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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작노트의 첫장에 '지금 이 순간에도 감옥에서 시를 쓰고 있는 한 시인이 있다'라고 항상 먼저 써놓고 시를 쓰기 시작할 만큼, 그는 나에게 '70년대의 윤동주'였다. 이번에 문학평론가 홍용희가 펴낸 ‘김지하 문학연구’는 그러한 김지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한 결실이다. 70년초에 활시위를 떠난 김지하의 시가 30여년 동안 어디로 날아가 어떠한 과녁을 관통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종합적 통찰의 한 비평서다. - 조선일보 문화·라이프 | | 2000.04.23
최농경공동체의 생명의식과 화엄적 상상
- 김지하 시 세계의 불교적 세계관을 중심으로
1. 화엄적 상상과 생명 의식
김지하의 시적 역정의 가장 큰 특이점에 대해 일반적으로 ‘저항’에서 ‘생명’으로의 전환을 지적한다.
1969년 <<시인>>지로 등단한 이래 『오적』(1970),『황토』(1970),『타는 목마름으로』(1982) 등의 시
세계가 선명하게 보여준 억압적인 지배세력에 대한 울분, 대립, 저항의 공격적인 언어와 1980년대
중반『애린』(1986)이후의 수렴, 성찰, 조화의 포용적인 언어를 통한 내성의 탐구 및 생명적 세계관은 분명
극단적인 변화의 도정으로 이해된다. 특히 1960⋅70년대 김지하의 시 세계는 스스로 오랜 감옥 생활로
점철되는 직접적인 저항 운동의 전위로서 활동한 문학외적 요소와 어우러지면서 더욱 반역과 투쟁의
상징성을 선명하게 지니게 된다.
지금까지 김지하의 시세계의 이러한 변화의 양상에 대한 이해는 ‘직선적⋅ 양적 움직임으로부터
곡선적⋅음적 움직임으로의 전화“ 1 라는 진단과 “불온한 죽임의 세력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에서 죽임의
세력까지 순치시켜 포괄하는 살림의 문화의 재건”이라는 창조적 심화 2 로 규명하는 논의가 대표적이다.
특히 후자의 지적은 그의 시적 변화의 도정을 ‘생명론’이라는 일원론적인 연속성 속에서 방어적인
국면으로부터 적극적이고 근원적인 층위로 나아가는 방법적 전환으로 파악하는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김지하의 시적 변화의 마디절에 대한 논의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드러난 질서와 숨은 질서의
교호작용과 새로운 차원 변화의 내적 계기를 동시적이고 입체적으로 파악할 때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차원 변화를 통한 생성이란 숨은 질서가 기왕의 드러난 질서를 추동, 비판, 수정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구체화되는 관계론의 산물이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에 바탕하여 김지하의 시적 삶의
변화과정과 양상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시적 삶의 변화는 농경공동체의 생명의식의 작용과 깊은 연관을 지닌다. 그의 시적 삶의 원적을
이루는 농경공동체의 생명의식은 「애린」연작을 마디절로 숨은 차원의 질서에서 드러난 차원의 질서로
외화되고 더 나아가 화엄적 상상력으로 승화되는 면모를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애린」연작이 불교적
세계관의 집약적 정수에 해당하는「심우도」와의 병치관계를 통해 도저한 내성과 화엄적 자아의 탐구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엄적 자아에 대한 발견과 우주 생명의 존재원리에 대한 인식은 생태적
상상력의 철학적 원리로서 작용한다. 따라서 그의 시 세계에서 화엄적 세계관에 입각한 불교적 상상의
시적 인식을 규명하는 것은 지속과 변화의 핵심적인 속성을 규명하고 아울러 1990년대를 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심화, 확대되고 있는 생명론의 시적 원형성과 지향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김지하 시 세계의 시적 전환의 마디절과 특성에 대해 불교적 세계관에 초점을
두고 집중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2. 죽임의 현실과 대지적 생명력
1 채광석, 「「황토」에서 「애린」까지 1」, (『애린』첫째권 해설), 실천문학사, 1986
2 홍용희, 『김지하문학연구』,시와시학사, 1998, 9쪽
김지하의 시적 삶은 “뜨거운 해가/땀과 눈물과 메밀밭을 태우는” 죽임의 상황의 “황톳길”(「황톳길」)을
스스로 가로지르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그의 시 세계는 처음부터 치열하고 비장하고 절박한 정조를
드러낸다. 그는 첫 시집 『황토』의 후기에 직접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죽도록 몸부림치지만 그것은 작은
몸짓에 지나지 않고, 필사적으로 아우성 치지만 그것은 작은 신음으로 밖에는 발음되지 않는다. 그 작은
신음. 그 작은 몸짓. 제동당한 격동의 필사적인 자기표현으로서의 어떤 짧은 부르짖음. 나는 나의 시가
그러한 것으로 되길 원해 왔다.” 그의 시 시계는 이처럼 가위눌림으로부터 벗어나고 악몽으로부터
깨어나야 한다는 삶의 절대 절명의 당위적 과제 속에서 생성되고 있다. 죽임의 상황으로부터 살아 있음을
드러내는 증거이며 항변의 언어로서 시적 출발점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데뷔작 중의 한편인
「녹두꽃」을 보면 이러한 사정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펼쳐지고 있다. 그가 스스로 우주 속의 화엄적 자아로 거듭 태어나는 찰나이다.
