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은 여러가지 요인에 의하여 생성된다. 역사적인 배경이나 사회적 배경에 의하여 생성되기도 하고 장소, 땅의 형태, 사건(전설), 흉내말, 사람, 동식물, 풍수지리, 땅의 성질 등의 여러가지 요인으로 생성되기도 한다. 이러한 땅이름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본래의 모습에서 변형되기도 한다. 변형되는 원인으로는 토박이말로 된 땅이름이 한자말로 바뀌는 경우도 있으며, 발음의 편의에 따라 변형되거나, 유사한 뜻을 전용하면서 변화되거나, 적당한 전설이 붙어서 변화되기도 한다.
포천군의 지명에 나타난 생성과정에서 이루어진 특색을 분류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전설과 관련지어진 이름
땅이름은 전설과 함께 전하여 오기도 한다. 포천지역의 땅이름은 북부에는 궁예, 남부에는 이 성계와 관련된 땅이름이 많이 남아 있다.
①·이성계와 관련된 땅이름
참나무장이(眞木亭) : 내촌면 마명리
여덟밤이(八夜洞) : 내촌면 음현리
용상골(龍床洞) : 소흘면 이동교리
막(幕)골 : 소흘면 무봉리
부인(夫人)터 : 소흘면 이동교리
② 궁예와 관련된 땅이름
울음산(鳴聲山) : 영북면 산정리
패주(敗走)골 : 영북면 산정리
항서(降書)받골 : 영북면 산정리
야전(野戰)골 : 영북면 산정리
망봉(望峯) : 영북면 산정리
남창동(南倉洞) : 관인면 초과리
2. 씨족의 성이 반영된 땅이름
홍촌(洪村) : 내촌면 진목리
이촌(李村),조촌(趙村), 원촌(元村) : 가산면 일대
최가채리(崔加采理), 조가채리(趙加采理) : 신북면 가채리
3. 위치에 따른 이름
아랫말,웃말 : 포천읍 어룡리/ 가산면 마산리,금현리,마전리,방축리/ 창수면 추동리,주원리/
앞골,뒷골 : 영북면 대회산리
건너마을 : 내촌면 진목리/포천읍 신읍리
바깥말(外村) : 내촌면 진목리
안골 : 내촌면 소학리
4. 모양에 따른 이름
병풍바위, 장기바위 :포천읍 신읍리
갓뫼봉 : 포천읍 어룡리
치마바위 : 포천읍 자작리
안장바위 : 포천읍 선단리
너러바위 : 포천읍 설운리
연적바위,붓바위 : 군내면 구읍리
거북바위 : 군내면 직두리
범바위 , 자라바위 : 군내면 하성북리
고드네 벌판 : 군내면 좌의리
가마솥골 : 군내면 직두리
5. 기능에 따른 이름
점(粘)말 : 포천읍 신읍리 / 내촌면 진목리/ 이동면 도평리/ 영북면 운천리
사기막(砂器幕) : 내촌면 소학리/ 일동면 화대리
사기점(砂器店) : 일동면 길명리
기와골(瓦谷) : 포천읍 설운리
파발막(把撥幕) : 포천읍 자작리
봉화대(烽火臺) : 이동면 연곡리
장(場)거리 : 포천읍 신읍리
거리장 : 가산면 방축리
술막(酒幕) : 소흘면 송우리
인삼막골 : 군내면 직두리
비행장들 : 포천읍 자작리
6. 동식물에 관련하여 지은 이름
1) 동물
용(龍):요물(군내면 용정리)
호랑이(虎):호병동(포천읍 신읍리)
두꺼비(蟾):섬암동(창수면 추동리)
여우(狐):여우고개(이동면 장암리)
비둘기(鳩):비득재(소홀면 직동리)
곰(熊):곰고개(영중면 양문리)
제비(燕):제비울(이동면 연곡리)
이리(狼):낭유리(이동면노곡리)
도룡뇽(蛟):데룔골(관인면 중리)
2)식물
소나무(松):솔모루(소홀면 송우리)
오동나무(梧):오장동(신북면 가채리)
지초(芝):종지골(영중면 양문리)
칡(葛):갈오리(소홀면 이가팔리)
느릅나무(楡):느릅쟁이(영중면 성동리)
보리(麥):왼부리(麥邱/일동면화대리)
배(梨):배골(소홀며 이곡리)
닥(楮):닥밭(영중면 금주리)
잣(柏):잣골(영중면 성동리)
버들(柳):유촌(柳村 신북면 유촌)
피(稷):피머리(군내면 직두리)
복숭아(桃)도리돌(이동면 도평리)
개암(榛):개암밭골(이동면 연곡리)
벼(禾):볏가리소(영북면 자일리)
밤(栗):밤나무골(관인면 삼율리)
7. 유물 또는 유적과 관련지은 이름
정자 : 군자정(가산면 방축리) 금수정(포천읍 어룡리)
비석 : 비석거리(포천읍 어룡리)
고인돌 : 괸돌(포천읍 자작리,/가산면 금현리)
서원 : 화산서원,옥병서원,충목단
창고 : 사창말(신북면 신평리)
향교 : 향교말(군내면 구읍리)
태봉산(소홀면 송우리)
8. 땅의 성질에 따른 분류
붉은데기(소홀면 초가팔리)
거친봉(소홀면 무봉리)
9. 흉내말로 지은 이름
헐떡고개:군내면 구읍리
10. 한자로 변경된 경우
특히 한자지명은 본래부터 한자로 지어 진 것이 있으나 일본의 식민지 통치시대에 우리말과 글, 곧 우리의 민족정신을 소멸하기 위하여 창씨개명과 더불어 우리의 땅이름을 일 본식 한자로 바꾸어 놓은 것이 많이 있다.
울뫼>鳴山 울음산>鳴聲山 기와골>瓦谷 말우리>馬鳴
안골>內谷 큰골>大谷 피머리>稷頭 절골>沙谷
우무골>牛目谷 여우내벌>狐川坪 한내벌>漢川坪 새보들>新堡坪
한여울>漢灘江 괸돌벌>支石坪 뒷골>後谷 참나무정내>眞木川
용우물>龍井里 윗잣뒤>上城北里 아랫잣뒤>下城北里
감바위>甘巖里 쇠재>金峴里 가래울>楸谷里 물안>水內里
배골>梨谷里 송아지고개>松峴里 자래울>鱉洞 메기울>呑谷
범우리>虎鳴里 건너말>越村 새터말>新基村 벌말>坪村
메기안>沐浴洞 고인돌>支石村 가재울>佳在洞 당메말>唐山洞
우무골>井洞 시우골>時雨谷 두껍바위>?岩 큰넉고개>大廣峴村
작은넉고개>小廣峴村 횻대박이>孝竹村 둔터>屯基 안말>內村
비둘기고개>鳩峴里 뒷골>後谷里 빌은돌고개>祝石嶺 그림바위>畵岩里
솔모루>松隅 갈미>楸山洞 안나무골>內樹洞 모래재>沙峴里
샛말>間村 원모루>院隅 맷돌안>磨石洞 깊이울>深谷
가마골>釜谷 새목이>鳥項里 숯골>炭洞 솔치고개>松峙峴
문고개>門峴 소리개고개>鳶峴 넙고개>廣峴 여우고개>狐峴
저고리고개>赤古里峴 무네미보>水踰洑 너버기보>廣村洑
달맞이봉>月迎山 가리마고개>可里馬峴
제2장 . 포천군명의 유래
'포천'이란 지명은 조선 태조 13년(1413)에 생겨난 이름이다. 포천은 원래 백제와 고구려의 영토일 때 고구려에서는 마홀군(馬忽郡 一名 命旨郡)이라 불렀다. 신라의 진흥왕 때에 견성군(堅城郡)이라 부르다가 경덕왕 때에 다시 청성(靑城)이라 불렀다. 고려초에 와서 포주(抱州)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다시 조선조에 포천(抱川)이라는 오늘의 땅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들 각 시대별 이름이 갖는 의미와 연관성을 연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한자로 우리식 땅이름을 옮길 경우 첫째 소리로 맞옮길 수도 있고, 둘째 소리와 뜻을 합하여 맞옮길 수도 있으며 셋째, 완전히 한자식으로 옮길 수도 있어서 어느 것을 적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뜻이 달라지기 때문이다.특히 이 지역은 문헌자료의 부족으로 그 본래의 모습을 밝히어 낸다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다.그러나 지금까지 밝혀진 내용에 따라 그 뜻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마홀(馬忽)
고구려 때 생긴 이 지명은 이두식 한자로 맞옮김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홀(馬忽)을 분석하면 마(馬)+홀(忽)로 볼 수 있다. 마(馬)는 고구려시대에 물(水)을 나타내는 매(買)일 가능성이 크다. 그 이유는 고구려의 지명을 신라시대에 한자로 변환하면서 나타나는 몇가지의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매홀군(買忽郡) > 수성군(水城郡) :현 수원
매성현(買省縣)[一云 馬忽] > 내소군(來蘇郡) :양주군 주내면
마홀군(馬忽郡) > 견성군(堅城郡) :현 포천군
즉 買와 馬의 신라시대 발음은 [m l ]로 보아서 두 글자가 같이 물(水)을 의미한다. {홀(忽)}은 고구려의 지명에 붙는 접미사로 신라시대에 성(城) 또는 골(谷)으로 한자로 변환 시킨 것으로 보아서 그 뜻이 크게 다르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마홀(馬忽)이란 지명을 재구성하여 보면 '물골' 즉 현재의 지형에서 알 수 있다시 피 영평천과 포천천을 안고 있는 '물이 많은 고장'이란 뜻으로 추정된다. 특히 인근에 있는 '수원산(水源山)'이 있어서 그 증거를 뒷받침하고 있다.
마홀(馬忽)을 '높은 지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는 마(馬)를 {?},{??}로 보아서 해석한 것으로 '높다'는 뜻을 나타낸다. 여기에 홀(忽)이 붙어서 생긴 이름으로 해석 한 것이다.
2. 명지(命旨)
이 지명은 그 의미를 찾기가 어렵다. 단지 '지(旨)'가 높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마홀(마홀(馬忽)과 관련을 지을 수는 있으나 확연치는 아니하다.
