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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새소리 택배☆]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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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리 택배]
이혜선 시집 / 문학아카데미시선 273 / 문학아카데미(2015.08.25) / 값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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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리 택배
이혜선
구례 사는 후배가 택배를 보내왔다
울안의 앵두 매실 머위대도 따지 못했어요 콩은 밭에서 콩깍지가 터졌고 고구마 두 이랑은 살얼음 낀 뒤에야 캐었답니다. 감 몇 개 그대로 까치밥이 되고 밤은 쥐들 먹이가, 대추와 산수유는 새들 먹이가 되었어요 그래서 제 집 울안과 남새밭에는 언제나 새들 지저귀는 소리 끊이지 않아요
상자를 여니 서리 맞은 누런 호박 한 개와 대추가 들어있었다 고구마 여나믄 개와 주황색 감이 남새밭과 감나무를 데리고 들어 있었다 바삐 통통거리는 그녀 발소리 속에 내년 봄에 핀 산수유꽃망울도 질세라 연노랑 하늘을 서둘러 열고 있었다
빈 상자 속에서 또롱또롱 새소리가 방울방울 튀어나왔다 뒤이어 지리산이 큰 걸음으로 걸어나왔다
불이不二, 식구
이혜선
개숫물 함부로 버리지 말아라
뜨거운 물은 식혀서 버리고
건더기 있으면 가라앉혀 버리거라
해종일 밭머리 엎드렸다 돌아오신 아버지
발갛게 익은 밀짚모자 벗어 털며
밥상머리에서 당부하는 첫 마디
지렁이 굼뱅이 고물고물 땅속 식구들
그 물 받아먹고 살지러
그애들도 식군데
건더디기 있으면 목이 메이고
뜨거운 물에 약한 몸 데일라
논두렁 햇쑥 돋는 산자락 논배미
모내기 하다 굽은 허리 펴는 아버지
거머리 물린 종아리 문지르며
어 씨원타,
헌혈 한 번 자알 했으니 보나마나 올 농사는 대풍일세.
불이不二, 공기가 아프다
이혜선
이불을 널어놓은 창문으로
날아든 왕벌 한 마리
활짝 열려 텅 빈 문으로 나갈 줄 모르고
온 집안을 붕붕 날아다닌다
닫힌 창문에 이리저리 머리 부딛고 다닌다
어디가 길인지, 나락인지
허방지방 흙탕길 헤매온 내 모습이다
지하철 2호선 순환선 타고 깊은 잠 들어
온종일 돌고 도는 노숙자, 캄캄 밤하늘 돌고 돌다가
충돌하여 떨어지는 별똥별, 우주의 노숙자 내 모습이다
그러다가 지칠 때쯤
누군가 손 내밀면 좋아라 덥석 잡고
지옥이라도 따라가는 나,
기진맥진하여 창틀에 널브러진 그를
부채로 날려서 창문으로 내보낸다
나도, 그분이 내밀어주는 그 부채를 잡고 싶다
길 잃은 그 자리, 동생이 아프니
공기가 아프다.
이팝꽃 필 무렵
이혜선
6.25 전쟁 이듬해 초여름, 아직 보리가 익기 전
세상에서 가장 넘기 힘들다는 보릿고개
아이들은 그 고갯마루에 올라 소나무 껍질을 벗겨 우려낸
멀건 송기죽으로 배를 채웠다
여기 저기 시체가 썩어 해골 되어 누어 잇는
그 산을 헤매다가 주운, 제 키보다 긴 녹슨 총 하나
장난감이 없던 시절,
동네 아이들 빙 둘러서서 좋아라 흔들어대며
여지저기 서로 만져보다 누군가 당긴 방아쇠에 뻥!
돌이의 밥통이 터졌다
길바닥에 하얀 밥알들이 쏟아져 나왔다
돌이 엄마가 절미단지에 쌀 한 술씩 모아서
생일밥 해준 그 이밥이,
길에서 죽은 귀신이라 제 집에 못 들어가고
상여집에 누었다가 산으로 간 돌이의 밥통에서,
이제는 배가 불러 이밥이 터져나는 아이들 앞에,
이팝꽃도 모르고는 아이들 앞에,
올해도 산에 들에 지천으로 이팝꽃 핀다.
도천수대비가禱千手大悲歌
이혜선
엄마, 사랑해
나는 목청을 높여 말할 수 있지만
듣지 못하는 엄마라고
말을 할 수 없는 엄마라고,
한 번도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어요
안 보이는 구석으로 엄마를 피해 나다녀서 미안해요
그러나 내게는 간절한 소원 하나 있어요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다면
엄마가 딸이 되고 내가 엄마 되어
엄마가 내게 해준 사랑만큼 내 딸을 키우고 싶어
엄마를 부끄러워해서 마음 아프게 한 그만큼
내 마음도 아프고 싶어
언제나 내 눈 속에 가득 담긴
세상에서 오직 내 목소리만 알아듣는 엄마, 우리 엄마
엄마, 사랑해!
미안하다 미안하다
이혜선
딸을 팔고 백 원을 받은 그 엄마, 뛰어가 빵을 사와서 아이 입에 넣어주며 평생 배 곯린 게 마음 아파 ‘용서해라’ 통곡했다지요 어떤 아이는 날마다 풀죽으만 먹다가 생일날 아침 흰 밥 한 그릇 앞에 놓고 그건 밥이 아니라고 ‘밥 달라’ 울었다지요 풀죽을 밥으로 알고 사는 그 아이들, 풀죽도 못 먹어 맥없이 죽어가는 북녘 아이들,
미안하다 미안하다 너무 많이 먹어서 배 나온 것 미안하다 살 빼려고 비지땀 흘리며 사우나에 들어 앉아 미안하다 먹다가 내 배 부르다고 날마다 쓰레기통에 음식 버려 미안하다 같은 하늘 같은 핏줄 형제들 굶어 죽어도 모른 척해 미안하다 혼자만 뜨신 방에 단잠 자서 미안하다 달려가서 밥이며 약이며 쥐어주고 싶어도 가지 못해 미안하다 이유가 많아서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말만 해서 더 미안하다.
거미줄 법문
이혜선
다보사 큰 법당에 가부좌하고 앉으니
머리속에 매미소리
탱탱한 줄 하나 매어놓는다
연이어 가로세로
얽히고 설킨 거미줄 소리소리
순식간에 빈 머릿속
매미허물로 가득 찬다
꿈틀대는 초침 속 결가부좌하고
꽉 끼는 옷을 벗는다
몸부림 옷부림친다
팔만 사천 땅 속 시침 분침이 흔들린다 조여든다
조여 오는 거미줄 속에 앉아
벗어버린 옷, 텅 빈 안쪽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이판사판
탱탱한 어둠 밧줄 한 쪽 끝을
확 놓아버리니 거미줄 밖이다.
