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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음식, 혀끝이 아닌 삶으로 느끼는 맛!
음식으로 기억하는 서울과 서울의 삶 『서울을 먹다』. 음식 기행작가 정은숙과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의 공저로, 서울음식을 만들어 파는 이들과 이 음식을 먹고 즐기는 사람들을 인터뷰하여 사람 냄새를 담아냈다. 아울러, 음식의 유래와 그 음식을 파는 식당이 한 지역에 모여 있게 된 배경을 인문학적 시각으로 통찰력 있게 바라본다. 같은 대상을 취재하되,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글을 풀어내 함께 엮은 이 책은 생생한 현장감은 물론, 사유의 재미를 함께 느끼게 만든다.
이 책은 “서울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을 살피면 서울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시작되었으며, 총 17가지의 음식을 소개한다. 설렁탕과 냉면, 홍어회, 빈대떡 등 의문을 가질만한 음식들을 통해 서울을 ‘이주민의 도시’로 정의한다. 해장국으로 유명한 음식점에서 야간통행금지가 서슬 퍼렇던 옛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고, 재개발에 밀려 거대한 빌딩의 한 구석을 간신히 차지하고 있는 골목들의 아픈 현실 역시 기록한다.
저자 황교익
1962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1980년까지 살았다. 도미, 전어, 도다리, 꼬시락, 붕장어, 뽈락, 문어, 멍게, 꽃게, 해삼, 홍합 등 해산물을 주로 먹었다. 초등학교 때 단팥빵, 쥐포, 아이스케키, 자장면을 먹었고, 중학교 때 돈가스와 비프가스를 처음 맛보았다. 혼식을 하지 않는다고 도시락을 들고 벌을 섰다. 고등학교 때 시장 골목에서 통닭, 곱창볶음, 아귀찜에 소주를 마셨다. 1980년 서울에 왔다. 그해 피자와 비엔나커피를 맛봤다. 명동에서 햄버거와 닭칼국수를 먹었다. 대학은 흑석동에 있었다. 그곳에서 돼지갈비, 삼겹살, 순대국, 냉면을 먹었다. 삼겹살과 순대국의 돼지비린내에 적응하는 데 3년이 걸렸다. 1987년부터 서울 사대문 안에서 밥을 먹었다. 점심으로 된장찌개, 김치찌개, 설렁탕 등을 먹는 데 익숙해졌다. 1990년대 초부터 회사 돈으로 지방을 돌아다니며 온갖 향토음식을 먹었다. 그때 먹은 것을 '맛따라 갈까보다'(디자인하우스, 2000)로 묶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맛 칼럼을 쓰면서 유명 식당들을 섭렵하였다. '뉴스메이커', '주간동아', '말' 등에 음식 이야기를 연재하였고 그중 일부를 묶어 '소문난 옛날 맛집'(랜덤하우스코리아, 2008)이란 책을 냈다. 2002년부터 사단법인 향토지적재산본부에서 지역 특산물의 지리적 표시 등록과 브랜드 개발 컨설팅을 하였다. 현재 네이버캐스트에 한국의 특산 먹을거리들을 연재하며, 울진대게, 지례흑돼지, 장흥김, 영광굴비, 삼천포쥐포, 청도미나리, 고흥갯장어 등등을 현지에서 맛보고 있다. 앞으로도 먹을 것이고 쓸 것이다.
