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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잠언 제12강
자기 마음을 제어하는 사람
말씀 / 잠언 25,26장
요절 / 잠언 25:28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오늘 본문은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요’라고 시작합니다. 여기 ‘이것’은 잠언 25~29장까지를 가리킵니다. 앞에 나왔던 내용들도 솔로몬의 잠언인데 ‘이것도’라고 말하는 이유는 유다 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솔로몬의 잠언을 필사하면서 편집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왕의 사후, 250년이 지난 뒤의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구체적인 삶의 규범을 만들기 위해 이스라엘의 최전성기에 주어진 솔로몬의 잠언을 다시금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는 백성들의 신앙을 진리의 말씀 앞에 굳게 세우고자 했습니다. 이 시간 잠언 말씀을 통해 우리 삶과 신앙을 하나님 앞에서 되돌아보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굳게 세우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마음의 영적 소원
25장 2,3절을 보십시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 섭리,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두신 뜻을 잘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잘 드러내지 않으실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가 매우 많지만 하나님은 숨겨 두실 때가 많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찾고 두드리고 구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에 대해 우리가 간절히 알려고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영적 소원을 가지고 알려고 노력하지만 인간의 머리로 우주보다 더 광대하신 하나님의 지혜의 세계를 우리 인간이 다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적 소원을 가지고 알고자 하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밝히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살피는 것, 즉 하나님의 일을 밝히 드러내는 것이 왕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대리인입니다. 자기 뜻대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왕의 지혜는 일반 백성이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지혜여야 합니다. 그 지혜를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3절에 보면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왕의 마음도 하늘이 높고 땅이 깊음같이 헤아리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감히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위대하심과 크고 넓고 깊으심에 대해 어찌 인간이 다 헤아려 알 수 있겠는가? 이런 말씀입니다. 로마서 11장 33절은 말씀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우리는 깊고 깊어서 다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과 지혜를 간절한 마음으로 찾고 밝히 깨달아 알 때 우리 또한 영적으로 더욱 성숙해지고 더욱 깊이 있는 신앙인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솔로몬 왕은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하나님이 물었을 때 백성들을 분별하여 재판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했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우리에게도 부어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덧입어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서 더욱 깊이 알아가는 은혜가 주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내면의 깨끗함과 겸손함
하나님의 지혜를 덧입으려면 간절한 영적 소원과 함께 무엇이 필요할까요? 깨끗함과 겸손함입니다. 25장 4,5절을 보십시오.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의 왕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 은에서 불순물을 제거하여 순은의 쓸 만한 그릇을 만드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없애야 합니다. 악한 자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온갖 감언이설로 왕의 눈과 귀를 어둡게 하고 속이고 거짓되게 행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자신의 욕심과 권력을 위해서는 진리 앞에 바로 서기보다 아첨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떤 존재인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들이 있다면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 우리를 더럽게 하는 찌꺼기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 내면이 깨끗한 거울처럼 될 때에 거기에 비로소 하나님의 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더불어 25장 6절도 보십시오.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만약 왕 앞에서 신하가 거들먹거리며 높은 체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높은 사람들의 자리에 끼어들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누가복음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높은 사람이 왔을 때 자리를 내어주게 되고 부끄러워 제일 끝자리로 가게 되는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차라리 끝자리에 앉아 있으면 초청한 친구가 “친구여, 올라 앉으라”하여 높은 상석에 앉게 될 때 초청받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게 될 것입니다(눅14:7-11). 사람은 자기중심적이어서 자기가 영광 받고자 하는 교만함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는 말이 있듯 칭찬은 물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을 돕는 측면에서 칭찬과 격려가 좋다는 것이지 받는 사람이 스스로 칭찬과 인정에 매몰되어 높아지고 교만해지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입니다. 사회에서도 교회에서도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들보다 더 돋보이고 싶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높은 척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2).” 성경적 원리는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높여 주실 때에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려 할 것이 아니라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으로 허리를 동여매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쓰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하나님의 때에 높여 주십니다. 사람이 때로는 겸손의 자리에 서는 것이 자존심 상할 수도 있고 속된 표현으로 호구 취급당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늘 겸손의 자리에 서고자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가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겸손을 잘 나타내 줍니다. 하나님이시지만 자기를 비워 인간의 형체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으로서 가장 높은 분이시지만 이 땅까지 낮추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하나님은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세상 만물을 모두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 꿇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더러움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힘입어 깨끗함을 덧입고 예수님을 배우기에 힘써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담기게 될 것입니다.