3. 견성(堅城) / 청성(靑城)
신라시대의 이 지명은 각각 '굳은 성', '푸른 성'으로 번역되는 바와 같이 완전히 한자로 변한이름으로 우리말의 뜻은 아니다.
4. 포주(抱州)/포천(抱川)
고려 때 지어진 포주(抱州)는 조선조에 포천(抱川)으로은 바뀌었으나 그 근본의 의미는 같은 것으로 보인다. 이 지명이 어떤 동기에서 이렇게 지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내'를 안고 있는 지세로 보아서 포주(抱州)/포천(抱川)이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
포천읍(抱川邑)
1. 신읍리(新邑里)
본래 포천군 서면(西面) 지역으로 시장이 섰으므로 장거리 또는 장가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포천군청을 이곳으로 옮기고, 새로 생긴 읍이라하여 신읍리라 하였다.
군청이 1930년대에 군내면 구읍리로부터 현 위치로 이전됨에 따라 당시 포천면 사무소도 自 作里로부터 신읍리로 이전되었으며, 그때부터 상인들이 신읍리 일대로 모여들어 상업이 번창 하게 되었다.
포천읍 신읍리를 중심으로 시골 마을 사람들이 신읍리로 모여들게 되어 이곳을 '장거리'라 부르게 되었다.
2) 원모루(원몰, 원우동)(마을)
옛장터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고을 원(員)이 살던 곳이라 하여 원모루라 부른다. 어원으로는[모루]라는 말은 [몰]에서 나온 말로 山 또는 높은 지형을 뜻하므로 이곳은 고을 원이 살던 언덕 또는 비교적 높은 지대를 의미한다. 진군아파트 앞쪽 포천여자중학교 입구를 말한다.
3) 점말(粘말)(마을)
해방촌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오지그릇 굽는 가마가 있었다. 일명 원모루라고도 한다.
4) 해방촌(解放村)(마을)
구장터 남쪽에 새로 된 마을로 6·25 사변 때 38선 이북에서 피난은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포천여자중학교 근방 진군아파트가 있는 곳을 말한다.
5) 호병동(虎甁동)(호병골)(마을)
동네 전체의 모습이 호리병같이 생겼다는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됨. 장거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왕방산으로 오르는 길목으로 마을의 지형이 甁의 형태를 띠고 있어 회병(廻甁)골이라 불리워지다가 변음되어 호병(虎甁 또는 戶甁)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호병골>회병골 가능성이 크다.
6) 역장골(마을)
나라에 진상을 위한 소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소를 사고 파는 장사가 열리던 마을.
7) 원적골(원적굴)(골짜기)
호병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부터 사람들이 소풍을 많이 왔다. '원족'은 일본어로 소풍이라는 뜻이다. 일제 때 생긴 이름으로 추정된다.
8) 넉딱굴(골짜기)
마마로 죽은 사람의 넋을 달래기 위해 빌었던 곳. 녹딱굴은 넉딱굴의 다른 이름.
9) 무럭고개(고개)
장거리에서 신북면 심곡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무릎고개, 무럭고개, 물어고 개라 하고 한자어로는 問禮峴이라 한다.
10) 배무덤(골짜기)
절터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배씨(裵氏)의 무덤이 있었다.
[배]는 어원적으로 [받]에서 나온 말로 山을 뜻하기도 한다. 이 지명은 [배+무덤]으로 보아 높은 곳에 있는 산소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11) 보덕사(普德寺)(절)
호병골 서북쪽 왕방산에 있는 절이다. 이 절은 신라 말엽인 872년 경에 도선국사가 정업을 닦을 때, 국왕이 친히 행차하여 격려하였다 하여 산을 왕방산, 그 절을 왕방사라 했다고 하며, 그 사지(寺址)에 30여년 전 청매화상이 지금의 보덕사를 복원하였다고 한다. 또 일설에 의하면 조선조 이태조가 왕위를 물려 주고 함흥에 있다가 서울로 환궁하는 도중 왕자들의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의 소식을 듣고, 아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 산에 있는 사찰을 방문, 체류하였다 하여 왕방산, 절 이름을 왕방사라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12) 진등(등성이)
은등 북쪽에 있는 긴 등성이다. 산등성이가 길게 늘어져 있는 곳. 진등이라고도 한다.
긴등>진등(구개음화)에 의하여 재생성된 땅이름으로 보인다.
13) 덕밭(밭)
마마로 죽은 아이들을 위해 덕을 쌓아 마마로 죽은 아이들의 혼령을 달래던 곳이라고도 하며, 마마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위해 덕을 쌓아서 아이들이 살기를 빌던 곳이라고도 한다.
14) 가마안(터)
산의 형태가 가마와 같이 생겨서 그 밑부분은 그늘이 져 4월까지도 눈이 녹지 않는 일대.
15) 혹골재(고개)
횟골재라고도 부른다. 횟돌이 많이 나오는 고개.
2. 어룡리(魚龍里)
본래 포천군 서면(포천읍) 지역으로서 다섯 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국이라하여 오룡골 또는 어룡동, 어룡이라 한다.
마을 뒤편으로 조득산이라는 험준한 산이 있는데 왕방산에서 내려보면 윗쪽으로는 용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으며, 아래쪽으로는 냇물이 흘러 물고기가 많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마을에 있는 잉어가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어룡리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용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도록 조득산의 용머리 부분이 무겁지 않도록 나무를 심지 않고 황무지인채 남겨두었다고 한다.
어룡리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오백주 선생의 효자 정문이 있다. 효자 오백주 선생은 조선조 숙 종때의 무관으로 남달리 효성이 극진했던 분으로 기록에 전해온다. 선생은 인조 21년 이 고 장 어룡리에서 출생하여, 약관 23세에 무과에 급제, 그 후 벼슬이 귀성도호부사(龜城都護府 使)와 귀성진병마첨제사(龜城鎭兵馬僉制使)에 이르렀는데, 그 성품이 청렴하고 고결하여 신망 높은 청백리로서 공직생활을 일관했다. 또한 부모님 공경하기에 지효한 바, 하루는 부친이 위독한 병환이라는 급보를 받고, 급히 귀향하는 길에 고개를 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때 사나운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앞을 가로 막으매, 선생은 "아무리 생각없는 미물일지라도 부친의 급환으로 가는 사람의 길을 막음이 어찌 도리이겠느냐"고 크게 한마디 꾸짖자, 호랑이는 순순히 물러 갔다고 한다.
선생이 집에 당도하여 부친의 병세를 살피니 필히 산삼(山蔘)과 석밀(石蜜)이 필요한지라 그것들을 구하기 위해 몸소 산속을 헤매게 되었다. 그런데 우연히 전날의 맹호가 나타나 등에 타라는 시늉을 하여 올라 탔더니, 호랑이는 쏜살같이 달려 예전의 그 고개에 선생을 내려 놓았다. 살펴보니 산삼이 있었고 그 때 또 벌 한 마리가 날아와 안내하니 바위틈에서 석밀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나라에서 알고 효자 정문을 내렸다고 한다.
2) 구성골(골짜기)
구성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골짜기에서 유래된 이름.
3) 갓뫼봉(산)
어룡골 서쪽에 있는 산으로 갓모(갈모)처럼 생겼다.
어원적으로는 「갓+뫼+봉」 으로 이루어진 말로 모두 山을 의미한다.
4) 배걸(바위)
어룡골 서쪽 왕방산 꼭대기에 있는 바위로 이곳이 바다가 되어 있을 때 이 바위에 배의 닻줄을 걸었다고 한다.
[배+걸] : [배山+골(谷)] 산의 바위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5) 비석거리(거리)
고을 현감들의 공덕을 기린 내용으로 보이는 비석이 도로변에 늘어서 있어서 붙인 이름이다.
3. 자작리(自作里)
문화 유씨 일족이 자작리에 정착하면서 "문화유씨촌"으로 불렸는데, 문화 유씨 스스로 마을을 만들었다고 하여 자작리(自作里)라고 한다.
자재기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 공문을 급히 보내기 위하여 설치한 역참이 있었던 곳으로 말이 쉬어 가던 곳.
3) 고인돌(자작리 지석묘)
파발막 남쪽에 있는 고인돌로 자작리 부락 민가 옆에 남아 있다. 평지에 조성된 탁자형의 북방식 지석묘로 하부가 약간 파손되었으나, 단변 지석이 1석만 없어지고 다른 부재(部材)는 남아 있어, 원형을 살피는데는 지장이 없다. 화강암으로 이루어 졌으며, 내부의 유물이 모두 도굴 당하여, 어떤 유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4) 대장의 터(대장아터)(들)
자재기 북쪽에 있는 들로 고려 시대에 조선 태조 이성계 장군이 살았다고 한다. 큰 인물이 나온다는 터.
5) 미럭동(골짜기)
절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미륵이 있었다고 한다.
6) 안장바위(바위)
자재기 서북쪽에 있는 바위로 말 안장처럼 생겼다.
7) 거북바위(바위)
99칸짜리 집을 가졌던 유인선의 집이 불타게 되자 유인선 효우비의 지단 거북바위가 목을 설운리 쪽으로 돌려서 자작리에서는 큰 인물이 나오지 않고 설운리 사람들이 부유하게 되었다 함
4. 선단리(仙壇里)
선단산 밑에 위치하여 선단이라 하였는데, 마을 뒤에 위치한 왕방산에 큰 바위가 있어 주민들이 이곳에 제단을 만들어 놓고 신선이 내려 온다고 믿어 이 마을을 선단리라 부른다.
추바위), 너러바위, 고리바위, 지게바위, 규융바위, 두부바위, 떨어진 바위, 아궁바위, 갓 모바위, 설통바위
[들] : 감장서들, 꽃두들기, 버들개, 서낭댕이들, 신배남끝, 큰서들, 희배나무들
[논] : 둑새논, 매몰고래논, 세골논, 안고개논
[밭] : 늘밭
[개울] : 너멋개울, 정자말개울
[산] : 가사봉, 화봉산, 태봉산, 선단산, 둥글재산, 피난봉, 형제봉
[등성이] : 말궁댕이, 배미끝
[터] : 왕뱅이골, 이상아터, 똥구뎅이, 배무덤, 곰방새, 양물터
[묘] : 말무덤, 장군묘
[굴] : 굴아구, 박쥐굴
1) 알매(마을)
이 부락 앞쪽에 있는 산의 모양이 새가 알을 품고 있는 모양과 같다고 해서 '알매마을'이라 고 하며, 또한 이 마을이 선단 2리 마을 가운데서 가장 낮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아 랫말'이라고도 한다.
