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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왜> ․침략: 남해왕 11년(14년), 탈해왕 17년(73년) ⇒변진 12국의 말왕이었던 숭신왕이 세운 기내의 왜 왕국. 변진이 신라에 망했기 때문에 원한으로 침략한 것으로 보인다.(121년조도 동일) ․수교: 탈해왕 3년(57년) 57년은 왜노국(倭奴國)이 후한에 사신을 보낸 시기로써 신라와 수교한 왜가 왜노국이며 이 왜노국은 신라계 신무왕의 왜 일 것이다. ․158년(아달라왕 5년), 왜의 사신이 신라를 예방하였다. ⇒정권이 새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 이해의 정권을 마한계 경행조의 2대왕 성무왕 시기로 본다. ․173년(아달라 20년)에 보이는 비미호는 마한계 또는 부여계이다. 1)대륙국가에 대해 경건했다. 2)마한 72국의 하나인 『비미국』을 자신의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나해왕 13년(208년), 조분왕 3년(232년)에 공격한 왜도 야마대국으로 보이며, 232년의 왜는 비미호의 장녀인 일여여왕의 왕국으로 보고 있음 ․야마대국은 일여여왕이 죽음으로써 왕조가 멸망하고 이에 부여계 응신조가 등장한 것으로 보고 있음 ․270년 응신조가 성립되고 283년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려 했으나 석우로의 처에 의해 응신조 사신은 죽음을 당함 ․그로 인해 응신조는 287년 신라를 공격함 ⇒이에 신라는 응신21년(291년) 일본본토를 공격. 응신왕의 항복을 받음 ※德川幕府 초기 학자 松下見林의 《異稱日本傳》에 의하면 응신 21년에 신라가 명석포를 공격했다는 기록을 남김 ⇒故문정창님은 291년 응신은 항복을 하면서 신라에게 吉備 6현을 할양했다고 본다. ※故김석형님 또한 吉備지역은 신라영토라고 주장 문정창《한국사의 연장 일본고대사》 |
․신라본기 신라 - 왜 관계 특징: 부정적, 피동적(왜에서 먼저 사신을 보냄)
일본서기에 신라가 계속 내방했다는 것과는 부합되지 않는다
․신라본기에 나타난 왜
․사신을 보내어 국교를 한다던가 군대를 보내어 침략을 하는 왜
기원전 57년(경주부근 몇 개 고을을 차지한 장도의 나라)에 신라를 공격할 정도라면
가까운 거리였을 것이며 그렇다면 북 큐슈의 백제계 왜 왕국이었을 것이다.
북 큐슈의 왜 왕국은 백제 계통이므로 백제 - 신라의 관계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백제 - 신라 관계는 고구려의 적극적인 남하 정책시기때만 긍정적이었고 대부분이
부정적이었다.
<어떻게 왜는 신라의 국경을 통해 성으로 진격할 수 있었는가> 1차대전의 경우 2만을 기준으로 1개 사단의 방어전면은 고작해야 3Kmdp 불과하다. 이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3세기경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규모로는 방어는 고사하고 모든 전선에 병력을 배치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희진《가야와 임나》P53 |
․신라와 대립하지 않는 왜
- 호공: 출신이 왜
- 탈해왕: 왜국(북 큐슈)동북 1천리. 다파나국(多婆那國)태생
․여기서의 왜는 이즈모 지방의 신라계통 왜 일 것이다.
⇒또 하나의 항로가 남해 →이끼 섬 →이즈모이기 때문이다.
2.《삼국사기》백제본기와 볼모사건등을 통해 본 한일관계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등장하는 왜 기사는 통합 10개
:397년부터 시작하여 428년에 중단, 7세기 백제멸당당시 6개 정도
․397년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왜와 우호 관계(원문: 結好)
(대응되는 기사) 399년 광개토왕릉비문의 “백잔(百殘)이 서약을 배잔하고 왜와 더불어 화통(和通) 했다.”에 해당
․김부식은 일본에 있는 조선제 소국들의 존재를 몰라 ‘왜’라고 하면 단 한나라로 인식했다.
․백제가 왜에게 볼모를 보내기 위해서는 북 큐슈의 왜 왕국이 백제에 보다 독자적이었을 때라는 것이 전제된다. 그러나 볼모라고 하는 태자 전지가 귀국하면서 왜의 군사 100명의 호송을 받았다는 것은 과연 볼모가 맞는지 의구심이 든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볼모사건
․삼국사기 신라본기 볼모사건
․삼국사기 백제상전과 삼국유사의 김제상 이야기는 큰 줄거리상 동일
․미사흔은 402년~408년까지 16년간 볼모로 가 있었고 백제 태자 전지는
397년~404년까지 왜에 머물러 있었다. 미사흔은 전지태자와 2년간은 일본의
왜 왕정에 같이 있었다.
