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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思悼世子)뒤주에 죽은 참극
- 1762년 음력 6월 13일, 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 만에 죽음
- 1749년, 15세에 왕세자에 책봉 명실상부한 조선의 차기 왕이었다.
- 부인은 혜경궁 홍씨이며, 아들 정조이다
- 사도세자의 죽음 28세
사도세자(思悼世子) 사건은 1762년(영조 38) 부왕(父王)인 영조(英祖)가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으로, 조선 시대 왕실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원인으로 사도세자의 일탈, 정신병 때문에 빚어진 영조와의 갈등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대립이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권력의 정점에 서 있던 수장과 차기 수장 간에 갈등으로 빚어진 참극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도세자는 1735년(영조 11) 정월에 영빈 이씨(暎嬪 李氏)의 소생으로 태어났다. 1728년(영조 4)에 영조의 첫째 아들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10세의 어린 나이에 죽고, 41살의 나이에 어렵게 얻은 아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세자의 출생은 영조에게 너무나 큰 기쁨이었고, 어려움을 딛고 왕위에 오른 자신처럼 명석하고 강한 아들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기대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바람으로 사도세자는 태어난 이듬해인 1736년(영조 12) 3월에 2살의 어린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세자 출생 이후 영조의 탕평 정국은 세자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갈등이 커질 가능성이 보이고 있었다. 영조는 1737년(영조 13) 소론 영수 이광좌(李光佐)를 영의정으로 발탁하여 그가 세자의 후견인이자 스승임을 천명하였는데, 이는 영조 즉위 이후 강성해진 노론을 제어하고 소론을 강화하여 탕평을 이루고자 했던 의지를 반영한 결과였다. 영조는 세자 탄생을 기화로 더욱 의욕적으로 탕평을 추진하고, 이를 세자에게 정치적 유산으로 물려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1738년(영조 14) 12월 경종을 시해하고자 하여 이른바 삼수역안(三手逆案)에 올라있던 서덕수(徐德修)가 신원되면서 노론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서덕수는 연잉군(훗날의 영조)도 역모에 가담했음을 자백한 후 사형 당하여, 연잉군 역시 이른바 ‘임인옥안(壬寅獄案)’에 올라 있었으므로 서덕수의 신원은 사실상 영조 자신의 혐의를 깨끗이 씻어내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어서 1740년(영조 16) 정월에 신임사화(申壬士禍)와 관련된 김창집(金昌集)과 이이명(李頤命)의 복관이 성사됨으로써 신임사화 때 화를 입었던 노론의 4대신이 모두 복관되는 경신처분(庚申處分)이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정국의 흐름은 점차 노론과 소론의 균형이 깨지고 노론의 우세로 굳어져갔다. 영조가 1743년(영조 19) 11월에 세자빈을 노론 홍봉한(洪鳳漢)의 딸로 책봉한 것도 노론의 득세를 인정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렇듯 노론의 우세가 강화됨에도 불구하고 세자의 대리청정 전까지 영조와 세자 사이에 큰 문제는 없었다. 영조는 세자를 아끼며 그를 성군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정성을 쏟았다. 세자가 탕평을 계승하여 ‘달효(達孝)’가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자신의 서명[押]인 ‘통(通)’자와 맞추어 세자의 서명을 ‘달(達)’로 정했고, 탕평의 규모를 익히게 하기 위하여 숙종대 탕평을 건의한 바 있는 소론 박세채(朴世采)의 손자 박필부(朴弼傅), 남인의 영수로 부상하던 오광운(吳光運)을 특별히 불러 세자에게 소개하고, 직접 가르친다는 뜻에서 경연에 세자를 참석시키기도 하고, 수시로 세자를 훈육하기 위한 글을 직접 지어주기도 하였다. 세자는 5세가 되면서 서연(書筵)을 시작했는데 세자의 강학(講學)은 비교적 엄격하게 지속되었다.
노론의 우세가 진행되던 가운데 세자가 15세가 되던 1749년(영조 25) 정월, 세자의 대리청정이 결정되었다. 영조가 대리청정을 추진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임금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평소의 마음을 이룰 수 있는 점, 군국(軍國)의 일이 정체되지 않은 점, 세자에게 정사를 익히도록 하는 점을 들고 있다. 사실상 대리청정으로 영조는 상왕(上王)이나 황제(皇帝)가 된 것 같이 이전보다 더 높은 지위에서 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다. 대리청정이 시작된 다음 해부터 영조는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균역법을 추진하여 성사시켰는데, 여기에는 영조의 높아진 위상과 탕평책을 지지하는 주요 인물이 큰 역할을 하였다. 영조는 이와 같이 일면 자신은 정무와 약간 거리를 두고 휴식을 취하면서도 왕권을 높이고, 또 세자에게도 정치실습을 통해 탕평의 원리를 익히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노론과 소론 간의 갈등이 격화되고 영조는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도세자를 꾸지람하는 일이 점차 많아졌다. 특히 세자는 궁중을 휩쓴 홍역을 앓고 난 직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엄동설한에 눈 위에서 대죄(待罪)하느라 건강이 많이 상하였다. ‘우레 뇌(雷)’나 ‘벽 벽(霹)’이라는 글자를 보지 못하고 천둥을 두려워하는 이상 증세도 이때부터 나타났다.
이즈음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를 악화시킨 또 다른 요인은 흔히 ‘문녀(文女)’라 부르는 문소의(文昭儀)의 등장이었다. 영조가 총애하는 문녀가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에게 불손하게 대하자 대비인 인원왕후가 문녀를 데려다 꾸짖은 사건이 발단이 되어, 1752년(영조 28) 12월 영조는 문녀 문제로 선위(禪位) 파동을 일으켰다. 세자는 대죄(待罪)를 하며 머리가 돌에 부딪혀 망건이 찢어지고 이마에서 피가 나오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 영조는 세자가 성군으로 성장해가도록 나름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여전히 경연에 세자를 참석하도록 하고, 요순(堯舜)의 심법(心法)과 역대(歷代)의 치란(治亂)에 대해 직접 가르치거나, 수시로 세자의 학문적 성과에 만족감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755년(영조 31) 2월에 일어난 나주괘서사건, 이른바 을해옥사는 부왕과 세자의 관계를 극도로 악화시켰다. 거병하여 조정의 간신을 제거할 것이라는 내용의 괘서가 나주 객사에 나붙는 사건으로 소론 강경파가 일망타진 되었다. 을해옥사 이후 경색된 정국은 정치적 경험이 부족한 세자가 감당하기 어려웠다.
