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s://youtu.be/L15-DGYlqvg?si=pqHNSzNQ_f-Sp38r
561장 예수님의 사랑은
“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하시고”(눅 18:16)
어린이 주일에 함께 부를 수 있는 찬송으로 평안남도 중화 출생으로 해방 후 월남하여 대구대학교와 총신대학교를 졸업한 안성진(安成眞;1917~2002) 목사가 1997년 어린이날 작사하였다. 일찍부터 어린이 문화 운동에 뜻을 가지고 ‘기독교 어린이 문화관’을 세우는 등 어린이 목회에 일생을 바치며 어린이 찬송과 노래집, 아동 문학작품을 만드는데 헌신하였던 안성진 목사는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어린이 천로역정, 그림성경, 시각적 아동설교, 주일학교 설화집, 보브의 25불, 갈릴리의 아이들, 메리·크리스마스, 소년소녀 생활독본 등의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찬송 곡은 1922년 강원도에서 박창숙의 4남으로 태어난 박재훈(朴在勳;1922~2021) 목사가 1997년 작곡하였다. 그는 「한 알의 밀알」뜻의 일맥(一麥)이란 아호를 쓰기도 하였다.
보통학교를 마치고 평양으로 가서 요한학교에 입학, 장수철, 윤춘병 등과 함께 1943년 3회로 졸업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제국 고등음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곧 학도병으로 끌려나갔다가 훈련소에서 도망쳐 나와 귀국하였다. 평남 강서군 문동국민학교의 교사로 교편을 잡은 그는 이유선 교수에게 작곡법을 배웠다. 1946년 4월에 월남하여 서울 용산에 있는 금양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1946년 그동안 작곡한 동요들을 모아《일맥동요집》을 출판하였다. 그는 대광고등학교의 음악 교사로 자리를 옮긴 후 야간으로 설립한 중앙신학교에 입학하여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6・25사변 때에는 해군 정훈음악대에 복무하였으며, 전쟁 후에는 기독교방송 음악과장, 영락교회 찬양대 지휘자로 일하였다. 1955년 「박재훈 동요작곡집」과 기독교 아동문화사를 출판하였다. 1959년 미국에 유학하여 웨스트민스터 합창대학, 크리스천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귀국하여 한국교회음악협회 총무와 이사를 역임하였으며, 한국찬송가위원회 간사와 음악전문위원으로서《개편 찬송가, 1967》편집을 도왔다. 장수철 교수의 뒤를 이어서 선명회 어린이합창단을 이끌고 북미 지역을 순회 연주하기도 하였다.
1965년부터는 숭실전문대학, 장로회신학대학, 서울신학대학, 서라벌예술대학,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등의 강사로 출강하였다. 1982년 회갑을 넘긴 그는 미주 한인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84년 토론토에 큰빛 장로교회를 개척하여 섬기다가 1990년 정년 은퇴하였으며, 암 병세가 악화하여 향년 99세로 2021년 병원에서 소천했다.
1절 예수님의 사랑은 따뜻한 사랑
햇빛처럼 포근히 날 품어 주시네
잠들 때나 깰 때나 늘 지켜주시니
그의 사랑 고마워 찬송합니다.
1절, 햇볕처럼 따뜻하게 늘 품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
어느 날 예수님께서 갈릴리 어느 마을에 들어가셔서 복음을 증거 하시는데 동네 사람들이 다 몰려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때 작은 어린아이 하나가 예수님 앞으로 아장아장 걸어와서 예수님 무릎 위에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사랑스러운 눈초리로 예수님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어린아이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그것을 보고 어떤 부인이 그 아이를 잡아당기고 자기의 아이를 예수님 가슴에 슬쩍 밀어 넣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웃으시며 그 아이의 얼굴에 볼을 갖다 대셨습니다. 그 옆에 있던 젊은 부인도 안고 있던 어린아이를 예수님 품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아이를 받아 안으시고 축복하셨습니다. "하늘의 이슬 같은 신령한 복(福), 땅의 기름짐의 복, 강건한 복이 임할지어다." 그러자 모든 엄마가 자기 아이들을 예수님 무릎 위에 내려놓았습니다. 이 광경을 시종 지켜보던 제자들이 화를 내면서 "여보세요, 우리 선생님이 얼마나 피곤한 분이신데 왜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이리 귀찮게 구는 거요"(눅 18:15) 하면서 데리고 온 아이들을 물리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게 오는 아이들은 금하지 마라, 저들을 용납하라, 저들에게 복을 빌어 주라”(16절)고 말씀하셨다.
