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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자불설(一字不說) > ― 한 법도 설한바 없다.
불교의 목적인 깨달음, 즉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 말로는 '붓다(Buddha)'이고,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이라,
결국 불교는 깨닫는 길(佛道), 깨닫는 법(佛法)에 대한 가르침이라 하겠다.
그런데 그 ‘깨달음’에 대한 것을 어떻게 말로써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그래서 ‘일자불설(一字不說)’이라, 깨달음의 경지는 문자로써는 표현할 수 없고,
말로써도 설할 수 없어, 깨달음에 대해 (정확하게) 설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말이다.
부처님은 45년간을 중생구제와 깨달음을 위해 구세의 설법을 하셨다.
그리고 마지막 선언은, “나는 한마디도 설한 적이 없노라. [일자불성(一字不說)]라고 하셨다.
이미 모든 것을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제천제불(諸天諸佛),
과거육불(석가모니 부처는 제 칠불)이 모두 설한 것일 뿐이니,
더해서 우주와 삼라만상에 대한 진리로서의 법(法)을 설할 것이 없어,
내가 더 보태고 빼고 한 것이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모든 중생이 부처의 씨앗을 가지고 있어, 즉 중생 자신들의 내면에 불성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안다면 더 이상 구할 것이 없는 것이다.
이미 자신이 진실이고 진리인데 어디 가서 무엇을 구하고 닦는단 말인가.
그들 스스로 자각하고 깨달으면 되는 일이다. 다만 그 자각이 번뇌에
가려져 있어, 그것을 열고 환상을 제거해주면 되는 일이다.
말로써 천상의 불 세계와 우주와 창조의 모든 뜻을 담기에는 역부족,
말해봐야 사족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을, 어찌 말과 글(言說)로써 다 하겠는가.
다만 이 땅의 어리석은 중생이 이를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하니,
불가피 그들에 맞혀 몇 마디 한 것일 뿐이다. 헌데 그것이 후세에
사람들에 의해 무상(無上)의 불가촉(不可觸) 진리라고 전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다 알아듣지 못한 제자들이 있어,
부득이 「나는 이같이 들었노라[여시아문(如是我聞)]」라는 말로 시작해서
몇 마디 언설을 중언부언 늘어놓은 것이 경전(經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경전이 완벽할 수가 없다. 못 다한 여백이 있게 마련이다.
예를 들면, 배고픔의 감각적 상태를 상대에게 설명해 주려고 할 때,
과연 그 배고픔의 생리적 감각상태를 진실 되게 법성(法性)
그대로 설명해서 상대를 이해시킬 수 있을까. 이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사실상 설명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딱 부러지게 설명할 수 없으니,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도 <금강경> 제13분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과
제21분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 등에서 말씀하시길,
“여래는 법을 설한 바가 없다”라는 하셨다.
그리고 제21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그대는 여래가 마땅히 설법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말하지 마라.
이렇게 생각하지 마라. 왜냐하면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께서 설법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곧 여래를 비방하는 것으로, 내가 말한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부처님이 스스로 말을 꺼내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절대 여래가 이 세상에서 설법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는 것이다.
부처님은 서른다섯 살에 도를 깨친 후 설법을 시작해 여든 살에 열반에 들었으니,
사십오 년간을 설법하셨다. 그런데도 여기서 이 모두를 부인해버린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라[莫作是念], 절대 내가 불법을 설했다고 생각하지 마라,
왜 그런가?
가령 어떤 사람이 여래는 설법한 것이 있으며 그것도 진정으로
어떤 법을 설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다[卽爲務佛].”
부처님은 우리에게 염불을 하고, 지관(止觀)을 닦고, 계⋅정⋅혜(戒定慧)를 닦으라고 하셨다.
그런데도 이제 만약 어떤 사람이 내가 설법을 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나를 비방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상하지 않는가?
부처님은, 이런 사람은 불법을 비방하고 있는 것이라 하셨다. 무슨 이유일까?