을해옥사 이후 영조는 세자 보호의 책임을 김상로(金尙魯)에게 맡겼는데 김상로는 세자에게 접근한 뒤 동태를 영조에게 알리면서 세자를 모함하였다. 1758년(영조 34) 8월 명릉(明陵)에 가는 영조를 수행하던 세자가 비를 맞아 건강이 좋지 않자 도중에 돌아오면서 잠시 경기감영에 들렀는데, 김상로가 이것을 가지고 세자가 영조에게 반기를 들고 군대를 일으키려 한 것으로 모함하여 세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마침내 영조는 같은 달 세자 폐위 전교를 밤에 승정원에 내렸는데, 도승지 채제공이 여러 승지와 사관을 거느리고 와 국왕을 설득하여 이를 철회하였다. 영조는 대리청정 이후 오랫동안 폐지하였던 경연을 이해 봄 다시 열었는데, 여기에서도 경연관의 직임을 띤 관료들이 세자가 영조에 반기를 들고 변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논의를 이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세자의 병세가 이상 행동으로 발전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한중록(閑中錄)』에 따르면 1757년(영조 33) 세자가 옷을 두려워하는 의대증(衣帶症)이 나타나고 화증으로 인해 내관을 매질하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고 하는데, 이는 자신을 보호해주던 중전과 대비의 죽음에 따른 불안감과, 궁중 세력들의 견제가 안겨주는 스트레스가 주요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1760년(영조 36) 영조와 정순왕후가 경희궁으로 이어하고, 세자는 창경궁에 머무르면서 부자 사이에 참소가 더욱 쉽게 이루어졌다. 마침내 1761년(영조 37) 4월 세자는 관서로 미행(微行)을 단행하고, 이후 세자의 관서행(關西行)이 정국의 쟁점으로 부상하였다. 세자의 관서행은 유람설(遊覽說)과 거병준비설(擧兵準備說) 등 다양하게 해석된다. 영조는 세자의 관서행을 일단 최소한의 사건으로 축소함으로써 세자가 몇몇 측근 환관을 데리고 미행(微行)한 과실로 처리되었다. 관서행은 미봉되었지만 세자를 둘러싼 암투는 결말로 치닫고 있었다.
이듬해인 1762년(영조 38) 5월에 나경언 고변사건이 일어났고, 이는 세자를 결정적으로 궁지에 몰았다. 나경언 고변사건은 5월 22일 액정서별감 나상언의 형인 나경언이 세자가 역모를 모의를 한다고 고변한 일인데, 고변의 내용에는 왕손의 어미를 때려 죽인 일, 여승을 궁으로 끌어들인 일, 관서로 행역한 일, 북한산성을 유람한 일 등 세자의 비행 10여 조가 거론되었다.
나경언은 노론 강경세력의 영수였던 윤급(尹汲)의 노복(奴僕)이었다는 점과 죽기 전에 노론 반(反)세자 핵심세력의 사주를 받았다고 자백한 『대천록(待闡錄)』의 기록, 영조가 배후자 색출을 극단적으로 거부하고 나경언을 살리고자 한 점, 나경언이 가산을 탕진하고 세자를 모해할 계책을 내었다고 한 점은 나경언이 매수되었을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그가 대궐 일을 보는 액정서별감 나상언의 형이면서 자신도 대궐 하인으로 있었던 것 역시 나경언 사건이 세자의 비행을 공론화 할 목적으로 처음부터 조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영조가 어느 정도 공모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결국 나경언 사건은 영조와 홍봉한의 방조 하에 노론 강경세력에 의해 일어났던 것으로, 그 계기는 세자의 관서행이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게 되었던 이른바 임오화변은 나경언 사건이 일어난 지 20일 정도 지난 1762년(영조 38) 윤5월 13일에 일어났다. 영조는 이날 창덕궁에 행차하여 선원전을 참배하고 궁성을 호위한 후 길 위에 진을 치고 나서 정성왕후의 신위가 봉안된 휘녕전에서 행례를 마친 다음 세자를 휘녕전 뜰에 세워놓고 자진을 강요하며 실랑이를 벌이다가 마침내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가두라는 처분을 내리고, 전교를 내려 이를 중외(中外)에 널리 알렸다.
세자를 처분할 때 영조가 내세운 가장 큰 명분은, 세자의 병이 아니라 세자의 생모 영빈의 고변이었다. 영빈은 세자가 나인, 중관(中官) 등을 살해한 것이 근 100명에 이르고, 기생․여승과 음란한 행동을 하였으며, 근래에 궁궐 후원에 무덤을 조성하여 영조를 시해하여 묻고자 하니 그 위험이 눈앞에 닥쳤다는 것이다.
영빈의 고변과 처분 당일의 영조의 문초에서 세자가 변란을 기도한 증거로 거론된 무덤은 세자가 이 해 5월에 후원에 조성한 지하 3칸의 굴실(窟室)을 가리키는데, 처분 당일 내관은 이 굴실이 유희를 위한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또 굴실에 두었던 효복(孝服)과 지팡이 때문에 세자가 복(服)을 입고 곡을 하며 임금을 저주했다는 의심을 받았는데, 이 또한 정성왕후의 상(喪)에 사용하던 것인데 추모의 마음이 그치지 않아 버리지 못하다가 발각될까 두려워 굴실에 둔 것으로 확인되었다. 생모 영빈이 세자를 고변했다는 것 역시 당시에도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으로, 영빈의 고변은 나경언 사건으로 세자 폐위의 명분을 축적하고 있던 영조가 세자의 변란 기도를 기정사실화하고, 세자와 가장 가까운 세자의 생모를 끌어들여 처분의 정당성을 보강하고자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영빈은 사사로운 은혜를 끊고 임금을 위해 고변하여 대의(大義)를 실천하였고, 영조는 사적인 애통을 뒤로 하고 세손과 왕실․국가를 위해 ‘의(義)로써 은혜를 절제하는’ 공적인 대처분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혜경궁과 세손은 오히려 세자의 변란을 사전에 막음으로써 연좌될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준 영조의 결단을 칭송했다는 임오화변을 바라보는 입장이 공식화되었다. 이것이 당시의 이른바 임오의리(壬午義理)였다.
영조는 세자 처분 직후, 신만(申晩) 등 삼정승이 이를 하례(賀禮)하기를 청하니 기꺼이 수락하였고, 대궐문에 나아가 호위한 군사들을 위로하고 상을 내렸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기 직전 조정 신하들이 부당(父黨)․자당(子黨)으로 나뉘었다고 격분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그의 처분이 세자의 비행에만 원인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상황이 얽혀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세자는 뒤주에 갇힌 지 9일이 지나서 세상을 떠났다. 세자 사후 세손을 동궁으로 정하고, 세손을 효장세자의 후사로 삼으면서 사도세자의 추숭도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또 당시의 자신의 결정은 존망의 기로에서 종사의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임을 강조하고 있다.
영조의 죽음으로 세손이 정조로 즉위했다. 정조는 즉위 직후 영조의 빈전(殯殿) 문 밖에서 신하들에게 내린 첫 번째 윤음에서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후 조심스럽게 사도세자를 추숭해갔다. 사도세자의 묘소를 영우원(永祐園)이라 하고, 사당을 경모궁(景慕宮)이라 하여 고쳤고, 이후 묘소를 수원으로 옮기고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여 화려하게 꾸몄으며, 현륭원 부근 수원에 화성(華城)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하였다.
사도세자는 지금까지 비극적 사건의 주인공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영조는 조선 후기를 중흥으로 이끈 군주로 평가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비정한 아버지로 기억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도세자 사건은 단지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 속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왕조시대 국가의 지도자와 차기 지도자 간의 정치적 갈등과 개인적인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벌어진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세자는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해야 했나
조선의 왕실 역사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비극을 꼽으라면, 단연 사도세자의 죽음이 빠지지 않는다.
