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오름달 열사흘, 맑음.
아침에 허석렬 교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오늘 오전에 만나기로 미리 약속을 한 건데
내가 전화한 시간이 너무 일러
아직 출근을 하지 않았다고 하여
다시 내일로 미루고 나니 갑자기 아침나절 일이 없어졌습니다.
마침 엊그제 장례식장에서 만난 후배 고애덕 군의 사무실이 가까이 있어
그에게 들르기로 하고 걸음 바꿔
‘기독인의 집’(크리스챤하우스라는 해괴한 이름)으로 갔습니다.
사무실에 들르기 전에 선배 정삼수 목사와 잠깐 마주쳤습니다.
이 선배는 나하고는 참 묘하게 얽힌 인연을 갖고 있습니다.
신학을 공부할 때 성공한 목사라고 사경회 강사로 초청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의 설교는 거의 만용에 가까웠고
그 상황에 대해 신학적 입장을 당시 신약신학 교수에게 물었다가
그 동안 그런 게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다가
갑자기 말을 바꾸는 교수를 보며 환멸을 느꼈던 일,
그 때 내가 그 교수에게 좀 심한 반응을 보였고
이후 일이 꼬이고 얽혀 복잡한 상황들이 생기기도 했는데
내가 목사가 된 이후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노회의 분위기를 따라 제압을 해 보려고 시도했던 일에서
심하게 부딪쳐 수습이 어색하게 이루어지던 일,
그러고 나서는 겉으로는 가까워진 듯한 관계에 있었는데
아무튼 그 일이 있고 나서 이 선배가 내게 우호적이었고
지금까지 그런 관계가 지속되는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나 없는 자리에서도 말하는 그런 선배였는데
이제는 은퇴한 뒤 그가 마련한 곳이 바로
‘기독인의 집’이라고 할 수도 있는 그런 곳,
거기에 노회 사무실이 있고
고애덕 군이 일하는 교회가 하고 있는 복지 사업을 하는 사무실도
거기에 방 한 칸을 얻어 들어 앉아 있습니다.
저간의 사정을 낱낱이 말하려면 엄청나게 길고 복잡한데
아무튼 거기 가서 고애덕 군에게 일에 대한 설명과 함께 동의서를 받고
그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대략 분위기도 알게 되었는데
한국교회의 복지에 대한 인식이라든가
그 복지사업의 현실이 어떤 것인지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애덕 군과 만난 다음 바로 돌아 나오려다가
선배의 방을 찾아갔습니다.
가서 다시 인사하고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드린 다음
내 책 한 권을 선물로 드리고
조금 더 가까워진 듯 싶기도 했는데
적지 않은 이야기들을 들은 다음 거기서 나왔습니다.
오다가 헌옷 가게 들러
밤낚시 할 때 입을 수 있는 바지 하나를 싼 값에 사고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오전이 훌쩍 지나갔고
돌아와 책 조금 읽다가 쉬고
오후에는 다시 바람 부는 길을 따라 낚시터에 나갔지만
오늘도 역시 찌올림 몇 번 본 것이 전부,
그렇게 돌아오니 다시 또 하루,
저녁 먹고 앉아 가만히 하루를 돌아보니
나이를 먹어서 하루를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가
조금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흔히들 나이를 먹으면 시간이 빠르게 느껴진다고 하는데
나는 여태 그것에 동의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느끼지도 않았고
그런 통속적인 말이 가치나 무게를 지닌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그런데 오늘 정삼수 선배를 만나고 나서 보니
나이를 먹어서 하루를 산다는 것은
사실은 그동안 살았던 수많은 날들을
다시 곱씹는 시간들이라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무게와 의미가 다르다는 것,
이에 대해 좀 더 생각해서
정리를 할 필요가 있겠다는 것까지 헤아린 다음
오늘 하루를 여기서 접습니다.
날마다 좋은 날!!!
- 키작은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