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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다른 날보다 느긋하게 움직이는 날.
때로는 느림의 미학이 필요하니까요.
늦게 일어나, 느릿느릿 요기하고, 천천히 걸어 편백나무숲으로 갔어요.
물론 원고 뭉치 들고서요.
숲과 눈 맞추느라 원고는 1챕터 밖에 못 봤지요.
어제 만난 멧토끼 또 만날까 싶어 연신 두리번두리번~ 하지만 오늘은 나타나지 않았네요.
숲향기 맡으며 누워 있다 앉아 있다, 원고 보고 노래 부르고....참 좋은 시간.
12시쯤 되자, 주인장 부부가 함께 점심 먹으러 가자고 불러 서둘러 준비를 했네요.
대륜산 케이블카 타는 곳에 있는 산마루터 돌솥찰밥 정식집 - 오로지 이 메뉴만 먹을 수 있어요.
돌솥 찰밥
정갈한 밑반찬.
부글부글 청국장까지...
오랜만에 밖에서 함께 먹는 밥. 여태까지 점심은 거의 혼자 먹었거든요. 혼자서 먹는다는 것이 도시보다는 참 어렵네요.
달보드레숲 바깥주인은 숲으로, 안주인은 복지관으로 근무하러 가고
저는 다시 이곳저곳 다녀보기로 했어요.
처음 간 곳은 고정희 생가.
해남군 삼산면 출신 유명 시인이 두 분이나 되네요.
마을 전체를 벽화로 예쁘게 꾸며놓았어요.
시인 고정희 길도 있고.
죽어서 이렇게 기억해준다면 참 영광이고 좋겠어요.
43세의 나이로 요절했으니 너무 아깝긴 하네요.
특별히 관리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그래서 그런지 마루에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어요.
알고 보니 바로 옆집이 오빠네 집이라고 하네요.
겉만 보고 그냥 돌아가면 안 되고 마루에 올라가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가 봐야 한다는 글을 어디서 보았기에
낑낑대고 문을 열고 들어갔어요. 왜 그런지 잘 열리지 않더라구요.
집 안은 깨끗하고 정갈하게 잘 꾸며져 있었어요.
아마도 땅끝순례문학관에서 정리 및 관리하는 듯.
시인의 시가 적힌 엽서도 보이고.
평소 보던 책도 잘 정리되어 있었어요.
사진도 적재적소에 잘 배치되어 있네요.
시인을 꿈꾸는 사람들,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
시를 쓰는 사람들.
모두모두 오면 좋을 것 같아요.
깔끔하게 정리된 책꽂이.
시화도 배치해 놓았고.
집은 작지만, 구석구석 공간을 이용해 잘 꾸며 놓았네요.
해남군이 엄청 공을 들인 느낌입니다.
보기에도 정갈한 느낌이지요?
다시 길을 떠나 이번에는 같은 삼산면 출신 시인 김남주 생가로 출발!
포장도로에서 한참동안 꼬불꼬불 들어가는 길이어서 조금 힘들긴 했지만....
바로 잘 도착했습니다!
반독재 투쟁에 앞장선 시인 - 얼마나 삶이 힘들었을까요?
아쉬운 것은 집 어디에도 시인 김남주의 자료가 없다는 것.
시 한 편 감상하고.
뜰에 있는 나무가 참 멋집니다.
뒤의 건물은 생가, 앞의 건물은 게스트 하우스.
김남주 시인의 동생 분이 바로 같은 동네에 살고 계신다고 하네요.
두 시인의 생가를 방문하는 동안, 사람 한 명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한가한 마을.
예상했던 것보다 찾아가는 시간도 짧게 걸렸고, 관람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아 대흥사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몇 년 전에 대흥사에 와보긴 했는데 한참 공사 중이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거든요.
공사가 이제는 끝났을까, 궁금하여 대흥사에 다시 가보기로 했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 올라가는 길.
절에 도착하기 전에 멋진 건물이 있기에 들어가 보았더니 '템플스테이 체험관'이랍니다.
차 문화가 발달해서 주로 차 수업을 하는 듯해요.
한참 걸어 걸어 드디어 두륜산 대흥사 일주문 앞에 도착했어요.
일주문은 '기둥이 한 줄로 서 있는 문'이라는 뜻으로 속세의 번뇌를 말끔히 씻고 일심(一心)으로 진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상징적인 문입니다.
해남 대흥사는 백제 때 창건되었으며, 대둔사 혹은 한듬절이라고도 했으나, 근대에 대흥사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426년에 신라의 승려 정관이 세웠다는 설, 544년 고구려의 아도화상이 세웠다는 설, 신라말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설이 전하고 있습니다.
편액은 현대 서예가 여초 김응현 선생의 글씨입니다.