들어가며_ 무엇이 서울음식인가 12
1장 서울 설렁탕
오, 소대가리 서울이여! 20
조선의 왕에게 얻어먹다 36
2장 종로 빈대떡
거기 가면 빈대떡 신사를 만날 수 있을까 48
가난도 낭만이게 하다 62
3장 신림동 순대
순대 볶는 소리가 요란해질수록 72
전라도의 이름으로 84
4장 성북동 칼국수
서울이라고 바꿀소냐, 국시는 국시다 94
골목길에 숨은 경상도의 권력 106
5장 마포 돼지갈비
대포 한 잔에 뼈에 붙은 살 한 점 118
한때 남자의 음식이었던 132
6장 신당동 떡볶이
이제 며느리도 안다 144
고삐리를 해방시키다 158
7장 용산 부대찌개
부글부글 냄비 속에 김치와 햄이 섞이고 172
전쟁과 가난을 추억하다 182
8장 장충동 족발
서울 어디에서도 장충동의 이름으로 194
체력은 국력이었던 그 시절의 보양음식 206
9장 청진동 해장국
새벽을 여는 속풀이의 맛 216
조선 장꾼의 음식이었다 232
10장 영등포 감자탕
감자탕은 ‘쏘주’다 244
뼛골 빠지는 삶 256
11장 을지로 평양냉면
이것이 백석의 국수 맛일까 268
평양이라는 이름의 맛 280
12장 오장동 함흥냉면
타향살이 매운맛을 매운 양념으로 달래다 292
함경도 아바이의 삶이 이리 질길까 304
13장 동대문 닭한마리
섬세한 일본인도 반한 터프한 한국음식 314
시장 사람들의 저렴한 보양 326
14장 신길동 홍어
홍어는 삭혀야 맛인 거라 336
날것의 전라도 348
15장 홍대 앞 일본음식
서울에 울려 퍼지는 ‘이랏샤이마세’ 358
반일과 친일 사이의 입맛 372
16장 을지로 골뱅이
한여름밤, 뒷골목의 뜨거운 건배 소리 382
동해에서 인쇄 골목으로 온 까닭은 394
17장 왕십리 곱창
다른 듯 닮은 왕십리의 곱창 맛 404
살을 못 먹는 변두리 418
나가며_ 음식이 있어 서울살이가 견딜 만했다 426
혀끝이 아닌 삶으로 맛보는 서울음식
“서울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을 살피면 서울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도서출판 따비의 신간 《서울을 먹다 - 음식으로 풀어낸 서울의 삶과 기억》의 두 저자 황교익과 정은숙은 이런 생각을 갖고 약 1년 동안 서울을 먹으러 다녔다.
서울음식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500년 조선왕조의 도읍지였으니 궁중음식이나 반가음식이 먼저 떠오르지만 두 저자가 《서울을 먹다 - 음식으로 풀어낸 서울의 삶과 기억》에서 소개하는 음식 중에 궁중음식이나 반가음식은 없다. 서울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음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저자들은 어떤 음식을 통해 어떤 서울을 발견했을까?
■ 서울은 이주민의 도시이다
저자들이 《서울을 먹다 - 음식으로 풀어낸 서울의 삶과 기억》에서 소개하는 음식은 17가지이다. 그런데 그 음식 중에는 일제강점기부터 서울 명물로 소문난 설렁탕 외에 냉면, 홍어회, 빈대떡, 부대찌개 같은 음식이 포함되어 있다. ‘저 음식들이 서울음식이라고?’ 하는 의문을 가질 만한 음식들이다. 냉면은 늘 앞에 평양이나 함흥이라는 지명을 달고 있으며, 홍어는 대표적인 남도음식으로 꼽힌다. 빈대떡도 이북이 고향이라 생각되는 음식이며, 부대찌개 하면 사람들은 으레 의정부를 떠올린다. 《서울을 먹다 - 음식으로 풀어낸 서울의 삶과 기억》의 저자들이 이런 음식들을 서울음식으로 선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2004년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의 조사에 의하면, 본인 세대부터 서울에 거주를 시작한 세대가 57.2퍼센트, 부모 세대부터 살기 시작한 세대의 비율은 33.6퍼센트라고 한다. 토박이라고 부를 만한 기준인 3대째 이상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세대는 불과 6.5퍼센트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90퍼센트가 넘는 서울 사람들이 비교적 근래에 팔도 각지에서 서울로 옮겨 온 이주민인 것이다.
서울음식에는 이런 이주민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한국전쟁으로 피난 온 이북 실향민들의 삶이 을지로 평양냉면과 오장동 함흥냉면에 스며 있다. 평양냉면 전문점인 우래옥, 을지면옥 등에 가면 연세 지긋한 실향민들 만나기가 젊은이들을 만나는 것보다 쉽다.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며, 추운 겨울밤 뜨거운 아랫목에서 먹던 어머니의 냉면 맛을 을지로에서 찾는다.