2) 묘소(묘소말)(마을)
선단 남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조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묘가 있다. 조선
후기 헌종이 1894년 23세로 승하하자 왕위를 계승할 분이 없어 논란끝에 전계군의 아들 元範을 왕으로 맞았으니 이분이 철종이다. 후에 이미 별세한 전계군을 전계대원군으로 추봉하였다. 전계 대원군은 헌종 7년(1841)에 57세로 하세하였으며, 양주(楊州)에 안장하였다가 병진년(丙辰年)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향토 유적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3) 모텡이말(모탱이말)(마을)
산 모퉁이를 돌아가서 마을이 있다고 하여 유래된 마을이름.
4) 정자동(마을)
마을 한 가운데 커다란 정자나무가 있어 커다란 그늘을 드리워 주고 있다. 그 그늘에서 쉬어 가기도 하고 또 마을에 큰 일거리가 있을 때는 이 나무 밑에서 온 동리 사람들이 모여 회의도 한다. 그래서 이곳 마을을 '정자동'이라 하고, 또 이 일대를 정자밭, 정자논이라 한다.
5) 뒤주골(두릿골)(골짜기)
쌀 뒤주같이 쑥 들어간 모양에서 유래. 옛날에 개두룹이 많아서 이를 따라서 이름 붙임.
6) 고리바위(바위)
옛날 왕방산 일대가 홍수로 물에 잠기었을 때 배의 고리를 걸었다는 바위.
7) 말무덤(묘)
말의 주인이 전쟁터에서 죽게 되자 주인의 목을 물고 와서 죽었기 때문에 말의 무덤을 만들어 준 것임. 어원적으로 [?]+[무덤]으로 보면 [?]이 높은 곳이라는 뜻으로 높은 곳에 있는 무덤을 이른다.
5. 설운리(雪雲里)
옛날 이곳 일대가 물에 잠겨 바다처럼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왕방산 마루에 배말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때의 홍수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는데, 이때 이 마을에 살던 이무기가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하였다고하여 이 마을을 해룡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950년전까지 군소재지가 군내면 구읍리에 있을 때 이곳까지는 거리가 삼십리라하여 '서른'이란 말과 같은 의미로 서른리로 불리다가 법정리 지정 시 비슷한 어감으로 설운리로 정하였다고 한다.
해룡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기왓가마가 있었다고 하여 기와골(와곡)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함.
2) 제청말(마을)
진솔모루 서쪽에 있는 마을로 달성 서씨의 제청이다. 약봉(藥峰) 서성(徐暉)선생이 조상의 묘 를 쓰기 위해 자리를 찾고 있는데, 난데 없는 노루 한 마리가 나타나 이상한 몸짓으로 묘자리를 잡아 주었다고 한다. 그후 서씨 문중에서는 이곳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제당을 지어 놓았는데, 그 후로 이곳을 제청말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3) 서약봉묘(徐藥峰墓)
제청말 뒤에 있는 약봉 서성(徐暉)선생의 묘로, 선생은 명종(明宗) 13년에 출생해서 선조(宣祖) 1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兵曹左郞)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함경도에서 토민 국경인(鞠景仁)의 반란으로 잡혀갔던 왕자와 재상을 지략을 써서 구해냈다. 광해군 때 김제남(金悌男)의 무고로 11년간 귀향살이를 하였고, 인조반정(仁祖反政)으로 다시 조정에 복귀하여 형조와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이괄의 난을 평정하다가 1631년 74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이곳 설운리에 부모님 묘역의 바로 옆에 안치되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묘역에 얽힌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공이 돌아가시고 정승, 판서의 자손들과 나라에서 묘역을 찾기에 분분하다가 몇 개월이 흘렀는데, 결국은 생전의 유시도 있고하여 하는 수 없이 자리를 잡고 장례일정을 잡았다. 그리고 당시 풍수지리설에 따라 지관을 이곳에 안내하니, 지관이 보고 하는 말이 천하의 명당이나 약 1km 전방에 우뚝 속아 있는 바위가 앞을 막으니 후손의 번성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장례일이 하루전으로 임박하였다. 여러 차례 의논을 한 후 우선 이곳에 모시고 나중에 이장하기로 하고, 장례를 치르기로 하였다.
그런데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이 장례 전날 일어났다. 멀쩡하던 날씨가 갑자기 먹구름과 함께 질풍과 광란의 뇌리를 몰고 와서 폭우와 벼락이 이곳 저곳을 난타하더니 문제가 된 우뚝 솟은 바위를 사정없이 강타하였다. 이튿날 장례일에 이 사실을 알고 그 후부터 이 바위를 벼락바위라 명명하고, 자손들이 그 자리를 둘러보고 갈라진 바위 틈에 향나무 몇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이 벼락바위는 하송우리 삼거리에서 소흘면사무소로 가는 좌측 약 300m 지점에 지금도 깨어진 채 향나무와 함께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연유로 공의 제2자이신 전첨공 경수(이조판서)도 이 벼락바위에서 약 1km 떨어진 태봉산에 묘역을 잡았으니, 이곳은 지금 송우국민학교 바로 옆자리이다. 후손들은 포천에서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4) 화봉산(산)
이항복의 서원과 산소가 있는 곳으로, 임진왜란때 이 산위에서 횃붓을 피워 위험을 알렸다고 하여 화봉산이라 한다.
5) 해룡산(산)
2000년전 해룡산에 큰 홍수가 나서 그 산에 살던 이무기가 그 물로 인해 용이 되었다. 지금 도 산에 조개껍질이 많다.
6. 동교리(東橋里)
장마가 지면 물살이 세어서 다리가 잘 뜨므로 뜬다리, 동다리, 또는 동교라 하였다. 또는 이 마을 동쪽이 설운리와 통하는 커다란 다리가 있어 이 마을을 '동다리'라 불러 왔다고 한다.
이 마을 서북쪽에 胎峰山이 있어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松林이 무성하였으며, 이 무성한 송림 모퉁이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해서 '솔모루'라 한다는 것이다.
2) 갈뫼(추산동)(마을)
연봉모루 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가래나무가 많았다. 이곳은 농사를 많이 지어 부촌(富村)이었던 관계로, 춘궁기를 맞아 다른 마을 사람들이 모두 곤궁을 겪을 때라도, 이 마을 사람들만은 봄도 가을처럼 식량이 풍족했다고 해서 '갈모'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3) 술막(酒幕)(마을)
이곳은 江原て咸鏡 양도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숙박시설과 상업이 매우 번창한 곳이 다. 또한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이태조도 함흥으로부터 이곳을 거쳐 한양에 도달했다는 유래담도 있다. 이곳을 場이 번성하여 '장터'라고도 부른다.
4) 곤당골(渼洞)(마을)
지금으로부터 약 220여 년 전 이씨 일가족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았다고 한다. '곤당골'이란 胎峰山의 玉女峰이 곱고 아름답다고 해서 이곳을 '곤단골'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5) 연봉모루(蓮峰隅)(마을)
송우리 京元街道 양편에 발달한 마을로 이성계 장군이 이곳에서 留宿하였는데, 이 御輿의 뜻 으로 '輦'자와 '小岡'의 뜻인 峰과 모퉁이라는 隅를 떼어 '蓮峰隅'가 유래되고 이에서 연꽃(蓮花)의 의미로 변하여 지금은 '蓮峰隅'라 쓰게 되었다.
6) 산막골(山幕골)(마을)
송우리 가운데에 있는 작은 마을로 상송우리와는 멀리 떨어져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는 崔氏 의 묘를 지키는 산막이 있어서 이곳을 '산막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7) 구호주택(마을)
솔모루 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광복 뒤 피난민 구호주택으로 이룩되었다.
8) 이삿골(이사과골)(골짜기)
사과(司果)라는 벼슬을 하던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곳에서 이주하여 살게 된 이후 이곳 을 '이사과골'이라 불렀는데 이 말이 줄어엇 '이삿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9) 태봉산(산)
송우리 서북쪽에 있는 산이다. 예로부터 이곳은 송림이 무성하고 경관이 아름답다고 해서 옥녀봉(玉女峰)이라고도 했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의 소생인 貞喜王女 阿只의 태를 태워 재를 매장한 뒤로 태봉이란 이름이 생겨 났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현재 석대가 남아 있어 옛 태봉임을 말해 주고 있다.
10) 젖떼는개울(내)
연봉모루 앞에 있는 내이다. 마을의 부인들이 아기의 젖을 뗄때 이 물로 젖을 씻으면 젖이 떨어졌다고 한다.
11) 젖우물(우물)
태봉산 북쪽 밑에 있는 우물이다. 부인들이 아이를 낳은 뒤 젖이 안 나면 여기에 와서 빌었 다고 한다.
2. 이동교리(二東橋里)
본래 포천군 내소면의 지역으로서, 이동교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수내리를 병합하여 이동교리라 하고 소흘면에 편입시켰다.
이동교리란 포천군의 남북으로 흐르는 한내(포천천)의 다리 중 두번째 동교가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동교리는 [동다리]라고 하였으며, 큰비가 오면 동동 뜨는 다리라는 뜻으로 전함.
부인터 남쪽에 있는 마을. 420여년 전 평택 임씨인 林得義가 임진왜란 때 洪州에서 세운 전공으로 말미암아, 선조(宣祖)로부터 이 땅을 하사받아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임씨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한편, 이 마을 남쪽 산기슭에는 온수가 나오는 곳이 있었는데, 이 마을이 그 물의 안쪽에 있었기 때문에 '물안(水內)'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이 마을에 난초가 무성했다고 하여 무란(茂蘭)이라 부른다고도 하지만, 그것은 '물안'이 '무란'이라 발음된 것을 한자로 표기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 추측된다.
2) 용상골(마을)
부인터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조 태조가 함흥에서 한양으로 가던 길에 이곳에서 자 고 갔다고 하여, 임금의 침상이란 뜻으로 '용상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3) 부인터(婦人터)(마을)
조선 태조 이성계가 용상동에서 주무시게 되었을 때 王妃는 이곳에서 주무시게 되었다고 해서 '婦人터'라고 한다.