한 나라의 세자이자 왕이 될 인물인 사도세자는, 1762년 음력 6월 13일, 그의 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 만에 생을 마감했다.
그는 무슨 죄를 지었기에, 어째서 군왕이 될 사람에게 이러한 끔찍한 형벌이 내려졌던 걸까?
이 글에서는 사도세자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 비극의 배경을 조선 후기 정치와 왕실 내부 갈등 속에서 들여다본다.
사도세자의 본명은 이선(李愃). 그는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둘째 아들로, 1735년 태어났다. 영조에게는 오랫동안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었기에, 사도세자의 출생은 큰 기쁨이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아끼고, 조기 교육을 철저히 시키며 장차 왕으로 키우는 데 공을 들였다.
1749년, 불과 15세에 왕세자에 책봉된 사도세자는 명실상부한 조선의 차기 왕이었다. 그러나 그가 세자로서 살아갈 수 있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사도세자의 불행은, 영조와의 극심한 갈등에서 시작됐다. 영조는 평민 출신의 후궁 숙빈 최씨의 아들로, 스스로 왕권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교적 규범과 왕권 유지에 철저했다.
반면, 사도세자는 감성적이고 자유로운 성향을 지녔으며, 규범보다 예술과 무예에 더 관심이 많았다.
이러한 성향 차이는 사소한 일에도 충돌을 낳았고, 영조는 사도세자의 언행을 꾸짖고 경멸했다. 특히 사도세자의 정신 상태가 불안정해지면서 갈등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사도세자의 정신 상태에 대한 기록은 여러 사료에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서는 사도세자가 시종을 죽이고, 궁녀들을 폭행하며, 칼을 들고 미쳐 날뛰었다는 묘사가 나온다.
이런 기록을 통해 ‘사도세자는 광인이었다’는 시각이 오랫동안 굳어졌지만, 현대의 역사 연구는 이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사도세자는 정말 미쳤던 것일까, 아니면 정치적 희생양이었을까?
사도세자의 '광기'가 실제였다고 해도, 그 배경에는 아버지 영조의 강압적 교육과 억압, 그리고 당시 정치 세력 간의 대립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분석이 많다.
영조 시대의 조선 정치는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지배했다.
영조는 자신의 왕위 계승이 논란 속에서 이루어진 만큼, 정치적 안정을 위해 노론을 중용하면서도 소론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 절묘한 줄타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사도세자는 소론 및 남인계와 가까웠으며, 노론 중심의 왕실 정책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정치적 성향은 자연스럽게 노론 세력과의 충돌로 이어졌고, 사도세자의 언행 하나하나가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1762년, 드디어 사건이 벌어진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명령을 거부하고 침전을 무단 이탈하는 등 일련의 행동으로 ‘불효’라는 비난을 받게 되고, 대신들과의 회의에서 사도세자의 폐위를 요구하는 상소가 이어진다.
그러나 영조는 세자를 폐위하거나 공개 처형할 경우 정통성에 타격이 될 것을 우려해, 극단적인 결정을 내린다.
1762년 6월 13일, 사도세자를 뒤주(쌀가마니에 곡식을 담는 나무 궤짝)에 가두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여름의 더위 속에서 아무런 물과 음식도 없이 갇힌 사도세자는 8일 후인 6월 21일, 서서히 말라 죽는 극형을 당하게 된다.
그는 28세였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조선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영조는 이후 사도세자의 아들인 이산(정조)을 양자로 삼아 보호했고, 정조가 왕이 된 이후에는 사도세자에게 '장헌세자'라는 시호를 내려 명예를 회복시킨다.
정조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복권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정조 시대에는 ‘탕평책’이라는 새로운 정치 원칙을 세워 붕당정치의 폐해를 줄이고 실용주의 정치를 시도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단지 한 세자의 비극이 아니라, 조선 왕권과 붕당정치, 신분제 사회의 모순이 낳은 비극이었다.
오늘날 사도세자의 죽음은 단순한 왕실 내부의 스캔들이 아닌, 한 인간이 체제 속에서 어떻게 파괴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로 재조명된다.
그는 ‘광기’를 가진 왕세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무너진 가족 관계, 정치적 희생양, 그리고 체제의 피해자였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조선 후기 왕실의 긴장과 붕당 정치의 폐해, 그리고 인간성의 좌절이 만들어낸 참극이다.
한 나라의 세자가, 아버지의 손에 의해 갇혀 죽는다는 역사 속 현실은 단순히 충격적인 사건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체제가 가진 모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사도세자를 광인이 아닌, 시대의 희생자, 인간적인 고통을 겪은 인물로 이해하며 그 죽음을 다시 바라보고 있다.
그가 남긴 질문은 여전히 우리에게 묻고 있다.
"왕이 되기 위해, 인간성을 잃어야 했던 시대. 과연 우리는 그 비극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사도세자 생모 영빈 이씨([暎嬪 李氏) 1696-1764
1701년에 궁녀로 입궁하였다. 영조의 승은을 입어 1726년 11월 16일 내명부 종 2품 숙의에 책봉되었다.
1728년에 귀인이 되었다가 마침내 1730년 11월 27일, 내명부 정1품 빈[嬪]의 첩지를 받아 영빈이 되었다.
슬하에 화평옹주[和平翁主], 화협옹주[和協翁主], 화완옹주[和緩翁主]에 조졸한 옹주 둘을 포함한 5녀와 1남[사도세자], 모두 여섯 자식을 두었다.
1735년 사도세자의 출생 때 영조는 그녀의 곁을 직접 지키고 있었다 한다.
고명아들인 셋째 사도세자는 애초에 아버지 영조와 사이가 멀었던 데다, 노론 벽파 신료들과 친동생인 화완옹주, 영조의 후궁이던 문숙의까지 나서서 죽음으로 몰아갔으며, 모후인 영빈까지 단죄를 간하자 뒤주 속에 갇혀 굶어 죽었다.
영빈 이씨[暎嬪 李氏] 1764년 음력 7월 26일, 사도세자가 죽은 지 2년 후 사망하였다.
영조는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영빈의 장례를 후궁 제일의 것으로 하였고, 의열[義烈]의 시호를 내렸다.
숙의문씨(淑儀文氏 ? ~ 1776년)
본래 영조의 첫째 아들인 효장세자의 세자빈(현빈 조씨)을 모시던 궁녀(궁인) 출신입니다. 현빈 조씨가 사망한 후 영조의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되었으며, 화령옹주와 화길옹주 두 딸을 낳았습니다.
세자 자리를 노리며 조정의 간신 김상로 오빠 문성국등과 결탁해 사도세자를 무고하고 모함하여 뒤주에 갇혀 죽게 만든 임오화변의 주요 원인 제공자 중 한 명입니다. 대궐 내 약재인 인삼을 도둑질하는 등 사리사욕을 채우며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영조가 승하하고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가장 먼저 숙청된 타깃이 되었습니다. 즉위년(1776년)에 작위를 박탈당하고 궁에서 쫓겨났으며(폐서인), 결국 정조에 의해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습니다. 그의 오빠 문성국 역시 처형되었고 어머니는 노비로 전락했습니다.
☞정조 : 조선 제22대왕. 재위 1777년 ∼1800년.