인드라 구슬그물
이혜선
충주박물관 불교전시실에서
호랑이 안고 있는 나한상을 보았다
귀가 크고 눈썹이 길게 늘어진 나한님이
아기호랑이를 무릎 위에 앉혀 포옥 안고 있었다
두 몸이 한 몸인 양 잠차지게 안고 있었다
얼굴 표정은 알 수 없도록 닮아 있는 돌덩이다
가부좌한 무릎 위에 앉아
편히 쉬는 아기 호랑이 모습도
알아볼 수 없도록 닳아 있다
마치 불어오는 바람에 뜰 앞 감나무잎이 날아내렸다
감잎 아래 흙집으로
개미들이 먹이를 가득 물고 드나들었다
먹잇감을 무거운 등에 진 개미 행렬 속에 언뜻
내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나한님의 긴 눈썹이 휘날렸다
두툼한 손으로 내 등을 쓸어주었다
잠차지게 포옥 안아주었다
마량포구, 금빛 화살을 던진다
이혜선
남도의 이월은 바다로부터 온다
햇님 입술 닿을 때마다
살짝살짝 알몸 비틀며 간지러 타는 신호느이 바다
부드러운 젖가슴 다 열고 길게 누워
맨살로 안아주길 기다리는 다수운 뻘밭
양지 언덕 나실나실 피어나는 나싱개 향기
매생이 감태 파래미역
김발 걷어올리는 아낙네 재바른 손길
구수한 사투리로 어기여차
그물노래 뱃사나이 그을린 힘줄
공중을 나는 새의 깃털에
땅 속 깊이 잠든 뿌리에
금빛 화살을 던진다
파릇파릇
나실나실
수런수런
손 잡으로 온다
남도의 이월은 바람으로부터 온다.
색色을 먹고 공空을 낳다 1
이혜선
절골 자연 휴양림에
생강나무 층층나무 산딸나무 어깨 겯고 서 있다
해돋이 봄하늘이 달려와 뻥튀기판이 되었다
햇살이 나무를 뻥튀기하더니
노란 생강나무 꽃이 피었다
층층나무 산딸나무에 차례로 하얀 꽃이 피었다
숲 속에 해종일 하늘바라기선 나도
나무 옆에 빈 손 들고 서서
나무가 되었다
꽃의 염색채를 안고
온몸 물관부 잔가지 흔든다
뿌리를 거꾸로 허방을 쓸어본다
함박눈 내려 쌓이는 겨울이면
새벽마다 동그란 이슬방울이 내려와
하얀 허방꽃을 피운다
열매도 뿌리도 떨어진 이파리도
모두 허방꽃으로 피어난다.
새싹 비빔밥을 먹다
이혜선
무우싹 냉이싹 겨자싹
고추장에 썩썩 비벼 발그레 물 오른 봄싹들
큰 숟갈 둠뿍 떠서 한 입 가득 넘긴다
내 몸 들녘 가득 푸른 새싹들 솟아난다
동그란 젖무덤에 볍씨가 싹트고
봄 오른 입술엔 파릇파릇 냉이가
등줄기엔 쭉쭉 뻗은 소나무가 자라난다
어느새 팔다리엔 자운영이 돋아나네
봐!
온몸 구석구석 살이 트기 시작했어
어느새 푸른 물결 넘실대고 있잖아
새싹비빕밥을 자꾸자꾸 먹으면
우리 사는 푸른 지구‘
맑은 물 맑은 공기 잘 썩은 흙으로 다시 태어날 거야
연분홍 봄싹 피어날 거야
초가지붕, 화양연화
이혜선
마당 가득 샛노란 이엄뭉치가 쌓인 날, 동짓달 초하루 바람 자는 날 남늪아재 덕암양자반이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에 올라갔다 옹칠이 아재가 아래에서 두루마리 이엉뭉치를 올려주면 위에서 받아 추녀의 끝에서부터 두루루 펼쳐 차곡차곡 지붕을 이어다가다 맨 꼭대기엔 용마름을 펴서 지붕 전채를 꼭 앉아 주었다 빗자루로 스윽스윽 쓸어서 볏짚이 골고루 펴지면 새끼줄로 동여매어 꼭꼭 눌러주었다 정침과 사랑채를 가방 돌아가며 추녀 끝에 삐죽 내민 볏짚을 가지런히 면도해주면 짧은 동짓달 해가 어느덧 똥맷등 너머로 꼴깍 숨었다 머릿수건 벗어 땀을 닦고 횃불 아래 둘러앉은 저녁상에 막걸리 덕담이 구수하다
지금도 바람맞이 산고개 넘다가 뒤돌아보는 그
높은 음자리표.
간장사리
이혜선
시어머니 제사 파젯날
베란다 한 구석에 잊은 듯 서 있던 간장 항아리 모셔와
작은 병에 옮겨 부었다
20년 다리 오그리고 있던 밑바닥을 주걱으로 긁어내리자
연갈색 사리들이 주르륵 쏟아진다
툇마루도 없는 영주땅 우수골 낮은 지붕 아래
허리 구부리고 날마다 이고 나르던
체수 작은 몸피보다 더 큰 꽃숭어리들
알알이 갈색 씨앗 영글어 환한 몸 사리로 누우셨구나
내외간 살다 보먼 궂은 날도 있것제
묵은 정을 햇볕삼아 말려가며 살아라
담 너머 연기도 더러 챙기며 사리 하나 품고 살거라
먼 길 행상 가는 짚신발 행여나 즌데를 디디올셰라
명일동 안산에 달하 노피곰 돋아서
어긔야 멀리곰 비추고 있구나*
이승 저승 가시울 넘어 맨발로 달려오신
어머니의 간장사리.
*백제 가요 ‘정읍사’에서 차용
콩나물시루 속 심헤어
이혜선
1.
작은 콩알 속에 잠 든 씨눈이
싹터 줄기를 세우기까지
시루 속에서 몸 비틀며 밀어 올리는 연둣빛 시간
이따금씩 물 부어주면 온 몸 불리고 싹을 틔워서
마침내 까만 껍질 찢어지는 붉은 꽃송이
2.
캄캄한 콩나물시루 속 심해어
하루 서너 번 주는 물을 통째로 꿀걱 삼키고
젖은 몸 불리는 사코파린크스*
통방울눈으로 위만 바라보며 선선에 들어
조금씩 줄기 밀어 올리는 바렐아이*
작은 콩나물시루 속 세상을 키운다
수심 1km 아래 푸른 바다에서
연한 싹 한 줄기 끌어 올린다
빛을 쏘아 올린다.
*심해어들은 깊은 바다 속 환경에 적응해가면서 수심 1km 아래서는 스스로 빛을 낸다
경칩 무렵
이혜선
먼 데 산이마
아지랑이 앞세우고 다가오네
엎드린 잔등이에 잔디풀 돋아나는 소리
잔뿌리 실뿌리 더 깊이 발 뻗어 물 긷는 소리
쪼로롱 물관부 따라 새물 오르는 소리
상수리 마른잎 이불 속에서
애벌레가 돌아눕는 기착
발가락 꼼지락대는 기척
개미굴 안방에 산개미 알 깨어나는 소리
바위굴 입구 새끼곰들 낑낑, 내다보는 까만 소리들
잔설 녹은 땅 헤치는 두더지 똥그란 눈망울
얼음 풀린 냇물 건너
그대 사는 마을, 더 가까이 보이네 들리네
그대 하마 내 앞에 다가서는 향기
그 소리.
