 여러 차례 방문하고, 장기간 머물렀다. '현종실록'의 기록에는 어의들이 피부병에 온천욕만큼 효능이 뛰어난 것이 없음을 강조한 대목이 나온다. '탕약은 위를 손상하고 환약은 열을 다스리는 게 느려 온천욕만한 것이 없다'고 하여 국왕이 온천욕을 할 것을 권유한 부분에서 온양 행차의 성격이 명확히 드러난다.
요즈음은 누구나가 온천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조선시대 백성들도 온천에 갈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성종 1년 4월 17일 성종이 충청도 관찰사 김필에게 내려준 하교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도내 온양 온정(溫井)의 어실(御室) 및 휴식소와 세자궁의 침실 외에는 다른 사람이 목욕하는 것을 허락하고, 남쪽 탕자(湯子)는 재상 및 사족의 부녀에게 또한 목욕하는 것을 허락하라"는 기사에서, 비록 사족의 부녀에게 한정되었지만 왕이 아닌 일반인도 온양의 온천욕을 즐겼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온양별궁전도'
조선시대 왕실 목욕탕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 궁금증을 풀어주는 자료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영괴대기 (靈槐臺記)'라는 제목의 책 속에 포함되어 있는 '온양별궁전도'가 그것이다. '영괴대기'는 정조가 온양에 왔던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며 그 자취를 1795년(정조 19) 기록한 책이다. '영괴대'란 신령스러운 느티나무 옆에 설치한 사대(射臺)라는 뜻. 영괴대는 현재 충남 아산시 온양온천동에 자리하고 있다. 1760년 사도세자가 온앵행궁에 행차에 활을 쏘던 자리에 그늘을 만들기 위해 세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어 영괴대란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영괴대기'에는 '온양별궁전도'가 친절히 그려져 있어 즐겁다. 지도에 하얗게 표시된 어도(御道)를 따라 들어가면 왕의 침소인 내정전(內正殿)과 집무실인 외정전(外正殿)이 눈에 들어온다. 초가지붕 또는 기와지붕으로 표시된 홍문관, 승정원, 상서원, 사간원, 수문장청 등의 건물은 온양행궁이 임시 궁궐로 충분한 기능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특히 왕이 사용하는 공간을 제외하고는 가장 넓게 표시된 수라간의 존재는, 왕을 수행하는 인원이 행궁에 대거 머물렀음을 짐작하게 한다.
화면의 좌측 상단에는 '영괴대'가 표시되어 있어 이곳에 머물렀던 사도세자와 정조의 자취를 느낄 수가 있다. 그리고 화면의 중심에 온천이라고 표시된 큰 건물, 바로 이곳이 국왕이 목욕을 즐기면서 병을 치료했던 온천탕이다. '온궁사실'의 기록에는 '온양별궁전도'에 그림으로 표시된 '온천'의 구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나타난다. 12칸짜리 온천 건물에는 욕실, 양방(凉房), 협실(挾室), 탕실(湯室)이 있었다. 탕실은 온천수가 솟는 곳과 욕조가 있는 곳으로 구성된 듯하다. 탕실을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에 통로로 보이는 협루가 있고, 찬바람을 쐴 수 있는 방이 남북으로 하나씩 있었다. 온돌을 깐 욕실은 동서 양쪽에 있었다.
따뜻하게 몸을 녹이며 피로를 풀 수 있는 온천욕이 생각나는 계절이다. 이제는 누구나가 쉽게 찾을 수 있는 온천에 가서 조선의 왕과 같은 기분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온천 행차에 관한 기록들
- 영조 목욕기념 세금감면, 사도세자 한약재탕 사용
정조가 온양에 왔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자취를 기록한 '영괴대기'.
규장각에는 왕들의 온양 행차에 관한 기록이 몇 건 소장되어 있다. '온행일기(溫幸日記)'는 1750년(영조 26) 9월 12일부터 19일까지 영조가 온양 온천에 이르기까지의 상황을 기록한 책이다. '온행배종록 (溫行陪從錄)'은 이 때 영조가 호종한 신하들과 시를 주고받은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영조가 피부에 가려움증이 생겨 온천욕을 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금을 감면하고 과거 시험을 치게 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1760년(영조 36) 사도세자가 온양에 행차한 사실은 '온궁사실(溫宮事實)'과 '온천일기(溫泉日記)'란 책으로 남아 있다. 1760년 7월 18일 온양행궁에 도착한 사도세자는 16일 간의 요양을 끝내고 8월 1일 온양을 출발, 4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사도세자의 온양 행차는 세자의 다리에 종기가 곪아 터지자 여러 의원들이 습창(濕瘡)을 제거하는 데는 온천이 좋다고 하여 추진되었다. 사도세자가 온양행궁에 묵는 것을 대비하여 온양행궁에서는 건물을 보수하고 각종 준비물을 챙겼다.
이 중에는 내의원(內醫院)에서 각별히 준비한 약재도 있었다. 부용향(芙蓉香) 한 재와 소목(蘇木) 1근, 울금(鬱金) 8량 등이었는데, 모두 목욕에 소용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부용향은 일종의 향으로 알려져 있으며, 소목과 울금은 기를 원활히 하는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요즈음도 사우나에 가면 각종 탕마다 한약재를 담은 봉지를 넣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와 유사한 장면이 조선의 왕실 목욕탕에서도 재현되었던 것이다. 이 밖에도 '온궁사실'에는 오동나무 바가지, 큰 함지박, 조그만 물바가지, 놋대야, 의자, 수건(14장) 등 사도세자가 목욕할 때 사용했던 목욕 용품들까지 기록되어 있다.
<18> 1760년 청계천 '준천사실'과 '준천시사열무도'
240년전 청계천에도 '삽질소리' 높았네
영조가 1760년 3월 16일 청계천 준설 사업을 마치고 친히 공사 참여자들을 격려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 '준천시사열무도'와 청계천 준설사업을 한 영조 어진(작은 사진).
2005년 서울 도심을 관통하는 하천 청계천의 복원이 이루어졌다. 청계천이 복원된 후 지금까지 하루 평균 8만9000명 이상이 다녀갈 정도로, 청계천은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가 가장 사랑하는 휴식처 중의 한 곳이 되었다. 개발과 도시화의 물결에 휩쓸려 햇빛을 보지 못하고 뚜껑이 덮여 있었던 청계천이 그 장막을 걷게 된 데는 문화와 환경과 같은 삶의 질이 무엇보다 중시되는 현대의 사회 분위기가 큰 작용을 하였다. 도심을 흐르는 하천은 많은 시민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고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들어 주고 있다. 지금부터 246년 전 조선후기 영조시대. 그 때도 청계천은 몸살을 앓고 있었다. 원인은 서울로 밀려드는 백성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이 배출하는 폐기물이 청계천에 몰리고, 근처에 있는 나무들을 베어가면서 청계천의 흙들이 계속 쌓여만 갔기 때문이다. 큰 비라도 내린다면 서울 전 지역이 큰 홍수 피해를 입을 것이 확실하였다. 스스로 서민을 대변하는 국왕임을 표방한 영조가 본격적으로 청계천 공사에 나섰다.
▲태종, 한양을 가로지르는 개천 공사에 착수하다
복원된 서울 청계천 전경. 국제신문 자료사진
한양의 한 복판에 개천(청계천)을 처음 뚫은 왕은 태종이었다. 1405년 개성으로 옮긴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태종은 수도의 정비에 착수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이 개천, 즉 청계천 공사였다.
한양은 북쪽의 북악산, 남쪽의 목멱산(남산), 동쪽의 낙산, 서쪽의 인왕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모양의 구조 때문에 지리적으로 홍수에 취약하였다. 북악산이나 인왕산, 남산 등에서 흘러 들러온 물들이 남산에 막혀 바로 한강으로 빠져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홍수의 위협은 늘 존재하였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태종은 도성을 가로 지르는 개천 공사에 들어갔다. 1406년 1월 16일 한성부의 정부(丁夫) 600명을 동원하여 개천을 팠고, 1412년 본격적으로 준천을 시행하였다.