4) 축석령(고개)
무란 남쪽에 있는 고개. 포천에서 의정부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 고개에 얽힌 일화는 다음과 같다. 포천읍 어룡리에 오백주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벼슬살이를 하던 중에, 부친이 병환으로 위급하다는 급보를 받고, 급히 고개를 넘게 되었다. 이 때 마침 맹호가 앞을 가로 막으며 덤비려 하였다. 그가 부친의 위환으로 가는 효의 길을 가로 막는 까닭이 무어냐고 소리치자, 호랑이는 곧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하여 집에는 무사히 도착하였으나 산삼과 석청이 있어야만 부친의 병환을 고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선비가 산삼과 석청을 찾아 산속을 헤메고 있는데, 그 호랑이가 나타나서 등에 타라는 시늉을 하더라는 것이다. 호랑이 등에 올라 탔더니 쏜살같이 달려 이 고개에 내려 놓았다. 그리하여 선비는 그 고개 근처에서 산삼을 구할 수 있었다. 다시 석청을 구하려고 할 때, 마침 벌 한마리가 안내하여 따라가 보니 바위 틈에 석청이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이 고개를 축석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중말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이곳에 시제를 지내는 무덤이 있는데, 시제 때마다 마을 어린이들이 떡을 얻어 먹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4. 이곡리(梨谷里)
본래는 포천군 외소면의 지역인데, 산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므로 배울, 배곡 또는 주곡, 이곡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 때 송현리를 병합하여 이곡리라 하고 소흘면에 편입시켰다. 이 마을은 원래 마을의 지형이 배(舟)를 닮았기 때문에 배골(舟谷)이라고 하였는데, 뒤에 이곡(梨谷)으로 바뀌었다.
조선조 철종 때 왕이 광릉 세조대왕 능에 참배하러 가던 길에 이곳을 지나게 되었다. 마침 꽃이피는 계절이라 이 마을에는 배꽃이 만발하였다. 마을의 봄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왕이 마을의 이름을 물었다. 주위에서 배골(舟谷)이라 대답하니, 그보다는 배골(梨谷)이라 하는 것이 더 어울리겠다고 하였다. 이후부터 이곡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 앞에 소가 누운 것 같은 고개(峴)가 가로 놓여 있어서 처음에는 臥牛峴이라 불렀 으며, 속칭으로는 쇠현(牛峴)이라 하였다. 그 '소'가 다시 '솔'로 변하여 '솔개(松峴)'로 변했다는 것이다.
3) 배골(梨谷)(마을)
이 마을의 地形이 배(舟)를 닮았다고 해서 배골(舟谷)로 불리우던 곳이었으나 조선 哲宗 이 光陵 세조대왕능에 참배하러 가던 때, 마침 이곳을 경유하게 되었었다. 마침 계절이 꽃피는 때라 배꽃이 만발하여 아름다운 봄경치가 한창 무르익어 철종은 이 마을 이름이 배골(舟谷)이라 하니 그보다는 배(舟)를 배(梨)로 고쳐 배골(梨谷)이라 하는 것이 더 어울리겠노라하여 이후부터는 배골을 '이곡'(梨谷)이라 부르게 되었다. 철종은 광능에 참배할 때마다 이곳을 경유하였는데 그 까닭은 임금은 壇에는 行幸할 수 있어도 묘소에는 행행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향적산 아래에 있는 마을. 북으로는 이가팔, 초가팔리와 접경을 이루며, 동쪽으로는 한성 골, 죽엽산을 바라보고, 남쪽으로는 삼거리 저수지와 노고산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노고산이란 어떤 사람이 늙은 고모님(姑,할미)을 모시고 그 산밑에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늙을 노(老)자와 고모 고(姑)자를 합친 것이다. 고모가 죽은 뒤에 그 산 밑에 묘를 썼으므로 '고모앞'마을이라 하였으며, 이것이 변음되어 고모앞으로 되었다고 한다.
2) 한성골(霞城洞)(마을)
이 마을 뒤로는 죽엽산이 둘러싸고 있는데 노을(霞)이나 안개(霧)가 마치 성(城)을 둘러싸 은 듯이 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 이 마을을 '하성동'(霞城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 '하성동'이 다시 변한 것이 '한성동'이다.
7. 이가팔리(二加八里)
본래는 포천군 내소면에 속한 지역이다. 서울에서 북쪽으로 80리에 2마장을 더한 지점이라 하여 이가팔리라 하였다. 또 큰 마을이라 하여 큰말 또는 대촌이라고도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때 초가팔리 일부를 병합하여 이가팔리라 하고 소흘면에 편입시켰다.
[마을] : 갈오이, 동묏말, 등산너머, 방아다리, 벌말, 아래끝, 윗끝, 한성골
[골짜기] : 뒤룽밭골, 너믄언골, 마름맏답, 새능골
[다리] : 이가팔리교, 한내다리
[고개] : 돌배나무고개, 방아다리고개, 샛말고개, 황토고개
[들] : 노랑축, 능위, 민드레미, 앞보들, 오린개, 우물앞, 피다리
[논] : 왕뒤, 꽁지논, 보아귀논, 부안자리, 서답내, 장푸샘
[밭] : 고모리밭
[개울] : 왕뒤개울, 한내
[소] : 노랑축보, 마루보
[산] : 갬재, 꽃동산, 유봉절산
[등성이] : 진딩이
[우물] : 장푸샘
1) 갈오리(마을)
큰말 북쪽에 있는 마을. 애초에는 이 마을 중앙에 연못이 있었는데, 온 연못을 엎을 만 큼 연이 무성하더니, 연은 차츰 없어지고, 사방의 산에 칡이 무성하여 뚝 모양을 만들었으므로, 갈로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2) 방아다리(마을)
동산말 남쪽에 있는 마을. 고모리와 초가팔리로 통하는 길목에 용자 모양의 다리가 있어 '용교(沃橋)'라 하는데 속칭으로는 방아다리라고 한다.
8. 초가팔리(初加八里)
서울에서 북쪽에서 80리가 되므로, 초가팔리라 한다.
[마을] : 능, 붉은덕이, 음성말, 안말
[골짜기] : 가장골, 당골, 대추나무골, 밤자골, 응골, 제논골, 풀무골
[다리] : 외다리
[고개] : 박석고개, 새적고개, 선황당고개, 함자고개
[바위] : 가마바위, 검바위, 장사바위, 평풍바위
[들] : 갬재, 공세논골, 동개, 제두리, 중보들, 피다리
[논] : 외배미, 왜미논, 장구논
[개울] : 앞개울
[소] : 음성말저지, 흥안저수지, 중보
[산] : 검바위산, 방아재동산, 향적산
[터] : 옻물, 산제터
[우물] : 돌우물, 오래물
[모퉁이] : 아홉모랭이
1) 붉은덕이(紅岸말)(마을)
음성말 남쪽에 있는 마을. 이 마을 뒤에 산이 하나 있는데, 이 산에는 어찌나 나무가 없던지 붉은 흙이 그대로 드러나 이 마을을 '붉은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2) 음성말(마을)
초가팔 동남쪽에 있는 마을. 이곳에 살던 성천경의 7대조인 성해응이 음성 현감을 지낸 일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음성 현감이 사는 마을'이란 뜻으로 마을 이름을 음성말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3) 벌말(坪村)(마을)
이 마을은 약 300년 전에 강원도 방면으로부터 이주해 온 金海 金氏가 개척한 마을로, 마 을 전체가 넓은 벌판(原野)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예로부터 이 마을을 '벌말'이라 불렀다. 벌말은 벌판마을이란 뜻이다.
4) 능말(陵里)(마을)
이 마을에는 高敞縣監 趙邦輔의 묘가 있는데 그 규모가 커서 묘라기보다는 차라리 陵과 같다고 해서 이 마을을 '능말'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무봉리 절골에서 북쪽으로 깊이 들어간, 향적산 남쪽에 있는 골짜기. 이곳에 전주 이씨 밀산 군의 산소와 신도비가 있다. 밀산군은 선조의 생가 형님의 손자이다.
2) 절골(사곡)(골짜기)
거친봉이 동쪽에 있는 골짜기. 조선조 선조 때 이 마을 뒷산에 사찰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는 흔적이 없다. 다만 이 산봉우리에 있는 약좌현이란 곳에 석불 하나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석불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송산에 사는 어떤 사람이 이 석불을 도적질하게 되었는데, 그날 밤 그의 가족이 모두 심함 복통을 앓게 되었다 한다. 그래서 그 다음날 석불을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고 한다.
3) 충목단(忠穆壇)(단)
마골 북동쪽 곧 무봉리 27번지에 있는 단이다. 이 단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죽은 사육신 중 한 분인 유응부와 한남군 이어(李?), 그리고 양치(楊治)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데, 유림들이 춘추로 제사를 지낸다.
4) 막골(幕골)(마을)
이 마을은 조선조 이태조가 咸興으로부터 還幸할 때 二東橋里 龍床洞에서 주무실 때 후방경 계로 이곳에 哨兵들이 막(幕)을 치고 경계하였다고 해서 이곳을 '막골'(幕谷)이라 부르게 되었다.
제3절 군내면(郡內面)
조선조 시대에 포천현아(抱川縣衙)가 있어 현내면(縣內面)이라 부르던 곳으로, 1905년 군청이 이전된 후 군청이 있던 곳이라 하여 군내면(郡內面)으로 개칭하였다. 군내면은 포천현(抱川縣)의 중심지였던 관계로 조상의 얼이 담긴 고적(古蹟)과 유품(遺品)이 많다.
1. 구읍리(舊邑里)
포천군청이 있었으므로 포천읍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군청을 서면(포천읍) 신읍리로 옮기고, 이곳을 구읍리라 하였다.
원래 이곳은 큰 개울이 있어, 그 물이 맑고(淸) 시원해서(凉) 이 개울물을 청량천(淸凉川)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은 큰 뚝을 막고 봇물을 만들어 지금과 같은 넓고 기름진 농경지를 만들어 후손들이 번창하고 마을이 크게 발달하였다 한다. 그래서 이곳을 '청량동'이라 부르고, 속명으로는 '청량개'라고도 한다.
2) 과부새미(샘)
구렁말 서쪽에 있는 샘으로, 거는말에 사는 과부가 날마다 이 우물가에 나와 울더니, 어느날 신발을 벗어 놓고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3) 무네미(논)
어원적으로는 [물+넘+이]로 물이 넘치는 곳을 뜻한다. 무너미>무네미로 변한 것은 음운동화 에 따른 변화이다.