막걸리 찬가
이혜선
조상님 재상 앞에 청해 모시고 유세차 모월 모일 술 부어 강신할 때 상향 헌작할 때 막걸리 항아리에 용수박아 맑게 떠올린 청주가 제격이지
6.25 전쟁 불을 뿜던 경인년 이불보따리 솥단지 이고 지고 피난간 김해 진영땅 피난동이 날 낳고 젖이 모자란 어머니 막걸리에 설탕 타서 마시고 막힌 젖줄 콸콸 쏟아졌다지 동네 아낙네 남정네 모두 모여 보리타작하는 오뉴월 뙤약볕에도 바깥마당 찬 샘에 담가둔 막걸리 김치 한 쪽이면 불끈불끈 새 힘 솟았다지 꽃순이 삼돌이 시집 장가가는 날 지나가던 과객도 불러 온 동네 잔치할 때 마당 가운데 놓인 술동이 한 대접씩 돌아가며 파서 마시면 육자배기 어깨춤에 온 마당이 빙글빙글 한 마음 손 잡고 돌았다지러 동구밖 주막집 막걸리 한 잔에 거나해진 아버지 ‘꽃잡고 길을 물러’ 노래 한 자락에 세상 근심 다 사라졌다네
너와 나 어깨 겯고
대대로 겨레 젖줄 지혜 샘 막걸리 속에
어진 겨레 둥근마음 끝없이 뻗어가네
남북으로 나뉘인
꽃과 나무와 풀뿌리도 하나 되어 뻗어가네
지구를 만들다
이혜선
미사리 한강 가에 가서 흙을 떠 왔다
아른아른 봄 햇살이 함께 따라왔다
하얀 스티로폼 상자에 햇살거름 섞어 담았다
집 하나 만들었다
매운 고추 방울토마토 상추를 심고 잘 눌러주었다
물을 훔뻑 주었다
우리 모두 묵은 신발을 벗고 새싹이 트는 봄밤
발바닥이 간질간질, 물관부가 스멀스멀 열린다
봄햇살 깃털 달고 날아오른다
심장이 벌떡벌떡 뛰는 새 지구를 만들었다.
백제 고분
이혜선
제 7호분, 제 10호분
이름표 대신 번호표 달고
무리지어 누워 있다
둥근 봉분 언저리 그 발치께에
보라색 제비꽃
파랗게 입술 질려 눈짓한다
등허리엔
말라가는 쑥대풀 무등태우고
능침 쪽으로 허리 굽힌
키 큰 소나무들 읍을 받으며
언제쯤일까, 이름 찾을 그날을 기다린다
손잡아 깨워줄 발자국소리,
오늘도 기다리는 긴 하루
한가람 물결 위에 천 칠백 년 해그림자 진다.
불이, 금줄
이혜선
볼리비아 우유니 소금 사막에 비가 오면
우유니 소금호수에 하늘이 알몸으로 내려온다
소금호수가 하늘을 받아 안아 몸을 포갠다
소금호수 위를 걸어가는 검은 사람 흰 사람
모두 덩달아 옷을 벗고
알몸 하늘의 비밀문 안에 들어선다
본래 하늘과 땅은 하나였다
너와 나 사이 갈라놓고 소금 뿌린 금줄은
내 안에 있었다,
별이 되지 못하는 내가 어리석었다
소금사막 한가운데 잉카가와시 섬
하늘 위에 솟아올라
둥둥 속옷가지 다 벗었다
무거운 인줄을 다 버렸다,
소금호수 하늘을 받아 안아 몸을 포개는
황홀한 입맞춤.
적멸을 쪼다
이혜선
도토리 깍지 속에 숨어 있는
고요함을 주우러
오대산 적멸보궁 올랐더니
발 시린 딱따구리 한 마리
이 뭣고, 이 뭣고
마른 나무둥치만 쪼고 있었네
도토리도 다람쥐고 보이지 않고
마음 숨긴 물소리만
만져보고 돌아왔네
솔바람 소리만
만져보고 왔네.
새 백악기를 위하여
이혜선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 너를 만나러 가을햇살 눈부신 날 길을 나섰다
너에게로 가는 길은 중생대 백악기 일억 년의 길 손짓하는 억새꽃 잎새를 헤치며 어두운 동굴을 지나 물 마른 웅덩이와 구멍 뚫린 바위굴을 지나서 자갈길 모래길을 타박타박 걸어서 가야 하는 길, 달빛의 장강을 건너 물에 비친 별빛오리 만지며 헤엄쳐 가야 하는 길
일억 천만 년 후의 내 꿈속에 깨어나기 위해 너는 그날 일억 천만 개의 알을 낳았으리 내 슬픈 구름 그림자 저쪽에 네가 낳아놓은 중생대 백악기의 꿈, 오늘 내 앞에 와서 깨어나는 너의 눈빛, 너의 노래, 그 노래 함께 부르기 위해 나,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날갯짓하여 왔네
오늘 나도 일억 천만 년 후에 태어날 새 알을 낳아 무너지지 않을 햇살의 집에 묻어 두네 아직도 혼자서는 다스리지 못하는 우리들 붉은 사랑의 알을, 영원히 불리어진 너와 나 새로운 백악기의 노래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대한민국 화성에서 발견된 백악기의 공룡뼈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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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人의 말
10년 만에 시집을 낸다.
하이데거가 상찬한 휠덜린의 시 ― 신의 목소리를 붙잡아 서 제 동족에게 전해주는 예지의시, 만해 같은, 육사 같은, 매천 황현의 절명시 같은,
정신이 살아있는 시,
좋은 시 훌륭한 시 위대한 시 중에서 시까지는 힘들어도 훌륭한 시 몇 편은 들어 있어서 정신을 일깨울 수 있는 시집, 그런 시집을 내야겠다는 마음이 10년이 되도록 시집을 내지 못하게 했는데, 막상 시집을 내자니 부끄럽다.
세월만 허송하고 시는 늘 제자리걸음이다.
그래도 일단 날개를 달아보자.
날아라 시여
생면부지의 누구 사슴에라도 부지런히 날아가 깃들어라.
인연이라도 지어라.
내일을 위한 뿌리를 내려라.
2015년 녹음 손짓하는 날
滋忞 李 惠 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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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선 詩集 [※새소리 택배※]
[ 이혜선 시인의 시세계 ] -
불이와 화쟁, 화해와 연민의 화엄 시학
박 제 천
1.
이혜선 시인의 네 번째 새 시집『새소리 택배』를 읽는다. 결론부터 말하자. 이번 새 시집에선 30여 년에 걸친 시인의 시세계에서 발원한 사유와 서정의 두 갈래 장강을 만날 수 있다. 그 흐름이 한 물로 모여들되 곳곳에 자리잡은 장강의 지주와 같은 삶의 공간도 만날 수 있다. 그 공간을 둘러싸고 피어나는 물너울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대양의 지리지는 특별한 볼거리다. 여기서 시인이 보여주는 정신적 상승과 서정적 감흥은 마치 비익조나 연리지처럼 모두가 하나라는 불이의 사유와 서로 다른 나무들이 어울려 한 몸의 새 나무를 키워내는 화쟁의 미학을 특징적으로 형상화시키고 있어 작품을 읽는 내내 시간여행자처럼 다양한 심미적 경험을 맛보게 한다.
