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진통일론이 판치던 상황에서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 선생이 과감하게 제기하신 “평화통일
론”은 오늘날 햇볕 정책에 이르기까지 남한 양심 세력의 통일에 대한 고민과 실천의 큰 방향을
이어놓은 원형으로서, 그 이전의 여운형 선생의 “좌우합작론”까지 연결하여 냉전시대를 관통하
는 대들보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1. 학살이라는 것
선생의 약력 소개가 아니라 “학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아시아의 20세기는 “학살의 세기” 였습니다. 학살 한번씩 겪지 않은 나라가 더 드물 겁니다. 인
구 밀집지역인 아시아인지라 그 규모도 상상을 초월합니다. 65년 인도네시아 학살의 경우, 6개
월간 1백만명이 학살 당합니다(이 숫자는 전 부통령 하비비의 입에서 나온 것으로 가장 보수적
인 평가입니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의 숫자도 몇 백만을 헤아립니다. 쏴죽일 총알이 부족하
여 죽창으로 찌르고, 커다란 작두에 5명씩 목을 집어넣고, 등등의 사진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
니다.
살아남은 사람은 어떻게 그 짐을 지고 살아갈까요 제주 4.3 학살의 한 장면입니다. 토벌대는 한
마을의 주민들 – 이들은 대부분 혈연과 친척 관계로 얽혀 있습니다 – 에게 죽창을 나누어주고
두 명씩 마주보고 서로 찌르도록 시킵니다. 남경 대학살의 한 장면입니다. 가정집에 들어선 일본
군은 아들에게 어머니를 강간하라고 총을 들이댑니다. 거부하는 경우엔 목을 잘라서 끓는 물에
집어넣고 가족들에게 그 국물을 마시라고 강요합니다. 가스실에 몰아넣고 독가스로 “처리”해버
린 나찌는 “cool”한 축에 들지 모릅니다.
20세기 아시아의 양민 학살은 지배자들이 민중들을 길들이기 위해 그들의 “영혼에 가한 테러”였
습니다. 남경 대학살을 “강간(The Rape of Nanking)”이라고 부르는 것은 비유가 아닌 적확한
표현입니다. 살아남은 남경 주민들 중에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
이 부지기수였다고 합니다. 상상하기 힘든 참상을 눈앞에서 본 이들의 영혼은 방울뱀에 홀린 토
끼처럼 질리고 움추러들고 차라리 잊어버리는 방법으로 이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 수 있을까요. 인간 영혼의 상처가 그렇게 쉽게 치유가 될까요.
빠블로프 개 마냥 길들여져서 “빨갱이”라는 말만 나오면 공포에 질려 차렷 자세로 돌아가던 우리
들의 모습은 무엇이을까요. 광주 때의 악몽에 시달리면서 인생이 파탄난 시민군들 또 공수부대
원 아저씨들의 인생은 무엇이었을까요.
인간 개인에게 전생으로부터 내려오는 업(業)과 장(障)이 있듯이, 민족이라는 집단적 정신사에
도 업과 장이 있습니다. 제국주의와 냉전이라는 정치적 이유로 주눅들고 생질려버린 20세기 아
시아 민중들의 집단적 영혼에 쌓인 이 어마어마한 업장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소멸이 될까요. 다
시 용기와 생명을 되찾고 집단적 영혼을 스스로 치유하는 함성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러했던 20세기를 어쩌면 서양 사람들은 기껏 냉정하게 “극단의 시대”라는 말로 부를 지 모르지
만, 우리 아시아의 민중들은 20세기를 “학살의 시대”라고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2. 분단과 학살
38선을 베고 누운 여운형 김구라는 거인들을 간단히 암살로 처리해버린 분단 세력은 드디어 그
들만의 정권을 1948년 수립하게 됩니다. 고목이 아닌 생나무가지를 꺾으려면 나무의 비명소리
를 짓누르며 아주 주리를 틀도록 덤벼들어야 하는 법입니다. 몇 천년 동안 한덩이로 살아오던 민
족을 갈라내는 일에 저항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 저항을 짓누르고 그 억지스런 분단 정권이 남북에 안착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6.25였습
니다. 거시적으로 보자면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이었겠지만, 우리 민족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해
방 전쟁”도 아닌, “자유 수호”도 아닌, 그냥 “학살”이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전쟁
은, 이미 48년부터 시작된 제주도 4.3 학살, 여순 반란 학살, 전쟁 도중의 거창 양민 학살, 보도
연맹 학살 등등 민중들에 대한 학살의 일부요 연장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학살의 원인이자 또 결과로 공고화된 남한 국가의 성격은 “법과 주먹”이 구별되지 않
는, 한마디로 “싹쓸이 국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숱한 학살의 몇 개의 단편만 음미해봅니
다.
