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양이 질 무렵의 블타바 강변은 마치 로맨틱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낭만적이다.
“어느 날 아침, 악몽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Gregor Samsa)는 자신이 흉측한 벌레 한 마리로 변해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소설 <변신(變身)>의 강렬한 첫 문장이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애쓰던 청년 그레고르는 하루아침에 좁은 방안에 갇히는 신세로 전락한다. 가족이지만 가족이 아닌 상태. 결국 철저히 소외된채 처절한 죽음을 맞게 되고, 남은 가족은 족쇄처럼 옭아매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음에 안도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문장을 곱씹을수록 씁쓸하고 비감한 여운이 맴돈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그레고르처럼 살아가는 동시에 그의 가족처럼 잔인하게 굴기도 한다. 불안한 현대인의 삶에 그의 작품은 여전히 뜨거운 울림을 전한다. 올해는 프란츠 카프카 탄생 140주년이 되는 해다. 프란츠 카프카를, 그리고 그의 삶이 투영된 소설을 이해하려면 출발선은 언제나 체코 프라하다.
오랜 세월을 간직한 앤티크한 분위기가 매력적인 프라하의 구시가.
화약탑은 14세기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과거 프라하 시가지의 관문으로, 보헤미안 왕이 즉위하면 이 문을 통해 시가지로 입성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던 시절에는 화약을 보관했기 때문에 '화약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내부에 보헤미아를 주제로 한 스테인드글라스와 전망대가 있다.
신성 로마 제국 룩셈부르크 왕조 2대 황제 카를 4세(Karl IV) 동상
신시가지를 대표하는 긴 대로의 바츨라프 광장(Wenceslas Square)
국립 박물관 앞에는 체코인들이 수호성인으로 여기는 성 바츨라프의 기마상이 서 있으며 이에 바츨라프 광장의 명칭이 유래되었다. 기마상 앞쪽은 1968년 ‘프라하의 봄’이 좌절되고 1969년 소련군의 침공에 맞서 학생이었던 얀 팔라크가 분신 자살을 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얀 후스 동상(Jan Hus Monument)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에서 ‘소원의 벽’으로 알려진 얀 후스의 기념비
성 바츨라프(바츨라프 1세 Vaclav I, 907-929) 기마상. 아래의 왼쪽이 성녀 루드밀라(St. Ludmilla of Bohemia).
체코 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세워지면서 현재까지 프라하성의 구왕궁 일부는 대통령관저로 이용되고 있다.
프라하성 정문의 독특한 동상이 거인족 타이탄을 제압하는 신들의 조각상이 양쪽 문 기둥 위에 서 있다.
프라하 성의 구시가지 구석구석을 다니는 명물 중 하나 프라하 트램.
프라하(Prague)는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카프카가 없는 프라하는 모차르트가 없는 잘츠부르크와 같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프라하는 프란츠 카프카의 도시다. 모차르트, 베토벤, 드보르자크, 슈베르트, 릴케, 리스트 등 시대를 풍미한 수없이 많은 예술가가 이 도시를 스쳐갔지만, 이곳에서 나고자란 카프카에게 프라하는 어머니와 같은 도시다. 그의 삶의 궤적이 모두 이곳에 남아있다. 베를린을 방문했던 시기를 제외하면 그는 일생 프라하 구시가 반경을 벗어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간절히 프라하에서 벗어나길 소망했음에도 말이다. “프라하는 나를 자유롭게 놓아주지 않는다. 발톱을 가지고 있는, 어머니 같은 고향 땅이여!” 일기장에 토로한 그의 진짜 속내다. 프라하는 그에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불안정한 경계인임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독일어를 모국어로 썼고 유대인이었으나 유대교 신앙은 없던 그였다. 체코 태생의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그는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았고, 방황하고 고뇌했다. 이런 삶의 조건이 후대에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라 평가받은 소설을 탄생시킨 밑거름이 됐을지언정, 그는 41년이라는 짧은 생에 동안 내내 고독한 불안의 그림자를 지고 살았다.
폐결핵이 악화돼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요양원에서 숨을 거둔 카프카는 프라하에 묻혔다. 구시가 광장에서 트램으로 20분 남짓 걸리는 도심 외곽의 유대인묘지(New Jewish Cemetery)는 한적한 공원을 연상시킨다. 10월의 프라하는 완연한 가을빛으로 물들었다. 덕분에 묘비 사이를 걷는 동안 스산함보다는 가을 냄새 물씬 풍기는 고요한 공원을 산책하는 기분이다. 안내 팻말이 없었더라면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의 묘비를 그대로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팬들이 남기고간 꽃송이만 이곳이 여전히 추모의 공간임을 말 해준다. 비록 평생 애증의 대상이던 부모와 함께 잠들었지만, 그가 보헤미안 소설가로 우뚝 설 수 있도록 조력한 막스 브로트의 흔적도 이곳에 남아 있 다. 카프카는 숨을 거두기 전 자신의 원고를 불태워달라는 유언을 브로트에게 남겼다. 카프카의 천재적 재능을 잘 아는 브로트는 그의 유언을 지키지 않았고, <성(Das Schloß)>, <심판(Der Prozess)>, <아메리카(Amerika)> 등 자칫 불쏘시개로 사라질 뻔한 카프카의 대표작은 무사히 세상에 진가를 드러낼 수 있었다.
