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그림은 잉글랜드 화가 에드워드 포인터(Edward Poynter, 1836~1919)의 1903년작 유화 〈폭풍요정들의 동굴(The Cave of the Storm Nymphs)〉이다.
세이렌, 사이렌, 유혹,
바닷소리는 왜 이따금 신비로워질까?
세이렌(Seiren; 사이렌; Siren)들이 오뒤세우스(Odysseus; 오뒷세우스; 오디세우스; 율리시스; Ulysses)를, 인남(人男)들을 유혹한다던 저 오래된 신화는 언제나 인간(人間)의 영원한 고향은 바다일 수밖에 없다고 암시하지 않을까?
생명의 근원이 아름다운 동시에 사나운 침묵의 노랫소리로써 인남들을 매혹하는데, 그들은 왜 그 노랫소리를 두려워하여 자신들의 귀를 틀어막고 전율했을까?
그들을 매혹하는 파돗소리가, 노랫소리가, 침묵의 음률이 얼마나 아찔했길래 그들은 그 소리들을 물리치려고 그토록 필사적으로 전율했을까?
그렇게 전율하는 몸부림은 ‘바닷소리에 매료당한 인남을 유인하는 고향이란 안식의 처소가 아니라 생명을 탄생시키는 죽음의 처소일 수밖에 없다’고 감득하는 인남들의 본능적 반응은 아니었을까?
고향은 아름답다.
그러나 아름다운 고향은 그곳을 등진 인남들을 더없이 아찔한 침묵으로써, 파돗소리로써, 불가항력적인 바닷소리로 써 매혹하거늘, 후리려하거늘, 죽이려하거늘, 그런 침묵의 소리에 매혹당한 인남들은 자신들을 죽여살리려는 고향에서 안식하고픈 욕망에, 포근한 자궁으로 회귀고픈 욕정에, 시달리며 전율하리라.
그런 인남들은 격동하는 죽음과 마찬가지로 격동하는 침묵을, 아름다워서 무시무시한 생명의 근원지를, 심욕(深欲)하고 그리워 안달하건만, 그들의 현기증을 격발시키는 고향길은 안녕하고 나른한 죽음길일지도 모른다.
영화 《트랜스포팅》, 《악어》, 《그랑부르》, 《유로파》를 보면서, 푸르디푸른 침잠(沈潛)을 주시하는 어떤 인남은 안식을, 그러나 죽음처럼 춤추는 물(水)의 가슴으로 안기고픈, 저 바다의 심장으로 빠져들고픈 그리움을, 사납게 침묵하며 전율하는 저 자궁의 호곡성을 허감(虛感)하리.
현실을 부리려는 이성(리성; 理性)도 그토록 아찔한 침묵에 매료되어 전율하는 가슴을, 해심(海心)을, 차마 견디려면, 그런 이성에 의탁하려는 인남의 귀를 막고 눈을 감길 수밖에 없으리.
세이렌들의 유혹에 용코로 걸려버린 인남들이 끌려가고 빠져들며 아예 돌진하는 심로는, 고향길은, 결국 현기증에 찌드는 죽음으로 회귀하는 길이라서, 저 가혹한 파도들의 음률이 그토록 격렬한 침묵으로 인남들을 유혹할 수 있으리라.
저 푸르디푸른 바다를 맞닥친 어떤 인남이 느껴야만 하는 것은 그런 바다로 어여어여 뛰어들고픈 본능이 아니던가?
바닷속으로, 바닷소리로, 하염없이 빨려들어가는 현기증을 견디며 무찌르려는 인남은 차라리 저 수평선을 박살내버리고파 전율하지 않을까?
바다는 그런 인남을 영원히 유혹한다.
치떨리도록 아름다운 자연의 목소리로, 아름답도록 사나운 침묵의 소리로, 어느 인남을 매혹한다...
(2000.XX.X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