신림동에 가면 순대타운이 있다. 원래 재래시장 노점에서 시작한 순대볶음집들이 두 개의 건물에 입주하여 타운을 이룬 것이다. 이곳 순대타운에 들어가면 대부분의 간판이 전라도의 지명을 붙이고 있다. 신림동 인근에는 1960~70년대 전라도 농촌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그들은 읍내와 같았던 신림시장에서 값싼 순대볶음에 소주 한잔 하면서 낯선 서울에 적응했다. 음식을 통해 본 서울은 이주민의 도시이다.
■ 음식으로 엿보는 서울의 삶
서울음식에는 서울 사람들의 삶이 담겨 있다. 해장국으로 유명한 청진옥에는 야간통행금지가 서슬 퍼렇던 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다. 밤새 기사 쓰고 나온 광화문 일대 언론사 기자들, 철야한 노동자들, 밤새워 술을 마셔 댄 글쟁이들, 통금에 걸려 잡혀 있던 사람들, 주변 여관에서 자고 나온 사람들 그리고 밤새 클럽에서 춤을 추다 나온 고고족들이 통금이 풀리는 새벽 4시에 청진옥에서 속을 풀었다. 장충동 족발 골목은 장충체육관에 빚을 지고 있다. 이렇다 할 오락거리가 없던 시절,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레슬링 시합을 보며 김일의 박치기 한 방에 열광하던 사람들이 응원에 타는 목을 축이기 위해, 체력은 국력이던 시절의 보양을 위해 족발 골목을 찾았다. 지금 신당동 떡볶잇집은 고등학생보다 가족 손님이 더 많이 찾는다. 신당동 떡볶잇집에서 수줍은 미팅도 하고, 디제이를 보며 열광하던 ‘고삐리’들이 이제 아들딸의 손을 잡고 와 젊었던 그 시절을 추억하기 때문이다.
서울은 가난하였다. 서울음식 또한 가난이 만들어 낸 음식이다. 1970년대 좁은 작업장에서는 쉴 새 없이 미싱이 돌아갔다. 작업장으로 들이던 원단이 지게에 실려 좁은 골목 사이사이를 분주히 다니던 곳이 동대문 일대이다. 동대문에서 왕십리 쪽으로 조금 벗어나면 마치코바라고 불리던 조그만 철공소들이 밀집해 있었다. 봉제 공장에서, 철공소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저녁시간을 위로하던 음식이 곱창구이다. 살코기는 외국으로 수출해야 했던 가난한 한국의 더욱 가난한 노동자들은 소와 돼지의 부산물로 만든 음식을 먹으며 서울살이를 견뎌 냈다.
같은 시기, 현재의 동대문종합시장의 1층에는 고속버스터미널이 있었다. 동대문 일대에서 일하던 사람들, 동대문을 통해 서울로 오가던 사람들이 그 뒷골목에서 ‘닭한마리’를 먹었다. 원래는 백숙이었던 음식이 손님들이 “닭 한 마리!”라고 주문을 하면서 음식의 이름으로 굳어진 것이다. 이제 흔하디 흔한 것이 닭이지만, 가난한 시절의 보양식 닭백숙의 기억은 ‘닭한마리’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 서울과 서울의 삶을 기억하다
《서울을 먹다 - 음식으로 풀어낸 서울의 삶과 기억》에는 서울의 변화도 담겨 있다. 젊은이들은 이태원이 아닌 신촌과 홍대 거리에서 부대찌개를 먹으며, 꿀꿀이죽의 가난이 아닌 군대 간 남자친구를 그린다. 동대문의 닭한마리 골목은 일본에서는 맛볼 수 없는 이색적인 음식을 찾아온 일본 관광객들로 비좁다. 을지로 인쇄노동자들이 구멍가게에서 맥주에 곁들여 먹던 ‘대충 안주’ 골뱅이무침은 이제 회식을 즐기는 넥타이부대가 찾는 맥줏집 전문 안주가 되었다. 골목에 한 집만 있어도 냄새 난다며 원성을 듣던 홍어가, 이제는 텔레비전에서 보던 중년 탤런트도 오고 동대문에서 옷 공장 하는 젊은 사장이 꽃 같은 여직원들과 회식하러 오는 대우받는 음식이 되었다.
