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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0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절 후 제22주)
섬김의 태도
욥38:1~7; 히5:1~10; 막10:35~45
헤르만 헤세가 쓴 작품 중에 <동방순례>라는 중편 소설이 있습니다. “결맹”이라는 비밀결사대가 거대한 규모의 동방순례여행을 계획하고, 화자인 주인공 H.H가 순례단에 참가합니다. 하지만 도중에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순례단은 해체되어 버립니다. 소설은 이 순례여행이 어떻게 해서 중단되었는지를 조사하여 기록해 놓은 보고서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주인공인 화자는 순례 중단 사건을 조사해 나가다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그 사람은 순례단에서 허드렛일을 하다 사라진 ‘레오’라고 하는 하인이었습니다. 순례단에서 묵묵히 단원들을 따르며 그들을 위해 성가신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고, 단원들이 지치고 절망할 때면 노래와 휘파람으로 마음을 달래주던 레오가 어느 날 소리 없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서류가 분실되면서 순례단 내부에 갈등과 혼란이 빚어지고, 결국 순례단 자체가 어이없이 와해될 때까지도 단원들은 레오가 사라졌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합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화자인 H.H.는 하찮은 존재로 여겼던 레오가 사라지면서 순례단에 위기가 닥쳤고, 결국 조직 자체가 와해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로버트 그린리프라는 경영 전문가는 이런 레오의 모습에서 소위 ‘섬기는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라는 새로운 리더십의 유형을 창안하여 이론적으로 체계화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온 책이 <서번트 리더십>이라는 책입니다. 그린리프는 자기 책에서 헤르만 헤세의 <동방순례>에서 받은 영향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위대한 지도자란, 처음에는 서번트(종, 하인)처럼 보이는데, 이 간단한 사실이 지도자를 진정으로 위대하게 한다.’ 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레오는 원래 최고지도자이지만, 근본적으로 종이기에 얼핏 봐도 종으로 알려졌다. 지도자의 자질은 선천적으로 종의 기질이 있는 사람에게만 부여된다. 세상에는 부여되고 부과되는 것이 무수히 많지만, 그것들은 언제라도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종의 자질은 부여되는 것도, 부과되는 것도 아니며, 사라지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렇기에 레오는 처음부터 종이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도덕경>에 나오는 많은 경구들을 연상시킵니다. “성인은 모든 일을 무위로써 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베풀며... 낳고는 그 낳은 것을 가지지 않고, 하고는 그 한 것을 뽐내지 않으며, 공을 이루고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2장)
(17장) “가장 높은 지도자는 아랫사람이 그가 있는 것을 겨우 알고, 그 다음가는 지도자는 가까이 여겨 받들고, 그 다음 가는 지도자는 두려워하고, 그 다음 가는 지도자는 경멸한다.” 그래서 가장 높은 지도자는 “... 공을 이루어 일을 마치되 백성들이 모두 말하기를 저절로 그리되었다[我自然]고 한다.”
서양의 “서번트 리더쉽”과 동양의 “무위 사상”이 그 나온 배경과 쓰임새가 같아 보이지는 않지만, 오늘 복음서가 말하는 “섬김”의 의미에 어떤 빛을 비추어 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이 섬기는 종으로 왔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러 왔다고 하는 심오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도 섬기는 사람이 되고 종이 되기를 요구하십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남을 섬기십시오.” “사람들의 종이 되십시오” 라는 권고를 들을 때, 여러분에겐 어떤 느낌이 올라옵니까? 뭔지 모를 부담감이나 저항감이 올라오진 않나요? 아니면 나와는 상관없는 먼 얘기처럼 들리는가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세 번에 걸쳐,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때 마다 제자들이 보인 태도는 예수님의 의도를 크게 벗어납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께 대들기도 하고(마16:22), 누가 더 크냐? 자기들끼리 다투기도 하고(막9:33), 또 오늘 본문처럼,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예수님의 좌우에 앉겠다고 다투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전혀 동참하지 못했고, 그 의미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사실 우리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 실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만나면서 우리는 어떤 의미를 새겨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삶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섬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섬김을 사도바울은 빌립보서2장에서 “케노시스”(비움)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빌2:6~8)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행적은 바로 이 비움에서 나온 사랑의 행위였고, 그의 죽음은 비움의 절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그것이 권력이든 재산이든, 끌어 모아 자기 손아귀에 쥐고 있어야, 그것이 능력이 된다는 세상의 법칙과는 달리 그분은 모든 것을 내려놓음으로써, 모든 것을 내어줌으로써, 전혀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사셨습니다. 그분은 탕진하는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죄인과 세리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모습에서,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는 모습에서, 탕자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그대로 드러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에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물론 예수님에게도 쉽지 않았겠지만), 우리네 삶과는 거리가 너무 먼 이야기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했을 때, 그들을 책망하는 대신에 계속해서 같은 말씀을 반복해서 가르쳐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그렇게 어려운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는 아직 섬길 수 있을 만큼 사랑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찬양이 찬양을 하고, 감사가 감사를 합니다. 사랑이 사랑을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사랑이 되었을 때, 우리는 사랑을 하게 됩니다. 그때는 사랑을 하라고, 섬기라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또한 우리는 “섬김”이라고 할 때, 무조건 남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 자신의 욕구는 다 내려놓고 남을 위해서 뭔가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섬김은 다른 사람을 위해 내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섬김은 “자신을 향한 섬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좋아 자신을 무조건 내어준 것도 아니고, 자기가 하찮아서 자신을 내어준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알았고,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셨고, 그래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사랑했고, 그 사랑이 자신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캇 펙이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말했던 “사랑”의 정의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사랑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사랑은 자기 자신이나 혹은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나가려는 의지다” 우리는 사랑이 항상 다른 사람을 향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다른 사람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근본적으로 “자기의 충만함”입니다. 혹은 “의식의 고양”입니다. 자기 안에 사랑이 넘치면 그 사랑은 다른 곳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 즉 사랑을 우선은 자신에게로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자신을 섬겨야 합니다. 이 말은 자기중심적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니, 그것과는 반대입니다. 자신을 넓혀가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깊은 연민도 필요합니다. 깊은 안아줌이 필요합니다. 깊은 수용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자기중심, 자기몰두 가운데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자기를 품어주고 받아주는 일은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소위 죄인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경험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동시에 우리의 꼭 쥐었던 주먹을 풀 수 있습니다.