프라하의 심장을 걷다 보면
불행 중 다행이라면, 역사적 내홍을 숱하게 겪은 프라하는 모진 풍파를 꿋꿋이 이겨내고 살아남았다. 중세시대 유럽의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구시가는 유럽건축의 변천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박물관과 다름없다. 뾰족한 첨탑이 인상적인 고딕양식부터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등 시대별 건축양식이 구시가 광장을 에워싸고 있다. 특히 구시청사(Staromestska Radnice) 탑에는 한눈에도 복잡해 보이는 천문시계(Prazsky orloj)가 존재감을 발한다. 시곗바늘이 정시를 가리킬 때 마다 여행객은 일제히 고개를 들어 예수의 12사도가 등장하기를 기다린다. 구시가 광장은 밤이 되면 금빛천지가 된다. 마치 도시가 지닌 아픔을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 화려하게 빛난다. 10월은 그 화려함이 배가되는 달이다. 체코에서 가장 큰 이벤트이자 빛축제인 ‘시그널 페스티벌(Signal Festival)’ 에서는 역사적 건축물을 캔버스 삼아 LED 조명과 레이저, 3D 홀로그램 같은 첨단디지털기술을 활용한 화려한 디지털퍼포먼스가 펼쳐진다. 올해는 10월 12일~15일에 열리는데, ‘생태계와 그의 탐험’이란 주제로 프라하의 밤을 수놓는다.
황금빛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구시청사 천문시계탑. 구시가 광장은 프라하 여행의 핵심 코스다.
따스한 가을볕이 내리쬐는 노천카페의 여유로운 한때.
구시가에 위치한 유대인 구역의 이정표 역할을 하는 프란츠 카프카 동상
/ 구 시가 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크바드리오(OC Quadrio) 쇼핑센터 입구의 조각상 ‘카프카의 움직이는 두상’.
구시가 광장에서 두슈니(Dušní) 거리를 걷다 보면 거대한 카프카 동상과 마주친다. 여기서부터 유대인 구역이 시작된다. 조각상은 머리와 양손이 없는 양복상의를 걸친 거인의 어깨 위에 목말을탄 카프카를 표현하고 있다. 구 시가 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크바드리오(OC Quadrio) 쇼핑센터 입구에도 유명한 조각상 ‘카프카의 움직이는 두상’이 자리한다. 서로 다르게 움직이는 하얀 강철판 42개가 시시각각 변화하며 찰나처럼 그의 얼굴을 형상화했다 이내 갈라진다. 우울과 고뇌로 복잡했을 그의 심경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카프카가 즐겨찾던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카페를 방문하는 것도 프라하에서 누리는 잊지 못할 경험이다. 커피 한 잔을 두고 토론에 열을 올리던 카페 루브르(Cafe Louvre)와 카페 슬라비아(Cafe Slavia)는 카프카뿐 아니라 당대 프라하 지식인과 예술인의 아지트였다. 특히 슬라비아는 블타바강과 프라하성이 보이는 창가 자리가 인기다. 음식 맛을 기대하기보다는 분위기를 감상하는데 의의를 둔다면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 성 얀 네포무츠키(존 네포묵)[Sv. Jan Nepomucký(St. John Neopmuk)]
체코에서 가장 존경받는 가톨릭 성인으로 1380년 성 비트 성당의 제단 성직자를 지낸 뒤 1383~1387년 이탈리아 파도바에서 교회법을 공부하고 프라하로 돌아와 1389년 프라하 대주교 대리를 거친 후 1390년 성 하벨 교회의 본당 신부가 되었다. 3년 뒤인 1393년 3월 20일 바츨라프 4세 왕(카를 4세의 아들)에 의해서 암살당하게 되는데 암살당한 이유로는 두 가지의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바츨라프 4세 왕은 전쟁으로 성을 자주 비웠는데, 이때에 왕비가 호위병과 바람이 나 임신을 하게 되었다. 