태종은 개천도감(開川都監)을 설치하여 이를 전담하게 하고 1412년 삼남의 군사들을 징발하여 작업을 독려하였다. 1412년 2월 15일 마침내 하천을 파는 공사가 끝났다. 이때 완성된 수로는 대광통(大廣通:지금의 광교)에서 오간수문(지금의 흥인지문 근처)을 거쳐 중랑천과 합류하여 한강에 들어가는 것으로서 현재의 청계천의 원형이 되었다. 태종은 "하천을 파는 일이 끝났으니 내 마음이 편안하다"라며 청계천 완성의 소감을 짧게 피력하였지만, 이 공사는 새로운 수도 한양의 팽창을 가능하게 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
▲실업자 구제와 홍수방지를 위한 청계천 공사
태종이 청계천을 건설한 후 350여 년이 지난 조선시대. 청계천의 중요성을 인식한 왕은 영조였다. 서민 군주임을 표방하며, 무명옷을 즐겨 입었다는 영조는 탕평책과 균역법을 단행하여 조선의 정치, 경제적 안정을 이루었다. 18세기 영조 시대는 조선후기 산업과 도시의 발달이 서서히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농촌 인구가 서울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청계천 주변에는 가난한 백성들이 움막을 짓고 살았고 이들이 버린 오물이나 하수로 청계천은 심한 몸살을 앓았다. 땔감이 필요했던 사람들은 근처 산림에 손을 댔다. 한양 안의 벌채가 심해지면서 홍수 때에는 많은 흙들이 밀려와 청계천을 메웠다. 홍수에 대한 피해 우려는 전 시기보다 한층 심각해졌다. 문제점을 파악한 영조는 청계천의 공사를 명했다. 청계천 공사를 통해 홍수에 대비하고, 당시 도시로 유입하여 실업자가 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자 하였다. 홍수 피해 방지와 도시 실업자 구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으려 한 정책이라고나 할까?
1760년(영조 36) 청계천 공사가 완성되기 전부터 영조는 준천 사업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1752년에는 친히 광통교에 행차하여 주민들에게 준천에 대한 의견을 물어 보았다. 1758년 5월 2일에는 청계천 공사가 가능한 지의 여부를 신하들과 의논하면서 구체적인 방안들을 추진할 계획을 세웠고, 1760년 마침내 준천 공사에 들어갔다. 준천 사업에 뜻을 둔 지 8년여 만의 결실이었다. 본격적인 청계천 공사는 1760년 2월 18일에 시작되어 4월 15일에 종료되었다. 57일간의 공사 기간에 21만5000여 명의 백성이 동원되었다. 한양의 일반 백성들을 비롯하여 각 시전의 상인들과, 지방에서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 승려, 군인 등 다양한 계층의 백성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실업 상태의 백성 6만3000여 명에게는 품삯을 지급하였다. 대략 공사 기간 3만5000 냥의 돈과 쌀 2300여 석(石)의 물자가 소요되었다.
▲1760년 청계천 공사의 기록 '준천사실'과 '준천시사열무도'
홍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영조의 청계천 준설 사업에 대한 의지는 1760년 2월 23일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영조는 '나의 마음은 오로지 준천 사업에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최대 역점 사업을 청계천 공사에 두고 있음을 신하들에게 알렸다. 영조는 특히 가장 어려운 공사 구간이었던 오간수문의 공사를 6일 만에 끝낸 사실에 매우 흡족해 하였다. 호조판서 홍봉한은 당시 맹인들도 부역에 참여하기를 희망한다는 보고를 하였고 영조는 모든 백성들의 적극적인 협조에 매우 흡족해 하였다. 이처럼 영조대의 준천 사업은 국가적 사업으로 모든 백성들이 적극 협력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1760년 3월 16일 마침내 공사가 완성되고 공사의 전말을 기록한 '준천사실'이 편찬되었다. '준천사실'이라는 책의 제목은 영조가 직접 정하였다. 영조는 공사의 책임자인 홍봉한에게 '준천한 뒤에 몇 년이나 지탱할 수 있겠는가'를 물었고 홍봉한은 '그 효과가 100년을 갈 것입니다'고 하여 공사에 대한 자신감을 표현하였다. 이어 구선행 등이 굴착이 끝난 후 각 다리에 표석(標石)을 만들 것을 건의하였고, 영조는 표석에 '경진지평(庚辰地平)' 네 글자를 새기게 했다. 1760년에 공사가 완성되었음을 표시함과 함께 항상 이 네 글자가 보일 수 있게 하여 더 이상 청계천에 토사(土砂)가 쌓이지 않도록 하고, 만약 한 글자라도 파묻히면 후대의 왕들에게도 계속 준천할 것을 당부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었다.
청계천 공사기간 동안 영조는 사업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친히 동대문에서 공사를 독려하기도 하였으며, 공사 완성을 기념하여 모화관에서 시험을 치르고 뽑힌 사람들을 시상하였다. 청계천 공사 완성의 기쁨을 백성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 것이었다.
또한 일을 감독한 사람들을 인솔하여 연융대(鍊戎臺)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면서 이들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당시 영조가 친히 공사 참여자들을 격려한 모습은 '준천시사열무도(濬川試射閱武圖)'라는 그림으로 남아 있어 당시 공사 현장의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다. 이 그림에는 당시 공사에 동원된 소와 수레, 쟁기 등을 비롯하여 영조가 동대문에서 관리들과 함께 친히 공사 현장을 목격한 모습 등이 생생히 나타나 있다.
# 청계천 준천사업의 의미
- 조선시대판 뉴딜정책
영조는 청계천의 준천 사업을 일컬어 균역법과 함께 '자신의 재위 기간 이룩한 가장 중요한 사업'이라고 평가할 만큼 자부심을 보였다. 청계천 준천 사업을 추진하여 영조는 도성 내의 백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홍수의 위협을 해소시키고 일부 도시 실업자를 구제하는 면모를 보였다. 영조는 자신의 국정 방향에서 최우선으로 삼은 민본 사상을 청계천 준천 사업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천했던 것이다.
이 사업은 1930년대 실업 문제 해결을 대토목 공사로 연결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를 떠올리게도 한다. 우리는 대개 세계사 수업 등을 통하여 1930년대 미국이 경제 위기에 빠졌을 때 루스벨트가 추진한 뉴딜 정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상식을 갖고 있지만, 영조 때 대규모 청계천 공사가 이루어졌던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뉴딜 정책의 추진보다 무려 170년 전에 조선의 한 국왕에 의해 홍수 방지와 실업자 구제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청계천 공사가 실시되고 성공적으로 완성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때의 공사 현장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준천사실'과 '준천시사열무도'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돋보인다.
<19> 원릉산릉도감의궤
죽어서도 정비 곁에 가지못한 영조
영조와 53년을 해로하고 먼저 승하한 정성왕후의 무덤과 비어 있는 묘자리(홍릉·왼쪽 사진). 영조는 당초 이곳에 안장될 예정이었으나 계비 정순왕후의 입지를 살린다는 정치적 이유로 이곳에 가지 못했다. 사진 오른쪽은 영조와 정순왕후가 나란히 묻힌 원릉.
영조는 자신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면서 어렵게 왕비의 자리에 오른 정성왕후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녀와의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고, 1757년 정성왕후는 사망하였다. 영조는 왕후의 무덤을 부친인 숙종의 묘역 근처에 조성하고 옆 자리를 비워 두게 하였다. 훗날 자신도 죽으면 그 옆자리에 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은 전날의 약속을 잊혀지게 하는 법. 1759년 66세의 영조는 15세의 신부(정순왕후)를 맞이했고, 1776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정조는 조부의 무덤인 원릉을 태조가 묻힌 건원릉 근처 동쪽 경역 내에 만들었다. 원릉이 동쪽으로 간 까닭은 무엇일까?