정조는 영조의 둘째아들인 장헌세자(사도세자라 불림)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청원부원군 김시묵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왕비로 맞았다.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아버지가 비극의 죽음을 당한 뒤 효장세자(孝章世子;眞宗)의 후사가 되었으며, 1775년 대리청정을 하다가, 이듬해 3월 영조가 죽자 즉위했다.
즉위 직후 홍국영을 중용하여, 장헌세자를 죽이게 하고 자신의 즉위를 끈질기게 방해하였던 벽파(僻派) 일당을 축출하고, 이어 왕의 총애를 믿고 세도정치를 자행하던 홍국영마저 축출함으로 써 친정체제를 구축하였다.
영조 이래의 기본정책인 탕평책(蕩平策)을 계승,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 등 여러 학파의 장점을 수용하고 그 학풍을 특색있게 장려하여 문운(文運)을 진작하였으며, 서얼(庶孼)을 등용하고 위항문학(委巷文學)을 적극 지원하기도 하였다. 또, 규장각을 설치, 우문지치(右文之治)’와 ‘작성지화(作成之化)’를 규장각의 2대 명분으로 내세우고 본격적인 문화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
한편, 세손 때부터 활자에 관심이 깊어 임진자(壬辰字) 등 여러 활자를 만들어 인쇄술의 발달을 기하는 한편, 영조 때부터 시작된 문물제도의 정비작업을 계승·완결하여 <증보동국문헌비고> <국조보감> <대전통편> <오륜행실(五倫行實)> 등을 간행하였다.
제도의 개편에도 힘을 써,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고 형정(刑政)을 개혁했으며, 백성의 부담을 덜기 위해 궁차징세법(宮差徵稅法)을 폐지하였다.
☞사도세자
조선 21대 왕 영조의 둘째왕자. 어머니는 영빈 이씨이며, 부인은 혜경궁 홍씨이다. 이복형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요절하고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었으므로 출생한 지 1년 만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였고 1749년(영조 25) 아버지를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게 되었는데 이때 그와 사이가 좋지 않은 계비 정순왕후, 숙의 문씨를 비롯한 노론 등이 영조에게 그를 무고하였다.
영조가 크게 꾸짖게 되고 그는 격간도동이라는 정신질환에 걸렸다. 이후 학문을 게을리하고 궁녀를 죽이며 여승을 입궁시키는 등 난폭한 행동과 광기로 영조의 노여움을 샀다.
1761년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金漢耉)와 그 일파인 홍계희(洪啓禧), 윤급(尹汲)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羅景彦)은 그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이어 영조는 그에게 자결명령을 내렸고 듣지 않자 뒤주 속에 가두어 죽게 하였다.
그 뒤 영조는 후회하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莊獻)으로 추존, 1899년(고종 36) 장조로 추존되었다.
☞혜경궁홍씨 이야기
영조 20년 1월 9일. 열살의 '세자빈' 을 앞에 두고 장차 임금의 장인이 되는 홍봉한이 입을 열었다. "궁중에 들어가면 3전 섬김을 삼가고 조심해 효성으로 힘쓰고 동궁 섬김을 반드시 옳을 일로 돕고, 말씀을 더욱 삼가해 집과 나라에 복을 닦으소서." 어린 세자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집과 나라에 복을 닦으라." 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가슴 깊이 새기고 어린 세자빈은 구중궁궐 속으로 들어갔다. 바로 이 사람이 영조와 정조, 순조의 시대를 관통한 여인, 혜경궁 홍씨였다.
이렇게 '집의 복을 닦으라.' 는 아버지 홍봉한의 말 한마디는 혜경궁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백두의 처지였던 홍봉한이 하루 아침에 세자의 장인이 되고, 숙부인 홍인한이 세도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면서 혜경궁은 자신의 가문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노론 명가로 일어나기 시작한 풍산 홍씨 가문을 위해 혜경궁은 나라와 남편과 자신을 모두 갖다 바쳐야 했다. 그것이 아버지의 성공이자, 숙부의 성공이었고 곧 자신의 성공이기도 했다.
'삼종(효종-현종-숙종)의 혈맥' 을 잇는 단 하나의 혈육, 그리고 장차 왕통을 이어나가야 할 사도세자와 세자빈 홍씨는 겉으로 보기엔 '최고의 결합' 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결합은 조선 최고의 비극을 불러 일으킬 수 밖에 없는 모순된 결합이었다. '소론' 을 지지하는 세자와 '노론' 명가의 세자빈은 섞일래야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남편을 바라보며 혜경궁은 남편을 버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 에서 사도세자와 영조의 사이가 처음부터 좋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사도세자의 정신병이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불편한 몸을 치유하러 나간 온양 행궁에서조차 백성들의 찬사를 받을 정도로 '멀쩡한' 인물이었다. 사도세자가 혜경궁의 말처럼 그저 '미치광이' 에 불과한 정신병자였다면 영조가 10여년 동안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길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허나 혜경궁은 이상하게도 '일관되게' 사도세자 정신병자설을 고집했다.
혜경궁은 남편의 원대한 꿈을 가장 지척에서 지켜보았다. 사도세자의 꿈은 '노론정권' 을 뒤집어 엎고 새로운 '소론정권' 을 세우는 것이었다. 썩을대로 썩어버린 노론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자신을 지지하는 소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 역학구도를 구상하는 사도세자의 꿈은 혜경궁에게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위협하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결국 그녀는 사도세자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노론의 '스파이' 로 활약하기로 결심했다. 사도세자의 일거수 일투족은 혜경궁의 입을 통해 궐 밖으로 빠져나갔고 노론은 혜경궁의 도움에 힘입어 사도세자 제거라는 무시무시한 음모를 아무렇지도 않게 꾸밀 수 있었다.
사도세자의 가장 큰 비극은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이 가장 믿고 의지해야 할 부인이 자신이 아닌 가문을 택했다는 처참한 상황에 영조의 어린 부인인 정순왕후 김씨가 가세하면서 사도세자의 입지는 더더욱 궁색해졌다. 사도세자는 노론이라는 강적이 밖에서 둘러 싸고 있는 위급한 형국에서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의 아들까지 낳은 부인 혜경궁과 법적인 어머니 정순왕후, 생모인 영빈 이씨 모두 바깥에서 이뤄지는 '사도세자 제거 음모' 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베겟머리 송사가 송사 중에 으뜸' 이라는 말처럼 그렇게 사도세자는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바깥과 안에서 함께 이루어지는 공격에 영조와 사도세자는 돌이킬 수 밖에 없는 강을 건넜다. 이것은 혜경궁 역시 마찬가지였다. 운명의 그날, 사도세자는 혜경궁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내 목숨이 그 날 마칠 것도 스스로 염려하여 세손을 경계 부탁하고 왔었는데 동궁(사도세자)께서는 생각과 다르게 나더러 하시는 말씀이 '아무래도 이상하니 자네는 잘 살게 하겠네. 그 뜻들이 무서워." 하시기에 내가 눈물이 드리워 말없이 허황해서 손을 비비고 앉았더니, 이 때 대조(영조)께서 휘령전으로 오셔서 동궁을 부르신다는 전갈이 왔더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혜경궁을 향한 사도세자의 원망어린 발언이다. 지금의 말로 풀자면 "나는 죽는데 이상하게도 너는 살 것 같으니 너의 뜻이 참 무섭다." 는 한탄이었다. 이어서 사도세자는 혜경궁에게 이런 말까지 남긴다. "자네가 참으로 무섭고 흉한 사람일세. 자네는 세손 데리고 오래 살려 하기에 오늘 내가 나가서 죽겠기로 그것을 꺼려 휘향을 내게 안 씌우려는 그 심술을 알겠네."