왕비가 그 죄책감을 못이겨 얀 네포무츠키 신부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하였는데 그 이야기가 바츨라프 4세의 귀에도 흘러들어가게 되고, 왕은 얀 네포무츠키 신부를 추궁하여 왕비의 고해성사 내용을 밝히려 하였다. 하지만 신부가 끝까지 사실에 대해 입을 열지 않자 왕은 신부의 혀를 자르고 돌을 매달아 카를교 위에서 블타바 강으로 내던졌다. 그 일이 있은 이후 나라에는 좋지 않은 일들이 벌어졌다. 그러던 어느날 블타바 강 위로 5개의 별이 뜨고 그 별들이 떠 있는 곳에 얀 네포무츠키 신부의 시신이 떠올랐고, 그의 시체를 건져내어 성당에 안치하자 좋지 않았던 일들은 점점 사라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온 나라에 퍼져 나가면서 국민들은 점점 그를 숭배하게 되었고 1729년 얀 네포무츠키 신부는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십자가를 안고 머리엔 다섯 개의 별이 떠있는 형상으로 다리를 지키는 수호 성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얀 네포무츠키 신부의 성상은 카를교 위 30개의 성상들 가운데 가장 오래됐으며 유일하게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다리의 수호신답게 카를교 위에서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다리에서도 얀 네포무츠키 성인상을 자주 만나볼 수 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바츨라프 4세 왕 시대에 대교황청이 프라하에 있었는데 왕과 교황청이 끊임없는 분쟁으로 격돌하게 되자 왕이 대주교를 잡아들이려 하는데, 도망간 대주교 대신 대주교 대리였던 얀 네포무츠키 신부만 붙잡혀 고문을 당했다. 고문을 받던 중 죽은 얀 네포무츠키 신부는 블타바 강으로 던져졌고 그후 30년 후인 1729년 종교적인 희생양이었던 얀 네포무츠키 신부를 얀 네포무츠키 성인으로 추대하였다고 한다. 이 두 가지의 이야기 중 후자 쪽의 이야기가 좀 더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얀 네포무츠키(Jan Nepomucký) 성인이 순교를 당했던 카를교의 30분의 석상 중 17번과 19번 사이에 얀 네포무츠키 신부가 가슴에 십자가를 들고 머리 위로 별이 뜬 모습으로 누워 있는 부조물과 성인의 동상 아래도 얀 네포무츠키 성인의 이야기를 담은 두 개의 동판이 있다. 사람들의 손이 타서 반짝이는 동판들 중 오른쪽 동판을 보면 카를교에서 순교를 당하는 얀 네포무츠키 신부의 모습(손가락만하게 작은 모습) 얀 네포무츠키 신부의 별을 만졌던 왼손으로 동판을 만지면서 소원을 빌는 관광객들이 많았다.
단풍처럼 붉게 물든 하늘과 카를교. 어둠이 짙어질수록 다리 위 악사들의 연주는 한층 유려해진다.
말라 스트라나에 위치한 카프카 박물관. 입구를 지나자마자
두 남자가 호수에 소변을 보는 청동 분수상이 눈에 띄는데 체코의 조각가 다비드 체르니의 작품이다.
카프카를 좇아 카를교를 건너 프라하성으로
프라하는 낭만적이다. 이 명제가 성립할 수 있는 충분조건은 프라하의 유일한 보행자 전용 다리이자 체코에서 가장 처음 만들어진 석조 다리 '카를교(Charles Bridge)'와 프라 하성(Prague Castle)이 있어서다. 특히 황금빛으로 물든 카를교와 프라하성의 야경은 눈부 시게 아름답다. 구시가와 프라하성을 잇는 카를교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중세 건축의 걸작이다. 500m 남짓의 다리 난간에는 성상 30개가 다리를 수 호하듯 양쪽으로 도열해 있다. 이 가운데 머리 뒤로 황금별 5개가 장식된 성 요한 네포무츠키 동상이 유명하다. 그 앞에서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전설 덕분인지 간절한 염원을 담은 손길이 더해져 유독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다. 문득 카프카도 카를교를 지나며 이 동상 앞에서 소원을 빌었을지 궁금해진 다. 만약 소원을 빌었다면 부디 이뤄졌기를.