달가운 변화만 있는 것은 아니다. 청진옥은 통금 시절의 전성기와 밤샘 영업의 경쟁을 다 이겨 냈으나 재개발에 밀려 거대한 빌딩의 한 구석을 간신히 차지하고 있다. 노인들의 별식이자 인근 월급쟁이들의 든든한 한 끼를 해결해 주던 이문설렁탕은 10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한 2층 목조건물을 버리고 견지동 뒷골목으로 쫓겨 이전했다. 왕십리 곱창 골목은 모두 헐리어 이제는 뿔뿔이 흩어졌으며, 곱창구이를 파는 포장마차는 단속반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날품팔이 노동자부터, 인천으로 안양으로 막차를 놓친 사람들의 푸념을 받아 주던 영등포의 감자탕 골목은 이 책의 취재가 끝나자 재개발로 사라졌다. 청일집에서 빈대떡은 여전히 먹을 수 있지만, 옛 정취는 식당이 아니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찾아야 한다. 두 저자는 서울의 삶을 기억하는 골목들이 사라지는 것 역시 아프게 기록하고 있다.
■ 서로 다른 시선으로 풀어낸 서울과 서울음식
《서울을 먹다 - 음식으로 풀어낸 서울의 삶과 기억》은 음식 기행작가 정은숙과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의 공저이다. 음식 기행작가 정은숙은 서울음식을 만들어 파는 이들과 이 음식을 먹고 즐기는 사람들을 인터뷰하여 사람 냄새를 담았다.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은 음식의 유래와 그 음식을 파는 식당이 한 지역에 모여 있게 된 배경을 인문학적 통찰과 함께 제공한다. 같은 대상을 취재하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글을 풀어내 함께 엮은 이 책은 생생한 현장감과 사유의 재미를 함께 느끼게 한다. 《서울을 먹다 - 음식으로 풀어낸 서울의 삶과 기억》은 그저 ‘수도’라는 건조한 호명에 갇혀 있지 않은, 사람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서울을 발견하고자 하는 독자에게 일리一理를 제공하는 책이 될 것이다.
음식과 관련되는 서양의 격언 중에 “그 사람이 먹는 음식을 보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음식에는 그 음식을 즐겨 먹는 사람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음식이 인문학적 고찰 대상이 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생각을 서울의 음식에 적용하면, 서울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을 살피면 서울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15쪽)
냉면, 중화요리와 함께 설렁탕도 배달음식 중에 하나로 1920~30년대 근대잡지에 자주 등장한다. 모락모락 김을 내는 배달부의 설렁탕은 종로통에 사는 양반들 집으로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설렁탕을 받아들고 허연 국물을 휘휘 저어 한 방울 남김없이 해치우는 그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어찌 배달뿐이었겠는가. 초롱을 든 상노를 앞세워 설렁탕집으로 들어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알아 주지도 않는 양반 체면이 뭐 대수인고 하며 혼자서 설렁탕집을 찾는 이도 있었다. 그렇게 서민들의 설렁탕이 위로 퍼져 나간다. (30쪽)