실제로 「애린」연작부터 그의 시 세계는 경직된 대항담론에서 탈피하여 억압적인 세력까지 순치시켜
포용해내는 살림의 언어의 화법과 미의식을 추구한다. 대결구도의 날카로움은 “모난 것/딱딱한 것, 녹슨
것/낡고 썩고 삭아지는 것뿐/이곳은 온통 그런 것들뿐/내 마음마저 녹슬고 모가 났어”(「결핍」)라고
호소하듯, 투쟁의 대상은 물론 자기 자신마저도 붕괴시키게 된다. 그래서 그의 시 세계는 직선의 파시즘을
넘어 곡선의 포용성 4 을 추구한다. 이것은 상극적인 직선(양)의 성향이 극단에 이르면서 결핍된 상생적인
곡선(음)의 성향을 불러오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사과알 자꾸만 만지작거리는
건/아니야/먹고 싶어서가 아니야/돈이 없어서가 아니야/모난 것, 모난 것에만 싸여 살아/둥근 데 허천이 난
내 눈에 그저/둥글기 때문” (「둥글기 때문」)이라고 노래하게 된다. 이러한 시적 정조의 선회는 “이기기
위해/죽어 너를 끝끝내 이기기 위”(「서울」) 해 더욱 첨예했던 “천둥, 번개, 폭풍, 피, 햇불”등의 이미져리를
점차 “노을” 5 등의 역동적인 균정의 이미져리로 전환시킨다. 낮의 밝음(양)과 밤의 어둠(음)이 습합된 “노을”
이미지는 직선을 포용한 곡선의 성향에 상응한다. 이처럼 양을 포용한 음의 세력은 6 생명을 포태하는
모성성의 근본 생리에 해당한다. 따라서 음양의 포용적 균정의 형질은「애린」연작의 “죽고 새롭게
태어남”(「애린」간행에 붙여)의 세계를 노래하는 토양으로 작용할 수 있게 된다.
김지하의 시 세계가 죽임의 상극으로부터 “풀씨”에서 돋아 오른 “싹”으로 표상되는 생명의 세계를
집중적으로 추구할 때 가장 선행되는 과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이다. 자기 자신의 본성과
근원에 대한 이해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우주 생명의 실재에 대한 이해의 출발이며 종착이기 때문이다.
「애린」연작이 불교의 심우도와 병치관계를 이루며 자신의 삶의 본성에 대한 성찰과 탐구를 시도하는
주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불법을 알기 쉽게 대중에게 널리 전도하고 선시 발전을 도모한 「심우도」 7 는
열개의 원으로 된 공간 안에 1. 소를 찾아 나서(尋牛), 2. 그 발자국을 보고(見跡), 3. 그 다음에 소 자체를
보게 되고(見牛) 4. 마침내 소를 붙잡아(得牛) 5.소를 길들이고(牧牛) 6. 잘 길들여진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 다음(騎牛歸家) 7. 집에 돌아가자 소의 생각 따위는 다 잊어버리고(到家忘牛) 8.급기야는 사람도
소도 다함께 생각하지 않게 되는 상태에 이르고(人牛俱忘) 9.본래의 맑고 깨긋한 무위의 경지에
이르렀다가(反本還源)10.사립문을 열고 시정으로 나와 자유분방하게 속인들을 교화하는(立廛垂手
)모습을 그린 것이다. 여기에서 자신의 본래면목을 상징하는 “소”가 「애린」연작에서 “애린”으로
치환되어 노래되고 있다.