2018년 6월 세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해남 대흥사 부도전에는 임진왜란 이후 대흥사를 중흥시키고 크게 빛낸 고승들과 대선산, 대강백 등 54기의 부도와 27기의 탑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서산대사, 초의선사 외에 해동화엄종의 중흥조로서 존경받았던 풍담스님, 화엄의 도리가 백가에 통달했다는 월저스님, 대승경전에 통달해서 많은 저술을 후세에 남겼다는 연담스님, 문자를 떠난 참진리를 설파해서 마음의 근원을 찾도록 가르쳤다는 상월스님 등의 부도가 있습니다.
* 대흥사 유감 - 안내판들이 너무 낡아 글씨가 잘 안 보여요.
올라가는 길에 만난 나무 구멍.
문득 궁금해졌어요. 누구의 집이었을까? 어떤 동물이 이곳에서 살았을까 등등.
대흥사 해탈문
해탈문은 '불이문'이라고도 하며, '진리는 둘이 아니다'라 는 뜻의 상징적인 문으로, 부처와 중생, 생과 사, 만남과 이별 역시 그 근원은 하나라는 뜻입니다.
해탈문 외벽에는 도륜 박태석 선생이 그린 '부모은중', '염화신중', '점성가제도' 등이 주제별로 그려져 있습니다.
대흥사가 워낙 크고 넓어서 이 안내문을 잘 보고 가야 합니다.
왼쪽으로 한 바퀴 크게 돌아보려고 합니다.
연리근은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의 뿌리가 만나 합쳐진 '사랑나무'로 수령이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 입니다.
풍치에도 좋고 수령이 우수하여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습니다.
대흥사 북원 구역이 시작되는 곳.
침계루 앞의 금당천을 기준으로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구역을 말합니다.
신라 말에 조성된 응진당 삼층석탑이 있으며, 침계루, 대웅보전, 명부전, 백설당, 대향각, 청운당 등이 있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대부분 1899년 북원 일대의 화재로 소실된 것을 새로 복원한 것입니다.
침계루는 대흥사 북원의 출입문으로 맞은편에는 대웅보전이 있습니다.
주심포식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시냇가쪽은 판문을 달았습니다.
침계루는 '계곡물을 베게 삼는다' 는 이름의 누각으로 순천 송광사에도 침계루가 있습니다.
침계루 편액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입니다.
금당천을 굽이 굽이 흐르는 물처럼 몽환적으로 쓴 이광사의 안목이 잘 드러난 글씨입니다.
대웅보전의 모습
대웅보전은 해남 대흥사 북원에 자리하고 있는 중심법당입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전각이 다포계 양식의 팔작지붕 형태입니다.
1667년에 중수하였으나 1899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세웠습니다.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편액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입니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 귀양길에 대흥사에 들러 평소 친분이 있던 초의선사에게 이 편액을 보고 떼어 버리라며,
"이광사의 글씨는 심서가 아니고, 글씨의 도를 체득하지 못하고 속기가 있다"라고 비판했습니다.
귀양살이로 새롭게 눈을 뜬 추사는 귀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이 절에 들러 "이광사의 글은 부족함이 없는 명필"이라 말하고 다시 걸라고 했습니다. 이때 김정희는 이광사보다 9살 어렸습니다.
장성 백양사 대웅전에는 여기 '大雄殿' 글씨를 집자하여 사용한 똑같은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대웅보전에는 목조삼존상이 있으며, 중앙에 석가모니불, 협시로 아미타불과 약사불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석가모니불은 상체에 비해 두상이 큰 편이며, 약사불과 아미타불은 상체가 길고 갸름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불상은 모두 조선 후기에 조성된 목조불입니다.
잠시 쉬어가는 타임.
시원한 물 한 잔으로 목을 축였습니다.
삼층석탑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 자장율사께서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진신사리를 이곳에 모셨다고 합니다.
1967년 1월에 탑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동으로 만든 12cm 높이의 여래좌상 1구가 발견되었습니다.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301호)와 함께 통일신라 석탑양식이 이 지역까지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언덕을 올라 반 바퀴 도니....
대흥사 호국대성전 - 지난 번에 왔을 때는 온통 가려진 채 공사 중이었는데 지금은 이렇네요.
대흥사는 조선 후기 걸출한 승려들을 배출한 조선의 승보사찰로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이에 기여한 서산대사의 유지를 잇기 위해 호국대성전을 건립 중입니다. 내부 장엄까지 총 10년이 소요되는 대공사로 이 건물에는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민주화 운동 때 숨진 군인, 독립운동가, 열사를 비롯한 경찰, 소방관 등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모든 선열을 기리는 제단이 마련될 예정입니다.
장독과 줄줄이 매달린 메주가 장관입니다.