카를교에서 프라하성으로 향하기 전 꼭 들러야 할 곳이 말라 스트라나(Malá Strana)다. 프라하성의 아랫동네쯤 되겠다. 골목마다 유서깊은 여행지가 잔뜩 모여있는데, 그 가운데 카프카 박물관도 자리한다. 프라하에서 카프카의 흔적을 가장 풍성하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파스텔톤의 산뜻한 외관과 달리 내부는 카프카의 내면세계를 암시하듯 어둡고 다소 우울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의 성장 배경부터 소설까지 자세히 안내돼 있어, 카프카에 관한 배경지식을 어느정도 숙지한 상태라면 관람내내 몰입도가 남다르다. 그가 수기로 작성한 작품의 초안과 편지, 내밀한 속내를 써 내려간 일기와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특히 그의 모든 초판 원고와 <변신>의 자필 원고를 볼 수 있어 팬들을 황홀케한다. 박물관을 나와 소설 <성>의 모티프가된 프라하성으로 향한다. 121계단으로 이뤄진 ‘오래된 성 계단(Old Castle Stairs)’은 아름다운 시가의 풍경을 곁눈질하며 프라하 성으로 오를 수 있는 추천 코스다. 계단을 오르다 보면 프라하성의 샛길 전망대가 위치한 후문에 당도한다. 인파가 몰리는 정문은 보안 검색 대기 줄이 기니 후문을 이용하는 편이 낫다. 유럽의 성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답게 프라하성은 볼거리가 많지만, 핵심은 황금 소로(Golden Lane)와 성 비투스 대성당이다. 황금 소로는 길이 100m 남짓의 아기자기한 골목으로, 성에서 일하던 하인과 병사, 금세공사가 모여 살던 구역이다. 20세기 들어서는 체코의 작가와 예술가가 몰려들었는데, 카프카도 그랬다.
황금 소로 22번지, 하늘색으로 칠해진 이곳은 카프카가 작품 세계에 몰두하던 작업실이자 아버지 간섭에서 벗어난 해방구였다. 원래는 막내 여동생의 집으로, 카프카는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저녁이면 이곳에 와서 글을 썼다. 협소한 공간이지만 그에겐 더없이 자유로운 세계였으리라. 현재는 카프카 관련서적과 엽서를 파는 작은서점으로 운영된다. 프라하성 깊숙한 곳에 자리한 성 비투스 대성당은 600년에 걸친 완공 역사가 말해주듯 압도적인 오라를 내뿜는다. 성당 내부는 온몸을 전율케하는 진귀한 볼거리로 가득하다. 당대 최고의 조각가가 완성한 제단, 보석과 도금으로 장식한 경당, 성인의 생애를 표현한 성화는 그야말로 숭고함 그 자체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이 압권인데, 특히 체코의 국민화가 알폰스 무하의 ‘성 치릴로와 성 메토디 오’는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인상적이다.
프라하성으로 향하는 ‘오래된 성 계단’을 걸으며 오렌지빛 지붕이 펼쳐진 프라하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오라를 내뿜는 성 비투스 대성당.
해질 무렵 자연스레 발길은 다시 카를교로 향한다. 유유히 흐르는 블타바 강물 위로 붉은 노을이 내려앉자, 거리 악사들의 연주는 한층 유려해진다. 프라하가 있었기에 카프카가 존재할 수 있었고, 그의 흔적이 남았기에 프라하는 여전히 추앙받는 도시가 아닐는지 짐짓 헤아려본 시간이었다.
변신(Die Verwandlung)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책 표지/
카프카 (Franz Kafka) 독일의 단편 소설 작가/
성(Das Schloss) 프란츠 카프카의 후기 작품, 초판 표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는 체코(당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의 작가. 독일어로 작품을 썼으며, 환상적인 작품세계를 보였다. 사후 출판된 소설 가운데 특히 〈심판 Der Prozess〉(1925)·〈성 Das Schloss〉(1926) 등은 20세기 인간의 불안과 소외를 그린 작품으로 유명하다.
중산층 유대인 가정에서 상인이었던 헤르만 카프카와 율리에 뢰비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카프카는 죽을 때까지 맏이로서의 역할을 의식하며 살았다. 가족 가운데 그와 제일 가까웠던 사람은 세 여동생 중 막내인 오틀라였다. 카프카는 영적이고 이지적이며 경건하고 유대의 율법을 열심히 배우고, 기벽(奇癖)이 있는 괴짜들이며, 감성적인 기질에다 육체적·정신적으로 섬세함을 지닌 어머니쪽 혈통과 강한 일체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특별히 어머니와 가까웠던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헌신하는 단순한 여인으로, 위압적이고 화를 잘 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고된 사업을 거들면서, 또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아무 이익도 없고 건강을 해칠지도 모르는 글쓰기에 몰두하는 것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카프카는 부모의 몰이해 속에 '몽상적인 내면생활'을 기록해갔다. 아버지의 형상은 카프카의 존재뿐만 아니라 작품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던졌으며, 사실 그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 유형으로 등장하고 있다. 물질적인 성공과 사회적인 출세 외에는 숭배할 것이 없는, 이 거칠고 실질적이며 오만한 상점주인이자 가부장인 아버지는 카프카의 상상 속에서 거인족의 일원으로, 무시무시하고 감탄스럽기는 하지만 혐오스러운 폭군으로 등장한다.