▲왕릉의 의미와 왕릉 관련 의궤
영조 사망 후 영조의 무덤을 조성한 과정을 기록한 '(영조)원릉산릉도감의궤' 표지.
이제까지 왕릉에 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왕릉에 대한 단순한 선입견 때문이기도 한다. 죽은 자의 무덤이고, 왕릉은 비슷비슷하게 생겨 특별한 연구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경향이 강했던 것 같다. 다만 문화유산이나 답사여행지로서 일부에 의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왕릉은 무덤이라는 약간은 무거운 이미지 때문에 쉽게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판 그린벨트 지역이었던 까닭으로 왕릉은 그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고, 주변의 수려한 조경들은 웰빙 시대의 흐름을 타고 왕릉 문화 답사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왕릉은 단순한 왕의 무덤이라는 측면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무덤을 조성한 지역과 곁에 묻힌 인물을 통해 당시의 정치적 입장을 압축적으로 살펴볼 수 있으며, 왕릉 주변에 조성된 석물을 통해서는 당대의 건축미와 미술사의 흐름까지 읽을 수가 있다. 최근 문화재청에서 '조선왕릉답사수첩'이라는 소책자를 간행하여 왕릉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 있고, 조선의 왕릉 전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이런 노력들이 연구자와 일반인들이 우리 왕릉에 대해 보다 많은 관심과 이해를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조선시대 왕실의 무덤이 묻혀 있는 왕릉의 조성에 관한 기록은 '산릉도감의궤'라는 제목으로 편찬되었다. 산릉도감은 총호사가 산릉도감의 관원 및 관상감 제조 등 풍수를 아는 관원, 지관 등과 함께 땅을 살펴 능역을 결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장지를 마련한 후 산릉 일대의 토목공사, 정자각 등의 건축, 매장과 봉축, 각종 석물의 설치, 주변 정화 등의 업무를 주로 맡았다. 영조의 무덤인 원릉을 조성한 과정을 기록한 '원릉산릉도감의궤'를 중심으로 영조의 왕릉이 현재의 동구릉 경역 내에 조성된 까닭을 알아보기로 한다.
▲영조의 승하와 원릉의 조성
'(영조)원릉산릉도감의궤' 내지의 목록과 사신도 중 현무 부분.
영조(1694~1776)가 승하하자 무덤은 동구릉 경역 내에 정해졌다. 1776년 7월 27일 유시(酉時)에 건원릉 오른쪽 둘째 산등성이인 원릉에 장사지냈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영조의 무덤은 현재의 서오릉 경역 내에 위치한 정성왕후의 무덤 곁에 조성하기로 되어 있었다. 정성왕후(1692~1757)는 서종제의 딸로 1704년 두살 어린 연잉군(후의 영조)과 혼인을 하였다. 1721년 세제빈에 올랐으며, 1724년 영조 즉위 후 정성왕후가 되었다. 영조와의 사이에 후사가 없이 1757년에 사망하였으니, 영조와는 53년을 해로한 끈근한 부부였다. 정성왕후의 무덤은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내에 조성되고 홍릉(弘陵)으로 불렸다. 이곳은 영조의 부친인 숙종의 명릉(明陵) 오른쪽 산기슭으로 영조가 자신이 사망한 후에 아버지의 곁에 갈 뜻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무덤의 옆자리를 비워 놓은 것은 이곳에 묻히겠다는 영조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영조는 사망 후에 이곳에 묻히지를 못했다. 바로 정성왕후 사망 후 영조가 얻은 어린 계비 정순왕후 때문이었다. 영조는 66세에 15세의 신부 정순왕후를 얻고도 17년을 더 살았다. 결국 영조 사망 후에는 정순왕후 세력이 조정에 널리 퍼져 있었고, 정순왕후의 입장 때문에도 영조의 무덤을 정비인 정성왕후 무덤 옆에 조성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1776년에 작성된 '(영조)원릉산릉도감의궤'의 내용에서도 이러한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왕릉 조성과 관련하여 왕에게 올린 조정의 보고를 모아 놓은 계사(啓辭)의 기록에는 이미 무덤의 이름을 '홍릉'이라 하고 있다. '정조실록'에서도, 정성왕후의 능인 홍릉의 위쪽 빈 자리에 봉안하기로 잠정 결정하고 능호를 장릉과 명릉의 전례를 따라 일단 '홍릉'으로 하기로 의논했던 기록을 볼 수 있다. 영조의 뜻을 따라 숙종의 무덤 옆이자 정비의 무덤 곁에 가기로 결정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임시 결정은 불과 한달 후에 뒤집혀진다. 의궤의 기록에 의하면, 홍릉을 살펴본 후에 경릉(덕종의 능), 순릉(성종비의 능), 장릉(인조의 능) 등을 살펴보았고, 영조 모친의 무덤인 소령원까지도 살펴보았다. 정조는 10여 곳을 살펴보았는데도 산릉이 정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초조함을 나타냈다. 이후에도 강릉(康陵), 태릉(泰陵) 등을 살펴보고, 건원릉까지 살펴보았다. 결국 건원릉 경역이 가장 적합하다는 의견이 모아졌고, 영조의 무덤은 건원릉 서쪽의 두 번째 산줄기가 산릉으로 결정되었다. 4월 10일 빈청회의에서는 묘호를 '영종(英宗:영조 사망 후에는 묘호가 영종으로 정해졌으나, 고종 때에 왕실의 위상을 높이면 영조라는 묘호를 올렸다)', 능호를 '원릉'으로 정하였다.
▲정순왕후의 승하와 원릉의 조성
영조가 부왕인 숙종과 첫째 부인 정성왕후가 묻혀져 있는 서오릉 경내의 서쪽으로 가지 못하고 현재 동구릉 경역 내의 동쪽으로 간 까닭은 계비 정순왕후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조는 정성왕후의 무덤 옆에 빈 자리까지 마련하고 자신도 거기에 묻힐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영조의 무덤은 동구릉 경역에 원릉이라는 이름으로 조성되었고, 무덤 옆에 빈 자리를 남겼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1805년에 사망한 정순왕후의 차지가 되었다. 애매하게 홀로 서오릉 경역에 남겨진 정성왕후, '왕궁 생활 43년 동안 대비와 대왕대비를 극진히 모시고 게으른 빛이 없었다던' 영조의 평판 때문이었을까? 정성왕후는 죽어서도 시아버지 숙종과 네 명의 시어미니를 모시는 운명을 맡게 되었고, 영조의 빈자리는 계비 정순왕후의 차지가 되었다.
1805년(순조 5) 1월 12일 정순왕후가 승하하였다. 정순왕후가 승하하자 곧 산릉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정순왕후의 산릉 간택 과정은 이미 정해져 있는 듯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순조도 당연히 영조의 원릉 옆자리를 첫 번째로 간심하도록 하였으며 당시 간심에 참여한 자들도 모두 다른 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길지라고 단정하였다. 영조의 산릉자리를 정할 때 삼간심을 끝내고도 정하지 못하여 왕이 초조해하던 상황과 비교된다. 원래 정성왕후의 무덤(홍릉) 옆에는 영조가 나중에 묻힐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영조의 능은 다른 곳(원릉)에 마련되었고 다시 그 옆에 정순왕후의 능이 조성됨으로써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는 함께 나란히 묻히게 되었다. 정순왕후 사망 후 영조의 무덤인 원릉에 쌍릉의 형태로 정순왕후의 무덤을 조성한 과정을 기록한 것이 '(정순왕후)원릉산릉도감의궤'이다. 왕이 먼저 승하한 후 그 곁에 왕비가 묻히면 원래 왕릉의 호칭을 부르게 된다. 그럼 왕비가 먼저 승하한 후에 왕이 그 옆에 묻히면 왕릉의 호칭은 어떻게 될까? 대개는 먼저 승하한 왕비릉의 호칭을 그대로 쓰게 된다. 태종의 헌릉, 숙종의 명릉, 헌종의 경릉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 정순왕후 김씨는 누구인가?
