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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이어 계속 이야기를 진행하겠습니다. 토번-당의 초기 단계 관계에 관한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당시 양국 사이에 문화적 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일 뿐이다. 화친은 중국 국가의 상대 국가 군주가 새로 즉위할 때마다, 즉 공주가 출가해야 할 상대가 바뀔 때마다 새로 경신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토번과 당의 화친은 이 두 번째 화친을 끝으로 해서, 다시는 갱신, 연장되지 않았다. 이 두 차례의 화친으로 화친 관계가 토번과 당의 정치, 외교 관계의 주조를 이룬 것 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300년 양국 관계에서 화친을 이룬 것은 단 두 차례에 지나지 않았다. 토번과 당 관계의 주조는 오히려 전쟁 관계였다고 한다. 예를 들면, 하서의 전략적 요충지 '안서 4진'[당나라는 640년 투루판[吐魯蕃]의 고창국(高昌國)을 멸망시키고 안서도호부를 두었는데, 648년 그 서방의 구차[龜玆]를 점령하자 도호부를 구차로 옮기고, 그 관하에 구차 ·우전[于] ·카슈가르[疏勒] ·카라샤르[焉耆] 등의 4진을 두어 군대를 주둔시켰다. 안서도호부는 670년 토번(吐蕃:티베트)에 함락되었다가 다시 빼앗았고, 이어 679년 서부 톈산산맥[天山山脈]의 북방 추강(江) 유역의 쉬아브[碎葉:토크마크 부근]를 점령하여 여기에 진(鎭)을 두고 대신 카라샤르진을 폐지하였다. 그러나 서돌궐(西突厥)의 한 종족인 돌기시(突騎施)가 세력을 떨치면서 쉬아브를 압박하자 당나라는 719년 이를 버리고 다시 카라샤르를 4진에 넣었다. 안사(安史)의 난 이후에 토번은 간쑤[甘肅] 지방을 점령하였으나, 4진은 계속 본국과 연락을 유지하다가, 790년 모두 토번에 빼앗겼다.] 특히 토번군의 장안 점령에 대해여, 중국측 기록인 [구당서] 196 토번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관덕 원년, 763년 황제가 섬주로 옮겨 가고 경사가 점령되자, 항장 고휘가 토번을 이끌고 상도성으로 들어가, 토번대장 마중영(뢴따자루콩) 등과 함께 고빈왕 아들 광무왕 승굉을 황제로 세우고, 연호를 세우며 대사면을 베풀고 관리를 임명하였다. --- 토번은 성에서 15일간 머무른 뒤에 퇴각하였다. " 반면에, 티벳의 사료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토번인의 기세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706년의 신룡 화맹부터 821-822년의 장경 화맹까지 백 십수년 동안에 모두 8-10차례의 화맹을 맺었는데, 이는 양국 관계가 그 만큼 평화로웠다는 뜻이 아니라, 반대로 그 만큼 전쟁이 빈번하였음을 의미하며, 양국의 전쟁 관계가 대등하고 독립적인 관계라는 토대 위에서 이루어졌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당과 토번의 대표적인 화맹의 하나가 청수화맹인데, 그 내용 서로 국경지대에서 만나 가축을 제단에서 희생하여 그 피를 서로 마시면서 맹약하는 것이었고, 맹약의 핵심적 내용은 전쟁 중단과 국경선 획정이었다. 구당서(당때의 기록)의 기록에 의하면 당이 폐전하여 이러한 화맹을 맺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양방의 수도에서 두 차례 결맹 의식을 치르는 경우도 있었는데, 마지막 화맹이었던 장경 화맹이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토번국에서 맺은 이 조역은 서로 노략질하거나 서로 영토를 침략 할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이 장경 화맹의 맹문은 쌍방의 수도에 비석을 세워 새겨두었는데, 라싸와 장안에 세워진 양종 당번화맹비의 내용에는 서로의 왕이 서로 의논한 내용이 변질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비석에 새긴다는 내용을 비롯하여, 토번은 중국의 공주를 2번이나 맞이했고, 중국은 공주를 2번이나 출가 시켰기에 둘의 관계는 가정이다라고 표현되어 있으며, 마지막으로 이 약속을 배신하고 맹약을 깨뜨리는 자가 있으면 그 재앙을 받을 것이라고 기록되엇다. 