1. 대부분 죽창 밖에 없던 소수의 “빨치산”들을 잡는다고 30만 중 8만의 도민을 학살한 제주도
4.3 사건은, 압도적으로 우월한 장비를 가진 미군정청과 경찰 – 당시의 경무국장은 조병옥(趙丙
玉)입니다 – 의 무리한 “초토화 작전”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즉, 활동 기지가 될 수 있는 민가
를 모조리 쑥밭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 작전의 비인간성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것이었고,
분단 정권 안착에 혈안이 된 이승만은 48년 11월 5일 여순 사건과 관련하여 “철저하게 조사하여
남녀아동일지라도 모조리 제거하라”는 담화를 발표합니다.
2. 잘 알려진대로, 북한군이 서울로 들어오자 이승만은 “시민들은 서울을 사수하라”는 녹음을 방
송하고서 피난길에 오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서있던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여 숱한 인명을 살상
하고 서울 시민들의 발을 묶어버립니다. 그런데 서울 수복후 돌아온 이승만 정권과 소위 “도강
파”들은 되레 그 때문에 서울에 남을 수 밖에 없던 “잔류파”들을 공산당의 앞잡이로 몰아 대대적
인 탄압을 벌입니다.
3. 전쟁이 터지자 국방부는 “국민 방위군”으로 장정들 수십만을 소집하여 경상도의 훈련장으로
이동시키는데, 전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보급 물자 모두를 국방부 장관 이하의 정부 인사
들이 착복해버립니다. 그 결과 완전히 해골의 몰골이 되어 가는 곳곳마다 “떼거지”라는 한국말
을 낳기도 한 이 대열에서 수만의 아사자가 발생합니다. 공산군이나 국방군의 총칼도 아니고 그
냥 권력의 부패가 “굶겨 죽인” 어처구니 없는 “학살”입니다.
4. 전쟁 전에 이승만 정권은, 좌익 활동의 전례가 있는 사람들을 다시 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취지
의 “보도(普導) 연맹”이라는 것을 만들고, 정부의 발표를 믿은 수 많은 좌익 활동 전력자들이 자
발적으로 여기에 참여하여 전국적으로 3십만명의 크기에 달합니다. 그런데 전쟁이 터지자 국방
군은 이들이 인민군의 앞잡이가 될 것이라는 이유로 후퇴하는 지역마다 그 보도 연맹에 이름이
오른 자들을 처단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 결과 경찰과 군에 의해 학살당한 이 보도 연맹원
의 숫자는 10만에 육박합니다.
5. 전쟁 직후 이승만 세력은 자신들의 집권 연장을 위해 “개헌”을 시도합니다. 개헌 정족수에 1
석 부족으로 개헌안이 부결되자, 정족수 3분의 2의 소숫점을 버리고 계산한다는 저 유명한 “사사
오입 개헌”의 궤변을 동원합니다.
이 학살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였던 자들이 일제시대 친일 전력자들이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
다. “반공”이라는 이름만 외치면 누구든 애국자로 돌변하는 세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안착된 남한의 지배 권력의 성격이, 옛날 친일파로부터 내려오는 지주, 자본가, 지
식 계층 등 소수의 특권층들이 권력에 붙어 전쟁 통에 그야말로 모든 부와 권력을 긁어모으는
“싹쓸이 국가” 였다는 것도 놀랄 것이 없습니다. 자유당 정권에 “빽”만 있으면 아무나 각종 특권
과 산업 시설을 불하받아 재벌로 전환하는 “노다지”시대였습니다. 농촌으로 가면 일껀 시작된 토
지 개혁은 결국 이 지주 세력이 여야를 모두 잡은 권력 아래에서 다시 농민들에게 모든 부담을
씌우는 방향으로 후퇴하고, 거기에 덧붙여 군경 관계자나 지방 관리들은 “산골 대통령”으로 군림
하면서 각종의 가렴주구를 멋대로 행합니다. 목불인견의 참상까지 내몰린 당시의 농촌 정황에
도 불구하고, 53년 충남에서처럼 “4만 5천석의 구호 양곡”이 특권층의 착복으로 증발해버리는
일이 도처에서 벌어집니다.