- 15세 때 66세 영조와 결혼, 정조 사후 3년반 수렴청정
정순왕후 김씨는 경주 김씨 김한구의 딸로 1745년 경기도 여주에서 출생하였다. 정순왕후는 15세의 꽃다운 나이에 영조에게 시집와서 청춘의 대부분을 노년의 국왕 뒷바라지에 바쳤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영조와의 사이에는 소생이 없었다. 영조가 83세에 사망했으니, 17년 간의 젊음을 자식에 대한 애정 없이 오로지 노년의 국왕에게 자신의 청춘을 바친 셈이었다. 정순왕후는 특히 자식뻘인 사도세자 내외와는 무척이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장성한 왕자가 대권을 계승하려는 현실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나이 어린 왕비의 존재는 어느 시대에나 부담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하자 비록 31살에 불과했지만 곧바로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되었고, 1800년 정조의 죽음은 야심에 찬 여인 정순왕후에게 정치적으로 날개를 달아주는 계기가 되었다. 정순왕후는 "주상이 나이가 어리니 내가 여주(女主)로서 조정에 임한다"고 하면서 국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할 것임을 시사하였다. 이후 정순왕후는 여군(女君) 또는 여주(女主)로 자처하면서 3년 반 동안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조가 구축해놓은 탕평정치의 기반을 파괴해 버렸다. 단순히 사학(邪學)으로만 규정되던 서학(천주교)을 금기시하여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1801년 신유박해). 1804년 순조의 친정체제가 이루어지자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마치고 왕실의 최고 어른이라는 상징적 존재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권력을 잃은 허망함이 죽음을 재촉했는지 창덕궁 경복전에서 승하하였다.
<20> 이수광 '지봉유설'
'우물 안 조선'에 띄운 세계로의 초대장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에 있는 이수광의 묘. 경기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는 묘비에는 탄흔도 보인다.
지봉(芝峰) 이수광(1563~1628)은 안으로는 붕당정치가 시작되면서 정치세력간의 정쟁이 본격화되고, 밖으로는 임진왜란과 북방 여진족의 흥기로 말미암아 국제적인 세력 판도가 점차 재편되어가는 시기를 살아가면서 시대가 요구하는 학문을 연구하고 국가의 중흥을 위한 사회경제 정책을 수립하는데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실천, 실용의 학문에 힘썼으며, 실생활에 유용한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섭렵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그의 저술 '지봉유설'은 바로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국제적 감각을 갖춘 인물
이수광의 본관은 전주이다. 왕족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4대 동안 관직 진출이 막혔다가 그의 아버지 이희검(1516-1579)에 이르러 관직에 진출하였다. 이희검은 명종 초에 문과에 급제하여, 선조 초에는 판서를 지냈고 청백리에도 뽑혔다.
이수광은 어린 시절을 동대문 밖에서 살았다. 그의 호 지봉은 집 부근에 있는 상산(商山)의 한 봉우리에서 따온 것으로 그가 평생 동안 이곳에 깊은 애착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젊은 시절에는 창덕궁 서쪽의 계곡인 침류대(枕流臺) 일대에서 유희경, 차천로, 신흠, 유몽인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이수광은 '비록 몸은 서울에 있지만 마음은 산림에 있다'라는 뜻으로 '성시산림(成市山林)'을 자처하였으며, '음악과 여색, 이욕(利慾)에 대해서 담담한 생활'을 하는 전형적인 선비 학자의 풍모를 보였다.
이수광의 학문 형성에 주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은 중국으로의 사행 경험이다. 이수광은 외교력과 문장능력을 인정받아 28세 때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35세 때 진위사로, 49세 때인 1611년(광해군 3)에 세번째로 각각 중국을 다녀왔다. 당시 선진국이었던 중국으로부터 보고 배운 문화 경험과, 세 차례의 使行을 통해 안남(安南:베트남), 유구(琉球:오키나와), 섬라(暹羅:Siam, 타이) 사신들과 교유하면서 국제적인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광해군 대에 잠시 관직에서 물러난 이수광은 1623년 인조반정 후 관직에 다시 복귀하여 도승지, 대사간, 대사헌, 이조참판, 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다가 1628년 이조판서로 재직 중에 사망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 장흥리에 있다.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상
조선조에 과거 보러 상경한 선비들이 반드시 찾아보는 집 중의 하나였던 비우당은 이수광이 살았던 오두막집이다. 그 이름을 달고 새로 생긴 청계천의 비우당교.
이수광의 학문은 한마디로 '실'을 강조하는 '실학'이다. 이수광은 비록 성리학자의 입지를 지켰지만 성리학에서 실용적, 실천적 요소를 찾는 것에 중점을 두었으며, 성리학 이외의 학문이라도 국부(國富)의 증진이나 민생의 안정에 유용한 것이라면 모든 학문을 폭넓게 수용하고는 개방성을 보였다. 이수광은 성리학을 이해하면서 실용, 실천의 측면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이론 탐구만을 고집하는 학풍이나 출세의 도구로 활용되는 성리학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의 저술에는 학문을 하는 사람은 실천에 힘을 기울여야지 구담(口談)에만 치중해선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모든 학문을 폭넓게 섭렵하는 한편, 비록 이단사상이라 할지라도 미리 선입견을 갖지 않고 그것이 갖는 유용성에 가치를 두는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가 나타난다.
그는 기본적으로 성리학자였지만, 성리학만을 신념화하지 않고 성리학에서도 시대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부분들을 강조하는가 하면 성리학 이념을 보완할 수 있는 사상체계의 수용에 적극성을 보였다. 그가 양명학과 도가, 불교 등에 대해서도 개방적 입장을 취한 것은 이들 사상이 가지는 긍정적인 기능에 주목했기 때문이었다.
'지봉유설'의 문장부와 같은 글에서는 시인을 소개하는 항목에서 사대부 학자 뿐만 아니라, 방외인, 승려, 천인, 규수, 기첩 등 신분이 낮은 사람들의 시까지 소개하는 신분적 개방성을 보여 주었다.
이수광은 사행의 경험을 통하여 외국의 문물을 보다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봉유설'을 통해서 외국의 많은 나라를 소개했던 까닭은 외국의 역사와 문화를 자신이 살고 있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비추어 보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립되고 폐쇄된 국가 조선이 아니라 진취적이고 개방적으로 발전해 갈 조선을 상정하고 그 모델들을 외국의 사례에서 구해 본 것으로 여겨진다.
▲주체성을 바탕으로 한 문화백과 사전
이수광이 편찬한 백과사전 '지봉유설' 표지와 내용. 이 책은 조선에 서양의 문물을 소개하는 데 선구적 역할을 했다.
'지봉유설'은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백과사전으로 손꼽을 수 있는 책이다. 저자의 나이 52세 때인 1614년(광해군 6)에 탈고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앞 부분에는 편찬 원칙을 밝힌 3칙의 '범례'가 수록되어 있는데, 범례에서 주목되는 것은 다루고 있는 항목이 3435조에 달한다는 것, 가능한 전거를 밝혔다는 것과 인용된 서적이 348가(家)이며 유교경전에서 최신의 자료까지 활용했던 것 등이다. 그만큼 자료 조사에 치밀성을 기하고 광범위하게 자료를 수집한 흔적이 나타나 있다.
'지봉유설'에서 다루고 있는 주요한 내용은 우선 목차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데 각 권별로 다루고 있는 항목은, 권1 천문, 재이부(災異), 권2 지리, 제국부(諸國), 권3 군도부(君道), 병정(兵政), 권4 관직부(官職), 권5 유도부(儒道)와 경서(經書), 권6 경서, 권7 경서와 문자(文字), 권8에서 권14 문장, 권15 인물과 성행(性行), 권16 언어, 권17 인사(人事), 권18 기예(技藝)와 외도(外道), 권19 궁실(宮室), 식물(食物), 권20 훼목(卉木), 금충(禽蟲) 등이다. 위의 항목에는 천문, 지리, 역사, 정치, 경제, 경학, 시문, 언어, 기예, 외도, 궁실, 식물, 금충 등 인문적 교양과 자연에 관한 것이 거의 망라되어 있다. 그야말로 문화백과사전인 셈이다.