우거진 풀 헤치며 아득히 찾아가니
물은 넓고 산은 멀어 갈수록 험하구나
몸은 고달프고 마음은 지쳐도 찾을 길 없는데
저문 날 단풍숲에서 매미울음 들려 오네
- 열 가지 소노래 첫째
4 채광석, 「「황토」에서 「애린」까지 1」, (『애린』첫째권 해설), 실천문학사, 1986 참조
5 「애린」연작에는 빛과 어둠이 습합된 “노을”이미지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안산」,「안팎」,「남한강에서」,「노을
무렵」등의 시편들에는 “노을”이 시적 정황의 밑그림을 이룬다.
6 양은 공격적, 확장적, 경쟁적 성격 혹은 그러한 존재를 상징하고 음은 방어적, 통합적, 협동적인 것을 상징한다.
7 「심우도」로는 각각 보명과 확암 선사의 도본과 게송이 있다. 전자 보다 나중에 나온 후자가 짜임이나 발상이 더욱
치밀하고 확연하다. 송준영, 「소 찾는 노래」, <<서정시학>>, 2008,7 참조
네 얼굴이
애린
네 목소리가 생각 안 난다
어디 있느냐 지금 어디
기인 그림자 끌며 노을진 낯선 도시
거리거리 찾아 헤맨다
어디 있느냐 지금 어디
캄캄한 지하실 시멘트벽에 피로 그린
네 미소가
애린
네 속삭임 소리가 기억 안 난다
지쳐 엎드린 포장마차 좌판 위에
타오르는 카바이트 불꽃 홀로
가녀리게 애잔하게
가투 나선 젊은이들 노랫소리에 흔들린다.
- 「소를 찾아 나서다」전문
「심우도 1」은 소를 찾아 나선 목동의 어려움을 노래한다. 목동이 소를 찾는 것은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본래면목은 실재하는 자성이면서 동시에 부재하는 무자성이다. ‘나’는 ‘나’이면서
‘나’가 아닌 것이다. ‘나’의 자성이 없다는 것은 ‘나’란 영속하는 고유한 본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법계연기론에 따른 취산(聚散)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몸은 고달프고 마음은 지쳐도” 나의
본래면목을 “찾을 길”은 없다. 과연 나의 본성을 표상하는 “소”는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김지하의 「애린」 연작의 ‘서시’에 해당하는 시편은 확암선사의 「심우도1」의 “소”가 애린으로
치환되어 전개된다. 「심우도 1」의 넓고 멀고 험한 “산”과 “물”이 “낯선 도시/거리거리”로 대체되고
있다. “몸은 고달프고 마음은 지쳐도” “애린”을 찾을 길은 없다. 시적 화자는 “포장마차 자판 위에”지쳐
엎드린다. “타오르는 카바이드 불꽃 홀로/가녀리게 애잔하게”흔들리고 있다. 그 “카바이트 불빛”은
“애린”의 부재를 명시하면서 동시에 현존을 암시한다. 카바이드 불꽃의 “가녀리고 애잔함”은 오랜 감옥
체험에 쇠잔해진 시인 자신의 자화상이면서 동시에 화자가 찾아 헤매는 “애린”의 투사체로해석되기
때문이다. “애린”의 부재를 통한 현존의 특성은 찾고자 하는 간절함과 어려움을 동시에 배가시킨다.
그러나 자기 자신(“애린”)을 찾는 데 정작 자신은 비추어보지 않고 밖으로만 향하는 탓에 몸과 마음은
더욱 지치고 고달프게 된다.