이 “싹쓸이 국가”에 대해 민중들이 저항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미 숱한 학살을 보면서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만도 못하게 되는” 일을 수도 없이 본 민중들은 겹질리고 주눅든, 일종의 영혼
의 테러 상태에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3. “피해 대중은 뭉쳐라!” – 평화통일, 사회 민주주의, 대중 운동
1899년 경기도 강화군의 어느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죽산 조봉암 선생은 일제 치하 상
해, 모스크바를 오가는 공산주의 활동가로 이름을 날린 바 있습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소련의
지령에 따라 이러저리 흔들리는 공산당에 염증”을 느끼고 “자본 독재와 공산 독재 모두를 거부하
고 민족 통일 국가를 건설하자”는 주장을 내세우며 공산주의자에서 민족적 진보주의자로 전향합
니다. 선생의 노선은 당시 여운형 김규식의 “좌우합작 운동”과 내용적으로는 일치하는 것이었으
나, 좌익과 우익 모두에서 불신을 얻어 조직적으로는 계속 소외되는 역경을 겪습니다. 결국 좌파
적인 정치 노선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단독 정권에 참여하여 농림부 장관과 국회 부의장을 역임
하는 등의 곡예와 변신까지 감수해가면서 정치적 생명을 유지해 갑니다.
하지만 위에서 본 것과 같은, 전쟁 후 분단된 남한 사회의 참상을 보면서 선생은 드디어 독자적
정치 노선을 제기하고 적극적인 활동에 들어갑니다. 그 속에서 선생이 내걸었던 정치 노선은 다
음의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으며, 이는 우리가 전편에 보았던 여운형의 “좌우합작 운동”의 기본
노선의 뚜렷한 계승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평화 통일론
이승만은 물론 “야당”이었던 민국당의 통일 노선도 압도적으로 “북진 통일론”이었습니다. 54년
11월 4일에는 아예 국회 차원에서 [남북협상 중립배격 결의안]을 채택하고, 11월 11일에는 “북
한에서 공산군을 철퇴시키고 유엔감시하에 선거”를 한다는 북진통일론을 국시로 천명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56년 5.15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 대통령 후보가 공약 10장의 첫째로 내건 다
음의 주장은 실로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남북한에 걸쳐 조국의 통일을 저지하고 동족상잔의 유혈극의 재발을 꾀하는 극좌극우의 불순세
력을 억제하고 진보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국련(UN-옮긴이) 보장하의 민주방식에 의한
평화적 통일을 성취한다”
이러한 선생의 입장의 기본이 되는 인식은 한반도가 미소 강대국이라는 외세의 대리 각축장이
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첫째 두 강대국 모두가 한반도에서
일정한 거리로 떨어지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등거리” 외교 전략, 두 번째 그렇게 외세와 결탁하
여 한반도 민중의 생존을 위협하는 국내 세력들을 철저하게 외세와 단절시키기 위한 “민족 자주”
의 두 측면을 가집니다.
전쟁 전인 1947년 선생은 “조선은 미군정이나 소련군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비소비미
(非蘇非美)”라는 “등거리 외교”의 정신을 내세워 미군정의 분노를 산 적도 있었습니다. 또 그가
공산당과 절연하게 된 가장 큰 이유도 “공산당이 소련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쟁 후의 남한에서 그러한 주장을 대놓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대신 한반도를 둘러
싼 외세와의 접점을 유엔 전체로 통일시키자는 주장의 형식을 띠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유엔 감시하의 선거라는 것의 모범적 사례로 선생이 든 것도 모스크바 삼상회의나 미
소 공동위원회 등의 “좌우합작” 시절의 경험이었습니다. 진보당은 제한된 상황에서나마 끈질기
게 비미비소 중립의 입장을 내세웠고, 평화적 민주적 선거를 통해 수립될 통일 정부는 영세 중립
국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선생이 가졌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는 56년 대통령 선거의 두 번
째 공약에 나오는 “집단 안보 체제를 통한 군비 경감”, “호혜 평등주의에 입각한 선린 정책”에서
도 잘 보여지는 바 입니다.
또한, 이는 냉전이라는 비극에서 민족을 빼내기는커녕 거기에 오히려 부화뇌동하려는 국내의 우
익 세력에 맞서 민족 자주의 입장으로 대응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당시 북진 통일론자들의 핵전
쟁, 냉전, 통일에 대한 인식을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이승만은 54년 미국회의사당에
서 소련을 때려잡으려면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최선이라고 선동하였고, 핵무기의 사용이야말로
그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조병옥은 아예 1960년이라는 시한을 정해놓고, 그 안에 미국으
로 하여금 한반도에서 “3차 세계 대전”을 시작하도록 전력을 다해 설득하자고 주장하는 것입니
다.