시인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무형의 모든 것들을 너나할 것 없이 품안에 껴안아 연민의 물꼬를 트는 독자적인 상상력을 맛보는 재미도 특별하지만, 자연과 시인이 하나가 되어 생명의 우주를 화려하게 개화시키는 미학적 연출을 통해 한껏 무르익은 서정적 감흥에 저절로 젖어드는 것 역시 놓칠 수 없는 큰 기쁨이었다.
이혜선 시집은 제1부 <이팝꽃 필 무렵>, 제2부 <인드라 구슬그물>, 제3부 <새소리 택배> 제4부 <새 백악기를 위하여>등 모두 4부로 엮여져 있지만 주제별로 갈래졌다기보다는 시인의 두 갈래 특징을 서로 혼합시킴으로써 읽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편편의 작품마다 시인의 고향으로부터 시인이 살며 마주치는 사회 현장, 시인이 꿈꾸는 삶의 길, 자타불이의 고뇌와 각성을 함께 경험하고 음미하면서 시인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안배되어서 시집을 읽기보다는 눈으로 보고 느끼고 참여할 수 있는 장편 파노라마와 같은 편집기법이 인상적이었다.
시집의 서문을 본즉 3,4년이면 시집 한 권을 발간하는 요즘의 경향과 달리 10년 만의 출산이다. 1981년『시문학』으로 등단한 이래『神 한 마리』『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이』『바람 한 분 만나시거든』등 세 권의 시집을 내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생산을 중단한 채 새 시집을 펴내고자 정진한 10년의 결과물이다. 달마의 면벽 10년을 연상시키듯 시인은 그동안 시란 무엇인가. 왜 시를 쓰는가와 같은 작시법의 원론을 화두삼아 자성과 숙고의 용맹정진을 거친 것이다. 시인의 서문을 인용하자면 “하이데거가 상찬한 휠덜린의 시-신의 목소리를 붙잡아서 제 동족에게 전해주는 예지의 시, 만해 같은, 육사 같은, 매천 황현의 절명시 같은, 정신이 살아 있는 시, 좋은 시 훌륭한 시 위대한 시중에서 훌륭한 시 몇 편은 들어 있어서 정신을 일깨울 수 있는 시, 그런 시집을 내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집 발간을 미루었다는 것이다.
시인의 소망처럼 “정신이 살아 있고, 정신을 일깨울 수 있는 시”를 쓰고 싶은 것은 시인된 자, 누구나 한결같이 간절하게 기원하는 목표라 할 것이다. 시력 30년이 넘는 중진시인이자 발표된 작품마다 마음에 곰곰 새겨볼 만큼 그윽한 맛이 깃든 가작 명편을 수없이 생산한 시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겸양을 바탕 삼았기에 시인의 결의에 걸맞은 이만한 새 시집이 태어났으리라 생각되는 대목이다. 그러니, 시인의 새 시집을 읽으며 새롭게 한 편 한 편 처음인 듯 저작하면서 그 곰삭은 맛과 멋을 음미해 보는 것도 읽는이의 예의라 다짐해본다.
2.
이혜선 시인의 새 시집을 읽어가는 동안 시집에 무게를 더한 사유의 작품에 한껏 빠져들기도 했지만 요소요소에서 문득 불어오는 한줄기 청량한 바람과 같은 서정적인 작품들을 만날 수 있어서 가외의 기쁨이었다. 상기된 뺨을 식히듯 가슴을 시원하게 확 틔워 주는 이런 작품들이 있기에 조금은 부담이 될 수도 있는 작품들과도 선뜻 무릎을 맞댈 수 있구나 생각되었다.
개숫물 함부로 버리지 말아라
뜨거운 물은 식혀서 버리고
건더기 있으면 가라앉혀 버리거라
해종일 밭머리 엎드렸다 돌아오신 아버지
발갛게 익은 밀짚모자 벗어 털며
밥상머리에서 당부하는 첫마디
지렁이 굼벵이 고물고물 땅속 식구들
그 물 받아먹고 살지러
그 애들도 식군데
건더기 있으면 목이 메이고
뜨거운 물에 약한 몸 데일라
논두렁 햇쑥 돋는 산자락 논배미
모내기 하다 굽은 허리 펴는 아버지
거머리 물린 종아리 문지르며
어 씨원타
헌혈 한 번 자알 했으니 보나마나 올 농사는 대풍일세
-「불이不二, 식구」전문
작품「불이不二, 식구」는 시집의 첫장을 차지한 상품이다. 아마도 시인의 유년체험이고, 실제의 아버지 말씀이겠지만, 읽는 그대로 공감이 가는 우리네 참 삶의 법도 이자 철리다. 미물들이 밟혀 죽을까봐 미투리조차 발을 넓게 벌려 짰다는 옛스님들의 마음쓰임처럼 사람이 사람과 살고 사람이 벌레와 공생해야 하는 철리가 담뿍 들어 있지만 읽는 내내 구어체의 부드러운 구절들이 살갑고 절로 미소를 자아내는 작품이다. 제목에 ‘불이’가 붙어 있기는 하지만, ‘불이’의 뜻이 무엇일까 찾아보지 않아도 되는 작품이다. 일반 시집에 비해 제목에 불교적이거나 관념적인 용어가 많이 들어간 시집이지만, 내용은 그렇게 어렵지 않으니 기죽지 말라는 시인의 따뜻한 배려라 할 것이다.
「불이不二, 식구」에서 보여주는 자연과의 상생은「불이不二, 번져간다」로 가면 우주와의 상생으로 발전한다. 전문 10행의 작품이지만, “나뭇가지 하나 꺾은” 인과로 가지가 “툭!/부러지는 순간” 지층에서는 “파랗게 물오른 눈동자 하나/비명을 지”르고, “온 산 나무들이 아픔에 몸을 비/”트는 참상이 벌어진다. 동시에 “우주 심장에 푸른 핏물/빠르게 번져”가기에 “나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고 주저앉았다”는 내용이다. 『주역』의 허무가 공자의 천지로 설정되고, 그것이 다시 노자의 자연으로 확대되어 장자의 우주로 통합하는 동양철학의 원리처럼 나뭇가지 하나 꺾는 것이 온 우주로 확대되어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는 반전이 거부감없이 설득력을 갖는 작품이다. 시인의 도저한 정신이 빚어내는 시의 황홀경이다.