좌의동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부터 이곳은 저수지와 방축이 많아 동네 사람들이 목욕을 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을 목욕동(沐浴洞)이라 한다.
2) 나막신고개(고개)
메기안 북쪽에 있는 고개로, 이 고개에서 움을 파고 살면서 나막신을 만들어서 붙여진 이름
3) 고드네벌판(들)
목욕동 서남쪽에 위치한 넓고 곧은 들.
5. 명산리(鳴山里)
'울뫼>울미', 한자로는 '鳴山'이라 한다.
이 마을에 씨족사회를 이루고 있는 고성이씨(固城李氏) 한 사람이 연로하신 부친을 모시고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효성이 지극한 이씨는 부친에게 맛있고 좋은 음식을 대접하지 못하는 것이 늘 마음에 괴로왔는데, 연로한 부친은 병을 얻어 그만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씨는 생전에 못다한 효심으로, 돌아가신 아버님의 묘라도 좋은 자리에 쓰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러나 집안이 어려워 지관을 모실 형편도, 또 좋은 명당 자리에 묘를 쓸 형편도 못되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하얗게 샌 다음날 새벽 문밖을 나서는데, 장삼을 걸친 도사 한 분이 마을 어귀에서 무서운 시선으로 한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효자 이씨는 그 도사에게 다가가서 그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한곳을 가리키며 묘자리로 너무나 좋은 곳이라고 탄복하며 깃다리(지금의 좌의2리) 쪽으로 홀연히 떠나 버리고 말았다. 효자 이씨는 이곳이야말로 하늘이 주신 명당이라 생각하고 墓土를 판파니 산 전체가 울리더라는 것이다. 그 후부터 '명산리' 속칭 '울뫼'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 정체 불명의 도사가 무학대사(無學大師)라는 설도 있다.
수원골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가평에서 진실하게 머슴을 살던 사람이 사경을 팔아 독립할 목적으로 포천 지방으로 오던 도중, 도사 한 분을 만나게 되어, "어디를 가면 잘 살 수 있습니까?"하고 물으니, "배를 깔로 앉아라."하기에, 배를 찾아 다니던 중 현재의 직두 2리가 배모양으로 생겼기에 자리를 잡고 부락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그 후로 사람들이 이야기 하기를 머슴을 비유하여 놈배라고 불렀고, 이것이 논배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큰 배나무가 논 가운데에 서 있었다고 한다. 농사짓는 산골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2) 피머리(稷頭里)(마을)
어원적으로 [피+머리]로 볼 수 있다. [피]는 稷으로 볼 수 있고, [머리]는 높다는 뜻으로 재해석이 가능하므로 이곳에 피밭이 비교적 높은 지역에 놓였을 것 같다. 주민들은 피를 血과 연결시키서 6·25때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다.
3) 귀신골(골짜기)
돌때린골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날이 궂으면 귀신이 나타났다 하여 귀신골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4) 거북바위(바위)
피머리에 있는 바위로 거북처럼 생겼는데, 옛날에 장사가 목부분을 치니, 금이 가면서 붉은 피가 나왔다고 한다.
큰말 남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깊고 우묵하여 옛날에 난리가 나면, 사람들이 많이 찾아드는 피난처인데, 이것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불쌍한 난민들에게 음식을 먹여 주어 구제를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메기울'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또한 이러한 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한숨 짓고 탄식하였다고 해서 '탄곡'이라고 하기도 한다. 상성북 2리에 있는 마을. 먹이울>메기울
2) 범허리[범어리, 버머리](호명동)(마을)
송정 동쪽에 있는 마을로 범허리처럼 생겼다고 하며, 또 이곳에서 범이 많이 울었다하여 호명동이라고도 한다.
3) 숯탱이(들)
샛말 서남쪽에 있는 들로 땅이 숯처럼 검다고 한다.
4) 정문고개[잣뒤고개](고개)
샛말에서 범머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이곳은 지금도 그 후손들이 살고 있는 全州李氏 이원희씨의 11대 조부가 효부로 소문이 나서 李子門을 세웠으므로 '정문고개'라 부른다. 또 군내에서는 잣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곳이기도 한다. 마을 앞뒤에는 잣나무가 지금도 많아 '잣뒤'라 부르기도 한다.
어원적으로 [잣뒤]는 [잣(城)+뒤(北)]라는 뜻으로 잣나무가 많다는 말은 [잣]에서 만들어진 말로 미루어 생각할 수 있다.
5) 탄곡(마을)
지금의 메기울을 일컫는 말로써 여러 가지 유래담이 전하고 있다. 그중 呑哭은 마을이 산에 삥 둘러싸여 있어 들어갈 때는 가는 길이 험해서 울고, 나올 때는 산에 정이 들어서 울었다고 하는데서 유래되었고, 呑谷은 집에 들어가는 입구는 보여도 나오는 출구가 보이지 않아 목구멍으로 음식을 삼키는 것과 같아서 지어진 이름이다. 그리고 글씀바위에 새겨진 한자 '탄'이라는 말에서 그 동네 전체를 일컬었다는 설이 있다.
6) 호랑바위(바위)
마당에서 일하던 청년이 호랑이에게 물려가면서 소리를 치자 마님이 뛰쳐나와 호랑이를 쫓 아가다가 보니 청년이 소리를 쳐 무서워서 내려와 훗날 다시 가보니 호랑이 머리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호랑바위'라 불렀다. 큰말에 있는 뒷동산에 위치하고 있다.
아랫성뒤 서쪽에 있는 마을로 현재 포천실고 뒤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뒤에 있는 白石을 깎 아 구읍리에 있는 미륵불 머리를 씌웠더니, 백석마을 사람들이 자기 마을 휜돌을 가져간다고 시비를 걸면서, 그 흰돌을 제 위치에 갖다 놓고 다시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도, 흰돌이 다시 미륵불 머리에 씌워져 있었다고 한다. 그 뒤로 이 마을은 흰돌, 곧 백석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함.
2) 자래울(자라울 鼈洞)(마을)
자라와 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자라울로 불러오다, 자래울로 변음되어 불리고 있으며 별동이 라고도 부른다. 지금도 암자리와 숫자라 같이 생긴 바위가 있다.
하성4리에 있는 마을로 마을 어귀에 자라 모양의 커다란 바위가 있음.
3) 이문바위(바위)
반월산성 밑에 있는 바위로 '이문 할머니'라고 하는 사람이 성을 쌓기 위해 바위를 앞치마 에 담아 날랐는데 그 바위가 지금의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문 할머니를 '천태성 마귀할멈'이라고 하여 인간이 아닌 하늘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제 4절 내촌면(內村面)
본래 죽엽산 안쪽이 되므로 내동면(內洞面)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내동(內洞)의 內자와 동촌(東村)의 村자를 따서 내촌면이라 하였다.
1. 진목리(眞木里)
조선조 태조 행차 때, 일행이 이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약 300m 떨어진 곳에 있는 참나무로 만든 정자에서 머물러 쉬고 갔다고 한다. 그 뒤로 동네 이름을 참나무정이(진목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진목정 부락은 마명리로 편입되었다.
내촌면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약 2km 떨어진 죽엽산을 등지고 포천 방면으로 가는 도로변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부터 점토 옹기를 굽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뚝배기 정도나 구워 내고 있으나, 옹기 굽던 가마 자리가 지금도 남아 있다. 마을 이름을 '점말'이라고도 부르는데, 언제부터 그렇게 불렸는지는 모르나, '점토마을'이 줄어서 '점말'이 된 것 같다. 또한 곡촌(谷村)이라고도 하는데, '곡촌(谷村)'이란 이름은 [골(谷)+말(村)]의 한자식 이름이다.
2) 맹촌마을(넘고개마을)(마을)
큰넙고개 중턱 내촌에서 가산면으로 통하는 도로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약 300여년전부터 지
금까지 신창 맹씨(新昌 孟氏)가 살고 있는데, 가구 수는 많지 않으나, 희귀한 성씨 때문인지 마을이름을 孟村이라 부른다.
3) 오림포(梧林浦)(마을)
내촌면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약 4Km 떨어진 곳에 있는 부락인데, 포천읍으로 통하는 도로 변에 있는 진목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시대는 알 수 없으나 오랜 옛날에 어진 인사(人士) 다섯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그 다섯 사람의 이름은 알 길이 없으나, 이때부터 이곳을 오인포(五人浦)라 불렀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음되어 '五林浦(梧林浦)' 또는 '오림개'라 불리고 있다. 지금으로 부터 약 330여년 전 남양 홍씨와 개성 이씨가 정착하여 개척하였는데, 홍씨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그 외 5개 성씨가 살고 있다. 안말, 바깥말, 건너말, 주말을 포함해서 오림포라 한다.
4) 노루목(골짜기)
홍촌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사냥꾼이 노루 사냥을 할 때 목을 잡았던 곳이라 한다.
어원적으로 넓어지거나 늘어진 목(지점)을 뜻하는 땅이름으로 이런 땅이름에는 사냥할 때의 목이란 뜻으로 전하는 곳이 많다.
5) 가마둔지보(보)
돌다리골 북쪽에 있는 보이다. 질그릇을 굽던 가마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돌 다리골 북
쪽에 있는 들의 농수로 이용된다.
6) 까치고개(같이고개)(고개)
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2Km 지점에 있는 죽엽산 부락에서 동막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옛날에는 죽엽사능로 땔감을 하러 다닌던 길목으로, 나무가 많고 맹수가 많아 혼자 다니지 못하고, 날짜와 시간을 정해서 여럿이 한데 모여 떼를 지어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고개 이름을 "여럿이 고개를 같이 넘었다"고 하여 '같이(同)고개'라 하였는데, 지금은 변음하여 '까치고개'라 부름.
7) 꽃말부리
모루끝 서쪽에 있는 산부리인데, 꽃이 많이 피는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됨.
8) 넙고개(廣峴)(고개)
가산면 우금리와 경계를 이루는 고개이다. 남북으로 이어지는, 완만하게 경사진 이 고개는 전
장 50여리나 된다. 고개 마루턱에 올라서 보면, 전후좌우가 탁 트여, 광활한 구릉지대를 이루고 다. 이렇게 크고 넓은 지형이라 하여 '큰넉고개'라 부른다. 서쪽으로는 작은 고갯길이 하나 있는데, 이 고개는 작다고 하여 '작은 넉고개'라 부른다.
