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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장 복음을 대변하라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빌1:27-30)
- 우리가 천국 시민이라는 사실과 우리의 행동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지배를 받아야 하고 그 복음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사도는 이런 전체적인 권면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권면을 시작한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두 부분으로 나눈다. 먼저 외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룬 다음, 연이어 내적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외부의 세력과 전투를 벌이는 동시에 내부의 세력과도 싸워야 한다.
사도의 말은 교회 전체를 향한 것인 동시에 그리스도인 개인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개인으로서 이 세상에 살고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한 몸으로 살고 있다. 교회는 외부의 적과 전투를 벌이는 동시에 교회의 몸 안에 있는 교활한 적의 존재도 의식해야 한다.
이처럼 두 가지 측면을 같이 살펴야만 그리스도인의 삶이 지닌 역설적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비 그리스도인들은 모순이 된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을 심히 강하게 하라고 독려하는 동시에 겸손을 요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두 가지 요구를 다 충족시켜야 한다. 대담하고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동시에 겸손의 태도도 보여야 한다.
본문은 그리스도인과 교회와 전투에 참여하는 교회 안의 개인들에 대해 특별한 그림을 보여 주는데, 바울이 사용하는 그림은 다양하다. 에베소서 6장 후반부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권면하면서 로마 군대와 같은 그림을 애용했다. 빌립보서에는 운동경기의 그림이 더 많이 나오는데. 27절에서 “한마음으로 서서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고 말한다. 또 다른 곳에서는 달리기 선수나 검투사의 그림을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는 신약성경을 읽을 때마다 교회가 일종의 군대나 큰 시합에 출전한 선수 같다는 인상, 인내의 시험을 치르고 있으며 원수를 이기고 상을 받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신약성경 처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읽고 나서 발견하는 것도 바로 이것, 견고하라는 권면이다.
이 권면이 초대교회에만 해당되지 않고, 오늘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똑같이 해당된다. 주님은 세상이 자신을 미워한 것처럼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도 미워할 것이라고 하셨다. 바울도 디모데에게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경고했다.(딤후3:12) 그리스도인은 이런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복음은 세상이 표방하는 모든 것과 정반대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이런 결과가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며, 교회는 어떤 모양, 어떤 형태로든 바깥세상과 갈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권면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현 위치를 점검하기에 아주 좋은 시금석이다. 우리는 과연 무슨 핍박을 받고 있는가?
- 신앙을 굳게 잡는 방법은 무엇인가?
전체적인 측면) 1.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굳게 서서)” 굳건하게 서 있으라는 이 말의 일반적인 의미는 싸움이 있음을 알고 그 싸움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가 전반적으로 이 싸움의 본질에 무지한 것이야말로 현대의 가장 비극이라고 확신한다. 이 전투는 교회가 세워진 이래 계속되어 왔고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과연 지금 빚어지고 있는 갈등의 본질을 인식하고 있는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지식과 철학과 과학이 교회와 복음을 어떻게 공격해 왔는지, 하나님과 구원과 인생에 대한 우리의 관점 전체를 어떻게 공격해 왔는지 생각해 보라. 이른바 성경 고등비평이 등장해서 성경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이 아닌지 가려 낼 수 있노라 주장하고 있다. 자신들끼리도 일치된 견해를 내놓지 못하면서, 진리의 토대를 훼손하고 있다.
과학은 오랫동안 복음을 공격해 왔고 지금도 여전히 공격하고 있다. 세속성의 공격도 생각해 보라. 인류의 역사는 세속성의 역사이다. 그들은 말한다. “그래요. 일반적인 차원에서 신앙을 전하는 것까지는 괜찮지요. 하지만 회심이니 중생이니 거듭남 같은 건 전하면 안 됩니다. 그건 좀 무례한 짓이예요” 복음 전체의 기초와 핵심을 쳐서 일거에 무너뜨리려는 미묘한 공격이다. 여러 가지 협박도 있다. 회심하고 겪는 일은 주위에서 미묘한 박해와 따돌림, 은근히 비이성적인 사람 취급을 받는다. 그리스도를 떠나게 하기 위해 사람들이 어떻게 위협하는지 보라. 이럴 때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이런 공격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아는 것과 이런 상황을 인식하고 경계하는 것이다.
2.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 두 번째 요점으로 바울에 따르면 우리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그 싸움을 우리의 싸움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내가 대신 싸워 줄 테니 너희는 즐겁게 교회생활이나 해라”라고 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 싸움을 자신의 싸움으로 만들 것을 권면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과 영광의 메시지를 덤덤히 좇아가는 것만으로는 싸울 수가 없다. 그 당시 사람들이 참여했던 경주(오늘 날 릴레이)는 한 사람이 횃불을 들고 달리다가 힘이 빠지면 다른 사람이 대신 횃불을 받아 들고 있는 힘을 다해 전력투구했다. 우리는 그런 시합에 부름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우리의 모든 것을 조롱하고 무시하는지 알고 있으며, 갖가지 공격을 퍼붓는지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말없이 묵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스도나 복음의 평판보다 자신의 평판을 더 염려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도가 복음을 위해 협력하라고 말한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잠자코 있지 말고 복음을 옹호하며 공격을 물리치라는 것이다. 용감하게 일어서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복음을 위해 무슨 일이라도 겪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했는지 아는가? “가이사가 주”라고 고백하기를 강요당했고, 거부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쁨으로 기꺼이 거부하고 죽는 편을 택했다. 우리 일이나 지위나 직업이나 그 밖의 것과 그리스도 중에서 어느 한 편에 충성해야 할 때 주저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이름을 굳게 잡고 그 이름에 충성하다가 목숨을 버려야 한다면 기쁘게 버리라는 것이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을 이겼다. 어느 시대에나 우리 조상들은 그렇게 했다. 종교개혁자와 청교도들을 비롯한 믿음의 조상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라. 우리는 그들을 잇고 있는 사람들이다.
