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감부의 영문 기관지 ‘서울프레스’ 제2대 사장 야마가타 이소오는 이토 히로부미의 측근이었던 즈모토의 뒤를 이어 1909년 4월에 사장 겸 주필로 취임했다. 도쿄제국대학 출신의 영문학자로 1899년 일분 ‘만조보’에 입사하여 주필까지 승진했던 인물이다.
국한문의 매일신보 재호와 기사
일문의 경성일보 제호와 기사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의 위안부 모집 광고
매일신보(국한문),경성일보(일문), 서울프레스(영문), 3언어의 총독부기관지를 발해하여 언론 총독부로 일컬어지던 경성일보사 사옥
서울프레스는 영국인 배설의 ‘코리아 데일리 뉴스’에 대항하고, 서구 여러 나라에 일본의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고 선전하기 위해서 창간한 신문이었다. 특별한 이슈가 있으면 책자나 팸플릿을 발행하여 통감부와 총독부의 입장을 홍보했다.
배설의 공판이 열리기 직전인 1908년 5월 23일 서울프레스는 두 개의 팸플릿을 발행했다. ‘한국의 배일신문지’는 친일 외교고문 스티븐스 암살 기사(신보, 1908.4. 17)를 비롯하여 배설의 공판에 증거물로 제시된 항일 논설과 기사를 일어로 번역한 것이다.
“대한매일신보는 치외법권의 보호 아래 극성스럽게 배일사상을 퍼뜨려 한국인으로 하여금 일본의 보호정책을 반항하도록 선동하는 것을 그 본래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면서 여기 수록한 글은 그 일단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영어 팸플릿 ‘한국의 선동신문’은 서울프레스가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비방하고 공격한 영문 논설과 기사를 실었다.
배설 재판을 위해 상해에서 서울에 온 영국 재판관과 검사가 유죄 판결을 내리도록 통감부의 입장을 선전했다. 주한 영국 총영사관에서 4일 동안 진행된 재판에서 영국 재판관이 배설에게 3주일간의 금고형을 선고하자 서울 프레스는 재빨리 공판의 상세한 내용을 책으로 발행했다.
‘한국에서의 외국 언론’은 9포인트의 작은 활자 2단조 55쪽 분량이었다. 영국법원이 배설에게 유죄를 선고하여 일본의 침략정책을 인정했다는 취지였다.
1912년 12월에는 ‘조선음모사건’이라는 제목으로 105인 사건의 자료를 일본어와 영어로 발행해 총독부의 민족진영 탄압행위가 정당하다고 강변했다 일어판은 250페이지 분량(영어는 96페이지)으로 유치호, 양기탁 등의 기소장과 공판내용, 미국·영국의 신문기사와 친일적 서양인들의 기고문 모음이었다.
야마가타 이소오는 1919년 3·1운동 후 일본 정보국 총재인 이슈인 히코요시에게 서한(7/10, 8/31)을 보내 국제홍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실천 방안을 제시했다.
3·1운동 때에 일본에 불리한 여론이 일어났던 경험을 살려 도쿄에 선전기관 본부를 두고 친일 성향의 논객 확보를 건의하는 내용이었다.
그 후로도 야마가타는 국가 홍보전략을 제시하는 서한을 본국 정부에 여러 차례 보냈다. 74세 때에 출간한 ‘미국필패’(1943.동경서방)는 야마가타의 국수주의적 성향을 드러낸 책이었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언론정보학 ]
통감부의 영문 기관지 ‘서울프레스’ 제2대 사장 야마가타 이소오는 이토 히로부미의 측근이었던 즈모토의 뒤를 이어 1909년 4월에 사장 겸 주필로 취임했다. 도쿄제국대학 출신의 영문학자로 1899년 일분 ‘만조보’에 입사하여 주필까지 승진했던 인물이다.
매일신보(국한문),경성일보(일문), 서울프레스(영문), 3언어의 총독부기관지를 발해하여 언론 총독부로 일컬어지던 경성일보사 사옥
서울프레스는 영국인 배설의 ‘코리아 데일리 뉴스’에 대항하고, 서구 여러 나라에 일본의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고 선전하기 위해서 창간한 신문이었다. 특별한 이슈가 있으면 책자나 팸플릿을 발행하여 통감부와 총독부의 입장을 홍보했다.
배설의 공판이 열리기 직전인 1908년 5월 23일 서울프레스는 두 개의 팸플릿을 발행했다. ‘한국의 배일신문지’는 친일 외교고문 스티븐스 암살 기사(신보, 1908.4. 17)를 비롯하여 배설의 공판에 증거물로 제시된 항일 논설과 기사를 일어로 번역한 것이다.
“대한매일신보는 치외법권의 보호 아래 극성스럽게 배일사상을 퍼뜨려 한국인으로 하여금 일본의 보호정책을 반항하도록 선동하는 것을 그 본래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면서 여기 수록한 글은 그 일단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영어 팸플릿 ‘한국의 선동신문’은 서울프레스가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비방하고 공격한 영문 논설과 기사를 실었다.
배설 재판을 위해 상해에서 서울에 온 영국 재판관과 검사가 유죄 판결을 내리도록 통감부의 입장을 선전했다. 주한 영국 총영사관에서 4일 동안 진행된 재판에서 영국 재판관이 배설에게 3주일간의 금고형을 선고하자 서울 프레스는 재빨리 공판의 상세한 내용을 책으로 발행했다.
‘한국에서의 외국 언론’은 9포인트의 작은 활자 2단조 55쪽 분량이었다. 영국법원이 배설에게 유죄를 선고하여 일본의 침략정책을 인정했다는 취지였다.
1912년 12월에는 ‘조선음모사건’이라는 제목으로 105인 사건의 자료를 일본어와 영어로 발행해 총독부의 민족진영 탄압행위가 정당하다고 강변했다 일어판은 250페이지 분량(영어는 96페이지)으로 유치호, 양기탁 등의 기소장과 공판내용, 미국·영국의 신문기사와 친일적 서양인들의 기고문 모음이었다.
야마가타 이소오는 1919년 3·1운동 후 일본 정보국 총재인 이슈인 히코요시에게 서한(7/10, 8/31)을 보내 국제홍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실천 방안을 제시했다.
3·1운동 때에 일본에 불리한 여론이 일어났던 경험을 살려 도쿄에 선전기관 본부를 두고 친일 성향의 논객 확보를 건의하는 내용이었다.
그 후로도 야마가타는 국가 홍보전략을 제시하는 서한을 본국 정부에 여러 차례 보냈다. 74세 때에 출간한 ‘미국필패’(1943.동경서방)는 야마가타의 국수주의적 성향을 드러낸 책이었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언론정보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