시어머니 제사 파젯날
베란다 할 구석에 잊은 듯 서 있던 간장 항아리 모셔와
작은 병에 옮겨 부었다
20년 다리 오그리고 있던 밑바닥을 주걱으로 긁어내리자
연갈색 사리들이 주르륵 쏟아진다
툇마루도 없는 영주땅 우수골 낮은 지붕 아래
허리 구부리고 날마다 이고 나르던
체수 작은 몸피보다 더 큰 꽃숭어리들
알알이 갈색 씨앗 영글어 환한 몸 사리로 누우셨구나
내외간 살다 보면 궂은 날도 있것제
묵은 정을 햇볕삼아 말려가며 살아라
담 너머 연기도 더러 챙기며 사리 하나 품고 살거라
먼 길 행상 가는 짚신발 행여나 즌데를 디디올셰라
명일도 안산에 달하 노피곰 돋아서
어긔야 멀리곰 비추고 있구나
이승 저승 가시울 넘어 맨발로 달려오신
어머니의 간장사리
-「간장사리」전문
「불이不二, 식구」가 아버지에 대한 회상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화합을 녹여냈다면,「간장사리」는 시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재생해 삶의 요체를 사리로 빚어낸 작품으로서 시인의 은사인 미당 서정주의「질마재 신화」를 연상시키는 황토색이 인상적이다. “20년” 묵은 간장항아리를 비우면서 바닥에 닥지닥지 껴붙은 간장을 긁어내며 만나는 “연갈색 사리”에서 시어머니의 말씀과 백제 가요「정읍사」의 한 구절을 차용하면서 부부간의 정을 다독이는 이 작품은 간장사리가 시인이 사는 “명일동 안산”에 높이 떠오른 달과 겹쳐지면서 이승저승을 환히 밝히는 빛으로 승화되고 있다.
「불이不二, 식구」나 「간장사리」처럼 이번 시집에는 시인의 유년시절, 고향친구들과 같은 제재를 통해 기억을 재생하는 시편들이 많은 게 특징적이다. 아울러 이들 작품은 하나같이 구어체와 사투리를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소리내 읽을수록 정겨운 리듬에 젖어들게 만든다. 이렇듯 향리(경남 함안)출신의 시인이 몸에 익은 표현을 자유자재 구사하는 언어능력은 제3부의 「새소리 택배」에서 발군의 성취도를 보여준다.
구례 사는 후배가 택배를 보내왔다
울안의 앵두 매실 머위대도 따지 못했어요 콩은 밭에서 콩깎지가 터졌고 고구마 두 이랑은 살얼음 낀 뒤에야 캐었답니다 감 몇 개 그대로 까치밥이 되고 밤은 쥐들 먹이가, 대추와 산수유는 새들 먹이가 되었어요 그래서 제 집 울안과 남새밭에는 언제나 새들 지저귀는 소리 끊이지 않아요
상자를 여니 서리 맞은 누런 호박 한 개와 대추가 들어 있었다 고구마 여나믄 개와 주황색 감이 남새밭과 감나무를 데리고 들어 있었다 바삐 통통거리는 그녀 발소리 속에 내년 봄에 필 산수유꽃망울도 질세라 연노랑 하늘을 서둘러 열고 있었다
빈 상자 속에서 또롱또롱 새소리가 방울방울 튀어나옸다 뒤이어 지리산이 큰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새소리 택배」전문
설명이 필요 없는 작품이지만, 시에서 보여주는 내용은 큰 울림을 동반한다. 1연의 간략한 도입부를 거쳐 2연에서 읽을 수 있는 구례 후배의 구어체 서술은 놀랍도록 자연의 한 절기를 생생하게 전달하면서도 쥐들 먹이와 새들 먹기가 되는 집안 텃밭의 상생원리를 포함하고 있다. 이어서 제3연은 구례 후배가 택배로 보내온 구체적인 내용물을 서술하면서 “그녀 발소리 속에 내년 봄에 필 산수유꽃망울도 질세라 연노랑 하늘을 서둘러 열고 잇었다”로 상승의 발판을 마련했다. 2연과 3연이 본격적인 전개와 전환부라면 제4연의 마무리는 1연의 도입부와 마찬가지로 간략한 구조다. 작시법의 기본 원리를 충실하게 밟아나갔기에 4연의 마무리에선 “빈 상자 속에서 또롱또롱 새소리가 방울방울 튀어나”오고, 전환부의 발판에 힘입어 “뒤이어 지라산이 큰 걸음으로 걸어 나”오는 상상력이 읽는 이들을 압도할 만큼 울림이 깊고 크다.
앞에서 말하듯이 이혜선 시인의 서정적인 작품은 각 부에 고루 수록되었다. 시인의 의도적인 배열이다. 구례에 관한 또 하나의 작품은 동일한 오브제가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것이다.
구례군 산동면 지리산자락
다소곳 엎드려 있는
산수유마을
흐르는 물소리 따라
수유에 피었다 지는
연노랑 꽃그늘 아래
너와 나 눈 맞추었을 때
하늘에 별
땅에는 별꽃
어울려 환히 웃고
몇 겁劫 후의 햇빛이 내려와
머리칼 쓰다듬고
-「수유꽃그늘 아래」전문
이 작품의 묘미는 “수유”에 있다. 작품에 나오듯 수유는 꽃나무 ‘산수유’를 가리키는 동시에 ‘찰나’라는 불교용어인 수유가 겹쳐져 사용되고 있다. 이 때문에 “몇 겁 후의 햇빛이 내려와/머리칼 쓰다듬고”라는 마무리를 얻는다. 짧은 작품이면서도 단출한 행 배열로 시각적인 효과까지 거둔 작품이다.
3.
이혜선 시인의 새 시집이 거둔 서정적 감흥의 작품에 이어 시인이 새 시집에서 집중적으로 추구하는 ‘불이’로 상징화된 불교적 사유를 들여다볼 차례다. 불이는 사전적인 해석에 의하면 “현실 세계는 여러 가지 사물이 서로 대립되어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모두 고정되고 독립된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은 하나라는 것”을 말한다. 『금강경』『유마경』『반야심경』『법화경』『대열반경』등 불교의 여러 경전을 비롯해 『벽암록』같은 불교 고승들의 화두집에서도 하나같이 불이를 강조한다. 이 때문에 불이는 우리나라 불교의 주류인 화엄, 선사상과 연결됨으로써 불이사상으로 명칭할 만큼 대승불교의 흐름을 관통하는 핵심사상으로 발전해 왔다.
따라서 이혜선 시인의 작품에 나타난 불이의 세계는 불교의 이러한 연기론적 관점에서 삶과 죽음, 몸과 마음, 있음과 없음, 이것과 저것의 대립적인 실체를 하나로 융합시키는 과정이라 할 것이다. 원효대사는 “둘이 아니되 하나를 고집하지도 않는다”(一多相容不同門)고 말한다. 우주와 나는 둘이 아니며(梵我不二), 너와 내가 둘이 아니며(自他不二),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다(生死不二)는 관점이다. 모순과 대립이 화해와 회통으로 모아지는 원효의 화쟁사상이 불이사상과 한데 겹쳐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시인은 종교적 관점에서 사로잡히기보다는 마치 그 묘법을 전하는 불이법문처럼 그 과정과 내용을 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특별한 능력을 발휘한다. 불교의 고승들이 득도나 절명과 같은 삶의 고비에 맞닥뜨릴 때마다 그들의 깨우침이나 소회를 게송으로 남기듯, 이혜선 시인은 우리 삶에 광활하게 펼쳐진 인드라망의 벼리를 연민으로 해석해낸다. 예컨대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불이공(色不二空) 공불이색(空不二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불이사상은 「색을 먹고 공을 낳다1」라는 작품으로 형상화된다.
