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매스컴의 정치면, 사설란에서 '평창 이후'의 한반도에서 벌어질 사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몇 개만 인용해보겠다.
['평창 이후'한반도의 自由化의 역전극을]
"이제는 '평창 후(後)'를 생각할 때다. '평창 쇼'는 조작(造作)이고 작위(作爲)였다.
잔짜 현실은 "김정은은 핵.미사일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창쇼'는 미국의 예봉을 피해보려는 김정은의 꼼수였다.
그러나 그의 뜻대로만은 되지 않을 것이다. '평창 후'엔 김정은의 핵놀음과 미국의 강경 대응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평창 후'는 그렇다면 어떤 모습으로 전개되고 전개되야 할 것인가? 이를 바라보기 위해선 근래에 있었던 두 가지 의미 있는 현상을 주목할 만하다. 하나는 NL(민족해방)운동권 권력에 대한 2030세대의 광범위한 환멸이 일어난 점이다.
네티즌 '벌레소년'의 랩송 '평창 유감' '종북의 시대' '다 올라' 가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게 그것이다.
또 하나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김정은 폭정에 대해 북한 인권. 탈북민이라는 '정신의 핵.미사일'을 꺼내든 점이다.
이 두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심각하다. ....
한반도 싸움은 대한민국 허물기와 김정은 허물기 중에서 어느 게 먼저 닥칠 것이냐의 시간 싸움이다.... [류근일 칼럼]에서.
[평창 이후 美 분노. 北 갑질 우려된다]
...언제부턴가 남북대화가 북한의 의도에 따라 열릴 수도 파탄날 수도 있는 구조가 되고 말았다.
한국 측이 오매불망 대화를 원햇던 결과다. 북한이 원하지 않는 주제에 대해서는 입도 열수 없는 구조다.
...한국 정부가 대화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애달픈 노력을 하고 있지만, 지금 같은 일방적인 구조에서
'북한의 핵포기'를 목적으로 하는 대화가 열릴 수 있겠는가? [이춘근 한국전략硏 선임연구위원]
[매티스 판단에 맡겨진 한반도의 운명]
군사협력 차원에서 지난 1월23일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매티스 미 국방장관이 "3월 말 이후 한반도 상황이
긴박하게 돌라갈 수 있다"고 귀뜸해주더라면서 당신 회사는 어떤 대비를 하고 있느냐고 묻더라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 정상 회담은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이라면서 서두르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송영무 국방장관은 '한,미 훈련재개 시기를 3월 말쯤 밝힐 것"이라며 매티스 장관과 합의한 사실을 밝힌 것은
북핵 문제를 둘러싼 미국의 기류를 제대로 읽고 대응하는 것으로 보여 안심이 된다. [김창균 컬럼]
[주한미군 가족동반 금지 說 확산, 4월 위기론 퍼지는데...]
최근 미군이 주한미군의 가족 동반 금지를 결정했다는 설(說)이 확산되고 있다. 미국이 군인의 가족 동반을
금지한다는 것은 해당 지역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는 의미다. 주한 미군은 이를 부인하고
있지만, 최근 미국에서 대북 군사행동 관련 발언이 잇따르면서 소셜미디너 등에서 '평창 올림픽 이후 4월 위기설'
등이 급속히 퍼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일엔 미 육군이 재래전 상황에 대비해 155mm 포탄과 스마트포탄
등을 전년 (前年)보다 8배난 증가한 수량을 발주할 계획이라고 미 언론이 보도했다....[유용원 군사전문 기자]
그 뿐만 아니다. 지난해에 발생한 복어잡이 배 [홍진호] 사건과 지난 18일 새벽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 된
국무조정실 정기준 경제조정실장의 죽음에 대해서도 '비트코인 북한 송금과 관련, 의문스러운 죽음'이라며
부검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높다. U Tube에서 공개한, 「홍진호에서 싣고 온 복어 포장 상태」를 보면 누구나 의심을 가질 만하다.
북한에서 겉에 '냉동 복어'라고 검은 글짜로 크게 인쇄한 카턴박스에 포장을 해서 보내준 것이다.
이런 어획물 포장 박스는 우리나라에서도 대형 트롤선을 보유한 유력 수산업체에서나 사용하지 영세수산업체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북한 영해에 침입해서 잡은 어획물은 '압수하고 선원들을 감금하거나 벌금을 물리는 것'이 정상인데
왜 짧은 기간에 이런 박스까지 만들어 포장해서 보냈을까? 그 저의가 뭔가? 하는 것이 방송 진행자들의 의혹이었다.
이제 갓데미산 이야기를 할 차례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갓데미 산은 창원 진북면과 함안 여항면 사이에 있는 서북산(西北山)을 말한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정말 전쟁이 일어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다.
나는 6.25를 고향 창원 사파정에서 겪었다. 어려서 전쟁의 기억은 없지만 들은 이야기는 많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우리 마을 뒤. 비음산 기슭에 미군 공병 1개 소대가 주둔하고 있어 흑인 병사들과 그들을 따라온 양공주들도 처음 보았다.
전쟁이 끝난 뒤라 흑인 병사들도 어린애들을 보면 인심이 좋았다.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웃으며 껌이나 초코렛, 어떨 땐
통조림 깡통을 주기도 했다. 그러면 우리는 무슨 소린지도 모르고 "올개 상추 베려놨다!" 고 소리쳤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오케이, 땡큐 베리마치!'였다.
1950년 7월 진동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우리 마을에도 미군 수색대가 들어와 마을 사람들을 거제도로 피란 가라고 했다.
그때 우리 마을에 '단발이'라는, 영어를 몇 마디 할 줄 아는 신여성이 있었다. 그 여자의 간청으로 우리 마을 사람들은
피란을 가지 않았다. 미싯가루 등 피란갈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강제로 마을에서 쫓겨나지는 않았다.