북진통일론은 광기였다고 밖에 할 수 없으며, 그 광기로 인한 결과는 고스란히 “피해 대중”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민중들이 붙잡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명분과 깃발은 “민족
자주”뿐이며, 이것이 바로 선생이 받아 안아 내걸었던 깃발이었습니다. 선생은 현재의 분단 상태
는 어느 이념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민족 주체성이 약했던 결과임을 강조하고, “우리 민족이
통일을 절규하여 그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힘차게 싸우는 입장에 서지 않고서는 강대국간의 상극
과 마찰을 조정할 길이 없다”고 단정합니다. 이는 국가 권력의 정당성의 계기가 외세가 되어버
린 한반도의 병적인 상황을 치유하고, 민족 내부의 통합을 통해 그 병적인 연결을 끊어내고 단죄
하기 위한 전략인 것입니다.
2) 사회 민주주의
선생이 조직한 진보당은 남한 최초의 본격적인 사회 민주주의 정당이었다고 평가됩니다. 하지
만 진보당의 진보 노선은 서구의 사회 민주주의(social democracy) 노선보다는 한국의 특수한
역사성을 듬뿍 담은 것이었습니다.
서구 사회 민주주의는 직종 조합(trades union)에 기반을 둔 영국의 파비안(fabianian
socialism) 전통의 영국 노동당, 대공장 노동 조합에 기반을 둔 독일식 사회 민주당의 두 가지
조류의 결합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운형 선생의 근로 인민당이 그랬듯, 조봉암의 진보당
도 그 어느 쪽의 성격도 담고 있지 않습니다. 해방 후 사회 개혁이 미진한 상태에서 고통을 받고
있던 노동자, 농민, 도시 서민등을 포괄하는, 다수의 “피해 대중”들을 기반으로 하였다고 볼 것입
니다.
강령이나 조직에서 보이듯, 진보당은 어느 노동 조합등 어떤 특정 계급 계층과 연계된 정당이 아
닙니다. 오히려 우익의 자유당과 그 이상으로 수구 반동적이었던 야당 민국당에 맞서는 모든 이
들을 끌어안는 “민주 대동 세력”으로서, 일종의 통일 전선에 더 가까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민중의 생계가 위협당하고 반대로 소수 지배 계층의 “싹쓸이 국가”가 전횡하는 것이 당시의 상황
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싹쓸이 국가는 “공산 독재의 반대”라는 것을 명분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합
니다. 이 상황에서 “공산 독재 자본 독재를 모두 반대”할 것을 외치는 진보당의 사회 민주주의
는, 지배 계층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냉전 이념의 방패를 깨부수고 절실한 민생의 개혁의 과제들
을 전면에 내걸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이 점에서, 당시 한국의 사회 민주주의는 서
구식 사회 민주주의라기보다는 해방 전의 “좌우합작” 운동의 연장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
니다.
2) 대중 운동
선생의 통일 운동은 주요 정치 세력간의 연합에 더 비중을 두었던 여운형 김규식의 “좌우합작”이
나 남북 지도자간의 협상에 주력했던 “남북협상”에 비해, 직접적인 대중들의 통일 역량을 조직하
는 것에 훨씬 더 큰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평화통일, 사회민주주의, 대중 운동의 노선은 56
년 5.15 대통령 선거 때 선생이 내걸었던 정치 구호, “피해 대중은 뭉쳐라”에 모두 집약되어 있습
니다.
분단이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이념 이상의 문제가 아니라 외세와 결탁한 소수 지배층의
야수적 기득권을 위한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 댓가로 민중들은 학살과 수탈을 겪으면서도 꼼짝
할 수 없는 테러 상태에 처했다는 점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푸는 일은 영혼에 상
처를 입은 대중들이 다시 용기와 이성을 회복하고 행동으로 나서서 스스로에게 씌운 업장을 스
스로 풀어내는 것 뿐이라는 점도 분명합니다. 또 외세에 들러붙어 이런 저런 이념을 휘두르는 자
들을 척결하고 다시 이성과 진보가 실현될 평화적인 민족 국가의 통일을 가져오는 데에 이해를
가진 중심 세력도 그들 밖에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 “피해 대중은 뭉쳐라”라는 구호는 한반도의 탈냉전을 위한 수단이요 동시에 탈냉전된
한반도가 도달해야 할 목적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 구호를 만들어낸 것은 조봉암 선생이 아닐
지도 모릅니다. 비명에 간 숱한 영혼들, 그리고 겁에 질려 움추러 든 민족 전체의 영혼이 회생을
위해 몸부림치면서 선생의 입을 빌어 터뜨린 비명이요 절규일 것입니다.