농촌 인구의 서울 유입은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다. 농촌 경제 구조의 변화에 따라 땅을 얻지 못한 소작농이 많아졌고, 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이주한 것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조선의 농촌 사정이 일제강점기 때보다 나았다고 볼 근거가 별로 없으므로 일제 때 서울로의 이주가 조선에서보다 여러 면에서 더 쉬워졌기 때문에 늘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초기의 이주민들은 돈암동, 신당동, 아현동 등지에 진을 쳤다. 한국전쟁 이후 서울 유입 인구는 급격하게 늘어나게 되는데, 전쟁으로 파괴된 한반도에서 그래도 일자리와 먹을거리가 서울에 많을 것이라 여기고 모여든 것이었다. 청계천변을 비롯한 서울 곳곳에 판자촌이 세워졌다. 1960년대에 들어 정부는 도심의 판자촌 주민들을 서울 변두리로 밀어내었다. 이 철거민을 위한 서울 변두리 중 하나가 관악산 북쪽 사면인 신림동, 봉천동, 난곡동 일대였다. 달동네라는 이름도 이즈음에 생겼다. (85~86쪽)
혜화칼국수도, 국시집도, 술 한잔에 곁들일 수 있는 안주를 내고 있다. 두 곳 모두 경상도의 상징적인 음식인 문어숙회를 낸다. 대표안주는 좀 다르다. 국시집에 생선전이 있다면 혜화칼국수는 ‘바싹불고기’다. 양념한 불고기를 석쇠에 물기 없이 고실고실하게 구워 참깨를 뿌려 내는데, 불맛이 들어 향미가 좋고 고소하다. 좀 달달하긴 하나 소주, 막걸리, 맥주, 동동주와 두루 잘 어우러진다. 주당들은 술 한잔으로 몸을 풀어 준 후 칼국수를 먹는다. 따끈하고 부드러운 칼국수로 속을 달래는 것이다. 술과 안주로 배가 불러도 칼국수 국물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먹는 것이 공들여 육수를 낸 수고에 대한 보답이다. 그릇을 들고 국물을 쭉 들이켠다. 시원하다! (101쪽)
1974년 9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경향신문》에 연재된 신상웅의 소설 〈배회〉에는 돼지갈빗집이 자주 등장한다. 다음은 을지로6가 계림극장 맞은편에 있던 돼지갈빗집을 묘사한 장면이다. “이쪽의 주문도 없이 찢은 날파와 마늘과 고추장과 김치 등속을 이글거리는 숯불과 함께 날라 오고 이내 널따란 갈비가 치직거리며 타기 시작했다.” 단편적인 묘사지만 이곳에서 돼지갈비와 함께 차려 나온 찬으로는 찢은 날파와 마늘, 고추장, 김치뿐이며 상추는 빠져 있다. 고깃집에서 고기를 상추에 싸 먹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식습관일지도 모른다. (125쪽)
1970년대 들어서는 돼지고기 수출을 위한 대규모 양돈단지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돼지고기는 수출되었지만 다리과 머리, 내장, 피 등 그 부속물은 이 땅에 남았다. 이 부산물은 재래시장에 공급되었고, 이를 재료로 한 족발과 순대, 머릿고기 등이 한국 서민의 음식으로 제공되었다. 삼겹살이 한국인의 주요 음식이 된 까닭도 이와 비슷하다. 1980년대 들어 돼지고기가 등심과 안심 등 부분육으로 수출되면서 삼겹살이 남아돌게 되고, 그게 시장에 풀리면서 한국인의 ‘삼겹살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대부분의 세계인이 돼지고기 중에 등심과 안심을 고급 부위로 여기는 데 비해 한국인만 기름 많은 삼겹살 부위에 집착하게 된 까닭은, 슬프게도 이 고급 부위를 먹어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211쪽)
1970년대 대학 시절을 보낸 어떤 이는 청진동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통금이 있으니까 밤새도록 춤추고, 통금이 해제되는 4시에 나가는 거죠. 그때 무교동, 명동의 고고장, 호텔 나이트클럽은 통금 끝날 때까지 영업했거든요. 나오면 배도 고프고 그러니깐 청진동에서 해장국에 해장술로 소주도 한잔 하고 가는 거예요. 젊은 날의 추억이죠!” 지금이야 24시간 영업이니 해서 새벽까지 문을 여는 식당이 많지만 당시에는 꼭두새벽에 속을 풀 수 있는 식당이 흔치 않았다. 그 시절에 청진동 해장국 ?
첫댓글 황교익, 정은숙 지음 / 출판사 따비 | 2013.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