각 항목에 대해서는 중국과 우리의 역대 사례를 중심으로 그 항목을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자료를 최대한 활용, 고증하고 있다.
이수광은 서문에서 '우리 동방의 나라는 예의로써 중국에 알려지고 박아(博雅)한 선비가 뒤를 이어 나타났으되 전기가 없음이 많고 문헌이 찾을만한 것이 적으니 어찌 섭섭한 일이 아니랴. 내가 보잘 것 없는 지식을 가지고 한 두 가지씩을 적어 두었다'라고 해 우리의 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행적이 뛰어난 역사적 인물을 소개하는데 '지봉유설'의 편찬동기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서문의 정신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본국'에는 각종 자료를 이용하여 우리나라가 군자국이라는 점과 동방은 전통적으로 착한 품성을 가진 곳임을 강조하고, '중국인들은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 보기를 원한다'는 내용을 소개하여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에 자부심을 보였다. 언어부에서는 '우리나라 사람의 일로서 중국 사람들이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부녀자의 수절, 천인의 장례와 제사, 맹인의 점치는 재주, 무사의 활을 쏘는 재주를 들었다. 이이에 우리나라에는 나고 중국에는 없는 것으로, 경면지, 황모필, 화문석을 소개하는 등 우리의 좋은 전통이나 물산에 대해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은 당대까지의 모든 지식과 정보가 총합된 문화백과사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우리 민족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세계문화의 수용에 진취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점이다. '지봉유설'은 백과사전의 효시를 이루는 저술로서, 이익의 '성호사설', 안정복의 '잡동산이',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등 개방적이고 박학한 학풍이 자리를 잡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전통문화에 대해 폭넓은 관심과 애정을 바탕으로 세계에 대해 열린 시각을 보인 이수광과 같은 학자가 그리운 것은 무분별하게 세계화만 외치는 오늘의 현실과 비교되기 때문은 아닐까?
<21> '한양가'
도성의 문물·풍속 읊은 19C '서울찬가'
19세기 서울의 모습을 묘사한 '도성도(都城圖)'.
19세기 조선시대를 보는 시각은 어떨까? 대부분은 세도정치가 극성에 이르면서 백성들의 삶이 곤궁해지고, 살아가기 힘든 백성들은 민란을 일으키는 '어두운 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을까? 물론 19세기 조선사회는 순조, 헌종, 철종 등 어리거나 힘이 없는 왕이 연이어 즉위하면서 왕대비의 수렴청정이 본격화되고, 외척들의 힘이 커지면서 정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시대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18세기까지 사회, 경제적으로 번성하던 사회가 불과 몇 년 만에 모두 몰락해 버린다는 이해 또한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19세기 한양 전반의 문물제도와 풍속을 노래한 '한양가'는 19세기 조선사회의 새로운 면모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자료이다.
▲'한양가'란 어떤 책인가?
'한양가'는 19세기 전반 서울의 문물제도와 풍속을 읊은 국문가사로 지은이는 한산거사(漢山居士)로만 표기되어 있다. 한양가의 판본은 다양하게 전해오고 있다. 1840년(헌종 6) 3월 한산거사가 지은 한양가에 신증동요(新增童謠)와 1874년(고종 10) 순종의 탄생을 경축하여 지은 축하 노래를 붙여 1880년 간행한 활자본이 있다. 필사본도 여러 종류가 전하는데 '한양풍물가'나 '한양태평가'로 제목을 한 것들이다. 한양가의 내용은 크게 한양의 지세와 도읍으로서의 형국, 한양의 궁전과 정각(亭閣), 승정원과 선혜청 등 관아의 모습, 도성의 성문과 시장의 풍경, 각종 놀이와 복식, 가무의 모습, 왕의 수원 행차, 문·무과 과거시험 등으로 구성되었다. 마지막에는 '이런 국도(國都) 이런 세상 자고급금(自古及今) 또 있으랴. 엎드려 비나이다, 북극전에 비나이다. 우리나라 우리 임금 본지(本枝) 백세 무강휴(無疆休 )를 천지와 더불어 해로하게 비나이다. 비나이다.'라는, 한양의 영원함을 예찬하는 노래로 끝을 맺고 있어서 마치 현대판 '서울 찬가'를 떠올리게 한다. 한양가에는 궁궐과 관아의 모습을 비롯하여 활기찬 시장 풍경, 과거 시험 장면, 왕의 행차, 기생들의 점고(點考) 등에 이르기까지 18세기 서울의 문물제도와 풍속이 노래 가사로서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한양가에 표현된 서울의 풍속은 조선 500년 역사에서 이룩한 발전적 성과들을 압축적으로 담아낸 것으로도 그 의미가 있다.
▲'한양가'의 압권, 물산이 넘쳐났던 시장 분위기
한양가에서 가장 신명나게 묘사된 부분은 바로 시장 풍경이다. 백성들의 삶이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곳, 시장. 한양가에 묘사된 시장 부분으로 들어가 보자.
'팔로를 통하였고 연경, 일본 닿았구나. 우리나라 소산(所産)들로 부끄럽지 않건마는 타국 물화 교합하니 백각전(百各廛) 장할시고. 칠패의 생어전에 각색 생선 다 있구나. 민어·석어·석수어며, 도미·준치·고도어(高道魚)며, 낙지·소라·오적어(烏賊魚)며, 조개·새우·전어로다. 남문 안 큰 모전(毛廛)에 각색 실과(實果) 다 있구나. 청실뇌·황실뇌·건시·홍시·조홍시며, 밤·대추·잣·호도며 포도·경도(瓊桃)·오얏이며, 석류·유자·복숭아며, 용안(龍眼)·협지·당재추로다. 상미전(上米廛) 좌우 가게 십년지량(十年之粮)을 쌓았어라. 하미·중미·극상미(極上米)며, 찹쌀·좁쌀·기장쌀과 녹두·청태·적도·팥과 마태(馬太)·중태·기름태로다. 되를 들어 자랑하니 민무기색(民無飢色) 좋을씨고. 수각(水閣) 다리 넘어서니 각색 상전(商廛) 벌였어라. 면빗·참빗·얼레빗과 쌈지·줌치·허리띠며 총전·보료·모탄자며 간지(簡紙)·주지(周紙)·당주지(唐周紙)로다'하여 물산이 풍부한 한양의 시장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팔로를 통하였고 일본 연경 닿았구나'에서는 국제무역으로까지 뻗었던 한양의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고, '백성들이 굶주린 기색이 없다'라고 표현한 부분에서는 19세기 관리들의 수탈로 기근에 허덕이던 백성들의 모습이 좀처럼 연상되지 않는다.
이어 '큰 광통교 넘어서니 육주비전 여기로다'하면서 옷감과 종이로 풍족한 육의전의 모습이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먼저 '일 아는 열립군(列立軍)과 물화를 맡은 전시정(廛市井)은 큰 창옷에 갓을 쓰고, 소창 옷에 한삼(汗衫) 달고 사람 불러 흥정하니 경박하기 측량없다'라 하여 흥정이 오가는 시장 풍경을 익살스럽게 묘사한 후, 어물전·백목전·지전·청포(靑布)전에서 판매되는 각종 어물과 생선·무명·비단·종이·삼베가 나열되고 있다. 공단(貢緞)·대단(大緞)·사단(紗緞)·금선단(金線緞)·아롱단 등 비단만 30종이 소개되는 등 풍요로움이 물씬 배어있다. 도자전(刀子纏)에서 팔던 부녀자들의 노리개, 광통교 아래에서 팔던 각색 그림들에 대한 묘사에서는 사람 살아가는 냄새를 맡을 수가 있다.