'나는 죽는데 너는 안 죽으니 이상하다.' '참으로 무섭고 흉하다' '내 아들을 데리고 혼자 오래 사려고 한다' '심술이 가득하다' 는 폭언은 10여년 넘게 자신과 함께 살아 온 부인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서슴없이 혜경궁에게 그런말을 퍼부었다. 운명의 그 날, 사도세자도 혜경궁도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을 제거할 수 밖에 없는 혜경궁과 부인의 가문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사도세자, 그들의 만남은 처음부터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비극적 결합이었던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사도세자는 영조의 명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아사했다. 온 몸이 굳고, 손톱이 다 빠질 정도로 뒤주 속에서 고통의 시간을 지냈던 사도세자는 대처분 8일만에 목숨을 잃었다. 그 시간 세자의 장인이었던 홍봉한은 뱃놀이를 떠나 있었고, 혜경궁 홍씨는 그런 아버지에게 사도세자를 도운 인물이 소론 영수 조재호임을 고해바쳤다. 사도세자의 죽음과 상관없이 그렇게 혜경궁은 자신의 가문을 위해 성심을 다했다. 자신의 가문을 위한 충성의 반 만큼만 혜경궁이 사도세자에게 신경을 썼더라면 사도세자는 아마 그런 식으로 비명에 횡사하진 않았을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사도세자를 죽인 '뒤주' 가 세자의 장인이자 혜경궁의 아버지인 홍봉한에 의해 역사 속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훗날 뒤주라는 단어를 꺼내기도 힘들어 '일물(一物)' 이라고 불리는 이 뒤주는 홍봉한이 직접 영조에게 귀뜸해 대처분 현장속으로 들여 놓았다. 그러나 혜경궁도, 홍봉한도 이 뒤주의 실체에 관해서는 조금의 말도 꺼내지 않았다. [한중록] 에서 볼 수 있듯 혜경궁은 그 처참한 현장을 지척에서 목격한 듯 구구절절한 변명만을 꺼내 놓을 뿐이다.
그렇게 노론의 '대처분' 은 사도세자를 제거하는 것으로 대단한 성과를 얻었다. 혜경궁은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혜경궁의 착각이었다. 사도세자를 죽인 마당에 노론이 사도세자의 아들, 세손까지 죽이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연산군의 비극에서 볼 수 있듯 세손이 살아 있는 세상은 노론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결국 노론은 사도세자에 이어 '세손' 까지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이른바 '택군의 정치' 였다.
"남편을 죽였으니 아들도 죽여라." 노론이 혜경궁에게 요구한 것은 바로 이 한가지였다. 허나 혜경궁은 차마 아들까지 버릴 순 없었다. 혜경궁은 노론과 가문의 '세손 제거 결정' 에 누구보다 강력하게 반발했다. 예상 외로 거센 혜경궁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노론은 세손을 제거해야만 했다. 사도세자가 자신들의 손에 의해 죽은 이상 어차피 세손과 노론은 한 하늘을 같이 이고 있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여기서 등장한 것이 바로 혜경궁의 숙부 '홍인한' 이었다. 혜경궁의 남편인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앞장 선 것이 아버지 홍봉한이고, 혜경궁의 아들인 세손을 죽이는데 앞장선 것이 숙부 홍인한이라는 사실은 남편이 아닌 가문을 택한 혜경궁의 모순이었다. 사도세자 제거 음모와 달리 혜경궁은 가문의 일에 조금도 협조하지 않았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던 것처럼 세손을 살릴 수 있었던 것도 오직 혜경궁과 영조 뿐이었다.
영조 51년, 영조는 백관들을 불러 놓고 "어린 세손이 노론-소론-남인-소북을 알겠는가? 국사와 조사를 알겠는가? 병조 판서와 이조 판서를 누가 할만한지 알겠는가? 나는 어린 세손에게 그것들을 알게 하고 싶으며 또한 그것을 보고 싶다." 며 사실상 양위 의사를 밝혔다. 이는 노론에게 용납될 수 없는 '청천벽력' 과 같은 하명이었다. 영조의 이 질문에 가장 먼저 대답한 사람이 바로 혜경궁의 숙부 홍인한이었는데 그 대답이 그야말로 명언(?)이었다.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 판서나 병조 판서를 누가 할 만한지 알 필요가 없으며, 더욱이 국사나 조사도 알 필요가 없습니다." 즉, 세손은 나랏일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알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이는 세손이 절대 임금의 자리에 오를 수 없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즉위를 막고야 말겠다는 노론의 강인한 의지가 담긴 한 마디였다.
홍인한의 이 발언은 훗날 홍인한 몰락의 가장 큰 원인이 되는데 현장에서 들은 영조와 세손 역시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영조는 "참으로 흉하다. 어찌 국사를 함께 논하겠는가." 라며 자리를 빠져나갔고 숙부의 기가막힌 발언을 들은 혜경궁은 숙부에게 "세손의 즉위를 방해하지 말라." 라는 경고문을 발송했다. 홍인한이 이 편지를 받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나와있는 바가 없으나 아마도 콧방귀를 뀌지 않았을까.
그러나 혜경궁 자신조차 용납할 수 없는 이 발언을 30년이 흐른 뒤 혜경궁은 [한중록] 에서 충성심 어린 발언으로 뒤바꿔 조작해 놨다. 세손이 이 세가지를 모두 안다고 대답하면 영조가 "내가 그리 금하는 당론을 세손이 안단 말이냐?" 라며 역정을 낼까 두려워 홍인한이 구구하게 변명했다는 것이다. [한중록] 의 이 구절을 보다보면 끝끝내 자신의 가문을 버릴 수 없었던 혜경궁의 처지가 절절하게 드러나 보여 한스럽기까지 하다.
이처럼 노론의 세손제거 공작은 대담하고 치밀했다. 다만, 다행인 것 한 가지는 노론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세손의 운명을 결정지을 결정권자 '영조' 가 세손을 지켜냈다는 것이었다. 영조는 삼종의 혈맥의 유일한 종손인 세손을 버릴 수 없었다. 아들의 처참한 죽음과 며느리의 간청을 지켜보며 영조는 끝내 세손에게 자신의 왕위를 물려주었고, 세손은 1777년 조선조 제 22대 왕이 된다. 바로 '명군' 정조의 탄생이었다.