넙고개>넉고개 는 음운동화로 발음이 변한 모습이다.
9) 봉화대
광현 동쪽 산 중턱에 있는 봉화대이다. 조선 말엽까지 국가 비상사태 시에 긴급 통신, 전령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옛날에 이 봉화대를 잉읍점(仍邑岾)이라 불렀다.
10) 술고개(쑥고개)(고개)
오림포 동쪽으로 약 1Km 떨어진, 진목리와 내리 기장대의 중간 지점에 있는 고개인데, 진목 리와 내리 기장대를 통하는 지름길이다. 옛날에는 이 고개 마루턱에서 서쪽으로 십여 미터를 내려가면, 샘물이 있었는데, 물이 아니라, 술이 솟아 났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고개를 넘어 다니는 많은 사람들은 컬컬한 목을 축일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샘물을 마실 때는, 엄격한 규율이 있어, 누구나 마실 수는 있으나, 꼭 한 잔씩만 마셔야 했다. 그러나 어느 욕심쟁이 술이 규율을 지키지 않고 한 잔을 더 마셨다고 한다. 그랬더니 이상하게도 술은 쑥 들어가고 맹물만 솟아 나오더라는 것이다. 이때부터 이 고개를 '술고개'라 부르게 되었고, 그 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음하여 오늘날에는 '쑥고개'라 부르고 있다. 지금도 날씨가 아무리 가물어도 샘물이 끊이지 않아, 오가는 이의 목을 축여 주고 있다.
2. 마명리(馬鳴里)
조선조 7대 왕 세조(世祖)가 왕위에 있을 때, 자신이 죽은 뒤 묻힐만한 명당 자리를 찾아 나섰다가, 하루는 신하들과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때 타고 가던 말이 갑자기 크게 울며, 이곳에서 서쪽으로 3Km쯤 떨어진 지금의 광릉으로 달려 가서는 우뚝 섰다. 전후좌우를 살펴보니 과연 명당자리이므로 이곳을 능자리로 정했다고 한다. 말이 울던 마을이라 해서 '말울이''말구리''마명(馬鳴)'이라 부르게 되었다.
말우리 북쪽 죽엽산에 있는 골짜기이다. 골이 넓어 능자리와 같은 형국이다. 능'은 크게 두가지의 어원을 갖고있다. 그 하나는 능(陵)의 뜻이고, 또 하나는 [는]이라는 어원에서 나온 넓은 곳 이라는 뜻으로 이 지역은 후자에서 발생하였다고 본다.
2) 도둑놈골(골짜기)
동막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도둑놈들이 숨어 있었다고 한다.
3) 거동길(길)
말우리 동쪽 무동산 중턱에 있는 길이다. 약 500여년 전 조선조 太祖가 함경도 함흥에서 서울 로 환궁할 때 이 길로 지나 갔다고 한다. 이후부터 왕이 지나갔다 해서 '거동길'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금은 나무가 우거진 산비탈길이라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 폐로가 되었다.
4) 승학기(沼)
말우리 마을 앞산 모퉁이 동남쪽 끝에 있는 소(沼)인데, 학이 하늘로 올라 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5) 애기바위(바위)
말우리와 참나무쟁이 중간 지점 도로변에 있는 바위이다. 예전에 이 바위 밑에서 아기를 낳았다고 하여 그렇게 불렸다고도 하고, 큰바위 위에 약간 작은 바위가 얹혀 있어, 그 모양이 아기를 업은 것 같이 보여 애기바위로 했다고도 한다. 현재 도로 확장으로 없어졌다.
6) 열녀문
진목정에 있는 열녀 정문인데,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장수 황씨 문중의 열녀문이다.
3. 음현리(菴峴里)
본래 포천군 내동면 지역인데, 음고개 밑이 되므로 음고개(엄고개), 또는 음현(峴)이라 하였다.
음고개 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전쟁이 있을 때는 이 곳에 군대가 주둔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지형이 특이해서 요새로 이용되는 곳이라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조선 태조가 함흥에서 돌아올 때, 이곳에 둔을 치고, 잠은 여덟 뱀이에서 잤다고 한다.
2) 마야위(馬也位)(마을)
음고개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 남쪽에 매봉산이란 봉우리가 있는데, 산에서 매사냥을 하였다고 하여 '매봉산'이라 부른다. 그때 타고 간 말을 매어 두던 바위를 '마야위'라고 부르고, 이 마을도 '마야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야위'란 말바위>발?ㅐ?>말아위>말야위로 변한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매화동'이라고도 부르는데, 풍수설에 의하면 이곳이 매화낙지형이기 ?문에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3) 안양동(安養洞)(마을)
면 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3Km 지점에 있는 마을이다. 연대는 미상이나 안양사라는 절이 이곳에 있었다고 하나 그 이름만 전해올 뿐이다. 지금은 잡초만 우거지고, 주초석 10여개가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다. 절터 바로 뒤, 약 20m 떨어진 곳에 영의정을 지낸 바 있는 백강 이경여 묘소가 있는데, 일설에 의하면 이 묘소를 쓰기 위해 절을 철거했다고 전하나 증명하기 어렵다. 아마 묘소를 쓴 후에 철거한 듯하다. 절터에는 지금도 기와 조각 등이 발견된다. 이 절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안양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4) 여덟배비(팔야동)(마을)
마야위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조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서 돌아올 때 이곳에서 8밤을
잤다고 하여 여덟배미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여덟배미를 3개 부락으로 나누어 웃여덟배미, 중간여덟배미, 아래여덟배미로 부른다.
5) 돌째갓(골짜기)
안양동 동쪽 소군골 옆에 있는 골짜기인데, 크기와 모양이 비슷한 목침같은 돌이 상당한 넓이
에 빈틈없이 널여져 있다.
6) 되반지기논(논)
둔터 북쪽에 있는 논인데, 볍씨 한되반을 심으면 벼 한섬이 소출되었다 한다.
7) 서낭당(당)
음고개에서 여덟배미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는 성황당이다. 옛날에 행인들이 지나다가 치성을
드리던 곳이다.
8) 약물터(옻물)(터)
엄고개 서쪽에 있는 약물터인데, 옻오른 사람이 이 물을 마시고 바르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
9) 태종사지(太宗寺址)(절)
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3Km 지점에 있는 절터인데, 년대는 알 수 없고, 그 이름만 전해
온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조 태조가 팔야동에서 묵을 때 이 절에서 숙박을 하였다고 한다.
4. 내리(內里)
본래 포천군 내동면(內東面)의 지역으로서 골짜기 안쪽이 되므로 안골, 또는 내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내리라 하였다.
안골 북쪽 수원산 기슭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우측 앞쪽에 병풍같은 바위가 둘러쳐 있는데, 굽이 흐르는 맑은 물이 그 바위에 부딪쳐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시대는 알 수 없으나, 옛날 어느 선비가 그 절벽에 楓岩이라 크게 새겨 놓았고, 바닥에는 장기판이 그려져 있는데 이 마을의 선비들이 모여 장기를 즐겼다는 전설이 있다. 또 일설에는 이곳에서 늙은 장수가 노닐었다는 얘기도 있으며, 그 장기판 옆에는 애기장수의 발자국이라 하여 오목하게 폐인 곳이 여러 곳 있다.
2) 능골(능곡)(마을)
내리에서 동쪽으로 약 1Km정도 떨어진 주금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부락이다. 조선
조 7대 세조(世祖)의 능 자리를 정하게 되었을 때, 현재 광릉의 토질과 이곳의 토질을 비교하게 되었는데, 이곳의 흙 색깔이나 질이 광릉의 것만 못하여, 陵은 쓰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부터 사람들은 이 마을을 '능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3) 비석거리(마을)
내촌면 사무소의 소재지로 조선조 세조때 공신인 김질의 누이이며 홍의달의 아내인 안동김씨 의 열녀비를 비롯하여 역대 현감들의 선정비와 공덕비 등 많은 비석이 모여있는 곳이라 하여 비석거리라 부른다. 현재는 내촌면의 중심지이면서, 상가가 형성되어 번화가가 되었다.
4) 장터(해방촌)(마을)
비석거리와 한 마을로 6. 25사변 후 이북 피난민들이 살았다 해서 '해방촌'이라 부른다.
5) 강습소터(터)
고장촌의 강습소가 있던 자리이다. 1920년대에는 이 지역 뿐 아니라 이웃 지역에도 신교육기관이 없어 자녀들을 가르칠 수가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 오다가, 교육에 뜻이 있는 분들이 뜻을 모아 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배영학원 의신강습소를 세웠다. 1930년 경에 폐쇄되어 지금은 빈터만 남아 있다.
6) 긴장등(진장등)(등성이)
능곡 북쪽 주금산 자락인데, 그 산에서 내려오는 산등이 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7) 독바위(德岩)(바위)
능골 동쪽 주금산 주봉 정상에 있는 큰 바위이다. 이 바위는, 근처에서 보면, 기이하면서도 웅 장하게 생겼지만, 친근감을 주어 무엇인가 의지하고 싶은 심정이 생긴다고 한다. 옛 사람들이 德의 상징이라 하여 德岩(덕바위)이라 불었다고 한다. 달리 독바위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바위의 형상이 먼 곳에서 보면 흡사 독(甕)과 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정상에 오르면 포천군, 가평군, 남양주군은 물론, 멀리 서울의 동부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오며, 지금은 등산 코스로 유명하다. 독바위에서 한자로 옮겨적을 때 덕바위로 변한듯 하다.
8) 동배들(들)
고장산 남쪽과 무동산 북쪽 사이에 있는 들인데, 내촌면에서 유일하게 넓은 들이다. 1동배 2왕듸(소흘면 소재 벌판)란 말이 있는데, 왕듸 벌판이 광활하고 지질이 아무리 좋다 해도 이 동배들만 못하다는 뜻이다. 이곳에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다름과 같은 것이 있다. 언젠가 七年大旱으로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 식량은 물론 종자도 구할 수 없는 딱한 처지가 된 적이 있었고 한다. 그래서 어느 고을 원님이 앞장을 서서 종자를 확보하기 위해 전 고을을 돌아다니다가, 이곳에 와서 일곱되지기 논에 벼가 익어 잇는 곳을 보고는 한시름 놓고, 전국에서 제일 좋은 논이라 하여 '東覇들'이라고 큰소리로 외쳤다고 한다. 이때부터 동배들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는 사이 변음되어 지금은 '동배뜰'이라 부르고 있다.
