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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8월, 한때 세계 최강대국의 자리를 노렸던 독일 제국이 무너지는 동안 다른 동맹국들 또한 처참한 최후를 맞고 있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괴뢰화 이후, 프랑스와 그리스가 직접 점거한 영역을 제외한 아나톨리아는 무정부 상태에 돌입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지속해서 물자와 식량, 사람까지 약탈해갔고 영국이 보증하는 오스만 황실은 새로운 수도가 된 앙카라 주변만 겨우 지키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식량 대신 이웃집과 죽은 아이를 바꾸어 먹는 지옥도가 펼쳐진 상황에서, 영국은 ‘오스만 황실을 보호하는 것이지 오스만 제국을 보호한다고 하지는 않았다’라면서 술탄에게 언제든 망명하라고 제안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에레얼리 석탄 광산을 비롯한 아나톨리아의 천연자원을 납치한 터키인을 비롯한 이슬람교도로 채운 강제수용소를 통해 채굴했지요.
자캅카스에 파견된 카튜셰프는 이 지옥도를 언론을 통해 보도하며 반제국주의 소비에트 러시아를 홍보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독일, 러시아, 그리스까지 새로운 사상가로서 서서히 이름을 떨치는 카튜셰프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고된 일에 시달렸습니다.
프랑스와 손잡고 이탈리아의 항의를 무시해가며 아나톨리아의 ‘합병지’를 늘려가던 그리스는 광기와 열정으로 가득 찼습니다. 고도 콘스탄티노플뿐만이 아니라 서아나톨리아까지 수복한 왕정에 대한 지지율은 유례없이 90퍼센트를 넘겼고, ‘독립 때부터 그리스를 지지하는 배신하지 않는 러시아’에 대한 이미지는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와 불신을 걷어내고 그리스인들에게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신뢰도를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러시아 동지들의 도움을 환영하지만, 폭력과 대립을 거부한다’라는 성명을 발표한 그리스의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노동당의 지지율은 나날이 상승했지요. 이는 그리스와 면밀히 접촉 중인 바레츠노프의 제안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바레츠노프는 계급독재나 공화국은 이른 이야기이므로 ‘사회노동당에 대한 대중 지지를 확보해 입헌군주국을 지향할 것’을 제안하였죠.
심각한 부상의 후유증으로 인해 야전 지휘를 할 수 없게 된 무스타파 케말의 동지이자 공화주의자인 [무스타파 이스메트], 범투란주의자 [이스마일 엔베르], 이슬람 신정국가를 원하는 광신도들과 손잡은 [페브지 차크마크] 등은 외세에 대항하고 때로는 자국민에 대항해 자신들이 원하는 새로운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동분서주 중이었습니다. 물론, 곱게 표현하면 그런 것이었고 사실상 군벌 간의 내전이었죠.
아나톨리아를 면밀히 감시하던 파우코이와 GRU는 ‘추방된 튀르크인과 아제리인은 제대로 자리를 못 잡고 죽거나 영향력을 상실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아나톨리아에 친러국가가 들어설 가능성은 아직 남아있다’라는 조심스러운 긍정적인 추측을 하였죠. 군 정보기관의 수장으로써 2성 장군, 즉 중장의 계급을 받은 파우코이는 체카의 발전에 일조하였으면서 체카와 GRU를 서로 분리하는 일에 힘쓰는 묘한 상황에 부닥친 상태였습니다.
어찌 되었든, 파우코이의 조언에 따라 소비에트 러시아는 그나마 좌익에 가까운 이스메트를 지원하기로 하였습니다. 물론 이는 다른 세력과 이스메트의 세력이 서로 싸워 최대한 힘이 뺀 뒤에 이뤄질 것이었죠. 난민과 도적으로 이미 아나톨리아가 지옥이 된 이상, 굳이 나서서 이간질하지 않더라도 이들은 알아서 싸울 것이 자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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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지역의 정세는 러시아에 극히 유리하게 돌아갔습니다. 각지에서 권력을 잡은 사회주의자들은 러시아의 전례를 따라 중도 세력부터 극좌세력까지 ‘우익을 제외한 통일전선’을 구성한 공화국들이 출현하였습니다. 소비에트 러시아처럼 ‘평의회 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한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은 헝가리 공산당의 수장이자 총리와 외무장관을 겸임하는 쿤 벨러를 대표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과반을 구성하는 체제를 수립하였죠.