이렇듯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하나를 안아주시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했겠어요? 지금까지 이런 사랑을 받아본 일이 없었거든요...
예수님 당시에 어른들은 어린아이들을 경시하고 매우 엄하게 대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도 여자와 아이를 뺀 숫자가 사천 명이나 되었더라(마 15:38)고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린이를 안아주시고 머리까지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대통령이나 서울시장에 나올 사람도 아니면서도 말입니다. 어떻든 아이를 안아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볼을 비벼주는 행동은 아이들에게 상당히 좋은 교육방법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만 해도 배가 아프다고 하면 할머니가 어떻게 했습니까? 손자들을 무릎에 눕혀 놓고는 “할머니 손은 약손이다.” 하시면서 배를 살살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슬그머니 잠이 들고, 한잠 자고 나면 아프던 배가 깨끗이 나아서... 정말 할머니 배는 약손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사랑을 받고 자라게 되면 잘못되는 애들이 거의 없습니다. 옛날 부모님들은 그 많은 자녀를 자신이 직접 낳아 키웠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렇게 어린아이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부모들은 달라요. 애들을 영어, 컴퓨터, 피아노, 태권도 학원 등에 맡겨 버립니다. 아이들이 부모의 손길을 느껴볼 겨를이 없어요. 돈만 있으면 아이들 교육이 다 잘되는 줄 알아요. 이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그 결과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남을 배려할 줄을 모른 채,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共同體)정신이 희박한 아이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옷, 좋은 핸드폰, 좋은 신발 사주려 하지 말고 아이들에게 남을 배려하고 양보하고 사랑할 수 있는 훈련부터 시켜야 합니다. 돈 가지고, 학원에만 보내서 남의 손에 맡겨서 기르려 하지 말고, 부모의 따뜻한 가슴과 손길로 자녀들을 보듬어주는 양육훈련이 더 중요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사랑을 다른 친구들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도록 신앙으로 훈련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교육은 죽은 교육입니다.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생명교육, 신앙교육, 인격교육은 햇볕처럼 포근히 날 품어주시는 예수님의 따뜻한 사랑을 실천할 때 나타날 수 있습니다.
2절 예수님의 말씀은 참 좋은 말씀
듣고 듣고 들어도 또 새로운 말씀
샘물처럼 흐르는 한없는 말씀과
그의 사랑 고마워 찬송합니다.
2절, 듣고 들어도 또 듣고 싶은 참 좋은 예수님의 말씀
2절의 가사는 205장 ‘주 예수 크신 사랑’의 찬양에 나오는 “나 항상 듣던 말씀, 또 들려주시오”라는 가사와 반복되는 의미입니다. 사무엘상 3장 10절에 사무엘은 여호와의 음성을 세 번씩이나 듣고 그 앞에 엎드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고백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시 119:103)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귀한 말씀의 소중함을 깨닫기 위하여 벳세다 들녘에 오천 명이나 모여 예수님의 말씀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듣고 있었습니다. 날이 저물어 가자 열두 사도가 예수님께 나아와 “무리를 보내어 마을과 촌으로 들어가 먹을 것을 해결하게 하소서”(눅 9:12) 할 때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12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심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인데 너희가 어디로 가서 배부름을 해결하려 하는가?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말씀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무리에게 주시매 오천 명이 다 배불리 먹고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를 거두는 기적을 행하셨던 것입니다(눅 9:16).
예수님 안에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사야 55장 1-3절에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 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아모스 8장 11절에서는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으면 우리가 절대로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습니다. 말씀이 곧 주님이시오 주님이 곧 생명의 떡이요 모든 능력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을 보십시오. 부모를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부모가 자기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리라는 믿음 속에서 아무 걱정도 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한 끼 식사를 해결할 능력이 없으면서도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을 믿고 부모님만 의지하면서 신나게 뛰어놀며 살아갑니다. 아이들의 자신의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어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미인(美人)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이렇게 아이들은 부모를 절대적으로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절대적인 의존성, 거룩한 사모함이 아이들에게 있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여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어린아이의 믿음처럼 이런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생명의 양식으로 받아들임으로 여러분 속에 샘물처럼 솟아나는 마음의 풍요로움과 기쁨과 평화가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3절 해와 달은 하늘의 빛이 되지만
예수님은 온 세계 참 빛이랍니다.