왜 마지막에 재앙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표현했냐면, 중국은 토번이 그 동안 주변 국가들과 매년 1번의 소맹과 3년에 한 번 대맹을 할 때에 어김없이 동물들을 희생시켰다. 그리고 대맹 때에는 부락의 유력자 200인과 화해하고 인질을 교환하면서 맹세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청수화맹을 할 때 농우절도사 장일이 "그 예를 생략하기 위해서"우마 대신 개나 돼지, 양 등을 사용하자고 주장하여 관철시켰으며, 장경화맹 때도 토번과의 맹을 종묘에 고하려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당과 토번 사이에는 10여 차례나 맹이 이루어졌지만, 이 모든 것이 토번의 요구에 당이 마지못해 응하는 방식으로 실현되었다는 사실은 토번과 당의 화맹이 주로 토번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토번과 당이 맺은 화맹의 주된 내용이 전쟁의 중지와 영토의 분할이었음은, 토번과 당 사이에서 이루어진 전쟁이 대부분 영토쟁탈전의 성격을 띠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개원 212년(733년)에 금성공주가 당 황제에게 상언하여, 금년 9월 1일에 적령에 비를 세워 번, 한 양계를 정할 것을 청하였다."고 하였듯이, 토번과 당의 외교적 현안은 언제나 영토분계 문제에 있었다. 토번과 당은 길고 전면적인 전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도, 빈번하게 사절을 서로 교환하였다. 당회요와 신, 구 당서 및 자치통감 등에 기재된 바에 의하면, 634년에 처음으로 사절을 교환한 이후 846년에 토번이 붕궤될 때까지 213년 동안 양국이 교환한 통사의 횟수가 모두 191회였는데, 그 가운데서 토번 사절이 당에 파견된 것은 125회였고, 당의 사절이 토번에 파견된 것은 모두 66회에 달하였다. 이는 곧 송첸감포-태종 시기 이후의 토번-당의 관계도 기본적으로는 전쟁 관계와 통사 관계의 성격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요컨대 토번과 당이 병존한 시기에 티벳과 중국은 서로 독립된 국가를 독자적으로 보유하면서 주로 전쟁과 통사의 방법을 통해 접촉하고 있었던 것이다. 토번 왕국 시기에 티벳은 고유문화, 특히 독특한 정치체제와 사회질서, 문화양식을 잘 유지하고 있었고, 그 이후까지 계승되어 티벳이 독특한 역사공동체로 존속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9세기 중엽부터 토번 국가가 와해되고 티벳은 수십 수백의 지방 세력으로 분열되었다고 한다. 때맞추어 당도 9세기 말에 붕괴되어 중국도 5대 10국의 대분열기로 들어갔다. 12세기 초, 요동의 여진이 거란을 대신하여 요동과 북중국을 아우르는 '금'이라는 통합국가를 건립하였을 때는 송의 지배력이 강남 방면으로 더욱 위축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중국의 국가 티벳의 국가와 정치외교적 관게를 갖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토번-당 시대의 티벳-중국의 관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티벳-중국 관계의 원형은 전쟁 관계와 통사관계, 그리고 부분적인 문화 교류관계였다는 것이다. 단지 이 시기에는 티벳의 수다한 지역세력이 할거하는 상태에 놓이게 됨에 따라 티벳 정치세력과 중국의 국가들 사이에 힘의 균형이 깨져,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책봉조공 관계가 부분적으로 발생하고, 양측의 필수 소비물자를 교환하는 차마호시가 출현하여 경제적 교역관계가 중시된 점이 주목 될 뿐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후 몽원 제국이 붕괴되어 티벳 고원이 다시 분열 상황에 빠지게 되고 중국에도 전형적인 중국 국가인 '명'이 출현한 이후에 다시 한 번더 재현된다. 티벳과 중국이 모두 분열로 인해 정치외교의 주체가 복수화하거나 통합국가의 출현이 저지된 상황에서는 언제나 이러한 성격의 관계가 되풀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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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