구체적인 측면) 1.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굳게 서기 위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신앙의 존재를 아는 것이다. 바울은 어떤 신앙이 아닌 그 신앙을 붙잡으라고 말한다. 기독교 신앙은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는 일군의 교리가 있으며 믿어야 할 내용이 있다. 영- 그 신앙 –이 사람 속에 들어온다. 그것은 싸워 지킬 수 있고 옹호할 수 있는 실체이다.
아주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진리를 찾는 위대한 탐색에 나서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또한 여러 가지 종교적인 신앙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자기네 신앙만 옳고 다른 건 틀렸다는 편협함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어떤 종교도 취할 만한 좋은 점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들 중 좋은 것들을 골라서 취합하면 그건 틀림없는 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도는 그 신앙을 위해, 성경의 기록에 소중하게 담겨 있는 그 신앙을 위해 힘껏 싸워야 한다. 그 신앙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 점을 모르면서 어떻게 그 신앙 안에 굳게 설 수 있으며 그 신앙을 옹호할 수 있겠는가?
2. 두 번째 요점은 진리의 본질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무이한 신성과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사역, 속죄와 죽음, 죽은 지 사흘째 되는 날 문자 그대로 육신으로 부활하신 것, 승천, 성령의 인격성, 오순절 강림은 최소한의 진리이다. 사도는 이 신앙을 위해 싸우라. 이 신앙을 옹호하라. 누구든 어떤 의미에서든 주님의 영광을 빼앗지 못하게 하며, 그가 온전히 이루신 일의 기이함을 훼손치 못하게 해야 한다.
3. 또한 이 진리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좋은 방법은 기독교 외에 제시되는 대안들을 조사해 보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무척 똑똑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들에게 “당신이 믿는 바는 무엇인가? 당신의 인생관과 도덕관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하면 그들은 사실 수많은 부정적인 비판 외에 할 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른바 지식인들의 삶을 조사해 보라. 똑똑한 말을 하기는 쉽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삶이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을 반대하는 자들을 조사해 보면 오히려 굳게 설 힘이 생긴다.
4. 마지막으로 우리는 대적을 겁내지 말아야 한다. 대적은 갖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겁주려 한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주님의 말씀을 붙잡는 것이다.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12:4-5) 생각하면 할수록 놀라운 말씀이 아닌가? 핵무기든 다른 무엇이든 영혼을 건드리지 못하다는 것이다. 해볼 테면 해 보라고 하라. 내 속에 있는 것은 절대 멸하지 못하며, 해치지 못한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처럼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으니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신앙을 굳게 붙잡는 방법에 대한 지침을 살펴보았다.
- 신앙을 굳게 잡아야 하는 이유
진리의 본질 때문이다. 이 진리 외에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이 또 있는가? 하나님이 독생하신 아들에게 주신 진리에는 만민을 위한 큰 구속의 길이 들어 있다. 이 세상과 영원한 세계까지 포괄하는 진리이다. 진리 그 자체, 진리의 특질과 본질 그 자체만으로도 옹호할 가치가 충분하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 이 진리를 대변해야 하며, 이 진리를 공격하고 있는 불쌍한 세상을 위해서도 대변해야 한다. 세상은 진리를 공격하지만, 정작 그들을 구원할 것은 이 진리밖에 없다.
또한 우리자신을 위해서도 이 진리를 대변해야 한다. 그 마지막 대열병식 때 하나님의 아들은 각 대열을 사열하며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실 것이다. 그 대열병식 날 아침에 비겁자라는 자책감, 수치심으로 고개를 숙이지 않으려면, 바로 지금 공격 앞에 물러서지 말고 견고하고 굳건하게 서야 한다.
- 격려의 말이 있다.
“너희에게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나처럼 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전에 자신이 싸우는 모습을 보지 않았느냐, 지금 로마 감옥에서 싸우고 있는 소식도 듣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이 싸움을 싸우는 사람, 핍박과 오해를 받는 사람은 바울의 경험에 동참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런 일을 겪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경험에 동참하는 것임을 아는가? 사도 바울과 순교자들의 무리, 각처에 잇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이루어진 무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선두에 서 계신 무리에 속해 있음을 아는가? 이 얼마나 명예로운 일인가?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핍박받고 공격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이다. 여러분이 공격을 받는 자체가 구원의 증거이다.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아주 특별한 혜택이자 축복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을 때 여러분은 “감사합니다. 이런 최고의 복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겨 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해야 한다.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은 원형경기장에 사자 먹이로 던져질 때에도 변함없이 감사를 드렸고, “드디어 최고의 혜택과 축복을 누리는구나”라고 말했다. 신앙이 선물이듯이,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도 선물이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통해 여러분이 자신의 백성임을 확인해 주신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2)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영을 주시기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과 순교자들과 성도들의 영을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굳게 서서 그리스도 복음의 신앙을 위해 전력으로 분투하게 해주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