절골 자연 휴양림에
생강나무 층층나무 산딸나무 어깨 겯고 서 있다
해돋이 봄하늘이 달려와 뻥튀기판이 되었다
햇살이 나무를 뻥튀기하더니
노란 생강나무 꽃이 피었다
층층나무 산딸나무에 차례로 하얀 꽃이 피었다
숲 속에 해종일 하늘바라기하던 나도
나무 옆에 빈 손 들고 서서
나무가 되었다
꽃의 염색체를 안고
온몸 물관부 잔가지 흔든다
뿌리를 거꾸로 허방을 쓸어본다
함박눈 내려 쌓이는 겨울이면
새벽마다 동그란 이슬방울이 내려와
하얀 허방꽃을 피운다
열매도 뿌리도 떨어진 이파리도
모두 허방꽃으로 피어난다
-「색色을 먹고 공空을 낳다 1」전문
절공 휴양림의 나무들이 봄이면 꽃을 피우듯, “함박눈 내려 쌓이는 겨울”에는 허방꽃을 피운다는 내용이다. 봄과 겨울의 공간과 나무와 시인의 대립적 존재를 색과 공으로 풀어낸 착안이 놀랍기 그지 없다. 봄날이 꽃이 피는 것은 “햇살이 나무를 뻥튀기하기” 때문이지만, 겨울에 허방꽃이 피는 건 시인이 나무가 되어 “뿌리를 거꾸로 허방을 쓸”었기 때문이다. 나무와 시인이 하나가 되고, 꽃과 눈처럼 보여진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하나로 감싸는 연민이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은 때에 맞추는 것이다. 피고 싶지 않다고 해서 피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지기 싫다 해서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생성과 조락의 시기에 맞추는 것이지만, 나무의 꽃만 꽃이 아니라, “열매도 뿌리도 떨어진 이파리도/모두 허방꽃으로 피어나”기에 이 세상 일체의 법이 하나라는 불이법문이 된다. 이 대목에서 이 세상 모든 것이 기의 작용이라는 화담 서경덕의 기철학과도 연결된다. “세상만물은 고정된 자성이 없고 여러 가지의 관계에 따라 일시적으로 성립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실은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하고 있음과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불이사상의 요체가 시로 표현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시인의 시를 굳이 종교와 연결해 읽을 필요는 없다. 시의 생리는 마치 도가(道家)와 같아서 잡식성이다. 종교든 철학이든 미학이든 이 세상 삶을 아우르는 모든 것이 시인의 마음과 맞닿을 때 섬광처럼 서리는 것이 시예술이다. 시인이 굳이 같은 제목의 2편(「색을 먹고 공을 낳다2」)에서 불교적인 세계가 아니라 “너와 나, 줄 위에서 한바탕 잘 놀다가/줄이 끝나면 꿈도 끝나지/꿈이 끝나면 잠도 끝나지”로 시작해 쥘부채 쥔 어름사니의 생애를 내세워. “나비꿈의 길”처럼 장자의 ‘호접몽’을 보여주는 것 역시 그와 같은 웅숭깊은 뜻이리라.
무를 깎다가 빗나간 칼이 손바닥을 깊숙이 찔렀다
뼈가 허옇게 드러나고 피가 멎지 않고 흘렀다
손이 퉁퉁 부어
마음도 덩달아 부어올라
눈도 코도 귀도 없는 나날이 영원히 계속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갇힌 창 안쪽에서, 부기 빠진 상처가 딱지를 만들며
제자리를 잡아갔다
그 뒤로 나는
가슴에 구멍이 숭숭 뚫려도, 아무리 피가 흘러도
바깥에서 부는 꽃바람, 먼 곳의 눈빛을 기다리지 않는다
촘촘한 시침의 그물 짜는 어부가 되어
내 안의 바다 깊푸른 수심에
가만히 두레박줄ㄹ을 풀어놓는다
저 깊은 뿌리에서 연초록 새싹이, 기쁨의 꽃 한 송이가
피어오를 때까지 숨을 고르며
고요히 두레박줄을 당긴다
-「그대 안의 새싹」전문
이 작품은 생활 속에 무를 깎다가 손이 찔린 상처거 모티브다. 일상의 작은 상처를 통해 “뼈가 허옇게 드러나고 피가 멎지 않고” 흐르는 아픔 속에 “손이 퉁퉁 부어/마음도 덩달아 부어올라/눈도 코도 귀도 없는 나날이 영원”할 것 같은 절망에 빠져들던 시인이 “어느 날” 상처에 딱지가 앉자“ 내 안의 바다 깊푸른 수심”을 찾아내는 연상작용이 인상적이지만 작품에 구사된 단어들 또한 중의적으로 읽힐만큼 세공이 두드러져 더욱 매력적이다.
예컨대 상처를 일으킨 동기부의 ‘무’는 채소종류지만 시인은 또 다른 ‘무無’에 더 비중을 둔 채 작품을 전개했고, ‘창’역시 동음이의어의 한자들이 보여주는 뜻(부스럼滄, 창자脹, 슬퍼할愴, 마음窓)을 담아내고 있다.
이 작품은 1연의 도입부가 2연의 전개에서 대폭 확장되는 게 특징적이다. “손”의 상처가 자연스럽게 “마음”의 상처로 옮겨가는 한편 상처는 이윽고 딱지가 된다. 따라서 3연은 전개를 이어가면서도, “촘촘한 시침의 그물 짜는 어부가 되”는 전환을 만들어 낸다. 여기 씌어진 “시침”역시 바느질 쪽과 시계를 아우르는 용법이다. “내 안의 바다”가 영원의 바다, 허무의 바다, 일상의 바다로 파동쳐 나가게 되는 미학적 장치로 하여 “저 깊은 뿌리에서 연초록 새싹이, 기쁨의 꽃 한 송이가/피어오를 때까지 숨을 고르며/고요히 두레박줄을 당”기는 마무리가 만들어진다. 시에 정진한 30여 년의 적공이 위력을 발휘하는 능숙한 장인의 솜씨다.
시인의 노트처럼 “스스로를 치유하는 철학적 사유를 생활시로 형상화 시”키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스스로 자기 상처를 핥으며 치유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와, 한편으로는 고마운 능력”이 유감없이 세세하게 표현되어서 오래도록 음미하는 기쁨을 가져다준다. 시의 치유력(힐링)을 증명해주는 고마운 사례라 할 것이다.