자기 섬김에는 자기 수련이 필수입니다. 자기를 사랑한다면서 자신의 욕구대로 움직인다면 그것은 빗나간 사랑입니다. 자기를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에는 마음근력을 키우는 수련이 필요합니다.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지 않고 실제로 행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운동하고, 책도 읽고, 기도하고, 이 모든 일들이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럼으로써 자기가 자신이 아는 자기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아야 합니다.
물리학자 브라이언 스윔은 <우주는 푸른 용>이라는 책에서 “새로운 우주 이야기 안에서 우리의 가장 충만한 목적은 인간의 형태로 사랑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빅뱅을 일으킨 힘이 바로 사랑이라고 역설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이란 우주 안에 있는 인력의 활동이예요. 이 기본적인 역동성이 원자와 은하, 별과 가족, 국가와 인간과 생태계, 바다와 별 공동체를 깨우죠. 사랑은 존재가 태어나게 해요. 활동하는 이 인력이라는 힘을 생각해 보세요. 어마어마하게 광활하죠.”
그러면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미 대륙 동부에서 서부로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는 일은 정말 피곤하죠. 우리가 별을 자전시키고, 은하계를 공전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면 어떨까요?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일과 우주를 움직이는 일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일이예요. 수소원자를 다 모으려면 어떨까요? 수소로 별을 만들어야 한다면 어떨까요? 우주가 매 순간 엄청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사랑을 만드는 우주적 유혹의 장엄함을 느끼기 시작할 꺼예요. 그런데 이 유혹이 연인들을 밤새도록 서로 따라다니게 하고, 새벽녘에 아픈 아이를 보살피기 위해 세 번씩이나 부모를 깨어나게 만들죠. 이것은 같은 사랑이라는 인력 때문이예요. 인력은 우리를 평생 배우게 하고 발전하도록 이끌어 주죠. 애인의 편지를 받고 봉투를 열 때 떨리는 손의 긴장감이나 칠흙 같은 어두운 밤을 뚫고 새벽의 장밋빛 속으로 광활한 지구를 회전시키는 것은 같은 역동이예요.”
사랑의 인력은 우주의 별들을 운행하게도 하고 우리들의 작은 사랑의 행위도 사랑의 인력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브라이언 스윔의 깊은 경험을 다 따라잡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도 사랑이라는 힘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고, 사랑의 본성으로 우리의 소중한 사람들을 보살핀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아픈 아이를 보살피기 위해 밤잠을 설친 경험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를 받으며 가슴 떨리던 경험이 있고, 열린 마음으로 힘든 사람이 이야기를 들어준 경험이 있고, 그저 말없이 다른 이의 아픔을 품어준 경험이 있고, 내 할 일이기 때문에 성실하게 할 일을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사랑이 하는 일이고, 그때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산 것입니다. 브라이언 스윔은 바로 이런 일들이 “칠흙 같은 어두운 밤을 뚫고 새벽의 장밋빛 속으로 광활한 지구를 회전시키는 것과 같은 역동”이라는 겁니다.
우리의 섬김은 바로 여기서 시작합니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일에서부터 말입니다. 저녁에는 피곤해서 아침에 일어나기조차 싫다는 생각을 했더라도, 다음날 아침이 되면 다시 일어나 일터로 나가는 일도 섬김의 시작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일을 성실하게 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 섬김의 태도입니다. 학생들을 만나 가르치고 상담하면서 뭔가 더 알려주고 뭔가 더 두드려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섬김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섬기는 사람이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엄청난 큰 희생을 요구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우리의 수준과 정도를 아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 말씀에 큰 부담을 느끼고 뭔가 내가 평소 할 수 없는 일을 하라는 압력으로 듣기 보다는, 그래서 오히려 지금 하던 일도 내려놓기 보다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상의 일들이 작은 사랑의 일들이 되도록 마음과 정성을 쏟는 것이 우리에게는 섬김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기억하고 되새겨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사랑이고, 우리는 바로 이 사랑을 배우려고, 잠시 이 땅에 머물러 사는 것이라고. 바로 이것을 늘 기억해 내라고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내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고. 이것을 기억할 때에만 우리가 온전히 자유로운 섬김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섬김의 사람이었던 마더 테레사가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합니다>라는 책에서 한 말입니다. 언뜻 들으면 어려운 권고 같아 보이지만 가만히 음미하면서 가슴으로 새기면,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그 방향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일 때문에 기진맥진해 있거나, 심지어는 자신을 대단히 혹사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사랑으로 맞물려 있지 않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 없이 일하는 것은 노예행위와 다름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다 기도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사랑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청하지 않고서는 사랑을 지닐 수가 없으며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의 정도 또한 극히 적습니다.
사랑은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우리의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사랑은 언제 시작됩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시작됩니다.”
우리들이 하는 평범한 일들이 비범한 사랑의 일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섬김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