1919년에 쓴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Brief an den Vater〉는 자서전에 대한 매우 중요한 시도였는데, 실제 주소로 부친 편지는 결코 아니었다. 여기서 카프카는 그의 내면에 자신이 무능하다는 생각을 주입시켜준 위압적인 아버지 덕분에, 아버지에게 묶인 끈을 잘라버리고 스스로 결혼하여 자신 또한 한 아버지가 되는 평범한 삶에 실패하여 문학으로 도피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아버지가 자신의 삶의 의지를 꺾어버렸다고 느꼈으며, 이런 아버지와의 갈등을 직접 반영한 작품이 〈판결 Das Urteil〉(1916)이다. 사람을 현혹할 정도로 맑고 간결한 산문으로 씌어진 카프카의 소설들은 압도적인 힘과의 절망적인 투쟁을 그리고 있는데, 미지의 힘은 〈심판〉에서처럼 희생자를 짓궂게 괴롭히며 심문하기도 하고 〈성〉에서처럼 그것을 인정받기 위해 추구하고 갈망하지만 허사로 만든다.
그렇지만 카프카의 불안과 절망의 뿌리는 그가 성인이 되어 더욱 가까이 지내고자 했던 아버지와 가족과의 관계에 있지 않았다. 그의 절망의 원천은 그가 아끼던 친구들, 사랑한 여인들, 싫어한 직업, 살아간 사회 등이 모든 인간존재와 그가 진정한 불멸의 존재라고 생각한 신과 진정한 친교를 맺지 못한 채 궁극적으로 고립되어 있다는 의식에 있었다.
아버지는 자칭 동화된 유대인이었지만 유대인 공동체의 예배와 의례를 마지못해 지킬 뿐이었으므로 카프카는 언어면에서나 문화면에서나 독일인이었다.
소심하고 죄의식을 지닌 온순한 소년이었던 그는 초등학교에서도 학구적인 엘리트를 양성하는 규율이 엄격한 고등학교인 알트슈테터 슈타츠 김나지움에서도 모범생이었다. 교사들은 그를 높이 평가하고 좋아했다. 그렇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이 권위주의적인 제도와 기계적인 암기식 학습, 고전어들을 강조하면서 인문과학을 비인간화시키는 교과과정에 대한 반란이 일고 있었다.
카프카가 기성사회에 대해 명백한 적대감을 표명한 것은 청년이 되어 자신을 사회주의자·무신론자라고 선언했을 때였다. 성인이 되자 줄곧 한정적이긴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공감을 표시했고, 제1차 세계대전 전에는 체크 무정부주의자 회합에 참석했으며 말년에는 사회주의화된 시오니즘에 뚜렷한 관심과 공감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본질적으로는 수동적이었고 정치적으로는 방관적인 자세를 고수했다.
유대인이기에 프라하의 독일인 사회에서 고립되어 있었고, 현대 지식인이기에 유대의 유산으로부터도 소외되어 있었다. 체크의 정치적·문화적 열망에 공감했지만 독일 문화에 동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공감은 억눌린 채 드러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사회적 고립과 근거 상실로 카프카는 일생 동안 개인적으로 불행하게 지냈다. 그렇지만 그는 프라하에 있는 일부 독일계 유대 지식인·문학자 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1902년 막스 브로트를 만나게 되었다. 바로 이 이류 문학예술가가 카프카의 친구들 중 가장 가깝고 그를 염려해주는 친구가 되었다. 결국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의 글을 장려하고 구제하고 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영향력 있는 전기작가로 부상했다. 이 두 사람이 알게 된 것은 카프카가 프라하대학교에서 별 관심 없이 법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1906년 박사학위를 받고 1907년 한 보험회사에 상근하기 시작했는데, 이 일반보험회사의 긴 근무시간과 엄격한 요구사항들 때문에 카프카는 글쓰기에 몰두할 수 없었다. 1908년 프라하의 보헤미아 왕국 노동자 상해보험회사라는 준(準)국가기관에서 일자리를 찾았고, 폐병으로 중간에 병가를 얻어야 했던 1917년까지 그곳에 머물다가 마침내 죽기 2년 전인 1922년 연금을 받으며 은퇴했다. 이 직장에서 그는 일에 열성적으로 매달렸으며 사장도 그의 능력을 인정해주었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그를 좋아했다.
사실 카프카는 간명하고 지적이며 유머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낮에는 일상적인 회사 일을 해야 했고 그때문에 주로 밤에만 글을 쓸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는 고된 이중생활을 극도로 괴로운 고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에게는 보다 내밀한 내면의 사적 관계들이 노이로제를 일으킬 만큼 혼란스러웠다.