셋째, 말의 절제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말에 있어 신중한 사람입니다. 내 눈으로 보았다고 해서 성급히 증인으로 나섰다가 자신이 잘못 본 것임이 드러나면 수치만 당할 뿐입니다(8). 또 이웃과 분쟁이 생겼을 때는 내가 해야 할 변론만 하면 되지 남의 비밀까지 누설해서 타인의 권리와 명예를 훼손하지는 말아야 합니다(9).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없습니다(10).
반면, 25장 11,12절을 보십시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사과니라.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 사과 같습니다. 은 쟁반만 해도 아름다운데 거기에 예술가의 솜씨로 아름답게 장식까지 되어 있으면 얼마나 보기 좋고 아름답겠습니까? 그런데 그 위에 금빛 찬란한 금사과까지 있으니 얼마나 고귀해 보이고 아름답겠냐는 것입니다. 그만큼 신중하고 시의적절한 말은 가치 있고 매력적인 장인의 작품과도 같은 것입니다. 11절의 ‘합당한 말’은 12절의 ‘슬기로운 자의 책망’과 연결이 됩니다. 즉 합당한 말은 슬기로운 책망이나 지혜로운 권면을 의미합니다. 또 지혜로운 권면은 들을 줄 아는 사람의 귀에 보석이라고 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지혜롭게 책망과 권면을 했을 때 그 권면이나 책망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기에게 아름다움이 되는 것입니다. 또 허풍과 과장이 섞인 자랑은 공허하지만 끈기 있는 말은 윗사람을 설득하게 되고 부드러운 말은 힘 있게 작용합니다(14,15).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말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사람은 사회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기에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끊임 없이 말을 합니다. 말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어떤 말은 상황에 너무도 합당한 말이어서 사람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는 정말 해서는 안될 말을 해서 분위기도 망가뜨리고 상대에게 큰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26장 22절도 보십시오.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우리는 남 말 하기를 좋아하고 험담하기를 별식처럼 하기 쉽습니다. 그러다 관계가 파괴되고 상처 주고 상처를 받습니다. 정말 말을 경우에 합당하게 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약3:2)” 했습니다.
우리가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상대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상대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 귀하게 여기는 마음,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상대를 잘 알고 상대의 말을 또한 잘 경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한 여인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셨고 사랑하는 마음,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다가가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 대해 잘 알고 계셨고 여인의 말을 또한 경청해 주셨습니다. 그럴 때 여인은 예수님께 마음을 오픈하여 자신의 목마름의 문제를 다 털어놓았고 해결함 받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예수님’이라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깊이 영접하고 마음을 활짝 열게 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제자들이나 무리들에게, 또 바리새인들에게 시의적절하게 지혜로운 책망이나 권면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예수님의 언어, 예수님의 대화법,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잘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성경 공부를 통해 예수님의 언행,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과 생각과 언행의 복음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잠언에서 말하는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할 수 있게 되고 지혜로운 권면과 책망 또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자기 마음의 제어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것도 지나치면 어떻게 됩니까? 25장 16,17절을 보십시오. “너는 꿀을 보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함으로 토할까 두려우니라.