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적의 합창, 30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 때 이모가 경험한 그것과 지금 ‘쿠르트’가 경험하는 이 합창의 차이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시간의 흐름과 그 사이 일어난 변화가 있습니다. 겨우 여섯 살이었던 소년이 이제는 결혼한 성인입니다. 그 성장 속에 역사의 소용돌이가 있었습니다. 정치사회의 변화, 가족의 변화 그리고 예술의 변화, 그 모든 것이 한 사람의 인생 속에 들어와 생각을, 표현을 새롭게 구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를 이끌어준 한 마디가 늘 마음을 붙잡고 있습니다. 이모의 아름다움이 마지막 울부짖음으로 맘속 깊은 곳에 새겨질 때 그 말은 더더욱 깊이 시간 속에 그리고 쿠르트의 인생 속에 새겨집니다.
인민을 위한 예술이 참 예술이라고 떠들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 예술이 아닌가요? 그런데 가장 개인적인 것이 이상하리만큼 가장 크게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사회라는 것도 결국은 그 개인들이 모인 것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정치하는 사람들은 그 개인들을 한 규율로 집합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어쩌면 당연한 욕망입니다. 그래야 통제가 쉽고 자기 야망의 수단으로 길들이기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가장 거슬리는 대상이 예술가일 수 있습니다. 그 생각들이 일반 사람들보다 매우 자유롭기 때문이지요. 때로는 방종이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술은 사실 그런 자유로움으로부터 생산되는 것입니다.
예쁜 이모는 종종 어린 조카 쿠르트를 데리고 미술관 박물관 등을 관람했습니다. 그리고 어지러워지는 사회변화 속에서도 진실을 찾으며 자유롭게 커가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권력을 쥐고 나라 전체를 전쟁으로 몰아가는 듯한 변혁 속에서 가족은 대항할 힘이 없습니다. 그 세찬 흐름 속에서 더욱 허약해지는 개인의 아픔을 이겨낼 길은 없을까, 아마도 예술가의 정신이 가능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 갈구하는 자유가 부모에게 걱정을 끼칩니다. 그리고 병원에 진단받으려 간 것이 오히려 비극의 문을 열어주는 꼴이 되고 맙니다. 살리려고 한 것이 죽음으로 몰아간 셈이지요. 그리고 다시는 이모를 볼 수 없었습니다.
여태 유대인 학살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국민 안에서도 우열을 나누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특히 여성들 속에서. 모르겠습니다. 남성들 안에서도 그런 색출작업을 하였는지는. 아무튼 우생학의 우열 가르기로 인하여 허약하다 싶은 여성은 불임조치를 내립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별 쓸모가 없다 판단되면 처형시킵니다. 이 기회에 역사를 뒤져보니 참 오랜 이론적 발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하는 짓거리라니 참으로 놀랐습니다. 아무튼 20세기 초 독일 나치가 가장 획기적으로 사용한 인종 청소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산부인과 의사들이 동원되었습니다. 사상적 동조였는지 정치적 동조였는지 분간이 어렵기는 합니다.
나치의 시대는 끝나고 소련이 들어옵니다. 인민이란 이름으로 모든 것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예술까지 인민이 지배합니다. 아니 인민이란 이름으로 덧칠하는 것이지요. 한편으로는 나치 전범들을 색출하는 작업을 합니다. 우수민족 보존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생명을 앗아가게 한 산부인과 의사들도 포함됩니다. 그런데 세상 참 요지경이지요. 전범으로 잡힌 책임자 격 의사가 산고를 심하게 겪는 소련 책임자의 아내의 출산을 도와 죽음에서 건져줍니다. 덕에 그의 보호를 받으며 생명과 재산 명예를 유지하게 됩니다. 그 무시무시한 죄악은 뒤에 묻히고 그는 여전히 자기 누릴 바를 다 누리며 삽니다.
이모의 영향이었을까, 쿠르트는 그림을 그리며 자랐고 화가 지망생으로 대학에서 공부합니다. 마음에는 이모가 해준 말이 늘 새겨져 있습니다. ‘진실한 건 모두 아름다워.’ 진실을 좇으며 그림을 그립니다. 그리고 그 대학에서 의상학과 여학생을 알게 되고 사랑에 빠집니다. 차이가 많이 나지요. 신분과 재산, 명예 등등 부모 특히 그 아버지가 허락해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우생학을 신봉하는 의사로써 자기 딸이 그런 사내와 맺어지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힘을 막기는 어렵지요. 그래도 그의 자식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 딸을 임신중절수술 낙태까지 시킵니다. 물론 다른 핑계를 대며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듭니다. 앞으로도 임신을 하지 못한다니 그 아픔과 슬픔이 오죽하겠습니까.
인민을 앞세운 정치 풍토 속에서는 예술이 진실을 담기 어렵습니다. 새로운 길을 열고 싶습니다. 부부가 서독으로 탈출합니다. 아직은 장벽이 생기기 전이어서 경계만 잘 벗어나면 되는 때였습니다. 무사히 벗어나 가난한 삶을 시작합니다. 그래도 천성이 화가이니 그 길을 고수합니다. 다시 대학에 들어가 그림을 배우며 작업을 합니다. 회화는 이제 한 물 갔다고 하는 풍토 속에서 나름 새로운 길을 찾으려 발버둥 치지만 자기 길이 아니지요. 그러다 어느 날 사진 속에서 과거의 진실을 맞닥뜨립니다. 어렴풋한 과거이지만 그 때의 아픔 때문에 분명한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그대로 화폭에 옮깁니다.
아무리 배부르게 잘 먹고 잘 살아도 조그만 양심이 그래도 남아있다면 과거 저지른 악은 당한 사람뿐만 아니라 저지른 사람 안에도 트라우마로 남아 있게 마련입니다. 장인인 의사는 사위의 그림을 보고 몸까지 휘청 이도록 충격을 받습니다. 친구가 묻습니다. 왜 그러지? 쿠르트는 알까요? 회화가 한 물 갔다고요? 인생들의 무관심 속에 진실이 숨어있었을 뿐입니다. 왜 ‘작가 미상’이라고 했을까요? 작가의 이름이 밝혀지면 일단 그 작가에 대한 선입관이 먼저 떠올라 작품의 진실을 가릴지도 모릅니다. 영화 ‘작가 미상’(Never Look Away)을 보았습니다. 정말 근래 보기 드문 명화를 보았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뿐만 아니라 이야기나 풍경 음악 모든 것이 만점, 3시간이 결코 길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