체코슬로바키아 지역에서는 러시아 멘셰비키와 같은 중도마르크스주의 노선의 사회민주노동당, 좌파공산주의 노선의 노동인민사회당, 민족주의-온건 개량주의 성향의 국민사회당, 농본주의 정당인 농민사회당 등 여러 개의 정당이 과도정부를 구성하고, 핀란드와 같은 사회민주주의 공화국 체제를 수립하였습니다.
‘공산당이라는 유령이 19세기에 떠돌았다, 이제는 유령의 무리가 유럽을 장악하려 한다’라며 중부유럽 사회주의 세력의 성공을 칭찬한 레닌은 ‘노동계급이 권력을 유지하려면 더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라는 쓴소리도 이어가며 이러한 타협주의적인 중부유럽 사회주의자들의 행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했습니다.
레닌의 우려는 단순히 그가 권위주의적인 지도자여서는 아니었습니다. 독일 사회주의 세력에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인사인 루돌프 힐퍼딩이 가담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의 사회주의 지도자인 [카를 레너]는 우익을 철저히 배격하는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를 비판하고 완전한 개량주의 노선으로 돌아서 자유민주주의 공화국 건설에 매진했습니다.
바레츠노프가 주프랑스 전권대표로 임명되어 프랑스의 동향을 감시하는 어려운 임무를 맡은 사이, 독일 혁명의 성공을 위해 독일에 모였던 국제 혁명가들은 요직에 위촉되었습니다. 독일어가 가능한 이디시어 화자인 우스트랼로프는 공업인민상과 농업인민상으로 공업과 농업, 즉 독일 전시경제의 총책을 맡게 되었으며, 표트로프는 독일 인민군의 총참모장으로 위촉되었습니다. 러시아 외무부위원인 카를 라데크는 폴란드인과 소르브인, 덴마크인 등을 끌어들이는 소수민족 담당으로 위촉되었죠.
독일의 상황은 대중의 지지는 좌익에, 점령지의 규모는 우익에 유리한 형세였습니다. 천이백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가 파업하는 독일 최대의 총파업은 우익 점령지를 뒤흔들었고, 사회민주당은 이러한 파업에 대해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연합군이 황급히 해상 봉쇄를 해제하며 식량 사정은 나아졌지만, 강제노동과 공출은 오히려 심해지고 있었죠.
좌익 점령지의 경우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러시아 등지를 통해 제한적으로나마 식량을 받으며 대규모 아사 사태만은 막고 있었지만, 파업과 태업만큼은 훨씬 적었습니다. 스페인 독감은 독일 전역을 휩쓸어 ‘순무의 겨울’이 ‘역병의 봄’으로 진화했다가 사라지며 엄청난 여파를 남겼지만, 총력전에 대한 공포는 독일인들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었죠.
서부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독일 주력군은 좌익에 충성을 맹세하며 라인란트 일부 지역에서 농성하는 이들을 빼면 프랑스의 라인란트 점거를 막기 위해 국경에 배치되었고 일부만이 우익의 병력으로 투입되었습니다. 이들의 사기는 무척 낮았고, 특히 독일군의 일부 장교들은 ‘이상한 선전’에 휘말려 오히려 좌익 쪽에 투신하고 있었습니다.
이 이상한 선전은 니콜라이 우스트랼로프가 이탈리아에서 퍼뜨리는 파시즘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자본주의의 타락이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한 세계대전을 일으켰다’라며 얼핏 좌익과 유사한 엉터리 주장을 하는 이 극우 인사들은 민족주의 대중은 자본가가 아닌 노동자의 편에 설 것이라며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서로 호환되는 것이라 주장하였습니다.
독일공산당의 당원인 [하인리히 라우펜베르크]와 자유군단 소속이었지만 좌익에 투신한 [에른스트 룀], [그레고어 슈트라서] 등이 이러한 주장을 이어갔죠. 특히 슈트라서는 우익의 간첩이었던 자신의 부관 [하인리히 힘러]에 의한 암살 시도까지 겪으면서도 좌익을 지지했습니다.