“이 사람은 비록 불법을 배우고 또 들었지만 내가 말한 불법을 이해하지 못해서
내가 설법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건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제대로 설명을 못했으니 아예 설법을 했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서툴게, 미흡하게 한 설법을 진실에 대한 바른 법이라고
오해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오도(悟道)나 성불(成佛)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는 것으로,
부처님 말씀 하신 법(法)은 뗏목에 비유될 수 있다. 강을 건너는 배와 같다.
강을 건너고 나면 배를 등에다 지고 갈 필요가 없다. 달리 말하면,
강을 건너고 나서는 배가 필요치 않다. 자신이 직접 헤엄쳐 건너갈 수도 있다.
부처님은 반드시 자신의 배 를 타고 건너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선종에는 많은 교육 방법이 있다.
어떤 때는 배조차 제공하지 않고 스스로 방법을 찾아서 건너가라고 한다.
스스로 고해(苦海)를 건널 방법만 있으면 된다. 부처님의 설법은 바로
이 이치를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건너가는 것을 강조한 것이지
배(法-가르침)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법(진리, 아뇩다라삼먁삽보리)은 언설로는 제대로 설명이 안 되는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가르침을 전혀 알아듣지도 못하고서 스스로 명심견성(明心見性)했다거나,
도(道)를 깨닫지도 못했으면서도 깨달았다거나 해서,
그 법에 한사코 매달려 그것을 진실이라 생각한다면,
이는 참으로 닭털을 들고 영전(令箭―군령을 전하는 화살)으로 삼는 격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지금 자신이 설법했다는 것을 부인하셨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설법한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셨다.
<능가경>에서도 45년 설법을 하셨지만 “조금도 법을 설한 바가 없다”고 하시어
일자불설(一字不說), 불설불설(不說佛說)이라고 하셨다.
이런 말씀의 뜻은 법성인 진리의 모습과 내용을 언설로는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법성(法性)인 진리의 당체는 형상도 없고, 색깔도 없고, 맛도 없고,
또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 것이기에
참으로 무어라 말을 할 수 없는 불가설(不可說)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법성이 우주만법의 근원이기 때문에 만물세계를 법계(法界)라고 하고,
우리 중생의 본원도 깨달음의 자리 그 자체이므로 이를 진여심(眞如心)이라고 하는데,
이 역시 불가설의 경지임은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선가(禪家)에서는 일착자(一着子)라고도 하는데,
착자(着子)는 주인공 (主人公), 곧 우리들의 본래 마음자리를 일컫는다.
그래서 본래면복(本來面目)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법성의 체성은 오직 스스로 수행을 통해 터득하는 것 이외는
별다른 설명을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지혜를 증오(證悟)해야
내외명철 (內外明徹), 즉 안과 밖이 밝게 통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스스로 자각, 자증하는 것만이 깨달음의 맛과 즐거움을
증오(證悟)하는 것이며, 증오가 되면 깨달음에 안주하지 아니하는
법성의 무위작용이 일어나 응당 중생제도에 행원이 있게 된다 하겠다.
그래서 <법성게(法性偈)>에서는 오직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라 해서
오직 지혜로 증득해 아는 바이지 다른 경계가 아니다.」라고 했다.
인간 삶의 발전에 있어 체험과 경험만큼 더 큰 산지식은 없을 성 싶다.
어떤 문제에 대해 이론과 명자(名字-이름과 문자)로 이해하기보다는
본인이 직접 관련성을 상즉상입(相卽相入)해서 체험과 경험을 통해
그 진실을 바르게 자각하는 것보다 더 훌륭한 가르침은 없다고 하겠다.
그래서 교훈을 주는 성어(聖語)에도 ‘백문이 불여일견(百聞 不如一見)’이라고 해서
천백번 듣고 아는 것보다 본인이 직접 그 문제에 대해 눈으로 한번 확인하는 것이
더 큰 배움이 된다고 해서 직접적인 체험과 경험의 배움을 강조하고 있다.
