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황 金錫璜 (1894 ~ 1950)】 " 1920년 1월 대한의용단 결성,
평안남도청 폭파의거 참여"
1894년 2월 28일 황해도 봉산군(鳳山郡) 동선면(洞仙面) 선영리(仙嶺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이명은 김윤황(金潤璜)이다. 가세는 풍족한 편이었고, 어려서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수학하였다.
1917년 『매일신보』 사리원분국장으로 활동하다가 1918년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갔다.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예비과정에 들어가 법과 입학을 준비하던 중 재일 한국인 유학생을 중심으로 추진된 2·8독립선언에 참여하였다. 재일 유학생들과 연락하며 동지를 규합하고, 1919년 2월 8일 재일 한국인 유학생들은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독립선언대회에 참가하였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훈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3·1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동녕 등과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5월에는 대한민국청년단(大韓民國靑年團)을 결성하여 서무부장을 맡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질서를 주도할 기구로 1920년 1월 국제연맹이 창설되자, 임시정부에서는 국제연맹에 제출할 독립운동에 관한 역사를 정리·간행할 기구로 임시사료편찬회(臨時史料編纂會)를 구성하였는데, 그 일원으로 『한일관계사료집(韓日關係史料集)』 편찬에 참여하였다.
또 국내외를 대상으로 임시정부의 활동 및 국내외 독립운동 정황을 알릴 목적으로 『독립신문』이 창간되자, 600원을 지원하였다. 황해도 대표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제5과 교통분과 상임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1920년 1월 안창호·손정도 등과 상의하여 임시정부 산하단체로 대한민국의용단(大韓民國義勇團)을 결성하고, 총무를 맡아 업무를 관장하였다. 의용단은 국내 각지에 지단과 분단 설치를 추진하였는데, 1920년 3월경 그는 안둥(安東, 현 丹東)과 펑톈(奉天, 현 瀋陽)을 거쳐 국내로 잠입하여, 의용단 국내 지단과 분단을 결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환자를 가장하여 평양 기홀병원에 입원한 뒤 병실을 찾는 친지들을 모아 동지를 규합하고 서북 지역을 중심으로 지단과 분단을 조직하며 군자금을 모았다.
평안도와 황해도 각지에 지단과 분단을 만들었고, 서울로 올라와 숭인동에서 황중극을 만나 경기도 지단을 조직하였다. 군자금을 모집한 뒤 군사 활동에 필요한 무기를 마련하려고 안둥에서 이륭양행 소속의 선박 호남환을 타고 같은 해 7월 5일 상하이로 돌아왔다. 이후 권총과 탄환, 폭탄 등의 무기를 구입하여 7월 말 재차 국내로 잠입하였다.
1920년 8월 3일 평안남도 청사 폭파 의거로 의용단 국내 조직이 붕괴되자, 중국 펑톈으로 건너가 은신하던 중, 9월 16일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다. 9월 21일 평양으로 압송되어, 12월 17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던 중, 1925년 11월 10일 가출옥하였다.
출옥 후 경성 운니동 집에서 요양하다가 고향인 황해도 봉산으로 내려가, 1926년 6월 운영난을 겪는 봉산군 동선면의 창덕학교(彰德學校)에 재정 지원을 하였다. 1927년 11월에는 서선농업조합의 발기회를 조직하고 발기회장을 맡았고, 1928년 5월 13일 서선농업조합이 창립되자 감사역에 선임되었다. 광복 직후 ‘임시정부 봉대(奉戴)’를 표방하며 임시정부환영준비회를 조직하는 한편, 임시정부 요인의 신변 보호를 목적으로 대한국의용단을 결성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