그의 열등감과 모순된 성격에서 비롯된 갈등의 성향은 성적 관계에서도 표출되었다. 그의 금욕적 태도는 펠리체 바우어와의 관계를 고통스럽게 방해했는데 그녀와 2번이나 약혼했다가 결국 1917년 헤어지게 되었다. 나중의 밀레나 예젠스카 폴라크에 대한 사랑도 역시 장애에 부딪혔다. 건강이 나빠진데다 회사 일이 그를 기진맥진하게 했다. 1917년 폐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그때부터 자주 요양원 신세를 져야 했다.
1923년 카프카는 아버지의 가부장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글쓰기에 전념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갔다. 여기서 사회주의자인 젊은 유대 여성 도라 디만트와의 우정으로 삶의 용기를 얻었지만 1924년 겨울에 결정적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베를린 체류는 짧은 기간으로 끝났다. 도라 디만트와 함께 프라하에 잠시 머물렀다가 빈 근처의 한 요양원에서 죽었다.
카프카의 작품은 전위문학을 주도하던 출판업자들의 요청으로 카프카는 마지못해 생전에 쓴 글 가운데 일부를 출판했다. 여기에 속하는 것이 〈어느 투쟁의 묘사 Beschreibung eines Kampfes〉(1936)에 수록된 2편의 소설(1909)과 단편 산문집 〈고찰 Betrachtung〉(1913), 성숙된 예술가의 면모를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1912년에 씌어진 장편 〈판결〉·〈변신 Die Verwandlung〉(1915)·〈유형지에서 In der Strafkolonie〉(1919)와 단편집 〈시골의사 Ein Landarzt〉(1919)이다. 간결하고 투명한 문체의 특성을 보여주는 4편의 후기 소설집 〈굶주린 예술가 Ein Hungerkünstler〉(1924)는 출판을 준비했으나 사후에야 발행되었다.
실제로 카프카는 자신의 작품에 불안을 느껴 죽기 전에 미발표 원고들을 전부 폐기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유언 집행자였던 막스 브로트는 소설 〈심판〉·〈성〉·〈아메리카 Amerika〉를 각각 1925, 1926, 1927년에 출판했다. 단편집 〈만리장성을 쌓을 때 Beim Bau der chinesischen Mauer〉는 1931년 출판되었다. 1904년경에 쓰기 시작한 〈어느 투쟁의 묘사〉·〈고찰〉 등과 같은 초기작품은 후기작품보다 양식면에서 구체적인 표현법을 쓰고 구조면에서 더 부조리하지만 그래도 특유의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에 실패하는 작중인물들은 정상적·일상적인 논리를 비웃는 은폐된 논리를 따르며, 그들의 세계는 괴기하고 폭력적인 사건이 벌어지면서 밖으로 분출해나온다. 등장인물들은 헛되이 세상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구하고 자신의 정체성과 목적을 믿고자 방법을 묻는 고뇌의 대변자에 지나지 않았다.
카프카의 많은 우화들은 정상적인 것과 환상적인 것이 종잡을 수 없이 불가해하게 뒤섞인 혼합물이다. 그러나 때때로 기묘함은 문학적 또는 표현장치의 소산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를테면 병리상태의 기만성에 현실의 지위가 부여되거나, 일상적인 발언의 은유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판결(The Trial)〉에서는 아들이 추호의 의심도 없이 늙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자살하며, 〈변신〉에서는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기괴하고 흉칙한 벌레로 변해 있음을 발견한 아들이 가족의 수치감과 무시뿐만 아니라 자책 어린 절망감으로 인해 서서히 죽어간다.
더욱 불가해한 이야기들도 많다.〈유형지에서〉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장교는 자신의 의무에 헌신적임을 과시하려고 스스로를 고문도구로 무시무시하게 절단하는(분석적으로 묘사됨) 조처를 받아들인다. 맡은 임무의 모호한 가치와 그 임무에의 기괴한 헌신이라는 이 주제들은 카프카가 항상 열중하여 다루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로, 〈굶주린 예술가〉에서 다시 등장한다.
나중에 〈심판〉에 삽입된 이야기 〈법 앞에서 Vor dem Gesetz〉(1914)는 접근하기 어려운 의미(법)와 그것에 대한 인간의 끈질긴 열망을 보여준다. 카프카의 생애 마지막 시기인 1923~24년에 씌어진 글들은 모두 이해와 평정을 얻기 위한 개인의 허영심, 그러나 굽히지 않는 투지에 집중되어 있다.