4. 56년 대통령 선거와 “진보당 사건”
우리는 흔히 우리의 50년대가 철저한 반공주의에 찌들어 있던 때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조봉암과 같은 혁신 세력은 대중들로부터 고립된 일종의 해프닝 쯤이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
다. 그런데 사실을 보면 엄청난 탄압에도 불구하고 “평화 통일론”은 민중들의 폭발적 지지를 받
았으며, 선생이 주도하던 진보당은 50년대에 가장 유망한 이승만의 대체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
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한국 진보 진영의 정치 세력화는 이미 전쟁 후인 50년대에 한 번 전
성기를 거친 바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상당한 원인은, “야당”이었던 민국당 – 한민당의 후신 - 이 사실 이승만보다 더 지독한 수구 기득
권 정당이었던 고로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1952년의 대통령 선거
에서는 전시 상황이므로 이승만이 70%가 넘는 득표를 했으나, 차점자는 10%를 얻은 민국당의
이시영 후보가 아닌, 11%를 얻은 혈혈단신 무소속의 조봉암 선생이었던 것입니다.
56년 5월 15일의 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더욱 더 극적인 상황이 벌어집니다. 돌풍을 일으키던 민
주당 후보 신익희가 선거 직전에 사망하여 표 대결은 이승만과 조봉암의 맞대결이 됩니다. 선생
이 전면에 내세운 “평화 통일”의 구호는 우익 세력에 의해 완전히 “빨갱이”로 매도되었고, 진보
당 당원들은 가족들까지 칼에 찔리는 살인적 테러에 시달렸으며 선생도 신변의 위협 때문에 아
예 5월 11일부터는 잠적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사실상 선거 운동조차 불가능했음에도 불구하
고, 선생은 500만표를 간신히 넘긴 이승만에 맞서 216만표라는 성적을 거두어 극우 진영을 경악
하게 합니다.
조봉암이 신익희의 사망으로 얻은 표는 그다지 크지 않았습니다. 먼저 민주당은 계속 신익희에
추모표를 던질 것을 지지자들에게 종용하였고, 이승만은 이를 묵인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예 선
거 당일 투표지에 신익희의 이름이 그대로 찍혀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승만 이상으로 조봉암을
위험시한 민주당 지지 계열의 신문들은 이승만 지지로 돌아섭니다. 결국 그 표가 찢어진 정도는
반반 정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3대 대통령 선거가 조직적 전국적 관권 부정 선거였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래
서 조봉암 선거 사무장이었던 윤길중은 실제의 표가 조봉암 4백만, 이승만 3백만 정도였을 것으
로 봅니다. 민주당 조병옥도 선거 직후 국회 연설에서 이승만이 실제 얻은 표는 200만 정도로 보
인다고 발언합니다. 당시 해무청장이었으며 1960년3.15 선거 직후 내무장관이었던 홍진기는 개
표 부정이 없었다면 백중세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3.15 부정선거의 주역이었던 최인규의 증언은 더욱 재미있습니다. 그는 이승만 정권이 3.15 부
정 선거를 할 수밖에 없었던 위기 의식의 원인이 56년 대선에서 “평화 통일”을 앞세운 조봉암의
엄청난 득표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선거 운동 과정에서 그렇게 엄청난 부정 관권 금권 선
거를 자행했는데도 실제 개표 결과는 아마도 이승만과 조봉암이 백중세를 보였을 것이라는 것입
니다.