1959년~1961년 사이에 나는 아버지의 전근으로 진북국민학교에 다녔다. 지금은 패교가 됐지만 진북국민학교는 진북면
대평리에 있었다. 대평리, 이목리(梨木) 뒤편에는 서북산 줄기에 이어진 산봉이 있었다. 봄에 참꽃을 꺾으러 산에 올라가면
녹슨 철모와 악어 입이 된 인민군의 군화가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그리고 안개가 짙은 날에는 낮에도 도깨비불이 왔다갔다
했다. 귀린(鬼燐)이었다. 그만큼 인민군들의 시체가 많았던 것이다. 약 두 달간의 진동 전투로 인해 진북면에는 과부들도 많았다.
우리들 어머니들이다. 전투가 끝난 지 십 년 가까이 되었지만 밤에 학교 변소에 가면 귀신이 나온다고 했다.
북한 공산군 6사단은 중공군 출신을 기간으로하는 정예부대로 남침 초에는 옹진, 개성, 김포, 천안을 거쳐 거침없이 내려왔다.
천안에서 호남을 짓밟고 7월25일 순천을 거쳐 부산을 목적지로 하고 단숨에 달려왔다. 하동과 진주에서 급파된 미24사단 19연대와
조우, 처음으로 전투를 해 이를 격파했다. 이 하동전투에서 전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이 전사햇다.
적 7사단장 方虎山 소장(전후에 숙청 됨)은 "진주, 마산을 점령하여 부산 목을 조르겠다!"고 할 정도로 기고만장했다고 한다.
함안을 점령할 때, 6사단 장병들은 군기가 세고, 소를 잡아 먹어도 해방되면 꼭 갚는다고 군표를 주었다고 한다.
이 무렵, 유엔군측은 미국 본토로부터 증원군이 연달아 부산에 도착할 예정이엇다. 만약 방호산 부대가 먼저 부산을 점령했더라면
전쟁의 국면이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다. 「적이 부산을 먼저 점령하느냐? 유엔군 증원 부대가 먼저 상륙하느냐?」
"분초의 다툼"이 운명의 진동 전투였던 것이다.
마산 방면의 위를 직감한 워커 장군은 미8군의 유일한 예비대인 미 제 27연대와 하동전투에서 타격을 받은 미 제 24사단 19연대를
진동에 배치, 적 6사단을 방어하게 했다 적 6사단은 8월 2일 정찰 후 진동에는 유력한 전투부대가 없는 것으로 판단햇다.
적 6사단은 13연대를 주력으로 패방산을 공격케 하고 14연대는 서북산 일대에 잠입시키고, 15연대는 예비대로 후방에 배치했다.
방호산 사단장은 8월 3일 14연대로 진동리를 치고 마산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3일 아침 1개 대대로 진동리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진동리에는 미군 보병 2개 연대가 지키고 있었다. 적 1개 대대는 큰 피해를 입고 격퇴되었다.
당황한 적 14연대장은 급히 1개 대대를 차량으로 증파했으나 수송 도중에 발각되어 궤멸되고 말앗다.
이 진동리 전투는 남침 이래 불패를 자랑하던 적 6사단에 치명타를 날렸다. 그래도 적 6사단은 7천 5백 병력에 포36, 탱크 20대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윌튼 워커 미군 사령관은 8월 4일까지 재빠른 기동으로 진동, 마산 전투 전면에 미 25사단, 5연대. 제1 해병여단을 배치했다. 이때부터 적 6사단과 미군 사이에 서북산을 사이에 두고 약 두 달간의 밀고 당기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서북산은 739m로 경사가 가파로워서 올라가는데 만 3~4시간이 걸리고 보급 수단도 지게뿐이어서 적을 격멸하기 어려웠다.
적 6사단도 마찬가지로 보급이 제대로 안 돼 병사들의 체력이 한계점에 이르고 있었다. 그들은 8월 12일 진주에서 병력 2천 명을
보충받았으나 이 보충병을 경북 안동에서 강제 차출한 남한 의용군들인데다 무기도 반 밖에 소비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방호산은 8월 18일 밤 불의의 대야습을 감행했다. 이 야습은 유엔군의 총반격이 전개되는 9월 20일까지
끊잘기게 계속되었다.
9월7일부터 마산 방면의 적 공세는 눈에 띄게 둔화되기 시작햇다. 적 6사단과 7사단은 수많은 유기 시체를 남기고 퇴각했다.
시체에 달려드는 파리떼 때문에 햇빛이 가려질 정도였다고 한다. 이 때 적 제 14, 15연대장은 무모한 공격을 계속하다 둘 다 죽어
지휘계통도 마비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약 두 달 동안 서북산을 경계로 악착같이 싸우는 동안 미군들이 질릴 대로 질려서
서북산을 갓뎀마운틴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中央日報社 編 『民族의 證言』참고.
한편, 1950년 8월 23일 해병대의 통영 상륙작전을 취재하러 왔던 뉴욕헤럴드 트리뷴지의 마거릿 히긴즈 종군기자는 소련제
무기로 무장한 적군에 대항하여 적의 점령지를 탈환한 한국해병대의 전공을 '귀신잡는 해병(They might capture even the devil)'
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이후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말은 한국해병대의 영원한 별명으로 자리매김했다.
『6.25전쟁과 한국해군작전』(해군본부 간행) 에서 발췌.
첫댓글 복잡한 사연 잘몰랐다 .너처럼 사람 잘못 만나 패가망신하고 가족 해체된 순박하고 사회물정 모르는 선박생활자 많더라 용기내라. 남은 인생
본인도 마찬가지.사기꾼들은 육상에 다 있다
갓뎀산밑이 안상린 고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