정조가 무사히 즉위할 수 있었던데에는 영조와 혜경궁 홍씨의 힘이 지대했다. 정순왕후 김씨를 위시한 외척가문의 발호와 풍산 홍씨 집안의 음모는 혜경궁에 의해 일차적으로 차단됐고, 영조에 의해 최종적으로 마무리됐다. 남편은 버려도 아들은 버리지 못했던 한 어머니의 절절한 모성이었다. 훗날 혜경궁은 자신의 가문을 지키기 위해 다시 한 번 온 몸을 내 던지지만 적어도 정조의 즉위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죽음, 정조의 즉위로 이어지는 비극은 끝나지 않는 비극이었다. 사도세자 제거가 새로운 비극을 불러 일으켰던 것처럼 정조의 즉위는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정조의 즉위 일성은 노론에게도, 혜경궁에게도 가슴 철렁한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아!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것이 바로 임금이 된 정조의 첫 마디였고 혜경궁은 그 발언과 함께 자신의 가문이 무너지리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빠르게 직감했다. 혜경궁의 예상처럼 정조의 '복수' 는 처절하게 감행됐다. 자신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순왕후 가문은 풍비박산 났고, 노론의 주요 대신들이 귀양길에 올랐다. 정조의 조용한 '복수' 의 마지막 타겟은 당연히 '세손은 아무것도 알 필요가 없다' 던 혜경궁의 숙부 홍인한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자신의 가문을 무너뜨리는 모습을 보면서 혜경궁이 받은 충격은 더할 나위 없이 컸다.
혜경궁이 정조의 '복수' 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단식투쟁' 밖에 없었다. 정순왕후 김씨가 오라비를 살리기 위해 단식을 감행한 것처럼 혜경궁 역시 아버지와 숙부를 살리기 위해 단식을 감행했다. 혜경궁의 단식 때마다 정조는 "아! 내가 있는 것은 곧 자궁(혜경궁)의 덕이니 어찌 자궁의 뜻을 거스르겠는가!" 라며 탄식했다. 홍봉한과 홍인한을 죽이는 순간 사도세자에게는 효도가, 혜경궁에게는 불효가 되는 것 역시 정조가 처한 딜레마라면 딜레마였다.
정조조에 이르러 풍산 홍씨 가문은 완전히 몰락했다. '망국동에 망정승' 이라고 불리던 홍봉한-홍인한 형제는 위풍당당한 위세에도 불구하고 손자에 의해 귀양길에 올랐고, 끝내 부활하지 못하고 비참한 생을 마감했다. 혜경궁으로서는 가슴을 칠 수 밖에 없는 통탄이었으나 대 놓고 불평할 순 없었다. 이미 혜경궁이 살고 있는 나라 조선은 풍산 홍씨의 나라가 아닌 '정조의 나라' 였기 때문이었다.
혜경궁은 '가문의 부활' 을 23년 동안 꿈꿔왔다. 그러나 아들이 살아 있는 한 가문은 부활할 수 없었다. 아들이 임금이면서 자신의 가문은 몰락한 이 현실은 혜경궁 스스로 남편이 아닌 가문을 택한 것으로 자초한 일이었다. 혜경궁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가문의 부활을 곱씹었다. 그렇게 혜경궁이 꿈 꾼 '가문의 부활' 은 예상치 못하게 빨리 다가오고 있었다.
1800년 정조 24년 6월 28일, 종기로 투병 중이던 정조를 둘러싸고 치료상의 난맥이 드러난다. 정조 스스로 의학 지식이 뛰어난 군주였고 궁중 의원들이 즐비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치료는 쉽사리 이뤄지지 못했다. 바로 정조의 최대 정적 중 한명이었던 정순왕후 김씨가 정조의 치료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기 대문이다. 궁중의 한낱 아녀자로서 임금의 치료에까지 간섭하는 것은 불경에 가까운 파격이었으나 노론 대신들은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이른바 '정조 독살설' 의 서막이었다.
정순왕후는 정조의 병세가 선조 병술년의 증세와 비슷하니 성향정기산이라는 탕약을 올려야 함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더욱 우스운 것은 정순왕후의 하달을 당시 도제조 이시수가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다. 의학 지식이 없는 아녀자의 말 한마디에 임금의 치료가 우왕좌왕 하는 우스운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여기에 더 나아가 정순왕후는 내시를 데리고 정조의 안색을 살피겠다며 직접 대전에 발을 들여 놓기까지 했다. 말할 나위 없이 사태가 급박했다.
사태의 급박함을 먼저 알아차린 것은 누구보다도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이었다. 정조가 죽어야 가문을 살릴 수 있는 처지였음에도 혜경궁은 아들과 가문을 맞바꿀 정도로 비정한 어머니가 아니었다. 정순왕후가 대전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곤 혜경궁은 그 즉시 "동궁이 방금 소리쳐 울면서 나아가 안부를 묻고 싶어하므로 지금 함께 나아가려 하니 제신은 잠시 물러나 기다리도록 하시오." 라는 전교를 내리고 대전으로 향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처럼 외간의 대신들은 혜경궁의 얼굴을 직접 대면할 수 없었으므로 잠시 물러났고 정조를 둘러싼 노론 대신들의 방어벽은 혜경궁에 의해 다시금 허물어졌다. 혜경궁은 동궁을 데리고 정조의 안색을 살피기 위해 대전에 들어갔다. 정순왕후 김씨와 혜경궁 홍씨, 정조를 죽여야 하는자와 살리고자 하는 자의 밀고 당기는 기 싸움이었다. 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혜경궁이 대전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정조의 안색을 살핀 혜경궁은 자전과 함께 처소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정순왕후를 견제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안심하기엔 그 시간이 너무 짧았다.
결국 혜경궁이 처소로 돌아간 뒤 정순왕후는 다시 한 번 정조의 치료 전면에 등장했다. "내가 직접 받들어 올려드리고 싶으니 경들은 잠시 물러가시오." 라는 명과 함께 방 안에는 정조와 정순왕후, 단 둘이 자리잡았다. 투병 중인 임금과 그 임금을 죽여야만 사는 대비의 운명은 그렇게 결정지어졌다. 잠시 뒤 방안에서는 정순왕후의 곡소리가 들렸고 정조의 임종을 지켜본 것은 정조를 낳은 혜경궁도, 부인인 효의왕후도 아닌 정조의 최대 정적, 정순왕후였다.
정조 사후, 어린 순조를 대신해 대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했다. 정순왕후는 집권하자마자 자신의 가문을 살리는데 최대한의 노력을 기하는 한편 혜경궁 홍씨의 동생 홍낙임을 사사하는 등 풍산홍씨 가문에는 잔혹한 대처분을 내렸다. 외척은 자신의 집안 하나면 된다는 정순왕후의 철저한 개인주의는 다시금 혜경궁 홍씨를 절망에 빠뜨렸다. 훗날 혜경궁이 "흉하도다, 흉하도다." 라고 탄식한 정순왕후의 인품은 바로 이토록 잔혹했다.
혜경궁이 자신의 가문을 살릴 수 있었던 때는 정순왕후가 죽는 그 순간이었다. 정순왕후의 죽음과 함께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비극과 정조의 죽음의 가장 생생한 목격자임을 자처하며 [한중록] 을 편찬했다. 그리고 순조에게 "내 아버지와 가문의 신원을 회복 시켜달라." 며 이는 "선왕의 유지" 라고 강변했다. 정조도, 혜경궁도, 정순왕후도 모르는 주장이었지만 혜경궁은 일방적으로 이것을 주장하며 자신의 가문을 일으켜 세웠다.