․삼국사기 박제상 전: 前에 백제인이 왜국에 와서 신라와 고구려가 왜국을 침공하려
이 때 백제인이란 전지태자 일행: 그들의 목적은 출병을 위한 것
하니 … 군사를 보내어 신라국경 밖에서 순행하며…“
⇒대응기사: 광개토왕릉비문 9년 기사 : 왜인이 그 국경에 충만하여 성지를 파괴하고
있었다.
3.《삼국유사》연오랑․세오녀 설화를 통해 본 한일관계
․시대배경: 아달라왕(2세기)
․연오랑․세오녀 설화가 지니는 의미: 신라인의 일본 이주(계통적인 이주)
․연오랑 설화에 등장하는 영일현과 도기야(都祈野)라는 지명
․연오랑이 보낸 비단으로 제사를 지냈던 곳이 영일현(都祈野라고 한다)
․영일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옛 이름은 근오기(斤烏支)였다고 한다.
․斤=‘큰’, 즉 큰오기=오끼(隱岐)섬
⇒신라의 일본진출 항로: 신라 →이끼(隱岐) →이즈모를 증명
․미사흔을 볼모로 보냈거나 적대적인 왜: 백제계통(북 큐슈)
․연오랑, 세오녀, 호공, 석탈해 등과 관련된 왜: 신라계통(이즈모)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 - 왜는 항상 적대적이었지 백제 - 왜와 같이 군사를 내어준다거나 우호적이지 못했다. 이것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왜는 대부분이 북 큐슈의 왜인 것이다.
그러면 왜 이즈모 왜 왕국은 신라와 통하지 못한 것일까...
우리나라 남해는 백제가 장악했기 때문에 신라 →오끼 →이즈모의 먼 항로는 백제의 방해를 받았을 것이다.
4.《가락국기》를 통해 본 한일관계
․석탈해 신화나 아유타 공주의 설화또한 김석형 특유의 공식에 맞춰 해석
5.광개토왕릉 비문에 나타난 한일관계
․제 1기사 백제와 신라는 원래 고구려의 속민이었다는 문구
백제는 시종일관 고구려에게 우세했고, 신라또한 고구려와 391년 이전 외교기록은 단 두 개 밖에 없었다 ⇒비문의 기록은 다소 과장
※문제의 구절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 百殘□□□羅 以爲臣民.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
← 주어: 고구려 → ← 주어: 백제 → 『광개토경 평안호태왕 비문 책략』
고구려가 渡海破百殘 →396년 討伐殘國
제 2기사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이에 6년 병신에 태왕이 친히 수군을 이끌고 가서
討伐殘國 軍□□首功取壹八城: 백잔을 토벌했다. 백잔의 군대를 물리치고서 일팔성
… 仇天城, □□□□, □其國城: … 구천성 등의 그들의 성을 빼앗았다.
… 왜가 없는 순전한 고구려 - 백제 기사
396년의 이 기록은 삼국사기엔 없다. 396년 기사는 삼국사기의 395년 기록을 과장했더나, 395년 전역의 연장으로 더 큰 것이었는데 삼국사기에서 누락시킨 것이다.
제 3기사 … 莫□羅: 신라? 신라는 391년 이미 속민이라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신라는 아님
제 4기사 (399년)백제는 고구려와의 약속을 위반하고 왜와 더불어 화통을 했고 …
⇒대응기사: 397년 백제가 왜국과 더불어 화친을 맺고(結好)
제 5기사 보병, 기병 5만 파견, 신라지원(400년)
⇒대응기사: 삼국사기 박제상전 “마침 고구려가 침입하여 왜국의 순라병을 모조리 잡아
죽였다.”
제 6기사 “불법하게도 대방지방까지 들어왔는데…”
⇒백제를 제외한 고구려 - 왜만의 전쟁
․왜 404년 전쟁에서는 백제가 출연하지 않은 것일까...