▲번성하는 한양에 대한 자부심
19세기 전반 서울의 문물제도와 풍속을 읊은 국문가사인 '한양가'의 첫면.
정조 때인 1791년에 단행된 신해통공은 조선후기 상업활동에 있어서 큰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시전 상인들에게 특권을 부여하고 난전의 설립을 금지하는 금난전권이 폐지됨으로써 자유롭게 상업 활동을 하는 사상들의 성장이 촉진되었다. 사상들은 앉아서 판매하는 난전에만 종사하지 않았다. 전국의 지방 장시를 연결하면서 물자를 교역하기도 하고, 전국 각지에 지점을 설치하여 판매를 확장하기도 했으며, 또한 대외무역에도 참여하는 등 다양한 상업 활동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여 나갔다. 이들 사상 중에서도 한강 주변의 경강 상인을 비롯하여 개성의 송상, 평양의 유상(柳商), 의주의 만상(灣商), 동래의 내상(萊商) 등이 가장 두각을 나타내면서 거상(巨商)으로 성장하였다. 사상의 성장과 함께 지방에는 장시들이 발달하였다. 장시는 보통 5일마다 열렸으며, 물건 교역 뿐 아니라 지방민들의 여론과 정보를 수집하는 기능을 하였다.
국내상업의 발달은 대외무역의 활성화에도 기여하였다. 청과 일본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공적인 무역인 개시(開市)와 함께 사적인 무역인 후시(後市)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의주의 만상은 청과의 무역에서, 동래의 내상은 일본과의 무역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으며, 개성의 송상은 양자를 중계하면서 이득을 취하기도 했다. 대외무역의 과정에서 외국어에 능통한 역관의 지위가 향상되었으며, 특히 이들은 인삼무역에서 수완을 발휘하여 부유층으로 성장하였다. 청과의 무역에서는 비단·약재·문방구를 수입하는 대신에 인삼·은·무명·종이 등을 수출하였고, 일본과의 무역에서는 은·구리·황·후추 등을 수입하고, 인삼·쌀·무명 등을 수출하였다. 이제 조선은 고립적인 국가가 아니라 국제교역에도 당당히 나서하는 상업국가로서의 면모를 서서히 보이고 있었다. '한양가'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업고, 새롭게 성장한 도시 한양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한 노래였다. '한양가'는 19세기의 조선사회가 어둡고 빈곤하기만 시대였다는 인식에도 변화를 안겨줄 것으로 기대된다.
# '성시전도시'란
- 이덕무가 그림보고 지은 시, '한양가'보다 먼저 서울 찬양
'한양가'에 앞서 서울을 노래한 시로 대표적인 것은 정조의 명을 받아 남긴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이다. 1792년(정조 16) 4월 정조는 박제가, 이만수, 유득공, 박제가, 이덕무 등 여러 신하들에게 '성시전도'의 그림을 보고 이에 적합한 시를 짓도록 명하였다. '청장관전서' '아정유고'에 기록된 이덕무의 시 '성시전도'를 보자.
이덕무는 먼저 '금척(金尺)의 산하 일 만 리가 한양 서울 황도 속에서 번성하네. 황도 한 문안에 큰 도회지. 역력히 펼쳐져 있어 손금을 보는 듯. 글 맡은 신하 그림에 쓰는 시 지을 줄 알아. 성한 일에 왕명을 받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라 하여 왕명을 받아 시를 짓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한양의 관아, 지리, 풍속을 묘사해 간다. 이 중 시장에 관한 부분에는 활기에 넘치는 당시의 풍요로움이 물씬 배어난다. '거리 좌우에 늘어서 있는 천간 집에 온갖 물화 산처럼 쌓여 헤아리기 어렵네. 비단 가게에 울긋불긋 벌여 있는 것. 모두 능라와 금수(錦繡)요. 어물 가게에 싱싱한 생선 도탑게 살쪘으니. 갈치·노어·준치·쏘가리·숭어·붕어·잉어이구나. 쌀가게에 쌓인 쌀 산과 같고. 운자(雲子:빛깔이 흰 돌) 같은 흰 밥 기름이 흐른다. 주점은 본래 인간세상이나. 웅백(熊白)·성홍(猩紅)의 술 빛이 잔에 가득하네, 행상과 좌고(坐賈)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자질구레한 물건도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네. 숭례문 밖에서는 무엇을 보겠는가. 강가의 창고에는 곡식이 억만 섬인데 연파에 끝이 없는 삼남의 선박 대밭같이 들어선 돛대 만 척이나 정박하고…'라고 표현하여, 물화의 유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18세기 후반 서울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덕무의 '성시전도시'가 왕명을 받아 쓴 만큼 약간의 과장은 있을 것이라고 판단되지만, 이 시를 통해 18세기 후반 활기차고 싱싱한 한양 풍경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한양가'에서 절정을 맞았다.
<22> 오주연문장전산고
'개화의 씨앗' 뿌린 조선의 백과사전
18세기 말에 편찬된 서구식 한역(漢譯)세계지도. 이규경의 세계에 대한 인식에는 이러한 세계지도의 수용이 바탕이 되었다. 남극을 화지(火地)라 하여 붉게 표시한 것이 흥미롭다.
'임진년에 왜군이 창궐했을 때 당시 영남의 고립된 성이 바야흐로 겹겹이 포위를 당하여 망하는 것이 조석지간에 달려 있었습니다. …이 때에 어떤 이가 비차(飛車)를 제작하여 성중(城中)으로 날아 들어가 그의 벗을 태워 30리 쯤을 난 뒤에야 지상에 착륙하여 왜적의 칼날에서 피할 수 있었습니다'.
위의 글은 조선시대 우리 민족이 서양의 라이트 형제보다 앞서 하늘을 날았다는 비차를 제작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는 '오주연문장전산고'의 '비차변증설' 부분이다. 19세기의 학자 이규경(李圭景:1788~1856)이 저술한 '오주연문장전산고'(이하 오주연문)에는 이처럼 흥미진진한 내용 이외에 천문, 의학, 역사, 지리, 농업, 서학, 병법, 광물, 초목, 어충, 음악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19세기를 대표하는 종합 백과사전
19세기의 조선사회는 정치나 사회 경제적으로 하향 곡선을 긋고 있었지만, 18세기 이후 풍미했던 실학과 북학의 흐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세기의 조선사회는 그 내부에서 축적되어진 학문적 성과와 청의 고증학의 영향, 그리고 사회경제적 모순에 대응하는 새로운 사상풍토의 조성 등으로 학문과 사상의 폭과 깊이에서는 현저한 성과를 보인 시기였다. 특히 양란 이후 주자성리학만을 고집하지 않고 국가의 통치나 민생에 필요한 모든 학문 분야를 포괄하는 박학(博學)의 풍조가 사상계의 일단을 형성하면서 반짝이는 지성들도 나타났다. 이규경, 최한기, 김정호, 김정희, 정약용 등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 지성들이다. 이 중에서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저술하여 조선후기 백과사전적인 학풍을 체계화한 인물이었다. '오주연문'의 저술에는 조선사회 내부에서 꾸준히 계승되어온 백과사전적 학풍이 큰 몫을 하였다. 이수광의 '지봉유설', 이익의 '성호사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등은 실제 '오주연문'의 저술에 크게 참고가 되었다. 마치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라는 위대한 업적에 앞서 정상기의 '동국지도' 등 조선사회 내부의 꾸준한 지도 제작이 이루어졌던 것처럼.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자신의 호 '오주'에, 저자의 겸손함을 뜻하는 거친 문장이라는 '연문(衍文)', 문장의 형태인 '장전(長箋)', 흩어진 원고라는 뜻의 '산고(散稿)'가 합쳐진 말로 제목에서부터 백과사전임이 나타난다. 총 60권 60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든 항목을 변증설로 처리하여 세밀한 문제까지도 고증학적 학문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동도서기(東道西器)를 통한 부국(富國)과 개항
조선 후기의 학자 이규경이 편찬한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
'오주연문'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총 1417항목에 달하며, 고증을 원칙으로 하여 저자의 주관적 견해가 피력된 변증설의 형식을 취한 것이 특징이다. 이규경은 서문에서 '명물도수(名物度數)의 학문이 성명의리지학(性命義理之學)에는 미치지 못하나 가히 폐할 수 없다'고 하면서 병법·광물·초목·어충·의학·농업·화폐 등에 이르는 다양한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가 호를 '오주'라 할 만큼 서양세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은 이미 지적했지만 저술에서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서양과 천주교에 대해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점은 '용기변증설(用氣辨證說)' '백인(白人)변증설' '지구변증설' '척사교(斥邪敎)변증설' 등에 구체화되어 있다. 그는 변증설 가운데 약 80항목에 걸쳐 서학을 직접, 간접적으로 논하고 있는데, 그가 변증한 서학 관련 항목은 천문, 역산, 수학, 의약, 종교 등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참고한 서학관련 서적들은 '천주실의' '직방외기(職方外紀)'를 위시하여 근 20종에 달했으며 그 종류도 매우 다양하였다.