9) 목너머(고개)
기장대에서 안산으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노루, 산돼지 등을 사냥할 때면 이곳에 목을 잡았
다고 한다.
10) 무동산(舞童山)(산)
내촌면 주금산과 죽엽산 사이 내촌지역 중앙 지점에 있는 산이다. 수원산 남쪽 끝 고장산에서 수원산맥이 끊기면서, 동배들이란 넓은 들이 펼쳐지는데, 이곳에서 다시 기봉(起峯)하여 형성 된, 남양주군 부평리까지 약 4Km 정도 뻗어 내린, 내촌면 동서를 가로 막고 솟은 산인데, 주위에는 7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11) 물봉(산)
기장대 동남쪽 앞 내(川) 옆 산인데, 냇가에서 보면, 물 위에 인삼이 비쳐, 그 인삼을 찾아 산 으로 가 보면, 인삼이 보이지 않아 캐지를 못했다는 전설이 있다.
12) 불당바위(바위)
기장대 서쪽에 우뚝 솟은 자연 암석이다. 인위적으로 건축한 아담한 정자와도 같은데, 가운데 에 1평 정도의 空洞이 있어 풍우를 막을 수 있고, 그 위나 옆으로는 소나무가 자라 경관이 아름답다. 옛날에 이 바위 안에 불상을 안치해 놓고 인근 주민들이 찾아와서 치성을 들였다고 하는데, 이 뒤로 이 바위를 불당바위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언젠가 한 무당이 이 불상을 다른데로 옮겨 갔다고 한다.
13) 새오개고개(고개)
능골에서 소학리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어느 때부터인지는 모르나 새로 생긴 고개라 하여 새우개(새오개)고개라 하였다 한다.
새고개>새오개로 변한 데서 다시 고개가 붙어서 생긴 이름.
14) 약물바위(바위)
능골부락에서 동쪽으로 약 3Km 떨어진 주금산 덕바위 밑 자연동굴(가로 5m, 높이 1.5m, 깊 이 5m)안에 있는 바위. 이 바위 틈에서는 玉水가 흘러 나오는데, 800여 고지에서 샘이 나는 것도 신기하거니와 이 물이 위장병, 피부병 등 만병통치에 효과가 있어 각지에서 찾는 사람이 많다.
15) 영당터(터)
능곡부락 안 용인 이씨네 선조의 영당이 있던 자리인데 70여년 전에 철훼되었다 한다.
16) 천자동우리(천자봉)(봉우리)
능곡 동쪽 주금산 밑으로 풍수설에 의하여 天子가 날 만한 명당자리라 한다.
5. 소학리(巢鶴里)
본래 포천군 내동면의 지역으로서, 두메 골짜기이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내리 일부와 함께 내촌면에 편입되었다. 지형이 사방으로 높은 산이 둘러 싸이고 산림이 울창하여, 학(鶴)이 많이 모여 들어 이 일대에 서식했다고 한다.
소학리에서 가장 큰 마을인데, 500여년 전부터 이곳은 사기그릇을 구워 생산하던 곳이라 한다. 지금도 이곳 논바닥을 깊이 파 보면 깨진 사기그릇 조각들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이웃 부락보다 넓고 평평하여 벌판 같다.
2) 횻대박이(마을)
새말 북쪽에 있는 마을로 아주 협소한 산골마을이다. 옛날에 이곳에 효자 한 사람이 살았는 데, 그는 부모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어떻게 해서라도 꼭 해드리고마는 성질이었다. 그 당시에는 대나무 지팡이를 짚는 것이 큰 자랑이요, 큰 유행이었던 시대였다. 그러던 중 부모님이 대나무 지팡이를 갖고 싶어 하셨고, 이 효자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것을 구해 드리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곳에는 대나무가 나지 않아 대나무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마음속으로만 애태우던 끝에 하룻밤은 꿈 속에서 뒷산 마루턱에 한 그루의 대나무가 나 있는 것을 보았다. 다음날 그곳에 가 보니 과연 꿈속에서 보았던 그 대나무가 있어 이것을 베어 부모님이 지팡이를 만들어 드렸다고 한다. 이 소문이 널리 퍼져 나라에서 그 효도를 표창하는 효기를 하사하였고, 이 기를 대나무가 나 있던 자리에 꽂았다고 한다. 이후부터 이 마을을 '횻대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변음하여 '솟대박이'가 되었다.
3) 선녀골(골짜기)
효죽 부락에서 서쪽으로 약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골짜기인데, 선녀바위가 있어 仙女 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4) 갓모봉(산)
벌말 북쪽에 있는 산인데 모양이 갓모(갈모)처럼 생겼다. 어원적으로는 [갓]+[뫼]+[봉]으로 모두 산을 의미하는 뜻으로 합성된 지명으로 보인다.
5) 개금밭(밭)
신촌 마을 북쪽에 있는 산인데 반짝이는 토석이 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6) 선녀바위(바위)
효죽부락 서쪽 충암절벽 위에 있는 바위이다. 봄이면 광대하고 기이한 이 바위 틈에 진달래꽃 이 만개하고 가을철에는 단풍이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데,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고, 이곳에 노닐다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다.
7) 양주바위(夫婦岩)(바위)
효죽부락에서 서남간으로 약 1Km 정도 떨어진 국사봉에 있는 바위인데, 자연석 바위가 약 100m 거리에 상하로 양립되어 있다. 윗쪽에 있는 바위가 할머니 바위이고, 아랫쪽 바위가 할아버지 바위이다. 보기에도 남녀 상이 구별된다. 옛부터 영험하다는 전설이 있어 부부의 금슬이 나쁘다거나 자손이 없는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정기적으로 이 곳을 찾아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
8) 제비바위(바위)
사기막 서쪽 대로 변에 있는 바위인데, 소학천으로 쑥 나온 것이 마치 지붕에 챙을 댄 것 같다. 여기에 제비가 집을 짓고 새끼를 쳤다고 한다. 현재는 도로확장으로 대부분 파괴되었다.
6. 신팔리(薪八里)
본래 포천군 동천면에 속했는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내동면 소학리 일부와 가평군 상면 율길리 일부를 병합하여 신팔리라 하고 내촌면에 편입하였다. 두메산골이면서 나무가 많으므로 섭파, 서파 또는 신팔 따위로 불렀다.
윗말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남쪽지방에서 생산되는 각종 토산물과 강원 도와 함경도 지방에서 생산되는 약재와 해산물 등을 교역하는 장(場)이 이곳에 섰다고 한다. 그래서 매일 盛市를 이루어 萬金이 들끓었다 하여 '만금당'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청담 [맑 은+담이]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까닭은 이곳에 맑은 못이 있었기 때문이다.
2) 서파(西坡)(마을)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8Km 떨어진, 내촌면에서 일동 방면과 가평군 하면 현리 방면으로 통하는 대로 옆에 있는 마을이다. 가평군 상면 봉수리에서 바라보면, 서쪽 언덕 위에 이 부락이 있다. 어원적으로 [薪(섶)+八(팔)]을 합하면 서파가 되어 두 이름사이의 관계가 뚜렸하나 그 원래의 뜻을 밖히기는 어렵다.
3) 안터(池村마을)(마을)
말근담이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350여년전 충주 지씨가 안착하여 개척한 마을이므로 지촌마 을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 수가 많지는 않으나 이 근처에서는 희성인 지씨가 수대를 살면서 마을을 가꾸어 왔다고 한다. 현재는 청담부락에 합류해 살고 있다.
4) 너더리(느더리)(골짜기)
서파 북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토질이 질어서 널판을 놓고 다녔다고 한다. [너덜]은 어원적으로 [넓은들]의 뜻으로 해석되지만 비교적 넓은 골짜기로도 생각된다.
5) 굴고개(배반고개, 상재)(고개)
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8Km 지점인 서파부락과 군내면 직두리 사이의 수원산 정상에 있 는 고개이다. 현재는 자동차가 통행할 수 있는 대로이나, 60년대만 해도 산고갯길이라 약 600m 고지를 굽이굽이 올라가야 했다고 한다. 이 고개를 오를려면 지루하고 고달픔은 뼈가 녹을 지경이다. 이 고개를 넘기가 너무나 지루하고 힘들어 골병이 들 지경이라 하여 '골고래'라 불렀다고 한다. '굴고개'란 그후 변음된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이 산길이 머루, 다래, 칡덩굴 등으로 서로 엉켜 사람들이 그 밑을 헤치며 다니다 보니 덩굴 터널이 되었는데 굴 속으로 다니는 격이라 하여 '굴고개'이라 불렀다고 한다.
6) 덜렁고개(고개)
솔번지에서 윗말로 오르는 고개인데, 급경사라 말이 짐을 지고 다니면 덜렁덜렁 소리가 난다 하여 '덜렁고개'라 한다.
7) 말무덤이(묘)
청담과 서파 중간에 있는 말무덤인데 만금담이에서 장(場)이 왕래하다가 병사하면 이곳에 묻었다고 한다. 어원적으로는 [?]+[무덤]으로 높은 곳에 있는 무덤이라는 뜻이다.
제 5절 .가산면(加山面)
화산(花山)이 있으므로 화산면이라 하였다. 加山面이라 부르게 된 까닭은 청량면의 3개리를 화산면에 더하여(加) 편입시켰기 때문이다.
1.마산리(馬山里)
본래 포천군 화산(가산)면 지역으로서, 산이 말처럼 생겼으며 말뫼, 말미, 또는 마산, 마산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후평리 서원리의 각 일부와 청량면의 마전리 일부를 병합하여 마산리라 하였다. 말미의 뒷산을 騎山이라 하는데, 한양으로 가는 벼슬아치나 騎士들은 이 산줄기를 따라 한양을 왕래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어떤 官員이 한양으로 가던 중 말이 죽어 이곳에 묻었다고 하여 이곳을 말뫼(말미)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전국적으로 [말미]라는 지명은 꼭대기라는 뜻을 가진 지명에서 유래된 것으로 [?]+[뫼]에서 보듯이 높은 지역을 뜻한다. 한자로 옮겨적을때 [말]과 관련지어 馬, 騎로 적어서 馬山, 騎山으로 불린듯 하다.