단편소설에 나타난 많은 주제들은 장편소설에서도 등장한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의 주인공인 소년 카를 로스만은 가족에 의해 미국으로 보내지는데, 거기서 아버지와 같은 유형의 많은 인물들과 은신처를 찾고자 애쓰지만 그의 순진성과 단순성으로 인해 어디서나 이용당하며, 마지막 장의 묘사에 따르면 꿈의 세계인 '오클라호마의 자연극장'에서 일자리를 얻게 된다. 카프카는 로스만이 궁극적으로 파멸하게 되리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심판〉에 나오는 능력 있고 양심적인 은행원이자 독신자인 요제프 K.는 그를 체포하러 온 사람에 의해 잠이 깬다.
치안판사의 법정에서 행해지는 심문은 환멸스러운 어릿광대극으로 바뀌고 그가 체포된 혐의는 결코 설명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법정은 더이상의 발의권을 갖지 못하지만, 요제프 K.는 스스로 접근할 수 없는 법정을 찾아 그가 알지도 못하는 죄로부터 무죄 석방을 받기 위해 전념한다. 그는 중재자들에게 호소해보지만 그들의 충고와 설명은 오히려 새로운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터무니없는 책략을 써보기도 하지만 더럽고 어둡고 음탕한 결과만을 초래했다.
한 성당에서 쉬고 있을 때, 어떤 신부가 나타나 결백성을 주장한 것 자체가 죄의 표지이며 그가 억지로 찾아나서게 된 정의의 문은 영원히 열리지 않으리라고 말한다. 결국 그가 여전히 주위에 도움을 청하면서 최후까지 저항하지만 결국 형이 집행되는 것으로 이 소설은 마감된다. 카프카의 가장 암울한 작품으로, 악은 도처에 있으며 무죄 석방이나 구제는 얻을 수 없는 것이고 광란의 노력은 다만 인간의 현실적인 무능을 가리킬 뿐임을 보여준다.
카프카의 후기작품 가운데 하나인 〈성(Das Schloss)〉의 무대는 어떤 성의 지배를 받는 조그마한 촌락이다. 이곳의 겨울 풍경 속에서 시간은 흡사 정지해버린 것 같고 거의 모든 장면은 어둠 속에서 벌어진다. K.는 성 당국이 임명한 측량기사라고 주장하며 마을에 도착하지만, 마을 관리들은 그의 주장을 물리친다. 이 소설은 K.가 성으로부터 다시 인정받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성에 있는 사람, 그럴 권한이 있는 사람은 요제프 K.(〈심판〉의 주인공)의 법정만큼이나 접근하기 어렵다.
그러나 K.는 희생자가 아니라 공격자로서, 하찮고 거만한 관리들과 그들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마을사람들 모두에게 도전한다. 그렇지만 그의 책략은 모두 실패한다. 요제프 K.처럼 그 역시 하녀와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술집 여급 프리다는 그가 그녀를 단순히 이용하는 것뿐임을 알게 되자 그를 떠난다. 브로트의 말에 따르면 카프카는 K.가 온갖 노력 끝에 탈진하게 되지만 임종의 자리에서 그 마을에 머물러도 좋다는 허락의 통지를 받게 할 의향이었다고 한다.
이 소설에서는 새로운 요소들이 보인다. 이 작품은 비극적이지만 황량하지는 않고, 대부분 카프카의 인물들이 역할자에 불과하지만 프리다는 확고한 개성을 지니며 냉정하고 사실적인 성격으로 나타난다. 프리다를 통해 K.는 해결의 실마리를 조금이나마 통찰하게 되며, 그가 애정을 갖고 그녀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고독감을 뚫고 나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카프카의 작품은 단편이건 장편이건 모두 풍부한 해석을 야기시켰다. 브로트와 카프카의 영어 번역자인 뮤어 부부(윌라와 에드윈)는 카프카의 소설들을 성총의 상징으로 보았고, 실존주의자들은 카프카의 죄와 절망의 세계를 진정한 실존을 건설할 토대로 간주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노이로제 증세를 보일 정도로 아버지에게 얽혀 있는 상황을 그의 작품의 핵심으로 보았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 비판, 권력자와 그 대리인의 비인간성, 정상적인 일상 밑에 웅크리고 숨어 있는 폭력과 야만성을 강조했다.
〈심판〉에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마구잡이 관료주의에 대한 공포를 통해 카프카가 풍부한 상상력으로 전체주의를 예견했음을 발견해낸 사람들도 있고, 초현실주의자들은 부조리의 끊임없는 침투를 보며 기뻐하기도 했다. 이런 각각의 해석들의 타당한 증거를 작품이나 일기에서 찾아낼 수는 있으나, 카프카의 작품 전체는 이 모든 것을 넘어선다. 어떤 비평가가 그의 작품들이 '열린 비유'로서 결코 그 최종적 의미를 매듭지을 수 없다고 평한 것은 이 점을 가장 정확히 표현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카프카의 작품에도 한계는 있다.
