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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후기 철학, 존재자의 존재함
하이데거의 후기 철학은 전기 철학을 토대도 심화시킨 철학이면서 동시에 그 틀 자체가 바뀌어 버렸다. 먼저 하이데거 후기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필요한 몇 가지 사전 지식을 알고 가도록 하자.
퓌시스는 고대희랍 철학에서 제시된 개념으로 전체로서 있는 것 그대로의 자연을 의미하며 스스로 전개하고 드러내는 존재의 자기 ‘탈은폐’(Entbergen)적 성격이 강조된 역동적인 개념이다.퓌시스는 명사와 동사의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존재자’(Seiendes)역시 분사적 의미로 명사와 동사의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이 퓌시스 개념은 전통 형이상학에서 약간 변질되어 버린다.존재자가 ‘존재한다’는,즉 존재자가 스스로 탈은폐되어 드러내는 원초적 사태,이를 망각한 채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론적 고찰의 대상으로서 눈 앞에 존재한다’는 것으로 이해한다.즉 퓌시스의 명사적 의미인 존재자만을 강조한체,존재함(Sein)의 동사적 의미에 대해 묻지도 않고 파악하지 않았다.이로 인해 존재자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근거로서의 또 다른 존재자 최고이자 완벽한 존재자인 신적 존재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이 과정을 하이데거는 ‘존재망각의 역사’라고 말한다.
하이데거에게 사태자체 혹은 현상은 존재자들의 존재함이다.그런데 파르메니데스 이후의 전통 형이상학은 퓌시스의 자기 ‘탈은폐’(Entbergen)적 성격을 망각하고 현전(지속적으로 현존하는)의 형이상학으로 변질된다.존재가 존재자와 다르다면 존재자만을 다루는 전통 형이상학의 방법으로는 존재를 규명할 수 없다.
또 존재 망각의 역사가 함축하는 잘못된 존재이해는 인간이 인식 주체로서의 이성적 존재자라는 전통적 인간 이해와 결부되어 왔다. ‘인식하는 주체의 존재양식 혹은 존재의미’에 하이데거는 관심을 가진다.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가 인식 작용을 설명하기 전에 앞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제 후기철학의 이해를 위한 사전지식을 간단히 소개 했다.이제 제대로 후기철학에 대해 다루어 보자.
후기에 들어서 하이데거 철학의 핵심적 주제는 현존재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옮겨 가며 존재 그 자체를 설명하고자 시도한다.후기철학에서 존재란 더 이상 현존재의 실존적 성취에 따라서 달리 해석되는 것이 아니다.오히려 존재자들을 개시하면서 자신은 은닉하며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인간에게 자신을 밝힘으로써 경험된다.더 이상 인간이 주체가 되어 존재를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상대적으로 수동적으로 존재의 계시를 받게 된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우선 능동,수동의 단순 이분법으로 존재의 역할과 인간의 역할을 구분해서는 안 된다.앞선 문장에서도 말했듯이 상대적으로 수동적으로 인간의 역할이 변했다.절대 이성이 세상을 재단하듯이 인간이 존재를 파악하고 구별하지 않는다.그렇다고 마냥 인간이 존재의 계시를 받는 존재가 신이 되는 것 역시 아니다.
후기철학은 현존재의 존재구조를 분석을 실마리로 존재를 탐구하는 것 보다 어떻게 존재 자체가 서로 다른 역사적 상황 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어떻게 개시하는 가에 관심을 집중시킨다.하이데거는 각 시대마다 그 시대를 뒷받침하는 존재이해가 달라진다고 본다.존재를 드러내는 근본기분이 시대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철학의 과제는 시대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존재의 의미를 규명해 존재사적으로 각 시대의 철학적 형이상학적 성격을 밝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기본적 전제를 가지고 근대 과학기술을 비판한다.이 부분은 예시를 들어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 하기 쉽다. 근대 이후의 기술은 인간의 인위적인 틀에 맞추어 인간 욕구에 맞게 자연을 일종의 기계부품처럼 대상화시킨다.이제 세계는 자신의 본래적인 존재의미를 상실한 채 인간의 필요에 따라 획일적으로 통제해야 하는 대상으로 이해된다.하이데거는 이런 자연을 부품으로서 드러나도록 인간을 내몰아가는 현대 기술의 본질을 몰아세움(Gestell)으로 규정한다.