말뫼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원래는 개울 건너편에 있던 마을인데, 병자호란이 당시 도적들이 많아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이곳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 이 화산서원이 있는 화봉산 뒤에 있다 하여 '뒷들'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2) 가재울(마을)
삼밭골 서쪽에 있는 마을. 가재가 많았다고 하나, 어원적으로는 [가재]는 가장자리를 뜻한다. 산이나 들의 가장자리에 나타난 마을을 의미한다.
2. 감암리(甘岩里)
본래 포천군 청량면에 속했는데, 가마바위가 있어 가마바위, 감바위, 또는 감암동, 감암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때, 마산리 일부를 병합하여 감암리라 하고, 가산면에 편입시켰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곳의 산줄기 모양은 마치 꿈틀거리는 용과 같은데 산줄기가 건너편 왕방산으로 이어져 굽이굽이 감돌기 때문에 '감바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웃 마을 벌말에서 봇말 줄기를 끌기 위해 정기(精氣)를 끊었다고 한다. 이렇게 용의 허리를 잘랐기 ?문에 현재 이 마을에서는 큰 인물도 나지 않고, 부자도 없다고 한다.
[마을] : 감바위, 담방이, 당말
[골짜기] : 당골, 제집골, 막동골
[다리] : 지능댕이다리, 감암교
[고개] : 복고리고개, 종지고개, 감바위고개
[바위] : 가마바위
[들] : 대동개, 모장들, 미끄러끝, 앞자리
[논] : 뒷논, 온수물자리
[밭] : 갓모밭, 골밭, 사그밭
[개울] : 당남말개울, 여우내개울, 한내개울
[소] : 장수독보, 제지방죽
[산] : 공동묘지산, 저리락동산, 큰산
[우물] : 사그밭우물
[부리] : 아래끝, 웃끝
[정자] : 초연대
1) 당넘말(마을)
담방이 동남쪽에 있는 마을인데, 닥나무 밭이 있었다고 한다. 한편, 200여년전 이 마을이 처음 생길 때, 이 산마루에는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신당(神堂)이 있었는데, 이 신당 너머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당넘말'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이곳의 名門大家인 문화유씨가 司僕寺正이란 벼슬살이를 마지막으 로 이곳에 낙향하여 살게 되었다. 이때 소나무 십여 그루를 심었더니 이것이 자라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지라 이곳에 정자를 짓고 소일하게 되었다. 그러자 公의 조카이며 연산군 때 領 議政을 지낸 柳洵이 직접 '군자정'이란 이름을 지어 叔氏의 여생의 안락함을 빌었다. 그 후 부터 이 마을을 '군자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2) 거리장(마을)
현재 시외버스 정류장이 있는데 그곳은 50여 년까지만 해도 5일마다 서는 舊場이 서던 자리 라 한다. '길거리에 서는 장'이라 해서 이곳을 '거리장'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3) 서원말(섬암동)(마을)
두껍바위가 있는 마을이다. 원래 이 마을에는 서원이 있어 '서원말'이라 하였다. 그러나 근 래에는 커다란 두꺼비 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하여 '두껍바위' 즉 '蟾岩'이라 부르게 되었다.
4) 백사의 허묘(묘)
방축리에 있는 백사 이항복 선생의 헛무덤이다. 유림들이 백사 묘소에 제사를 지내는데, 노 론과 남인이 서로 맞지 않으므로 일부에서 헛무덤을 모아 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4. 가산리(加山里)
본래 포천군 화산(가산)면에 속했는데, 화산(花山) 밑이므로 화산말, 또는 화산이라 하였다. 또 이곳에 시우정(시우정)이 있으므로 시우골, 도는 시우동이라고도 하였다.
[마을] : 가래울, 간촌, 남촌, 너먼말, 벌말, 평촌
[골짜기] : 못다리, 흥만화골
[다리] : 간촌교
[고개] : 간촌고개, 박석고개, 초당고개, 할딱고개
[바위] : 장사바위
[들] : 논골, 진골들, 해산이벌
[논] : 구래논, 긴배미, 보아귀논, 수동다리논
[밭] : 섬밭, 한경도밭
[개울] : 개성이개울
[산] : 된수리산, 매미동산, 성탱이
[묘] : 장만석선생묘, 정정승묘
1) 가래울(마을)
이곳은 사람들이 많이 살기 전에는 가래(楸)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가래나무가 많은 고을' 가래골이 변하여 '가래울'이 되었다는 것이다.
5. 정교리(鼎橋里)
본래 포천군 화산(가산)면의 지역으로서, 아래솥다리(이솥), 윗솥다리(조촌), 벌말 등 3개 마을이 솥다리처럼 생겼으므로 솥다리 또는 鼎橋라 하였다.
[마을] : 벌말, 아래솥다리(이솥), 아랫용화골, 용화골, 윗솥다리(조촌), 질마턱
[골짜기] : 늦은해, 부처내, 범의골, 산지리, 솥다리골, 절터골, 큰골
[다리] : 뒷다리
[고개] : 늦은해고개, 박석고개, 소작고개, 큰길고래, 흥나물고개, 회기미고개
[바위] : 약물바위
[들] : 나라터, 뒤골, 뒤벌, 양화산, 장공산이들, 해산이벌
[논] : 느티나무자리, 말굽자리, 살구논, 수통자리
[산] : 말두봉, 안산, 권산
1) 윗솥다리(이솥다리)(마을)
솥다리 윗쪽에 있는 마을인데, 이씨가 많이 살았다 하여 '이솥다리'라고도 부른다.
2) 해산이벌(들)
벌말 서쪽에 있는 들인데, 어떤 부인이 길을 가다가 이곳에서 해산(解産)을 하였다고 한다.
6. 금현리(金峴里)
본래 포천군 화산(가산)면 지역인데, 죽엽산 밑이므로 쇠재, 또는 철현, 금현이라 하였으며, 또한 고려 말에 이성계(조선 태조)의 둘째 부인 강씨(신덕황후)가 이곳에서 살았으므로 궁말 또는 궁촌, 궁동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신촌리, 광촌리와 서원리, 추곡리, 용화동의 각 일부와 청량면의 마전리, 우금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금현리(金峴里)라 하였다.
돌모루 북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에는 커다란 지석(고인돌)이 있는데, 포천군에 10여개 가까운 지석이 산재해 있으나, 이 지석은 매우 역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고인돌은 평지에 조성된 탁자형의 전형적인 북방식 지석묘인데, 현재 내용물은 모두 도굴 당하여 내부가 텅 비어 있으나, 잔존 형태는 완전하다. 지석묘의 구성 형태는 완전하다. 지석묘의 구성 형태는 長邊支石으로 1枚씩의 板石을 세워 막음으로써, 그 좌て우를 1枚씩의 板石을 세워 막음으로써, 短邊支石을 이루었으며, 이 위에 넓적한 蓋石을 올려 놓아 석실을 마련하였다. 현존하는 북방식 지석묘의 대부분이 장변지석 뿐으로 단변지석이 소실되어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드문 일인데, 이곳은 사방의 지석이 모두 남아 있어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지석묘가 있는 마을이라하여 지석동(支石洞)이라 부른다.
2) 너배기(광촌동)(마을)
궁말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조 선조(宣祖)때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선생의 조부인 李禮臣이라는 분이 넓은 들에 자손이 많이 번창하라는 뜻으로 이 마을을 '너배기'라 하였는데, 한자로 '廣村'이라 부르게 되었다. 어원적으로는 [넙원배기]에서 유래한다.
3) 대대울(竹谷洞)(마을)
궁말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강원도 通川에 살던 김씨란 분이 이곳에 옮겨와 살았는 데, 처음에는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사람 살 만한 곳이 못 된다고 실망했으나, 살다 보니 푸른 산 맑은 물이 마음에 들어 계속 살게 되었다. 14대 후손까지 대를 이어 살고 있으므로 이곳을 '대대울'이라 부른다고 한다.
4) 둔병이[둠뱅이](마을)
금현 4리 1반의 이름으로 옛날부터 집이 드문드문 있어서 붙여진 이름. 돌모루 북쪽에는 마을이다. 병자호란때 이 마을에 호병(胡兵)이 주둔했다고 해서 '둔병(屯兵)'이라 했다고 한다. 이 말이 변해서 '둠뱅이'가 되었다.
5) 돌모루
마을의 위치가 산을 돌아서 있다고 해서 '돌모루'라 했다.
7. 우금리(友琴里)
본래 포천군 청량면의 지역으로서, 우금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우금리(友琴里)라 해서 가산면에 편입되었다.
덕재 부능선에 있는 바위이다. 이 바위는 큰 벽 같이 생겼는데, 그 위에 갓의 챙 모양의 큰 바위가 얹혀져 있으므로, 이 바위를 갓바위라고 한다. 이 바위 벽에는 큰 글씨로 '壽陰先生墓 北一百五十歲'라 음핵되어 있다. 이것은 덕재 정상에 있는, 고운 최치원 선생의 14대 손이자, 면암 최익현 선생의 증조부인 학덕으로 이름이 높았던 壽陰公 崔光肇 先生의 墓의 위치를 표시해 놓은 것이다.
2)동박골(골짜기)
청성사 뒤 사냥번데기 위의 골짜기이다. 사냥번데기를 지나 올라가면 뒤웅박 같이 둥글게 생긴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있는 골짜기이므로 ?박골이라 한다. 이 바위 옆에는 큰 바위가 여러 개 있는데, 올라가면서 첫 번째 바위에는 '慶州崔氏世葬山'이라고 음핵되어 있다.
3) 무래골(골짜기)
무럭고개 옆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에 문례현을 왕례하던 옛 마차길이 있었다. 현재의 길이 뚫리기 전에는, 서면에서 북면으로 계곡을 따라 길이 있었다. 이 골짜기의 이름을 문례현(문례골)이라 하였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무래골로 바뀌었다.
4) 심뱅이고개(고개)
윗마을에 있는 고개이다. 이 고개를 넘으면 승방동 부락의 뒷산 언덕이 나타나는데, 이곳에 승방이 있었으므로 승방이고개라 하였다. 이 말이 변해서 심뱅이고개가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