⇒백제 왕실과 관련
․403년 2월 왜국 사신 예방
7월 왜의 신라변경 침입
404년 아신왕 사망. 전지태자 귀국
⇒당시 백제는 골육간의 싸움으로 어지러워 고구려와의 대결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보충)비문 첫 머리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만들었다라는 구절은 올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비는 광개토호태왕의 성덕을 자랑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광개토태왕시절 고구려 - 왜 관계> ․신묘년(391년):《삼국사기》 ⇒7월 한강이북 10성을 공략 《광개토왕릉비문》 ⇒倭以辛卯年來 ⇒來『康熙字典』에 의하면 “불리워서 왔다”로 해석. 피동적 ⇒백제의 요청에 의해 왔다는 뜻 ․영락 10년:‘신라성을 포위한 왜군을 쫓아 임나가라로 가고, 거기서 또 싸워 그 성을 함락 시켰다.’ 임나가라는 대마도이다 ⇒광개토왕은 대마도로 공격한 후 일본열도로 공격 하였다. 고고학 근거) 5세기 전반기 구주지방에 갑자기 고구려식 횡혈식 석실 후기 고분 등장 문정창《한국사의 연장 일본고대사》 |
<광개토왕릉비문의 왜> 일본학자들이 주장하는 응신릉(꼰다야마 고분), 인덕릉(다이센 고분)의 무구류는 초기 이도지마 반도의 실용적(5세기 초)성격을 띤 것이 아닌 장식용 성격의 것으로 그 시기 또한 5말 6초로 잡는다. 뿐만 아니라 비문의 왜의 정체의 근거로 기내에서 가장 이른시기에 출토된 기마전투적 유물이 나온다는 가와찌의 ‘노나까나 마루야마’고분과 ‘아리야마’고분 또한 그 편년이 5세기 중, 말엽이상으로 올라가지 않는다고 한다. 이도지마 반도에서 나타난 수혈계 횡구식(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가야의 영향의 아래의 이도지마 가야 소국의 것)무덤이나 대륙적 기마전투식 무기등이 나타나는 스끼사끼 고분 등을 보면 비문의 왜는 이도지마반도의 가야 소국일 것이다. 조희승《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
<중국 사서들을 통해 본 한일관계>
1.찬 - 무 왕조의 책봉기록
438년: 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 6국의 사지절 도독
451년: 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6국의 사지절 도독
478년: 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6국의 사지절 도독
2.찬 - 무 왕조는 야마도 왜 왕국
⇒이와는 별개의 북 큐슈 왜 왕국이 존재했을 것이다.
⇒근거)440년, 444년, 459년, 462년, 463년, 476년, 477년, 482년, 486년, 498년,
500년 삼국사기에는 왜의 신라에 대한 침략을 적고 있다. ⇒ 삼국사기의 왜는 북 큐슈의 왜 왕국
※계속 침범행위를 하는 대상국가에 대하여 도독을 칭할 수 있을까?
3.478년 제 5대 왜왕 ‘무’는 上表를 바쳤는데, 그의 조부가 200개도 넘는 소국을 평정했다
고 했다.
4.478년 상표문의 또 다른 내용
<…길은 백제보다 먼데 배의 장비를 잘해도 고구려가 무도하여 노골적으로 집어 삼키려
하며 … 신의 부친 ‘제’는 이에 원수가 하늘(중국)로 통하는 길을 막는 것을 원통하게 생각하여 백만대군으로 의로운 행동으로 용기를 내어 감행하려고 바야흐로 대전투를 준비하던 차에 …>
․이끌어 낼 수 있는 결론: 고구려가 당시 서남해안까지도 장악하고 있었다.
이 왜가 비문의 왜라면 치열하게 전쟁을 했던 것에 대해서 자랑하며 썼을
텐데 전쟁의 기록은 없고 다만 전쟁준비만 하고 있다라고 표현
5.수서 왜인전에 나타난 항행노정
백제 →죽도(竹島) →쓰시마(都斯麻國) →이끼(一支國) →쯔구시(竹斯國) →10여국을 지남
※7세기 초까지도 야마도와는 달리 王國이라 불릴만한 것이 열도 내에 있었다.
<신공황후의 신라 정벌 설화>
1.일본서기에 기록된 신라의 위치
․수인천황 2년: 미마나국 사신이 일본에서 붉은 비단 백필 얻어 가지고 돌아가다 신라
사람들에게 빼앗겼다. ⇒신라는 야마도와 가라 중간의 위치? ⇒야마토와
큐슈의 중간인 기비?
2.신공황후의 신라 정벌을 믿는 일본학자들도 없다.
<신공의 삼한 정벌> ․대마도는 2개의 섬으로(上島․下島)나뉘어져 있다. ․上島의 것을 佐護, 仁位라고 부르고 下島의 것을 鷄知라고 한다. 佐護평야를 신라, 仁位평야를 고구려, 鷄知평야를 백제가 차지하고 있었다. 신라의 삼한정벌이라는 것은 대마도의 세 분국을 토벌하는 것이다. 문정창《한국사의 연장 일본고대사》 |
3.신공황후의 일본식 이름: 오끼나가 다라시 히메노 미꼬도
7세기 후반 제명여왕의 이름에도 다라시 이메라는 것이 들어감
․신공황후는 제명천황의 환상?