현대는 소위 기술적 사유에 의해 모든 것들이 규정되고 이러한 형이상학적틀에 따라 우리의 삶 역시 이해되는 기술문명의 시대이다.모든 사물은 이성의 철저한 지배를 위해 수학적으로 계산 가능하고 에너지로 변환 가능한 존재로 환원된 채 고유한 본질을 상실한다.이러한 기술적 사고는 당연히 존재자의 참된 존재의미를 드러낼 수 없고 근원적인 존재에 대한 경험 가능성을 제거한다.
후기에서는 전기에 강조된 근본기분인 ‘불안’보다 ‘경악’(Erschrecken)이라는 기분을 근본기분이라 제시한다.이때 경악은 존재자들에게서 존재가 빠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는 기분을 가르킨다.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이 동물을 사육하는 사육장에서 느낄 수 있다.현대 기술은 공장형 목장을 가능하게 했다.항생제 투여와 최소한의 공간 면적을 계산하고 빠르게 동물을 성장시킬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낸다.동물들의 존재를 망각한채 이성으로 빠르게 계산해 존재자의 본질을 상실시키게 한다.어린 청소년이나 젊은 세대들에게 소,닭,도축용 개들을 키우는 공장형 목장의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면 그들은 경악을 느낀다. (이후 세대들은 이미 적응한 경우가 많다)그래서 채식주의자로 돌아서는 경우도 많다.이들은 경악,이 느낌을 받고 동물이라는 존재자의 존재를 망각한 현실에 충격을 받는다.존재가 망각됨을 깨닫는다. 이런 사태를 벗어나기 위해 하이데거는 기술시대가 조장하는 계산적 사유로부터 벗어나 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 이 세계와 존재를 바라보자고 권한다.이를 위해 하이데거가 제시하는 방법이 바로 그대로 둠의 태도이다.이러한 대토를 통해 비로소 기술적 의지에 의해 대상화된 세계로부터 소박한 원초적인 생활세계와 이에 대한 체험에로 귀환할 수 있다. 이에 고대 그리스의 테크네(Techne)개념이 등장한다.근대 이후의 기술은 이른바 자연에 대해 무언가를 내놓기를 닦달한다는 의미에서 탈은폐적인 성격을 지닌다.그러나 퓌시스는 스스로 드러내는 존재의 자기 탈은폐적 성격을 지닌다.근대의 기술을 강제로 드러나게 하며 퓌시스는 스스로 드러나게 한다.하이데거는 테크네가 본래 존재자의 숨겨진 본질을 드러낸다는 탈은폐적인 성격을 지니며,궁극적으로 알레테이아(진리)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한다.
테크네의 과정을 통해 근대적인 기술적 사물에 대한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 ‘경악’이라는 기분은 ‘경이’라는 기분으로 전환된다. ‘경이’라는 기분은 모든 사물들이 자기의 고유한 존재와 진리를 드러내는 장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기분이다. 추가적으로 하이데거는 예술에 대해 이야기한다.예술이 존재의 은폐된 모습을 드러내는 진리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기술’(Techne)과 동일한 의미를 함축한다.실제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기술과 예술이 구분되지 않았다고 말한다.기술과 예술이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역사의 산물이며 인위적인 것이다.하나의 근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술’은 미리 주어진 법칙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공학 분야인 반면 ‘예술’은 자유로운 상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허구로서 서로 상반되는 분야로 간주된다. 예술작품이란 은폐된 삶,즉 존재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그러므로 하이데거에게 예술이란 아름답게 치장하거나 미적 쾌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은폐된 존재의 본래 모습,즉 진리를 드러내는 활동이다.
우리가 예술 작품을 보면서 일종의 맥락을 해석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밀레의 만종을 보고 우리는 농부들의 삶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저 두 남녀가 바구니에 대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사태 자체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 두 남녀의 삶의 흔적, 기운 옷과 더러운 앞치마를 보며 고단한 삶을 읽어 낼 수 있는 그런 존재 자체를 드러내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이 해석이 옳던 틀리건 상관 없다. 이렇게 사물이 아닌 사물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예술의 본지 내지 역할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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