온 세상을 밝히는 우리의 예수님
그의 사랑 고마워 찬송합니다.
3절, 온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사랑
창세기 1장 3절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빛이 임하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이 빛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물리치고 우주와 자연과 세상을 창조해 갔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이 이와 같다고 설명합니다.
요한복음 1장 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 이 땅의 상황을 한 마디로 어둠이라고 했습니다. 비록 하늘의 해와 달고 별들이 빛이 되어 세상을 비추고 있기는 하지만 창세기에서 물리적인 혼돈, 공허, 흑암이 있었다고 했던 것처럼 요한복음에는 영적인 어둠이 이 세상에 가득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영적인 어둠이 가득한 세상에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빛이 임하면서 혼돈, 공허, 흑암이 물러가고 천지가 창조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빛으로 오셔서 영적인 어둠을 물리치시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 가시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요 8:12)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십니다. 영적 어둠으로 뒤덮여 있는 이 세상을 새롭게 창조해 가고 계십니다. 더불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빛의 자녀로서 빛이신 주님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빛의 자녀로서 비추어야 할 예수의 빛은 무엇일까?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진리의 빛입니다.
그리스도의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일화입니다. 그는 본래부터 기인처럼 살았습니다. 그가 남긴 일화들이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기 힘든 것들입니다. 한 번은 대낮에 등불을 켜고 아테네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도대체 왜 밝은 대낮에 등불을 켜고 다니느냐고? 그때 디오게네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이 진리에 대해 너무 어둡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지식이 넘쳐납니다. 인터넷을 통해 하루에도 셀 수 없을 정도의 정보들이 만들어지고 유통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 천지인 바다에 마실 물이 없는 것처럼 이런 지식의 홍수 속에 진리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 땅에 믿음과 진리에 대한 어둠이 더욱 짙어져만 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세상 사람들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데 그 원인이 진리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세상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저들이 정말 참 진리를 모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기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전혀 모릅니다. "글쎄! 전생이 있고 그 뒤를 따라 윤회를 했나?" "아버지 어머니가 결혼하셔서 그 사랑의 결과로 태어났나?", "원숭이에서 진화한 결과로 생겼나?" 자신이 없습니다. 자기들이 죽어 어디로 갈 것인지도 전혀 모릅니다. "글쎄! 죽으면 다 끝나는 것 아닌가?", "다음 세상에 대시 태어나는 것 아닌가?" 잘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셔서 오늘 자기들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릅니다. 예수 믿어야 구원받고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릅니다. 이런 진리를 모르니까? 속아 사는 것입니다.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그저 오늘이라는 삶에 집착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자유를 잃어버렸고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쾌락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자아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참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둘째, 희망의 빛입니다.
빛은 살리는 것이요, 어둠은 죽이는 것입니다. 빛은 보여주는 것이요, 빛은 인도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빛이시라고 외쳤습니다. 이사야 9장 1-2절에 "전에 고통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예언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유대 지역에서 돌아와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실 때에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마 4:15-16)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빛이요,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십니다. 이 세상은 생명의 빛을 원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영원한 생명의 길을 비춰주는밝은 빛을 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 마음에 주님을 모셔 들이면 그때부터 우리 안에 빛으로 가득 차게 되어있습니다.
빛의 특징은 어두움을 밝히는 것입니다. 즉 꿈과 희망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이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에게 나아와 그분의 사랑을 받으면 그때부터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같은 은혜와 축복이 5월 5일 어린이 주일에 믿음의 가정에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말씀 관주
1절
예수님 사랑 *요 3:16,13:1,34,15:9.고후 9:14,요일 3:16
품어주시는 사랑 *사 40:11,마 23:37,눅 18:15-16,
지켜주시는 주님 *수 1:7-8,시 121:4-6,사 31:5,딤후 1:12
2절
들어도 새로운 말씀 *삼상 3:10,왕하 20:19,시 119:103,벧전 1:25
샘물 같은 말씀 *잠 14:27,사 58:11,암 8:11,요 6:35,
3절
세상을 비추는 빛 *창 1:3,사 9:1-2,요 8:12,요일 1:5-7
▶관련 찬송
그 자비하신 주님 253장
하나님은 외아들을 294장
예수 사랑하심은 563장
사랑의 하나님 귀하신 이름은 566장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568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