이규경은 서양문명과 중국문명을 비교하여 중국의 학문은 형이상학의 도(道)로, 서양의 학문은 형이하학의 기(器)로 대비시켰다. 그리고 기를 잘 이용한 서양기술의 우수성을 인정하였다. 그는 서양의 과학기술이 중국의 그것보다 우위에 있음을 자각하면서도 동양사회의 과학적 전통을 중시하였는데, 이는 결국 전통사상의 바탕 위에서 부강한 국가를 위해서는 필요한 모든 것을 수용하려는 그의 사상적 개방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동도서기(東道西器)에 바탕한 사상은 개국통상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규경은 관직에 종사하지 않고 평생을 농촌에 은거하였다. 그는 학통상으로는 북학파와 연결되고 있었으나. 그가 처했던 위치가 농촌의 재야 지식인이었던 만큼 농민의 생활안정과 농촌문제의 해결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선비라도 먹지 않고는 살 수가 없음을 들어 무엇보다 농업이 생명의 근본임을 강조하였다. 이외에 농가의 월령에 대한 변증설과 구황식물로서 고구마의 중요성을 언급한 '북저(北藷)변증설'을 비롯하여, 농기구와 직조기구, 어구 등 농어민의 실생활과 관련된 많은 사실들을 고증하였다.
▲북학파와 개화사상의 고리 역할을 하다
이규경의 사상적 지향점은 무엇보다 부국(富國)과 통상(通商)에 있었다. 우리 국토에 소장되어 있는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고 잠재되어 있는 문화적 역량을 최대한 활용하여 잘 살고 선진적인 국가를 지향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도량형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화폐의 유용성을 타진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시장의 유래와 기능을 소개한 것에서 출발하여 개국통상론 주장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장시변증설'에서는 전국의 장날을 통일할 것을 주장하고 투기와 고리대의 폐단이 없는 상업의 발달을 추구하였으며, 서양과 중국과 통교를 해야 한다는 주장, 서양의 선박들과 무역을 해야 한다는 주장 등을 적극적으로 개진하였다.
18세기 후반 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파 학자들의 주장에서 일부 전개되었던 서학 수용과 대외 개방의 전진적인 역사 인식이 19세기 중엽 이규경, 최한기에 의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사상은 19세기 중, 후반 오경석, 유홍기, 박규수로 이어지면서 초기 개화사상의 토대가 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이규경은 18세기 북학파와 19세기 후반 개화사상을 연결시켜주는 고리의 지점에 있었던 학자로 평가할 수 있다.
이규경은 부강한 국가를 위해서는 도교. 불교. 자연과학 등 모든 학문과 사상을 흡수. 응용하려는 입장에 있었으며, 광산개발과 화기의 개발 등 실용적인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자연과학 사상은 '오주서종' 등에 잘 나타나 있는데, 방대한 자연과학적 사고를 이용후생의 관점에서 개진한 그의 사상은 그를 19세기 실학의 집대성자로 위치 지우기에 손색이 없다.
이규경은 문화와 사상의 암흑기로 인식되었던 19세기 전반과 중반을 살아가면서 반짝이는 등불처럼 활동한 학자였다. '오주연문'에 나타난 그의 박학풍과 학문적 개방성은 조선사회의 자율적인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규경의 모습에서 스스로 전통사회의 한계를 극복하고 근대사회로 지향해가는 19세기 조선 지성인의 역량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 저자 이규경은 누구?
-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의 후손, 최한기·김정호 등과 교류
이규경의 본관은 전주, 호는 '오주(五洲)'로 그의 호를 '오대양 육대주'에서 따온 사실이 흥미롭다. 열린 사고를 하고 있었던 학자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의 조부는 정조대 규장각 검서관으로 문명을 떨친 이덕무였고, 아버지 이광규 역시 규장각 검서관이었다. 이덕무는 정조의 총애를 받아 각종 편찬사업에 참여하였고, 개인 저작 '청장관전서'를 저술하였다. 같은 시대를 산 박제가, 정약용, 박지원에 비해 지명도는 낮았지만 정조를 뒷받침한 조용하지만 강한 실학자였다. 이처럼 이규경은 가학(家學)의 전통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에 눈을 뜰 수 있었지만, 서얼이라는 신분적 굴레 때문에 중앙의 정계에서는 활약하지 못하고 재야에 은거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정리하였다. 그러나 재야의 은둔자가 아니라 신학문의 수용에 언제나 민감하였고, 동시대를 살면서 같은 처지에 있었던 중인 학자인 최한기, 최성환, 김정호와의 교류를 통해 학문의 지평을 넓혀 나갔다. 최한기는 '해국도지', '영환지략' 등 당시 서양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던 최신 서적을 이규경에게 보여 주었으며, 최성환은 지리학에 해박하여 '여도비지(輿圖備志)'를 편찬하였다. 이규경은 '대동여지도'의 제작자 김정호의 뛰어난 능력을 칭송하여 그의 '여지도'와 '방여고' 2책은 꼭 전할만 것으로 평가하였다. 이규경의 학문 형성에는 신학문인 청나라 고증학의 수용과 최한기, 최성환, 김정호와 같은 중인층 학자와의 교류를 통해 얻은 지리학과 지도 지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조선의 학문이 양반의 전유물이 아니라 중인층에게도 널리 확산되어갔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23> 참의공사연도 3점
조선 사대부 집안의 왕실행사 '기념사진'
1629년 숭례문 밖 홍은효의 집 앞 남지(南池)에서 베풀어진 기로연 장면을 그린 '남지기로회도'.
조선시대에는 왕실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참여한 후에, 참석자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행사의 주요 장면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리고 이 그림들을 참석자들이 한 부씩 나누어 가지는 것이 관례였다. 오늘날로 치면 국가 행사에 참여한 후 기념사진이나 비디오를 촬영하여 한 부씩 나누어 갖는 것과 흡사하다.
왕이 직접 주관하는 행사에 신하가 참여하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었다. 이들 그림은 집안 마다 대대로 후손들에게 전해졌고, 따라서 같은 행사 그림이 여러 점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규장각에는 달성 서씨 집안이 대대로 보관해 오던 그림이 '참의공사연도(參議公賜宴圖)'라는 제목으로 현재까지 전해진다. 이들 그림은 가문을 위해 전승된 것이었지만, 오늘날 시각 자료가 부족한 조선시대 생활상을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참의공사연도'란?
1817년 왕세자 효명세자(후에 익종으로 추존)의 성균관 입학 의식을 그린 '익종대왕입학도'.