[한중록] 에서 펼쳐지는 풍산 홍씨 가문에 대한 혜경궁 홍씨의 절절한 변명과 순조에게 펼치는 생떼와 같은 일방적 주장은 어쩌면 사도세자의 비극 조차 외면하려 했던 혜경궁 홍씨의 자기 변명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혜경궁은 한 평생을 가문을 위해 살았다. 자신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가문의 뜻을 저버린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70평생 혜경궁을 옥 죈 것은 '가문의 부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는 가문을 위해 남편을 버렸고, 가문을 위해 [한중록] 을 지었고, 가문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내던졌다. 그 업보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낳았고, 정조의 비극을 낳았고, 결국은 조선을 소통과 변화의 시대에서 폐쇄와 퇴보의 시대로 만드는 결정적 이유가 됐다.
'집의 복을 닦으라' 라는 아비의 말을 평생 가슴에 새기고 살았던 '풍산 홍씨' 의 여인. 그리고 그 운명 때문에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 넣을 수 밖에 없었던 잔혹한 여인. [한중록] 과는 전혀 다른 실제 역사 속 혜경궁 홍씨의 슬픈 가면은 지금도 사도세자와 정조의 절절한 삶을 정 반대로 대변하는 살아있는 '역사' 로 숨쉬고 있다.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영조 21)∼1805(순조 5). 영조의 계비(繼妃). 경주김씨(慶州金氏)로,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한구(漢耉)의 딸이다.
영조의 정비 정성황후 서씨(貞聖王后徐氏)가 죽자 1759년(영조 35) 왕비에 책봉된 뒤 가례를 행하고, 1772년에는 예순(睿順)을 비롯하여 성철(聖哲)·명선(明宣)·융인(隆仁) 등의 존호를 받았다.
소생은 없지만 사도세자와의 사이에 틈이 생겨 참소가 심하더니, 아버지 한구의 사주를 받아, 나언경(羅彦景)이 사도세자의 부도덕과 비행을 상소하자 서인(庶人)으로 폐위시켜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죽게 하였다.
그뒤 당쟁에서 세자를 동정하는 시파(時派)를 미워하고, 그것에 반대하는 벽파(僻派)를 항상 옹호하였으며, 정조가 죽고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면서 벽파인 공서파(攻西派) 등과 결탁, 정치적으로 그에 반대하는 시파 등의 신서파(信西派)를 모함하여 천주교에 대한 일대 금압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가환(李家煥) 등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들이 옥사당하고 정약종(丁若鍾) 등 간부들이 처형되었으며, 정약전(丁若銓)·약용(若鏞)형제는 전라도지방으로 귀양갔다.
그리고 종친 은언군(恩彦君)과 그 부인 및 며느리 등도 같은 이유로 사사(賜死)되었다.
한편으로는, 그의 과단성 있는 정치수행으로 흐트러진 질서를 다시 찾고 국가의 안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 시호는 정순(貞純)이며, 능호는 원릉(元陵)이다.
===도표로 본 조선조 왕들의 재위 기간과 혈통관계===
조선 : 1392년 개국~1910년 한일합방(27代 519년간)
| 순번 | 왕 명 | 재위 연도 | 재위 기간 | 혈통 관계 | 왕의 이름 |
| 1 | 태조(太朝) | 1392년~1398년 | 6년 | 이자춘(子春)과 의혜왕후 영흥 최씨의 2남 | 본명 이성계 휘는 단(旦) |
| 2 | 정종(定宗) | 1398년~1400년 | 2년 |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2남 | 본명 이방과 휘는 경(曔) |
| 3 | 태종(太宗) | 1400년~1418년 | 18년 |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5남 | 본명 이방원 |
| 4 | 세종(世宗) | 1418년~1450년 | 32년 |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3남. 형-양영대군, 효령대군 | 휘는 도(祹) |
| 5 | 문종(文宗) | 1450년~1452년 | 2년 |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장남 | 휘는 향(珦) |
| 6 | 단종(端宗) | 1452년~1455년 | 3년 |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장남 | 휘는 홍위(弘暐) |
| 7 | 세조(世祖) | 1455년~1468년 | 13년 |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2남 문종 동생. 왕자명 수양대군 | 휘는 유(瑈) |
| 8 | 예종(睿宗) | 1468년~1469년 | 2년 | 세조와 정희왕후의 윤씨 2남 | 휘는 황(晄) |
| 9 | 성종(成宗) | 1469년~1494년 | 25년 | 덕종(예종의 형으로 추존됨)과 소혜왕후(후에 인수대비) 윤씨의 2남 | 휘는 혈(娎) |
| 10 | 연산군(燕山君) | 1494년~1506년 | 12년 | 성종과 제헌왕후(페비 윤씨)의 장남. | 휘는 융(隆) |
| 11 | 중종(中宗) | 1506년~1544년 | 38년 |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의 2남 왕자명은 진성대군 | 휘는 역(懌) |
| 12 | 인종(仁宗) | 1544년~1545년 | 2년 | 중종과 장경왕후 윤씨의 장남 문정왕후의 보살핌으로 성장 | 휘는 호(峼) |
| 13 | 명종(明宗) | 1545년~1567년 | 23년 | 중종과 문정왕후 윤씨의 장남 문정왕후가 8년간 수렴청정 | 휘는 환(峘) |
| 14 | 선조(宣祖) | 1567년~1608년 | 41년 | 중종의 손자.명종의 조카.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의 3남.후궁 14명에 광해군 영창대군 등 왕자가 11명이나 됐음 | 휘는 연(蚣) 임진왜란 |
| 15 | 광해군(光海君) | 1608년~1623년 | 15년 | 선조와 공빈 김씨의 2남 임해군과 영창대군 형제 사살 | 휘는 혼(琿) |
| 16 | 인조(宣祖) | 1623년~1649년 | 26년 | 선조의 5째 자인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아들 | 휘는 종(倧) 병자호란 |
| 17 | 효종(孝宗) | 1649년~1659년 | 10년 | 인조와 인렬왕후 한씨의 2남 | 휘는 호(淏) |
| 18 | 현종(顯宗) | 1659년~1674년 | 15년 |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아들 | 휘는 연(棩) |
| 19 | 숙종(肅宗) | 1674년~1720년 | 46년 |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장남 | 휘는 순(焞) |
| 20 | 경종(景宗) | 1720년~1724년 | 4년 | 숙종과 장희빈의 장남 | 휘는 윤(昀) |
| 21 | 영조(英祖) | 1724년~1776년 | 52년 | 숙종과 화경숙빈 최씨의 2남 아들은 사조세자 | 휘는 금(昑) |
| 22 | 정조(正祖) | 1776년~1800년 | 24년 | 사도세자와 헌경왕후(혜경궁) 홍씨의 2남. 후궁 의빈성씨와의 소생인 문효세자는 요사함 | 휘는 산(祘) |
| 23 | 순조(純祖) | 1800년~1834년 | 34년 | 정조와 수빈 박씨의 장남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4년간 수렴청정을 하였음 | 휘는 공(蚣) |
| 24 | 헌종(憲宗) | 1834년~1849년 | 15년 | 익종(순조의 아들)과 신정왕후 조씨의 장남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안동김씨)가 7년간 수렴청정을 함 | 휘는 환(奐) |
| 25 | 철종(哲宗) | 1849년~1863년 | 14년 | 정조의 동생 은언군의 아들인 전계대원군과 용성부대부인 염씨 사이의 3남 순원왕후가 3년간 수렴청정함 | 본명 이원범 휘는 변(昪) |
| 26 | 고종(高宗) | 1863년~1907년 | 44년 | 흥선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의 2남. 10년간 대왕대비 조씨가 수렴청정함. 실권은 흥선대원군이 장악함. 일본인에 의해 독살됨 | 본명 이재황 휘는 희(熙) |
| 27 | 순종(純宗) | 1907년~1910년 | 3년 |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의 장남 순종의 이복동생인 영친왕을 황태자로 삼음. 조선조의 끝 임금 | 휘는 척(拓) 한일합방 |
===조선왕조 역대왕들의 기록===
1] 32년간 세자로 있었던 임금은 순종
조선 마지막 왕인 순종 임금은 2세때에 세자로 책봉되어 32년간을 세자신분으로 지냈다.