리나는 난민촌에 살고 있는 열 살 소녀다
구호센터에서 트럭이 오면
어른들은 서로 좋은 옷을 차지하려고 힘껏 손을 뻗는다
발돋움하는 짧은 팔, 억센 팔들 틈에 끼어
잡히는 대로 일단 당기고 본 리나의 손에
노란 샌들 한 짝
맨발로 살아온 리나의 갈라터진 한쪽 발에
파란 꽃이 달린 노란 샌들 한 짝
가슴에 피어나는 노란 해바라기 한 송이
폭격 맞아 불타버린 초등학교
헌 가마니 깔고 흙바닥에 엎드려 공부하던
넓은 운동장에 ‘언니, 같이 가아’
구호품 분유깡통을 손에 든 리나
노란 샌들 한 짝 신은 리나가 웃으며 손을 내민다
-「노란 샌들 한 짝」전문
이 작품은 작품의 주석처럼 캐런 린 윌리엄스와 카드라 모하메드가 지은『노란 샌들 한 짝』을 배경장치로 사용했다. 옛 소련과의 전쟁 및 내전으로 유랑하는 아프가니스탄 난민촌 소녀 리나를 전면에 배치했다. 구호센터의 트럭이 찾아오자 “발돋움하는 짧은 팔, 억센 팔들 틈에 끼어/잡히는 대로 일단 당기고 본 리나의 손에/노란 샌들 한 짝”이다. “맨발로 살아온 리나의 갈라터진 한쪽 발에” 신겨진 노란 샌들 한 짝처럼 더없이 잔인하고 폭력적인 역사의 현장에 팽개쳐진 열 살짜리 소녀의 모습을 애잔하게 조명한 전4연의 시는 어떤 장편소설보다도 읽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하지만 눈밝은 독자는 리나가 등장하는 제4연의 내용이 아프간 난민소녀 리나의 이름만 차용했을 뿐 실은 한국전쟁의 “폭격 맞아 불타버린 초등학교/헌 가마니 깔고 흙바닥에 엎드려 공부하던” 우리네 현실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10대에 전쟁을 겪은 한국의 소녀에게 “노란 샌들 한 짝 신은 리나가 웃으며 손을 내”미는 이 광경이야말로 ‘절실함이 곧 시(詩卽切)’라는 공자의 시론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아울러 이번 시집에는「노란 샌들 한 짝」처럼 삶의 허방에 빠진 사람들을 따듯하게 껴안는 연민의 시편들이 제1부에 집중적으로 수록되어 읽는 이들의 가슴을 울려준다. 우리 이웃에 대한 시인의 연민은 특히 철부지 미혼모들의 기아를 수용한 암사재활원이나 무연고 노인요양원과 같은 음지는 물론 동네 어린이놀이터나 퇴근길 지하철에까지 두루 미치고 있다. 그중에서도 탈북난민의 실화를 그대로 시에 담은「미안하다 미안하다」를 보자.
딸을 팔고 백 원을 받은 그 엄마, 뛰어가 빵을 사와서 아이 입에 넣어주며 평생 배 곯린 게 마음 아파 ‘용서해라’ 통곡했다지요 어떤 아이는 날마다 풀죽만 먹다가 생일날 아침 흰 밥 한 그릇 앞에 놓고 그건 밥이 아니라고 ‘밥 달라’울었다지요 풀죽을 밥으로 알고 사는 그 아이들, 풀죽도 못 먹어 맥없이 죽어가는 북녘 아이들
미안하다 미안하다 너무 많이 먹어서 배 나온 것 미안하다 살 빼려고 비지땀 흘리며 사우나에 들어앉아 미안하다 먹다가 내 배 부르다고 날마다 쓰레기통에 음식 버려 미안하다 같은 하늘 같은 핏줄 형제들 굶어 죽어도 모른척해 미안하다 혼자만 뜨신 방에 단잠 자서 미안하다 달려가서 밥이며 약이며 쥐어주고 싶어도 가지 못해 미안하다 이유가 많아서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말만 해서 더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전문
전3연의 산문시지만 앞의 1연은 “딸을 팔고 백 원을 받”아 그 돈으로 “빵을 사와서 아이 입에 넣어주며 평생 배 곯린 게 마음 아파 ‘용서해라’통곡했다”는 엄마를 비롯해 풀죽을 밥으로 알고 사는 북녘아이들과 같은 탈북민의 실화를 가감없이 옮겨놓았고, 다음 2연에서는 오로지 “미안하다”는 말 밖에 더할 말이 없는 시인의 애끓는 심정으로 마무리했다. 어떤 픽션이 이 현실을 능가할 수 있으랴, 시인이 시로 묻는 질문에 우리 역시 대답할 말을 잊을 수밖에 없다.
4.
필자는 이 글의 처음에 이혜선 시에는 사유와 서정이라는 두 가지 특징적 경향이 장강대하처럼 커다란 흐름을 이루고 있다고 서둘러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이제는 불이와 화쟁이 실은 하나의 발원지에서 뻗어 나온 물줄기이기에 편편의 시를 읽어나갈수록 용어의 함정에서 오히려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예측이었음을 고백해야겠다.
불이와 화쟁을 어찌 따로 구분할 수 있으랴. 화쟁은 불이에서 나오고, 불이는 화쟁의 바탕이 아니던가. 시인 역시 시집의 후기에 그 점을 간명하게 밝히고 있다.
최근에 내 시 쓰기의 화두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이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이것과 저것이 둘이 아니고, 이곳과 저곳이 다르지 않고 흰 것과 검은 것이 다르지 않고 죽음과 생이, 선과 악이 미와 추가 다르지 않다는 초월의식, 그것은 경계와 차별을 넘어서고자 하는 초월의지의 표출일 것이다.
어차피 시 쓰기는 경계 넘어서기이다. 나의 자아를 사물과 세계 속으로 투사하여 동화되어 가거나, 자아 밖의 세계를 끌어당겨 나와 하나가 되거나 모두가 세계와 자아와의 동일시-경계 허물기이며 하나 되기 위한 이상주의자의 꿈꾸기이다
-이혜선「시집 후기」부분
모순과 대립을 화해로 받아들이는 화쟁이나 모든 근본은 하나이기에 너나가 없는 불이는 결국 하나의 발원지에서 뻗어나간 두 갈래 장강의 흐름이다. 불이와 화쟁, 사유와 서정의 물줄기를 한 권의 시집에 받아들여 화해와 연민을 한 몸으로 만드는 화엄 시학의 대장관을 연출한 이혜선 시인의 새 시집에 거듭 축하와 감사를 드린다.(시인, 문학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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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후기]
이상주의자의 꿈꾸기
이혜선
최근에 내 시 쓰기의 화두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이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이것과 저것이 둘이 아니고, 이곳과 저곳이 다르지 않고 흰 것과 검은 것이 다르지 않고 죽음과 생이, 선과 악이 미와 추가 다르지 않다는 초월의식, 그것은 경계와 차별을 넘어서고자 하는 초월의지의 표출일 것이다.
어차피 시 쓰기는 경계 넘어서기이다. 나의 자아를 사물과 세계 속으로 투사하여 동화되어 가거나, 자아 밖의 세계를 끌어당겨 나와 하나가 되거나 모두가 세계와 자아와의 동일시-경계 허물기이며 하나 되기 위한 이상주의자의 꿈꾸기이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인 폴 엘뤼아르는 ‘영속永續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고통스런 열망’을 실현하는 힘으로 예술혼을 들고 있다. 잘 들여다보면 나의 시 쓰기도 영속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오랜 역사동안 존재해오는 다양한 나를 만나고자 하는 열망으로 나의 내면으로 끝없이 침잠하여 들어가는 기록이다.
자아의 본질-그 알몸과 맨얼굴을 만나기 위해 껍질을 벗기고 또 벗기고 아무리 헤매어 봐도 똑바로 대면할 수 없는 내 속의 나, 수없이 생성하고 소멸해 온 천변만화의 나…. 그러나 열망과는 달리 나를 만난다는 일은 끝없는 동굴탐험보다 더 진난한 일이다. 불이는커녕 내 속의 분열된 나를 만나기도 숨찬 일이다.