1817년(순조 17) 7월 서정보(徐鼎輔)는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시강원 보덕(輔德)의 직책으로 익종(순조의 세자인 효명세자)의 성균관 입학 의식에 참여하였다. 1828년 서정보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익종대왕입학도'를 만들면서, 집안에 전해지던 10대조 서고(徐固)의 '서연관사연도(書筵官賜宴圖)'와 8대조 서성의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를 함께 보관할 수 있는 목재함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세 점의 그림들을 함께 모은 1첩의 함 앞면에는 '참의공사연도'라는 제목을 붙였다. 참의 벼슬을 지냈던 10대조가 사연(賜宴:임금이 하사하는 잔치)을 받았다는 뜻이다. 채색 필사본으로 된 그림의 크기는 세로 41㎝, 가로 26.5㎝ 정도이며, '남지기로회도' '입학도' '서연관사연도'의 순서로 구성되었다. 이들 그림은 모두 왕과 신하가 한 자리에 어울리면서 돈독한 군신관계를 형성하고 왕을 보좌하는 신하들의 영광을 부각시키는 그림들이었다. 달성 서씨 집안에서 '가문의 영광'으로 인식한 선조들의 행사 참여 장면 그림들. 우리는 이들 기록화에서 무엇을 읽어볼 수 있을까?
▲왕세자 스승들의 잔치 모임: 서연관사연도(書筵官賜宴圖)
1535년 서연관들에게 잔치를 베푼 모습을 담은 그림 '서연관사연도'.
1535년(중종 30) 인종의 세자 책봉 16주년을 맞이하여 서연관 등 왕세자와 인연이 깊은 인물 39인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푼 상황을 기록한 그림이다. 서연이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리들과 왕세자가 독서와 강론을 하는 자리로서, 왕과 신하들이 학문과 정사를 토론하는 경연과 유사한 성격을 띠었다. 장성한 세자가 어린 시절에 배웠던 스승들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려는 취지에서 잔치가 행해졌다. 연회는 경복궁에서 베풀어졌으며, 서정보의 10대조인 서고(徐固)는 이조좌랑으로 참석하였다. 서고는 조선 전기의 명신 서거정의 손자로서 명종 때에는 예조참의를 지냈으며,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도중에 사망하였다. 앞 부분에는 그림의 전래 과정을 설명한 서정보의 '서연관사연도기(書筵官賜宴圖記)'와, 잔치에 참석한 김근사, 김안로, 심언경, 채세영 등 39인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고, 이어 행사의 핵심 장면을 담은 '서연관사연도'가 나온다. 궁궐 마당에 머리를 꽃으로 장식하고 홍포(紅袍)를 입은 시강원의 신하들이 3줄로 늘어 앉아 왕이 내려주는 술잔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들 앞에서는 일무(佾舞)를 추는 무희들과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들이 잔치의 분위기를 돋우고 있다. 이미 술에 취한 신하들이 부축을 받으면서 궁궐 문을 나서고 있는 모습도 흥미로우며, 생동감 있게 그린 궁궐 주변 산들의 모습은 운치를 더하고 있다. 서정보는 옛 성현의 '양로걸언(養老乞言)'의 예를 성하게 한 것이라고 평하였다.
▲남쪽 연못에서의 노인잔치: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
1828년 서정보는 '익종대왕입학도'를 만들면서, 집안에 전해지던 10대조 서고(徐固)의 '서연관사연도(書筵官賜宴圖)'와 8대조 서성의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를 함께 보관할 수 있는 목재함을 제작해 그 위에 '참의공사연도'라는 표제를 붙였다.
1629년(인조 7) 6월 5일에 서성(1558~1631) 등 12인이 숭례문 밖 홍은효(洪恩斅)의 집에 모여 개최한 기로회의 모습을 기록한 그림이다. 서성은 서정보의 8대조로서 호는 약봉(藥峯). 선조에서 인조 연간에 걸쳐 호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저서로는 '약봉집'이 있다. 기로연은 70세 이상의 관리들에게 베푸는 잔치로서, 당시의 70세는 대단한 장수를 상징하였다. 왕의 경우에도 조선시대 기로소에 들어간 왕은 태조, 숙종, 영조, 고종 등 모두 네 명에 불과하였다. '남지기로회도'라 한 것은 남지(南池:남쪽 연못)에서의 기로연 잔치라는 뜻이다. 연회의 장면을 묘사한 장유의 글, 1691년 박세당이 당시의 잔치 모습을 묘사한 글, 1828년 서정보가 그림의 전래 과정을 설명한 글이 앞에 있고, 이인기(1549~1631), 윤동로(1550~?), 이귀(1557~1633), 서성, 유순익 등 12인의 성명, 자호, 보관, 관품, 나이, 생년월일, 함께 참석한 자제의 이름까지 기록되어 있다. 참석자는 80세의 이인기를 비롯하여 70세의 막내 유순익까지 모두 70세 이상이다. 당시 홍씨 집 앞에는 남지가 있었는데 마침 연꽃이 만발하였고 흐드러진 수양버들은 평화로운 정경을 자아내고 있다. 건물 안에는 12명의 참석자가 똑 같은 상차림을 받고 있고, 음식을 준비하는 아가씨들의 분주한 모습도 눈에 띈다. 건물 아래에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은 참석자들을 모시고 가려는 자제들로 보인다. 수양버들 사이로 보이는 2층 기와집은 숭례문으로 여겨진다. 한 폭의 수채화와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기록화이다. 화원출신 이기룡(李起龍)이 그림을 그리고, 당대의 문장가 장유(張維)가 발문을 쓴 원본(보물 865호)은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왕세자의 성균관 입학식: 익종대왕입학도(翼宗大王入學圖)
1817년(순조 17) 3월 11일에 거행된 효명세자(1809~1830:후에 익종으로 추존됨)의 성균관 입학 의식을 기념하여 그린 그림이다. 효명세자는 순조의 아들로 순조 말년에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조선 후기의 정치, 문화 부흥에 노력을 다했으나 요절하고만 인물이다. 당시 서정보는 세자시강원 보덕으로 이 행사에 참여하였으며, 그림의 앞에는 서정보가 행사에 참여하면서 당시의 정경을 묘사한 글과 그림 및 선조들에게서 이어진 '참의공서연관사연도' '약봉공(藥峯公)남지기로회도'를 합쳐 1첩으로 만들게 된 과정을 기록한 '입학도기'가 있다. 이어 홍경모, 김병구, 이만수, 남공철 등 빈객(賓客)과 궁관(宮官)이 주고 받은 13수의 시와 남공철(南公轍:1760~1840)의 발문이 있다. 남공철은 발문에서 세자 교육의 중요성과 세자를 가르치는 서연관의 수신을 강조하였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장서각 등에 소장된 '왕세자입학도첩'에는 왕세자의 출궁에서부터 왕세자가 문무백관의 하례를 받는 여섯 장면이 그려져 있으나, 본 첩에는 5번째 그림인 '왕세자입학도' 한 장면만 그려져 있다. 그림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입학 의식이 베풀어졌던 성균관 명륜당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 성균관이었던 만큼 왕세자가 이곳에 입학하는 의식을 행함으로써, 왕실에서 먼저 교육의 모범을 보이겠다는 뜻이 나타나 있다. 명륜당 오른편에 앉아 있는 인물은 강학을 담당한 박사(좌우빈객이 담당)이며, 그 맞은 편으로 서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세자의 자리가 있다. 왕도 마찬가지이만 왕실 의식에 왕세자의 모습은 그려 넣지 않았다.
달성 서씨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진 위의 기록화들을 그린 사람들은 화원이었다. 이런 기록화들은 '가문의 영광'을 대대로 간직하려는 후손들의 욕망에 이루어졌지만, 화원들의 손끝에서 이루어진 건물 배치를 비롯하여 세심하게 묘사된 인물의 모습, 잔치에 사용되었던 무용과 악기 등을 통하여, 우리 후손들 또한 선조들이 살아갔던 삶의 현장들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는 '후손의 영광'을 얻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