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아이 한복을 다룬 책이 나왔을 때 아들은 없지만 어떤 내용을 담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어 언제고 보고 싶은 그림책으로 꼽아 두었었다. 우리 또래들이 어렸을 때부터 이미 한복 세대를 벗어나서 아버지를 비롯한 친지 어르신들이-시골 사시는 아주 연세 많으신 할아버지 외에는- 명절이나 제사 지낼 때 같이 특별한 날에나 차려 입으신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야 결혼할 적에 장만한 한복이 있긴 하지만 명절이라도 꺼내입기는 번거로워 몇 년 째 한복상자 안에서 잠자고 있다.
새해 아침, 남자 아이 하나가 옷장에서 엄마가 손수 지어 주신 한복을 꺼내려 용을 쓴다. 엄마 내음이 배인 설빔. 요즘이야 기성복처럼 가게에 가서 마음에 드는 한복을 골라 살 수 있지만 가족들이 입을 한복을 집안 여자들이 일일이 손으로 꿰매 만들던 시절이 있었다. 명절을 앞두고 어머니는 차례 음식 장만하랴, 밤을 새가며 가족들 설빔 만들랴...(잠은 언제 주무셨는지), 가족들에게 설빔으로 새 한복을 장만해 주고 싶은 마음으로 바늘에 손가락을 찔려가며, 절로 감기는 눈을 비벼가며 옷을 지으셨을 게다.
혼자 입어보려고 장에서 옷을 꺼낸 남자 아이가 제일 먼저 손에 잡은 것은 버선이다. 버선은 신었을 때보다 날렵한 버선코가 그대로 느껴지는, 신기 전의 모습이 더 예쁜 것 같다. 버선코에 수놓아진 예쁜 꽃버선을 신노라면 내 발에 꽃이 핀 느낌이 들어 기분도 화사해지지 않겠는가. - 버선은 양말처럼 탄력이 있는 옷감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보니 아무래도 신기에 약간 불편함이 있다. 요즘은 한복을 입더라도 양말을 신는 경우가 많아 남자도 버선을 신는다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듯하다.
남자의 한복 바지는 얼마나 넉넉한지 두 명이라도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품이 크다. 무엇 때문에 이리 크게 만들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좌식 생활을 하는데는 이처럼 통이 큰 바지가 더 편리하다고 한다. 대님을 매는 것도 쉽지 않은 일로, 복숭아 뼈 쪽으로 여분의 발목 천을 둘러 대님을 묶는데 한복 입는 것이 서툰 사람에게는 그 부분들이 제일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 그래서 바지만 입어도 한복의 반은 입은 듯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다.
- 대님을 올바르게 매는 방법은 예전에 학교에서 배웠는데 시험에도 나온다 하여 열심히 외웠던 기억이 난다. 옷고름으로 고를 만들어 매듭짓는 것도 아이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닌데 책 속의 아이는 이를 척척~ 해낸다. ^^
비단 저고리의 사각사각~ 거리는 느낌은 또 얼마나 좋은지. 그리고 소매를 여러 가지 색깔의 천을 이어서 알록달록하게 만든 색동저고리는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데 까치두루마기도 이처럼 소매 부분을 알록달록하게 만든 것이구나,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이는 그 위에 또 한 겹, 금박 물린 남색 전복을 걸치고 전대도 매고... 정자관 쓰고 담뱃대 물고 할아버지 흉내도 내보고, 복이 이리 오너라~ 호령도 해보고, 멋진 태사혜 신고 도련님 행차도 알려 보고~. 아이는 옷을 차려 입는 와중에 방에서 연도 날려 보고, 윷도 던져 보고, 쉴 사이 없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설빔>은 해외로도 수출되어 우리 한복의 고운 옷태와 색감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선보이고 있다고 한다. 마지막 장면은 온 가족이 한복을 차려 입고 모인 모습을 담고 있는데, 설날을 기념하여 찍은 사진처럼 보이기도 한다.
- <설빔>은 같은 제목으로 여자 아이 한복(여자아이 고운 옷)과 남자 아이 한복(남자아이 멋진 옷)을 다룬 두 권의 책이 나와 있다. 먼저 나온 작품은 여자 아이 한복에 관한 그림책으로, 딸아이들과 함께 보고 싶어서 사는데, 참빗으로 곱게 빗은 듯한 머릿결이며, 고운 한복을 걸친 여자아이의 모습이 어찌나 참하고 어여쁘던지, 책을 보며 그림 하나 하나에 감탄을 했었다. 나는 가져보지 못한 배씨댕기가 특히 탐이 났다. ^^*
돌한복 한 벌 사서 두 아이 다 입힌 것이 다여서 여적 한복이 없는 우리 아이들은 <설빔> 책을 볼 때면 자기들도 한복을 사달라고 졸라댄다. 그런대도 아직까지 한복 한 벌 장만해 주지 못한지라 미안할 따름이다.
두 권을 다 놓고 보면 여자 아이(누나)나 남자 아이(동생)나 옷을 다 입은 후에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눈을 보며 반가워하고, 세배를 드리려고 문 밖에 서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장면은 등장인물만 다르고 배경이 같아 함께 볼 때는 중복된 마무리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뒤에 나온 작품이 한복을 차려 입은 가족의 모습을 담은 그림으로 그런 아쉬움을 메워주고 있다. 남편도 한복이 없고, 집에 딸만 둘이어서 남자 한복이 없는지라 이렇게 책을 통해서나마 볼 수 있어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