각 작품마다 절망적으로, 그러나 항상 내면에서 의미와 안정, 자기 가치와 목적 의미를 추구하면서 정신과 육체 양쪽으로 고통받는 인간이 등장한다. 카프카 자신은 글쓰기와 그것이 뜻하는 창작활동을 '구제'의 수단으로, '기도의 형식'으로 생각했고, 이를 통해 세상과 화해할 수 있거나 세상에 대한 부정적 경험을 넘어설 수 있으리라 여겼다. 투명하게 묘사되었지만 불가해하게 어두운 그의 작품들은 카프카 자신의 개인적 노력이 허사였음을 폭로한다. 무력한 인물들과 그들에게 닥치는 기이한 사건들을 통해 작가는 20세기 세상 속의 불안과 소외를 폭넓게 암시하는 매혹적인 상징주의를 이룩했다.
죽을 무렵 카프카가 사귄 문학인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카프카는 막스 브로트에게 출판되지 않은 원고는 전부 없애고 이미 인쇄되어 나온 작품은 재판 발행을 중지해달라고 유언했는데, 브로트가 그의 유언대로 했더라면 카프카의 이름과 작품은 살아남지 않았을 것이다. 브로트는 유언과는 반대의 길을 밟았고, 그로 인해 카프카의 이름과 작품이 사후에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그의 명성은 처음 히틀러 점령시 프랑스와 영어 사용국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카프카의 세 누이동생이 강제수용소에 유배되어 살해된 것이 바로 그때였다. 그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재발견되어 독일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이후였고, 1960년대에는 공산 체코슬로바키아의 지식인·문학계·정치계까지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체코 공화국(Czech Republic)는 유럽 중부에 있는 내륙국. 수도는 프라하(Praha)이며 화폐는 체코 코루나이다. 국민의 대다수가 체코인이며 국어는 체코어이다. 1918∼92년 보헤미아·모라비아·슬로바키아와 더불어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을 이루었다가 1993년 1월 1일 분리, 독립했다. 보건위생 상태가 양호하며 모든 교육은 국가의 책임하에 무상으로 실시된다.
국장의 의미: 세 영역으로 이루어진 체코 왕조는 체코 국장의 세 문장으로 대변된다. 두 개의 꼬리를 가진 사자 2마리는 보헤미아를, 붉은색과 흰색 체크무늬의 독수리는 모라비아를, 은색 초승달 문장을 지닌 검은 독수리는 실레시아를 상징한다. 사자는 구 체코슬로바키아 국장에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프라하(Praha)는 체코의 수도이다. 19세기에 제조업 분야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체코의 경제를 주도하는 도시가 되었다. 주요공업은 중·정밀기계 제조업과 프라하 맥주를 비롯한 식품류 및 전자·화학제품 제조업이다. 블타바 강이 프라하 중앙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른다. 강의 서쪽과 동쪽 모두 역사적 기념물들이 많으며 프라하 궁은 강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도시 전체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세워진 스바티이르지 교회부터 신고전주의 양식인 국립박물관까지 갖가지 양식으로 세워진 건축물 유산이 풍부하다. 문화의 도시로도 유명하여 프라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다. 프라하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로는 프란츠 카프카,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이 있다.
카프카(Kafka)(1991) 영화. 1919년 1차대전 이후 피폐해진 독일을 배경으로 실존인물 카프카가 주인공이지만 줄거리는 카프카의 소설들의 모티브로 꾸민 허구의 내용이다. 난해한 예술영화같으면서도 살해당한 동료가 남긴 증거와 여러가지로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소설가이자 당시 보험회사원 프란츠 카프카가 벌이는 일이 주요 줄거리.
흑백영화로 만들어졌으나, 카프카가 '성'에 들어와 활동하는 부분은 컬러로 나온다. 연출을 맡은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은 제러미 아이언스 배우야말로 카프카에 어울린다고 캐스팅했는데 꽤 평은 괜찮았다. 당시 아이언스 나이는 40대 초반이지만, 영화 배경이 1919년 카프카 나이가 30대 후반을 넘어갈 시대이니 그렇게 큰 차이도 없었다. 반지의 제왕에서 노년의 골목쟁이네 빌보로 나온 이안 홈이 여기선 악역 무르나우 박사를 연기했다. 그외 출연진으로는 알렉 기네스, 조엘 그레이, 아민 뮬러 스탈 등이 있다.
[참고문한 및 출처: 글과 사진: 《KB 국민은행 GOLD &WISE, 2023년 10월호, 글: 이은혜(자유기고가)》, 《Daum, Naver 지식백과》|이영일∙고앵자, 생명과학 사진작가∙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