내 속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아득히 이어 내려오는 생명의 속성, 인류의 속성, 겨레의 속성, 가계의 속성이 쌓이고 쌓여서 층층을 이루며 ‘나’라는 개체의 몸을 빌려 존재하기도 전의 나, 아득한 원시 동굴 속의 나, 선사유적지에서 볼 수 있는 움집 속의 나, 오늘을 사느라 허덕이는 호모 모빌리쿠스인 나….
수없이 변화하면서 영속해오고 있는 다양한 나, 시시때때로 불쑥불쑥 다른 얼굴, 생경한 얼굴을 내미는 수많은 ‘나’를 만나기 위해 힉스와 커크의 폭발 속으로 나를 밀어넣기도 하고 1초에 92억 번 진동하는 세슘 원자의 진동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리하여 둘인 것 같지만 둘이 아닌 나, 또는 수없이 많은 나를 만난다.
오랜 방황의 길 끝에서 아득한 중생대 백악기의 꿈을 만나 함께 꿈꾸면서 오늘이라는 강을 건너 영원히 불리어질 노래 속에 새로운 꿈 하나 심어놓기도 한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넘나들며 스스로 화해를 이루어, 타자(他者)와 나 사이에, 세계와 나 사이에 화해하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쳐 놓고 있는 경계인 금(禁)줄을, 그 아만심과 교만과 차별하는 마음을 지우고 하나가 되어 끌어안는 황홀한 입맞춤을 한다.
봄은 화해의 몸짓이다.
봄이 되면 여기저기서 돋아나는 풀잎 나뭇잎, 피어나는 꽃들의 사랑고백에, 그 황홀한 눈짓과 향기에 정신이 아찔해진다. 그래서 사람도 덩달아 봄을 앓고 봄바람이 나서 사람마다 자기 안에 숨 쉬는 새싹을 밀어올리기에 여념이 없어진다.
떨어지는 벚꽃비를 맞으며 아름다운 사랑을 생각하고 몸과 마음이 사랑의 세포로 가득차서 새로운 사랑을 낳는다. 꽃은 떨어져 흙으로 돌아가도 그 사랑의 결실로 돋아나는 새 생명들은 “사랑해요” “사랑해요” 한없이 속삭인다. 모두가 사랑이고 새로운 꿈을 꾸는 봄날에 어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랴.
시장에서도 거리에서도 사랑이 넘쳐흘러 웃음꽃이 핀다. 아줌마는 웃음대포를 쏘아올리고 아이들은 웃음덩이를 쏟아내고 하늘의 해님도 덩달아 웃음햇빛으로 온 누리를 따뜻하게 비춰준다. 암사동 양지시장 좁은 골목에서 터뜨리는 웃음꽃은 암사동 선사유적지 6천 년 전의 아이들 웃음을 그대로 닮아 있어서 그들은 함께 만나 웃음꽃을 피운다. 드디어 누리는 웃음으로 가득해진다.
내 속에서의 나를 만나려고 무한대의 시간과 공간 속을 헤매다 보면 나 밖의 나와도 불이不二가 되고 세상 만유가 모두 가슴을 열고 하나가 되는 경계지우기와 차별 넘어서기….
자신의 열망을 넘어서서 사회 속에서, 타자 속에서 또 다른 자아를 자각하고 사랑과 화해로 나아가는 사회적 울림과 감동을 주는 시 쓰기.
만유萬有에 대한 사랑의 발현인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에 우주적 상상력의 옷을 입히고, 자타불이, 동일시의 세계관을 접합시켜 하나 되는 동체대비, 자애와 사랑의 세계, 무지개처럼 모든 개체와 사물이 저마다 제가 지닌 각각의 빛을 내는 화쟁세계를 지향하는 시.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세계가 화해를 이루고 우리 겨레 모두 화해를 이루고 웃음꽃이 퍼져 온 누리가 화엄세상, 웃음세상, 자타불이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소망의 싹에 오늘도 물을 준다.(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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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불교사상을 기반으로 한 역설의 미학
치열한 길찾기, 시를 빚는 솜씨
이 시집에는 현실의 세공細工과 우주적 차원의 초월적 대공大工이 비교 대조되어 이른바 역설逆說, Paradox의 미학이 빛난다. 이 시집은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이론에 관련되는 “색色을 먹고 공空을 낳다”라는 작품이 돋보인다. 이 대목이 실려 있는 산스크리트어 원전에는 “색성시공色性是空, 공성시색空性是色”이라는 대목이 있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이 시집의 구조는, 즉 역설의 구조는 불교이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작품에는 “내가 아는 서귀포에 사는 이는 꽃나무 위에서 산다”고 하는 이른바 이상향理想鄕이 보이나, 같은 작품의 하단에는 “꽃가지 아래에 숨어 있는 검은 탱크”라는 무시무시한 살인 무기가 보인다. 이것도 역설이다. 또 어떤 작품에는 진관사의 부처님은 긴 팔을 뻗어 수세미 같은 노파의 머리를 쓰다듬는가 하면 긴 팔로 전동차의 문을 열면서 자기 집을 향하는 시인의 모습이 보인다. 이것도 역설이다. 이 시집의 구조는 모더니즘적인 역설의 구조로서 그 주제를 잘 드러내고 있다.
― 문덕수(시인·예술원 회원)
최근 이혜선시인의 시 쓰기는, 시인 스스로 후기에서 밝히고 있듯이, 자타불이自他不二다. 이러한 명제가 너무 뚜렷할 경우 시가 딱딱하고 앙상한 경우도 흔히 있는 일인데, 그의 시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은 이러한 생각이 머리로 얻은 것이 아니라 삶의 실제를 통해서 익힌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이것과 저것이 떨어져 있지 않다는 이러한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는 그의 시들은, 그래서 가파르지 않고 넉넉하며, 모질고 사납지 않고 따뜻하며, 서로를 가르지 않고 한데 모은다. 얼핏 보면 그의 시들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속에서는 날카로운 비수가 번득이고 차디찬 샘물이 뿜어져 나온다. 서로 남이 아니고 다르지 않은 사물의 한가운데 있는 자기라는 존재는 누구이며 무엇을 향해 가고 있으며 불이인 타자와는 어떻게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치열한 길찾기가 있기 때문이다. 무거운 주제들을 소화해 내고 있는 시를 빚는 솜씨도 빛난다.
― 신경림(시인. 에술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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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혜선 시인∥
∙ 경남 함안 출생.
∙ 동국대 국문과. 세종대 문학박사.
∙ 1981년 월간『시문학』등단
∙ 시집 : 『神 한마리』『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이』
『바람 한 분 만나시거든』『새소리 택배』
∙ 저서 : 『문학과 꿈의 변용』『이헤선의 명시산책』
『New Sprouts within You9영역시집 공저)』
∙ 수상: 한국현대시인상, 동국문학상, 문학비평가협회상(평론 부문),
한국시문학상, 자유문학상 등,
∙ 동국대 외래교수, 세종대 강사, 한국현대시인협회 부이사장, 한국시문학문인회장 역임
현재 동국문학인회장, 한국문인협회, 국제펜 한국본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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