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꿀은 달고 맛있을 뿐만 아니라 피부미용에도 좋다고 그러고 기침 완화에도 좋다고 그러고 심혈관질환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고들 말합니다. 아무튼 달고 몸에도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적당히 먹어야지 과식했다가는 토하게 됩니다. 이웃집에 다니는 것도 좋은 일일 수 있습니다. 왜냐면 이웃과의 사랑의 교제는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주 다니면 이웃이 싫어할 수 있습니다. 친하다고 눈치 없는 행동하며 너무 지나치면 이웃이 귀찮게 여길 수 있고 싫어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아무리 좋은 일도 지나치면 역효과가 생김을 알고 늘 지나침을 조심하고 절제해야 합니다. 자기를 제어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말이 많은 사람은 말을 제어하는 훈련이 필요하고 오지랖이 넓고 행동이 과한 사람은 때로는 자기 절제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25장 23,24절도 보십시오. 북풍이 비를 일으킴 같이 다른 사람을 헐뜯는 말은 사람의 얼굴에 분노를 일으킵니다. 다투는 배우자와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낫습니다. 27절도 보십시오.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꿀을 많이 먹는 것은 자기의 영예를 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에게는 누군가의 위에 서고자 하고 다른 사람에게 힘이나 영향력을 끼치고자 하는 권력욕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점차 지위가 올라가고 사람들로부터 높은 사람 대접받기를 좋아하고 자신의 명예가 올라가는 영예를 구하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대접받고자 하고 인정받고자 하고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은 교회라고 해서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영예를 구하는 것은 얻고 또 얻어도 높아지고 또 높아져도 만족이 없고 끝이 없습니다. 더 올라서고 싶은 마음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더 높아지고 싶고 더 대접받고 싶고 더 높은 명성과 더 높은 영광을 얻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부패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런 영예가 인생에서 일시적인 만족을 가져다줄지는 몰라도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부질없고 다 헛될 뿐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권력욕과 명예와 부와 쾌락과 모든 것을 다 누려본 전도자(솔로몬)도 이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은 다 헛될 뿐이라고 전도서에서 고백합니다. 잠언 26장 1절은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합당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자에게는 마치 여름에 눈이 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가 오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여름에 눈이 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추수 때는 논이 마르고 햇볕을 쬐야 튼실하게 알곡이 여무는데 비가 오면 알곡이 제대로 여물지 못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재앙입니다. 어리석은 자에게 영예가 주어지는 것은 재앙이라는 소리입니다. 26장 8절도 보십시오.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으니라.” 돌을 물매에 매면 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위험하고 피해가 발생합니다. 다른 사람을 크게 다치게 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영예를 얻어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면 그 조직에 속한 사람들과 조직은 얼마나 위험하게 되겠습니까? 군대에서도 높은 영예를 가진 스타 장군 지휘관이 어리석은 자이면 불합리한 명령의 연속이고 이로 인해 사고가 발생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자는 영예가 주어져도 제대로 바르게 쓰질 못합니다.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재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잠26:3)” 했습니다. 어리석은 자에게는 막대기로 등을 때려서라도 미련함을 막아야 합니다. 폭력 징계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의 위험성에 대해 경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헛된 자기 영예를 구하는 마음을 제어하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만족과 행복이 있는 영원한 영예를 구해야 합니다.