아무리 깨달음의 경지가 어떠어떠하다 하더라도 언어로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일자불설(一字不說)이라 하신 것이다.
그래서 팔만사천 경전을 45년 동안 설하시고도 부처님은 한마디도 한 적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부처님이 45년 동안 설하신 것은 궁극의 진리는
설명 못하고 그 언저리만 설했을 뿐이다. 그러니 제대로 된 설법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모르는 중생은 묻는다. 왜 부처님께서는 일자불설이라 하셨습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답을 해야 할까?
하지만 이를 중생에게 전달하려니 부족한 줄 알면서도 표현할 때는
언어로 다양하게 설명할 도리 밖에 없는 것이다. 어리석은 중생을 위해 ―
다만 방편에 의해 말과 글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난감함을 선가에서 토로하는 것이 일자불설이다.
<벽암록(碧巖錄)> 제28칙에는 유명한 남전 보원(南泉普願, 784~834) 화상과
백장 열반(百丈涅槃) 화상, 이렇게 두 화상이 ‘설할 수 없는 불법’에 대한 선문답을 나눈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여기서 백장 열반 화상은 백장 회해(百丈懷海, 749~814) 선사의
법을 이은 법정(法正) 화상일 것이다.
그는 항상 <열반경>을 강의했기 때문에 열반 화상이라고 불렀다.
남전(南泉) 화상이 백장산(百丈山)을 찾아가서
백장 열반 화상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참문하려 하자,
백장 열반 화상은 남전의 의도를 파악하고 먼저 물었다.
“예로부터 많은 성인이 남에게 설하지 않은 법이 있습니까?”
남전 화상이 말했다. “있지요”
백장 화상이 말했다. “어떤 것이 남에게 설하지 않은 불법입니까?”
남전 화상이 말했다. “마음(心)도 아니요, 부처(佛)도 아니요, 중생(物)도 아니요.”
백장 화상이 말했다. “설해버렸군!”
남전 화상이 말했다. “나는 이렇습니다만, 스님은 어떻습니까?”
백장 화상이 말했다. “나는 큰 선지식이 아닌데, 어찌 설할 수 있는
불법과 설할 수 없는 불법이 있는지 알 수 있겠소”
남전 화상이 말했다. “나도 모르겠소(不會).”
백장 화상이 말했다. “내가 화상에게 너무 말을 많이 했군!”
이 공안은 <전등록(傳燈錄)>에도 전하고 있으며,
<무문관(無門關)> 제27칙에도 수록돼있다.
부처나 조사들이 중생들에게 설하지 않은 불법이란 ‘설할 수 없는 불법’을 말한다.
부처님이 45년 동안 중생을 위해 8만4,000 법문으로 모든 불법을
다 설했고, 그 설법을 기록한 것이 경전(經典)이며, 조사의 설법을 기록한 것이 어록(語錄)이다.
그런데 선불교에서 제시한 문제는 8만4,000의 법문은 중생을 위한 방편법문으로
불법의 진실을 최대한 언어 문자로 표현한 것이지만, 불법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부처님이나 조사도 ‘설할 수 없는 불법’이란
불법의 진실 그 자체를 중생들에게 설하고 전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불법의 진실을
각자 본인이 직접 체험해서 스스로 체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남전 화상은 “있다”고 대답하고 있다.
부처님이 평생 동안 중생을 위해 8만4000 법문을 설하고도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一字不說)고 <능가경> 등에서도 주장하고 있다.
선불교에서 <능가경>을 중시하는 것은
‘일자불설(一字不說)’이라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선종의 슬로건도
<능가경>의 일자불설(一字不說)이란 정신을 토대로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세존이 꽃을 들어 보이고 가섭이 미소로 대답한
‘염화미소(拈華微笑)’로써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전법이
이루어지게 됐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선불교 출발의 목적은 세존의 일자불설(一字不說)과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경전에서 언어 문자로 전하는 방편법문을 극복하고,
불법의 진실을 본인이 직접 체득하는 실천체험의 종교를 주장한 점이다.