4.신공설화에 등장하는 ‘하사무 김(파사 이사금)’ ‘미시고찌 히도리 간기(미사흔)’
⇒시간과 공간이 서로 다른 사실을 한 데 뒤섞어 놓음
5.삼국사기는 왜를 하나로 보고 있어 해석에 혼선이 오고 일본서기는 세 개의 큰 왜(북큐슈 , 기비, 기내)를 한 개로 잡아 혼선이 2중 3중으로 온다
<일본서기의 미마나 미야께 설화에 관한 서술들>
1.미마나=임나?: 일본서기, 삼국사기 강수 열전, 진경대사 비문, 광개토왕릉 비문
<임나의 위치> ․숭신천황 65년 가을 7월 “임나는 축자국(筑紫國)에서 2천여리 떨어진 거리에 있다. 북은 바다에 막혀있고 鷄林의 서남쪽에 있다.” 문정창《한국사의 연장 일본고대사》 |
2.일본서기에서 말하는 미마나의 기원
:대가락국(또는 의부가라)왕자 쯔누가 - 아라시또가 귀국할 때 “네가 그토록 사모한 천황인 숭신천황의 이름이 마미끼인 즉 이를 너의 나라의 이름으로 삼아라”
3.신공 47년 제 2차 신라정벌
: 신라를 공격했는데 공격받은 지역은 가라? 초고왕과 왕자 귀수 등장
4.신공 62년(262년):《백제기》인용
사찌 - 히꾸는 본래 신라를 치려했으나 신라의 미인에 의해 도리어 가라를 치고 멸망시켰다. 이에 가락왕은 천황에게 항의하였고, 천황은 모꾸라 - 곤지를 보내 국가를 회복하였다.
5.백제기: 백제 유민들에 의해 쓰여진 사서
※야마도 왕정의 역사가들의 왜곡이 있을 수 있다.
즉, 사서 자체는 사실성이 있을지 모르나 그것을 인용하는 사람에 의해 조작할 수 있기 때문
《일본서기》에는 신공 62년(262년)기에서 흠명 17년(555년)에 이르기 까지 《백제기》《백제본기》《백제신찬》등을 인용하고 있다. 각 記의 인용횟수는《백제기》가 3회,《백제본기》가 13회,《백제신찬》이 3회이다. 이 세 개의 인용서중에, 백제본기는 簡明해서 권위적이며, 백제기는 無雜해서 未開인의 채취가 가득차 있다. 또한 이른바 백제신찬이라는 것은 무열 4년기에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쓸데없는 사람의 加筆이다. 해외에 많은 식민지를 가진 백제 본국은 그 國史의 체계에 있어서 본국에 백제본기를 갖추고 각 分國 및 식민지에는 각각의 史記를 備附시키고 있었던 것 같다. 일본학자는 이와 같은 사실을 연구하지 않고, 대마下島 내의 부족국가 백제의 史記인 백제기를 백제본국의 史記라고 잘못 판단하여 또 백제본국에 맞추려고 하지만, 큰 잘못이다. 문정창《한국사의 연장 일본고대사》 |
6.미마나에서 정권을 휘두르는 왜인
:모꾸만치(목만치)는 … 미마나에서 전횡을 부리었다. 우리나라(백제)로 들어와서는
귀국(일본)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 우리나라의 정치를 집행하였다.
권세가 당대에 가장 많았으므로 천황은 그 포악함을 듣고 소환하였던 것이다.
․목만치 = 목협만치
※일본서기의 목만치가 삼국사기의 목협만치의 그림자임은 명백하나 비쭐어진 그림자이다
복성귀족인 목협만치를 일본서기는 외자 성인 木가로 만들고 그를 모꾸라 - 곤지라는 가상적인 왜 단장을 시키고 신라여자와의 혼혈아로 비뚤어 놓았다.
백제와 가락이 아무리 가까운 관계였더라도 가락국을 백제의 속국으로 볼 수는 없다.
7.웅략천황 7년 7월
․기비 상도(上道)의 오미(臣) 다사(田狹)를 미마나의 구니노 미꼬도모찌(任那國司)로 임명
․國司: 7세기 전반기 대화개신에서 지방행정제도가 새로워지면서 종전의 國造(구니노 미야쯔고)에 해당하는 것으로 郡司위에 둔 것.
그렇다면 대화 개신의 국사제도를 여기서 찾아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