물론 걱정거리 또한 많았습니다. 카를 라데크가 이들의 입장을 러시아에 전달하자 레닌은 이러한 극우 반자본주의 세력의 주장을 ‘헛소리’라고 일축하였습니다. 하지만 극우 정당이면서 좌익에 가담한 독일노동당(Deutsche Arbeiterpartei)은 정치권에서는 소수였지만 민족주의자들을 영입하는 축으로서 점점 더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었죠.
이들은 점점 더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받아들이며, 단순한 극우가 아닌 좌도 우도 아닌 민족주의 우익과 사회주의 좌익의 장점만을 결합한 ‘왼쪽에서 뻗어나간 제3의 위치’로 자신들을 불러달라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자유주의, 의회주의, 자본주의, 독일 민족의 정체성을 파괴하고 타락하는 모든 서구적 이념에 의해 지배받는 피압박민족이오! 독일의 자본주의자들은 더 많은 무기를 팔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고, 지주와 귀족들은 사회민주당이 의석을 늘리는 것을 보고 전쟁을 일으켰소. 그리고 전황이 나빠지자, 좌익에 모든 오물을 뒤집어씌우고 도망갔소.
그렇소! 우리는 전선에서 패해서 전쟁에서 진 게 아니오! 우리는 등 뒤에 칼을 찔려서 패한 것이오, 지주에게, 자본가에게 찔려서! 그리고 보시오. 지금 노동자와 농민을 탄압하던 지배계급은 프랑스와 영국에게 독일 민족의 분열될 수 없는 영토를, 독일 제국Reich의 영토를 팔아넘기고 있소. 이런 모습을 보고도 동무들은 사회주의를 적대하는 것이오?
깨어나시오! 일어나시오! 독일 민족은 오직 사회주의를 통해서만 새로이 일어날 수 있소. 젊은 독일로서 새로 태어날 수 있소. 그리고 그런 뒤에야, 독일을 억압하고 탄압했던 모든 제국주의자를 상대로 이전에 없었던 총력전을 벌여 총체적이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고 제국Reich을 완성할 것이오! 독일 제국 만세!”
[아우구스트 비닝]이라는 사회민주당원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배후 중상설’이라는 새로운 합리화 논리까지 가져왔습니다. 대전쟁이 발발한 이유는 사회민주당이 1913년 독일 제국의회 선거에서 제1당이 되자, 정권을 넘겨주기 싫었던 지주와 자본가들이 전쟁을 선택했다는 논리였습니다. 전황이 나빠지자 좌익에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뒤로 물러난 이들을 크게 비난한 비닝은 ‘노동자와 농민을 탄압하던 지주와 자본가가 용감히 싸우던 제국 병사들의 등 뒤를 찌르려 했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독일 제국이든 임시 공화정부든, 좌익이든 우익이든 아직 임시 정전선언을 제외하면 협상국과 정식으로 휴전조약이 맺어지지 않았기에 대전쟁의 향방을 어찌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병사들에게 비닝의 주장은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사회주의만이 분열될 수 없는 혈통이 단일한 독일 민족을 구원할 수 있다는 비닝의 논리는 민족주의 대중에 급격히 퍼졌습니다.
반협상국, 반자본주의, 민족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졌던 일부 장교단은 이들의 주장에 혹해 좌익에 투신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쿠르트 폰 하머슈타인에크보르트] 남작은 소령이었음에도 ‘지지 선언’을 한 장교들의 서명이 담긴 문서와 함께 좌익에 투신했습니다. 지지 선언 명단은 독일 좌익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사회민주당이 임시 사령관으로 점찍었던 [발터 라인하르트] 대령을 비롯해 [오토 하세] 중령 등 기존 독일군의 반동주의 지휘부에 비해 좀 더 개혁적인 성향을 보였던 인사들이 목록에 들어가 있었으니까요. 특히 이들은 휘하 병력과 함께 좌익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좌익으로서는 갑작스레 병력이 늘어나는 수혜인 셈이었죠.
라데크와 우스트랼로프는 격론 끝에 이들을 명예직이자 자문직으로써 임명하고 대대적인 선전용으로 써먹자고 결정하였습니다. 하머슈타인 소령은 계급이 일시 폐지된 독일 인민군의 최고사령관으로써 임명되었습니다. 군령권은 총참모장인 표트로프에게, 군정권은 [에른스트 텔만] 국방인민상에게 있었기에 실권은 전혀 없는 자리였죠.