부처님이 45년 동안 설법하고도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일자불설(一字不說)’이란 말이 <반야경>에도 곳곳에 보이고 있는 것처럼,
언어 문자에 걸림 없고(無碍), 집착 없고(無相), 머무름이 없는(無住)
반야의 논리를 말한다.
백장 화상은 “어떤 것이 남에게 설할 수 없는 불법인가?”라고 반문하자,
남전 화상은 “마음(心)도 아니요, 부처(佛)도 아니요, 중생(物)도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이는 <화엄경>에서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고 설하고 있는 말을
토대로 해서, 마조(馬祖) 선사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고 했고,
이에 의거해서 남전은
“마음도 아니고(不是心) 부처도 아니고(不是佛) 중생도 아니다(不是物)”라고 설한 것이다.
불법의 진실은 불심(佛心)의 지혜작용을 말하는 것인데,
불심의 지혜작용(본래면목)을 “부처다, 마음이다, 중생이다” 하고
이름 붙일 수도 없고 어떻게 표현할 수도 없다.
그래서 남전 화상은 “부처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요, 중생도 아니다”라고 하면서
불심의 지혜작용으로 밝히고 있다.
이에 백장 화상은 “그렇게 말한 것은 설할 수 없는 불법을 설해버린 것이 아닙니까!”하고
다그쳤다.
남전 화상은 상황에 딱 맞게 대처할 줄 아은 사람이어서,
바로 뒤이어 대뜸 내질러 말하기를, “나는 단지 이와 같이 제시했는데,
스님은 어떻소? ― 어떻게 설할 수 없는 불법을 제시하겠소?”라고
반문한 것이다.
그러자 백장 화상은 “나는 큰 선지식이 아닌데, 어찌 설할 수 있는 불법과
설할 수 없는 불법이 있는지 알 수 있겠소(不知)”라고 대답했다.
즉, 백장 화상은 나는 대선지식이 아니라고 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니 남전 화상은 “나도 모르겠소(不會)”라고 대답했다.
남전이 말한 ‘불회(不會)’는 백장이 말한 ‘부지(不知)’와
달마가 양무제에게 말한 ‘불식(不識)’도 같은 의미이다.
마지막으로 백장 화상은 “내가 그대를 위해서 너무 많이 말해 버렸군!” 했다.
이 말은 ‘설할 수 없는 불법’에 대해 남전 화상이 “마음도 부처도 중생도 아니다”고 말한 것에 대해
“너무 많이 말해 버렸다”고 한 것이다.
백장이 ‘부지(不知)’라고 했는데, 남전은 ‘불회(不會)’라고 대답한 것처럼,
설할 수 없는 불법에 대해 두 사람이 많은 대화로 설한 것을 반성하고 있다.
말과 글로써 설명할 수 없으나 어리석은 중생은 그래도 말로써,
혹은 글로써 가르쳐야 다만 조금이라도 받아들이니 중언부언 몇 마디 씩
설해 준 것을, 마치 금과옥조처럼 떠받들고, 그것만이 진리인양
소중이 여기니 참으로 딱할 노릇이다. 결코 진리는 말 속에도 글 속에도 없는데,
경전의 틀 속에 갇혀 더 이상 나가지 못하니 나는 한 글자도
설한 적이 없다고 하셨고, 그래서 아난을 나무라기도 하신 것이다.
아난(아난다)은 경전에서 거의 빠짐없이 출연하는 인물이다.
왜냐하면 경전의 첫 문장이 항상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如是我門)」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나(我)’가 바로 아난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네가 천 날 만 날 배우는 것이 한 날 참선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팔만 사천 대장경을 다 외우다시피 해도 결국엔 생사문제를,
스스로 깨닫지 못할 것이다. 금생에 비록 네가 이렇게 많이 알고 있지만
마음을 밝히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고 하셨다.
그렇게 부처님이 아난 존자를 꾸짖으신 것은 법문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스스로 깨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