25장 28절을 읽겠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마음은 우리의 중심이고 하나님이 가장 깊이 감찰하시는 곳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 언어, 행동 모두가 마음에서부터 비롯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무게를 달아보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주님 주시는 평강을 누릴 수도 있고 누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면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성읍이 없고 성벽이 없으면 적들이 마음대로 공격해 올 것입니다. 속수무책입니다. 컴퓨터에 백신과 방화벽이 없으면 해킹이나 바이러스에 속수무책으로 뚫리는 것처럼 우리 마음은 방어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면 온갖 죄악되고 악하고 음란한 것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이 됩니다. 마음을 제어한다는 것은 본성대로 행하지 않도록 절제하며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스스로 높이고자 하는 마음을 제어해야 하고 성급히 나서대며 다투고 남의 은밀한 일을 누설하고 싶은 마음, 남을 깎아내리며 험담하고 싶은 마음을 제어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과유불급이면 역효과가 생기므로 이것을 절제하고 제어해야 합니다. 세상 쾌락에 대한 욕망, 세상의 영예만을 추구하고자 하는 헛된 욕망을 제어해야 합니다. 이 욕망들을 제어하지 못할 때 우리 인생의 성읍이 무너지게 되고 성벽이 없는 상태처럼 되어 버립니다. 삶의 터전도 잃고 성벽도 잃은 상태가 될 정도로 원수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됩니다. 사탄마귀의 시험과 죄의 유혹에 너무나 쉽게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크게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언 4장 23절은 말씀합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사실, 생명의 근원인 우리 마음을 제어하고 지켜내기가 웬만해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음을 제어하는 것이 힘들고 매일 지는 싸움을 할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 주님의 말씀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우리 삶이 성령님과 말씀의 지배를 받을 때 우리는 넉넉히 자기 마음을 제어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욕망과 영예를 추구하는 마음을 제어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깊이를 경험하게 됩니다.
다윗은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사모하게 되었을 때 그 영적 소원이 세상 영광을 구하는 마음을 제어하고 극복하고 하나님을 향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27:4).” 사람 마음에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욕망이 강할 때 그것을 못 얻으면 불안하고 염려와 근심이 되고 때로는 두려움이 들기도 합니다.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목마름으로 방황하다가 신앙생활이 엉망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추구하게 될 때 우리 영혼은 참된 평강을 얻게 됩니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131:2).” 다윗의 이 고백처럼 엄마 품에 있는 아이의 평온함처럼 하나님 품에 안긴 평강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최근에 여O이의 카톡 프로필의 메인 사진을 보았는데 고3 기도회 집회가 갈릴리교회에서 이번 주 토요일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근데 거기 말씀강사가 제가 종종 교제하는 YWAM을 섬기는 목사님이었습니다. 평상시에 같이 밥 먹고 차 마시고 할 때는 그냥 선교단체 간사라는 생각에 격 없이 지냈는데 순간 나도 여기저기 초청받으며 대접도 받고 싶고 높임 받고 싶다는 생각이 순간 짧게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나의 세상 영광을 추구하는 마음임을 생각하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순간 나도 영혼들을 섬기는 일에 쓰임 받고 있음을 생각하고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오후에 학생 수양회를 섬기러 경주로 가야 합니다. 수양회를 준비하면서 수양관 측 실무 관계자들과의 관계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습니다. 숙소가 부족해 숙소를 구하는 문제로 많은 고민을 하며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그렇게 까칠하게 대했던 수양관 관계자들이 요즘 같은 세상에 대학생들이 이렇게 많이 모여 수양회를 한다는 것이 대단하다며 어려운 때 학생 사역을 섬기는 분들이 귀하고 존경스럽다며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또 수양관 측에서 아는 가까운 팬션 주인과 잘 조율해 주어 저렴한 가격에 숙소도 부족함 없이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학생 목자들이 수양회 말씀 강사로 세움 받았는데 광주3부 김OO 목자는 말씀 코멘트 때 눈물 콧물을 훔쳐내며 메시지를 발표했습니다. 같이 코멘트하는 스탭 목자님들도 눈물을 훔쳤습니다. 세상 영광과 대접을 구하기보다 하나님이 저에게 맡겨주시고 저에게 주신 위치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영혼들을 섬기는 것이 나에게 진정한 은혜구나하는 생각이 드니 마음에 참된 평강이 밀려왔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배우고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추구하는 삶이 진정 복된 삶임을 고백합니다. 제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기도하며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거하므로 성령님의 제어함과 다스림을 받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끊임없이 세상 영광으로 향하는 마음을 제어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고 주님의 마음을 닮고자 하는 영적 소원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힘입고 예수님을 배우므로 내면의 깨끗함과 겸손함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스스로 힘은 쉽지 않지만 날마다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고 말씀의 지배함을 받음으로 말과 마음을 제어하고 주님의 은혜와 지혜를 사모하고 추구하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