다른 인사들 또한 최고사령부 회의의 고문으로 위촉되었습니다. 이는 우익에 대단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하머슈타인은 독일 우익의 군부를 이끄는 총사령관 발터 폰 뤼트비츠의 사위였으니까요.
1. 좌익은 우크라이나에서와 마찬가지로 융커와 지주가 소작농을 핍박하는 체제를 영구히 해체하고 '혁명 기간 동안' 농민의 토지소유를 인정할 것이다.
2. 선거에서 승리한 좌익이 곧 민심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좌익에게 의탁하는 지주들에게는 '3-7제'(지주 3, 소작농 7)의 농작물 분배만 받아들이면 '혁명 기간 동안' 기존의 권리와 재산을 인정할 것이다.
3. 좌익에게 의탁한 지주가 토지 개혁에 동조할 경우, 좌익 반군에서 발행하는 '혁명 기간 동안 효력이 있는 전시 채권'을 통한 유상 몰수, 무상 분배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4. 이러한 관대한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 융커와 지주는 모든 독일 농민의 적이며, 농민의 가장 큰 적이므로 모든 농민은 분연히 일어나 지주들을 타도해야 할 것이다.
5. 좌익은 자신의 권리를 위해 맞서 싸우는 농민에게 무기와 탄약을 지급할 것이다.
이어 좌익이 발표하고 배포한 토지개혁안은 농지 몰수나 집단농장 같은 개념을 완전히 배격하고 3-7제와 같은 과도기적 정책으로 이루어져 농민들을 포섭하는 데 이용되었습니다. 미제, 독일제 개인화기의 설계도를 공짜로 얻은 체코슬로바키아의 국방 인사들은 후하게 책정된 독일 좌익의 채권을 대금으로 받고 각종 자동화기를 생산해 독일에 ‘판매’하였습니다.
특히, 핀란드에서의 경험을 살려 대거 독일 좌익 측에 제공된 산탄총은 미군과의 전투로 악몽을 겪었던 자유군단 소속자들에게 트라우마를 재발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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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독일 혁명의 향방에 신경이 쏠려 있는 사이, 폴란드는 예상치 못한 한 방을 준비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로부터 독립한 폴란드-우크라이나계 국가인 갈리치아-로도메리아 공화국과의 통일 협상이 부결되자, 1919년 8월 28일 폴란드 왕국군이 국경을 넘어 갈리치아-로도메리아를 전격적으로 침공한 것이었습니다.
경악한 영국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개입 여지를 차단하기 위해 갈리치아 정부 측에 폴란드와 국가 대 국가로 연합을 맺고 자치권을 보장하라는 전언을 보냈지만, 갈리치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러시아에 의탁하였고, 전쟁 발발 3일 만에 갈리치아-로도메리아의 대표단이 모스크바로 찾아와 원조를 요청했습니다. 갈리치아를 독립 보장해주고 폴란드의 공격을 막아달라는 직접적인 부탁이었죠.
주영대사 레오니트 크라신은 ‘영국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폴란드는 미쳐 돌아간다’라는 소식을 모스크바에 전했습니다. 과연 크라신의 말이 맞았습니다. 갈리치아를 공격하기 위해 남하하던 폴란드군이 루블린 근처에서 폴란드-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어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국경을 경비하던 국경수비대와 충돌한 것이었죠
국경수비대는 불법적 월경에 항의하는 방송을 했지만, 폴란드군은 박격포를 발사하고 기관총을 퍼부었습니다. 경악한 피우수트스키가 모스크바에 사태 해결을 위해 연락을 할 즈음에는 황급히 증원을 온 노농적군과 폴란드군 사이에 일대 교전이 벌어져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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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폴란드야. 그러니까 뇌절좀 작작하지 그랬냐.
원작에선 소비에트의 압승이었는데 과연 여기선...?
독일 내 선전과 투표 간 빈공간에 이런 스토리가 ㄷㄷ
폴란드의 뇌절은 세계 제일(…)
진행을 위해 희생된 폴란드에 묵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