스님들의 공양간
대흥사가 워낙 크다 보니 뭘 제대로 본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어찌어찌 걷다보니 도착한 '표충사 구역'
표충사는 서산대사 휴정스님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으로서 대흥사가 임진왜란 이후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해지고 그 법맥을 이어왔기 때문에 선과 교의 종원으로 자부하였기에, 1788년 사액사우의 건립을 추진하여 표충사로 지정되었고, 정조대왕이 직접 '표충사'편액을 내렸습니다.
호국문을 지나 들어오면
의중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서산대사의 위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6개군의 군수가 봄·가을로 표충사에서 제사 지낼 때, 가지고 온 제물을 차리는 곳입니다.
의중당의 '의중'은 '뜻이 두텁다'라는 뜻입니다. 서산대사의 높은 뜻을 기린다는 의미입니다.
드디어 표충사를 만나게 됩니다.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팔도십육종도총섭'으로서 왜군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 휴정스님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표충사 편액은 정조대왕의 친필로 매우 힘있는 필체라고 합니다.
조사전 내부는 들여다보지 못했습니다.
조사전 내부에는 3폭의 조사 진영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진영은 창건주 아도조사를 비롯하여 대흥사 13대종사와 13대강사의 진영을 모신 3폭으로 구분되는데, 6명 1폭, 5명 2폭으로 2단 구성으로 배치하였습니다.
서산대사의 모습
우연히 눈에 띄어 가만히 살펴보았던 도깨비(?)
어디를 가든지 동화 소재로 쓸 거리가 없나 두리번 거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한참 걸어 내려와 올려다 본 대흥사 전경
소원을 빌며 돌을 쌓아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왜 돌을 쌓는 것일까요?
왜 돌을 쌓으며 소원을 비는 걸까요?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돌을 쌓았을까요?
애타는 마음, 갈구하는 마음, 간절하게 구하는 마음?
아래는 내려오는 길에 만난 동화소재감.
처음엔 천하대장군- 그는 이제 나이가 들어 아래쪽은 거의 보이지 않고 위쪽도 무너져내려갈 지경
두 번째는 나무로 만든 '금귀대장'과 '수소대장'- 귀신의 침범을 막고, 사람의 소원을 받아 천왕에게 보고하는 대장이라는 뜻. 하지만 이 대장들도 아랫부분이 썪어들어가 돌로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중.
세 번째는 단단한 돌로 만든 '금귀대장'과 '수소대장' - 표정이 아주 거만합니다. 나는 영원할 테니까....과연 그럴까요?
내려갈 때 들르려고 일부러 그냥 지나친 카페 유선.
분위기가 좋기도 하고, 달보드레숲과도 가까워 저녁 즈음 와도 좋은 카페라고 듣기는 들었지만,
오늘 처음 와 보네요.
우물도 있고요.
카페 안
메뉴판을 돌로 눌러놓은 것이 인상적입니다.
이 집에서 가장 비싼 대추차.
어찌나 녹진녹진한지 보약 한 첩 먹은 느낌입니다.
많이 걸어서 힘들었는데 피로가 싸악 사라졌습니다.
뜰 풍경이 너무 예뻐요. 봄에 오면 얼마나 예쁠까요?
카페 유선에서 바라본 유선관.(카페 직원은 한옥호텔이라고 소개를 하더군요.)
유선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관이라고 하네요.
1914년 모두 12칸 짜리 전통한옥으로 지어진 건물로 원래는 대흥사를 찾는 손님들이 묵던 객사 건물이었는데, 1960년대에 여관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곳은 임권택 감독이 즐겨 찾은 곳으로 영화 <장군의 아들>, <서편제>, <천년학> 등의 촬영지로 유명하며, <1박2일> 에도 소개되었습니다.
자, 이제 달보드레숲으로 돌아가자.
걸어나오다가 발견한 이 구조물은 무엇에 사용하는 것일까요?
이런 게 숲 가운데 몇 개씩 설치되어 있더라구요. 궁금....
오늘 걸음 수 - 7,516....오늘도 역시 느긋하지는 않았군요.ㅋ
첫댓글 고정희 시인의 그대생각중
보름 달빛 아니라 열사흘 달빛이라니...
정말 시인들이란.
좋은 시가 참 많더라구요.
두 시인 다 40대에 돌아가셔서 안타까워요.
그대 생각 넘 좋아요. 선생님은 멋진 날. 저는 해남에 여러 번 갔어도 두 시인의 생가를 못 가봤네요.
아주 외진 곳에 있어서 가기가 쉽지는 않을 듯해요. 다음에 꼭 들러보세요^^
전 대학때 김남주 시인 생가에 가서 시인 어머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옛 추억이 새록새록^^
겨울이라 그런지 한산하고 쓸쓸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