2] 죽어서 왕이 된 인물은
조선조에는 죽은 후에 왕으로 추존된 인물이 다섯 명인데
*덕종은 세조[수양대군]의 아들로서 세조1년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즉위 전에 죽었다
*인수대비의 남편이며 슬하에는 월산대군과 성종, 명숙공주 등 3명을 두었다.
원종은 선조의 5남으로 1627년에 왕으로 추존됨. 인조 등 4남을 둠.
* 진종은 영조의 아들로 사도세자와 4촌. 6세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즉위 전에 죽었다.
양자인 정조가 즉위하자 진종으로 추존.
* 장조는 유명한 사도세자로서 영조의 둘째아들이며 정조의 아버지.
부인은 홍봉한의 딸인 혜경궁 홍씨.
당파싸움의 희생양이 되어 아버지 영조에 의해 죽음. 1899년 장조로 추존됨.
* 익종은 순조의 아들이며 헌종의 아버지.
4세에 세자로 책봉되고 19세때[순조27년]대리청정으로 참정하였으나 4년만에 죽고 뒤에 익종으로 추존됨.
3] 가장 많은 아들을 둔 왕은?
세종대왕이 18명으로 가장많고, 다음이 성종 16명, 2대정종이 15명 순이다
딸은 태종[이방원]이 17명이며, 성종이 12명, 중종과 선조가 11명 이었다.
4] 왕비를 가장많이 배출한 가문은?
*청주한씨가 1위[태조비:신의왕후],[덕종비:소혜왕후],[예종비:장순왕후],[성종비:공혜왕후] [예종비:안순왕후], [인조비:인열왕후]로 가장많고
* 파평윤씨와 여흥민씨가 4명, 청송심씨와 안동김씨가 3명이다.
5] 왕비 중 가장 자식을 많이 낳은 왕비는?
* 세종대왕비 소헌왕후 심씨는 8남2녀를 낳았다.
성종의 제9비 숙의홍씨도 7남3녀로 공동1위이다.
6] 가장 짧은 기간 재위한 임금은
12대 인종이며 재임기간 9개월이었다.
7]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임금은
21대 영조로서 51년 7개월로서 반세기동안 왕좌를 지켰다.
8] 가장 단명한 임금은
단종애사의 주인공 6대 단종으로서 17세에 사약을 받고 죽음
9] 가장 장수한 임금은
21대 영조로서 83세까지 장수했다.
10] 가장 많은 부인을 둔 임금은
3대 태종과 9대 성종으로서 12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세종대왕은 6명이었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를 뒤 돌아보면서 염라국의 염라대왕(閻羅大王)이 조선왕 27명을 초청했습니다.
염라국의 대왕이 하루는 조선조 500년의 임금 27명이
저승에 다 와 있다는 보고를 받고 모두 만찬에 초대했습니다.
대왕은 건배 제의를 한 후, 분위기가 무르익자
곧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통역은 세종대왕이 맡았습니다)
"제일 단명한 임금은 뉘시오?"
"예, 단종(17세)입니다."
"그럼, 제일 장수하신 분과 재임기간은?"
"영조(21대) 83세에 승하하셨는데, 51년간 재위하셨습니다."
"장남이 왕위를 계승한 임금은?"
"7명뿐입니다. (문종.단종.연산군.인종 현종.숙종.순종 / 26%)
"자녀를 가장 많이둔 임금은?"
"태종(3대) 부인 12명에서 29명(12남 17녀)의 자녀를 생산했습니다."
"후손을 못 둔 임금은?"
* 단종(6대) * 인종 12대 * 경종 20대 * 순종(27대) 입니다.
"안방 출입이 제일 잦았던 임금은?"
* 3대 태종 부인 12명 * 9대 성종 부인 12명
"폭정을 한 왕은?"
"단연, 연산군(10대)입니다"
"제일 현정을 베푼 임금은?"
"예, 통역을 맡고 있는 '짐'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염라대왕:
세종은 백성도 잘 보살폈지만, 밤 정치도 잘해 부인
6명에 22명의 자녀를 둬, 생산 공장도 KS마크라고 들었소 이다~!!
"세종대왕 : 네, 황송합니다.,,??"
" 조선조 임금 중에서 가장 됐다 한 임금은?"
"예, 사도 세자의 아들인 정조대왕 인데 태평성대를 구가 했습니다."
"조선조 임금들의 평균 수명은?
" 47세입니다"
"그렇게 단명한 이유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생명을
오랫동안 보존하려고 애썼지만, 그들이 그토록 보존코자
했었는데 생명은 대단히 짧았습니다.
이유인즉,,,,
첫째. 10대 전반부터 수많은 후궁들 속에서 과도하게 성생활을 했고,
정력제에 해당하는 보약을 자주 복용하여 독이 몸에 쌓였고,
둘째. 일 거수 일 투족을 다른 사람이 다 대신해 줘 자신이 움직일
필요가 없어 운동이 부족 했으며.
셋째. 임금들의 생활은 일반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고달팠습니다.
기상시간은 오전 5시 전후. 하루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엔 일러야
밤 11시쯤 결국은 체력이 달렸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을 읽고 느낀점은
하나)
이씨조선 궁중의 암투가 519년동안 이어오면서 죽고 죽이고 피의 역사였다고..........권력이 무엇인지 상대방을 치지 않으며 내가 죽고......상대방을 먼저 쳐야만 내가 살고...... 고려의 역사나 조선의 역사나 현대의 역사의 뒤안길을 살펴보니 권력과 정치란 비정한것인가?
둘)
조선의 왕들은 평균수명이 47세, 지금으로 말하자면 한창 일한 나이인데 최고의 부와 권력을 누리면서도 그토록 보존하고자 하는 생명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단명으로 생을 마감한 것은 상대방의 보복으로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서 였을까? 아니면 운동부족 또는 쥐색에 빠져서일까?
셋)
세종대왕의 한글의 창제는 우리후손들에게 문맹자가 없도록 쉬운 문자를 남기어 잘한일이라 평가 될만합니다.
욕심 않부리고 건강하면서 즐거웁고 행복하게 인생여행하면 되지 않나 이렇게 생각됩니다. 건강합시다. 즐겁고 행복하게........오래오래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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