드러난 결과만으로도 이승만과 분단 세력은 엄청난 대중적 타격을 입은 셈이고, 조봉암이 내건
“평화 통일론”과 “피해 대중의 정치”는 이제 당당히 현실적 세력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
에 고무된 조봉암 선생은 해방 전 부터 내려오는 좌우 합작 남북 협상 운동 등의 “중간파” 세력
을 규합하여, 본격적인 전국 정당 조직의 창설에 착수하여, 전쟁 후 최초의 진보 정당, “진보당”
이 건설됩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정치적 타격을 입은 이승만은 이렇게 놀라운 기세로 세력을 확장하는 라이벌
을 결코 그냥 둘 수 없었습니다. 결국 검찰을 앞잡이로 하여 평화 통일론이 “북괴의 주장이다”라
는 논리로 진보당을 해산시키고 선생을 잡아들입니다. 하지만 견결한 논리로 무장한 평화 통일
론을 단죄하는 것은 쉽지 않았기에, 끝내 무죄 선고가 내려집니다. 이승만은 여의치 않으면 “법
을 바꾸어서라도 조봉암을 제거하라”고 길길이 날뜁니다. 선생이 양명산이라는 이중 첩자와 접
촉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59년 2월 27일 결국 어처구니없게도 “간첩죄”로 사형이 선고됩니다. 7
월 30일 재심 청구가 기각되자 변호인단은 밤을 새워 재재심 청구를 준비하지만, 대검찰청도 질
세라 긴급회의를 열어 바로 다음날인 7월 31일 교수형 집행을 명령합니다.
오전 10시 30분, 형장에 도착한 선생은 다음의 유언을 남깁니다.
“이박사는 소수가 잘살기 위한 정치를 하였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살리
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하였소.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
을 한 것 밖에는 없소. 그런데 나는 이박사와 싸우다가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
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요. 다만 나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그 희생물로는 내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랄 뿐이오”.
11시 17분, 검시관은 선생의 사망을 확인합니다. 숨가쁘게 달려오고 있던 4.19 혁명을 10 개월
남겨 두었던 때였습니다.
5. 길고 어두운 터널로: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유언과는 달리 선생은 민주주의와 민족 통일에 바쳐진 “마지막 희생물”은 커녕 그 “첫번째 희생
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선생의 죽음 이후 냉전 분단 체제는 더욱 더 견고해지고, 민족사는 오늘
날까지 이르는 기나긴 암흑의 터널로 빨려들어갔던 것입니다. 분단과 냉전은 오늘날까지도 위세
를 뽐내고 있으며, 그 낡은 틀에서 구역질날만큼의 이득을 챙겨온 기득권 세력도 여전히 버티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 엄청난 테러와 공포를 겪은 민족과 민중의 집단적 영혼이 완전히 낫지 못했
기 때문에, 더 많은 희생과 번제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김수영 시인이 노래한 대로, “아
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는” 긴 행렬의 끝은 아직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죽산 조봉암 선생의 입을 통해 민족과 민중의 영혼이 터뜨린 절규, “평화 통일론”은 그 이
후 남한의 진보적인 통일 운동 방안의 원형을 제시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4.19 직후 봇물처럼
터져나온 통일 운동의 내용이 그러하였고, 보수 정치인 김대중이 70년대 초에 내걸었던 평화 통
일론이 그러하였으며, 80년대를 뜨겁게 달군 남한 민중 운동의 통일 방안이 그러했습니다. 그리
하여 선생은 냉전이 시작되기 전 여운형 선생의 “좌우합작 남북협상” 과 냉전이 끝나가던 90년
대 햇볕 정책을 하나로 관통하는 대들보로 민족사에 남았습니다. 냉전과 분단을 넘어서려고 몸
부림쳐온 남한 양심 세력의 고민과 실천은 선생의 덕분에 뚜렷한 역사적 일관성을 획득할 수 있
게 되었습니다.
분단과 냉전이 아직도 남아 민족 전체가 전쟁의 공포에 떨어야 하며, 그 덕에 안팎의 냉전 세력
의 기득권이 유지되고 있으며, 민족은 계속 남북으로 동서로 갈라지고 민중들은 생계의 불안정
과 생활의 불안으로 시달리고 있는 이 새 천년에, 50년전의 선생의 구호는 아직도 생생하게 다가
옵니다.
“피해 대중은 뭉쳐라!”
* 정태영, [조봉암과 진보당](한길사, 1976)을 권할 수 있습니다. 또 서중석 교수의 [조봉암과
1950년대(상, 하)]는 아주 중요한 자료로서, 특히 하권은 전쟁을 전후한 학살에 대한 연구로 집
중되어 있습니다. 이 글의 시각 즉 조봉암 선생의 평화 통일론을 “피해 대중”의 문제와 연결시키
는 시각은 이 저서에서 시사받은 것입니다.
첫댓글 한나라당이 과거 용공조작, 인권말살하던 군부독재의 잔학상을 깊이 반성하고 거듭나지 않는 한 노무현이 아무리 실정을 해도 정의로운 민의는 한나라당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개혁이 안되면 홍사덕님 중심의 건강한 보수정당을 만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