김지하의 시집 『애린』첫째 권의 본문은 크게 네 편으로 구성되는 바 “서대문에서”,“원주에
돌아와”,“소 발자국 널렸거늘” “어찌 숨길 수 있으랴” 등이다. 여기에서 첫 번째 장은 서대문의
“감방”등과 같은 치명적인 “결핍”의 현실에서 찾고 부르고 원망하는 “애린”의 노래가 주조를 이룬다.
그리고 나머지 3장은「심우송2」에 해당된다. 첫 번째 장과 구분되는 2,3,4장의 상징적인 특이점을
다음 시편은 선명하게 드러낸다.
시냇가 수풀 아래 소 발자국 널렸거늘
풀 속을 뒤진들 무엇이 잇으랴
아무리 산이 깊고 또 깊은들
하늘까지 이르른 콧수멍이야
어찌 숨길 수 있으랴
- 열 가지 소노래 둘째
밤을 지새워
소주를 놓고 나누는 옛 이야기에도
노래에도 노여움에도
없었다 너는
사랑하는 애린아
돌아오는 허망한 길
얼어붙은 실개천 가장귀
손바닥만한 파밭자리
파릇파릇한 애기파, 그 위를 스치는 강바람
바람을 맞아
흐르는 내 눈물 속에 더욱 파릇파릇한 애기파
고개 갸웃거리며
귤빛 목수건 나부끼며
거기서 너는 웃고 있었다
애기파 속에서
애린
머리칼 흩날리며
눈부시게 흰 머리칼 흩날리며
너는 거기서
- 「발자욱을 보다」일부
「열 가지 소노래 둘째」는 “소 발자국”을 발견한 대목인 바, 소를 찾았다기 보다는 소가 그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소의 발자국을 본 것은 공부길을 찾은 것에 해당된다. 그러나 아직 소를
직접 만나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소의 실체는 “하늘까지 이르른 콧구멍처럼” 분명히 있으며 누구도
“숨길 수” 없다.
이에 상응하는 “애린”역시 문득 그 존재를 드러낸다. “파릇파릇한 애기파” 속에서 “눈부시게 흰 머리칼
흩날리며” 신기루처럼 나타나고 있다. 이제 “애린”의 형상도 점차 구체화 된다. 때로는 “살아있으면 갓
서른”의 젊은이로, “”노을진 겨울강 얼음판 위를/천천히“ 다가오는 ”한 소년“(「남한강에서」)으로,
”술병속에 갇힌“ 그러나 ”술병“ (「갇힘」)속에도 없는 모습 등등의 유예되는 실재로 나타난다. 그래서
시적 화자의 ”애린“을 찾는 목소리는 한결 구체적이고 실질적이 된다.
특히, “소발자국 널렸거늘” 편에서 시인 자신의 삶의 행적과 일상을 중심 소재로 다루고 있는 것은
“애린”의 존재가 자신의 삶의 일상 속에 흩어져 있음을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어찌 숨길 수
있으랴”편에서 「똥」,「서리」,「바람에게」,「송기원」등 명사형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애린의
혼”(「이슬털기」)과 실체의 윤곽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음을 가리킨다.
한편 시집『애린』둘째권에 이르면 확암선사의「심우송」3-10까지를 순차적으로 원용하고 이에
대한 화답을 단호하게 일갈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상징적으로 상응하는 「애린」연작 50 편이 “내
마음속 풍경”이나 “내 몸 속 돌아다니는 물건들 목록”(「43」)을 중심으로 수심견성(修心見性)의 계제를
밟아 가는 과정을 체현해 나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다음의「애린, 50」은 「애린」연작을 관류하는
형질의 응축적인 집적태이다.
땅끝에 서서
더는 갈 곳 없는 땅끝에 서서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새 되어서 날거나
고기 되어서 숨거나
바람이거나 구름이거나 귀신이거나간에
변하지 않고는 도리없는 땅끝에
혼자 서서 부르는
불러
내 속에서 차츰 크게 열리어
저 바다만큼
저 하늘만큼 열리다
이내 작은 한 덩이 검은 돌에 빛나는
한 오리 햇빛
애린
나.
-「50」전문
「그 소,애린」연작의 마지막에서 시적 화자는 그동안 부단히 찾고 헤매던 “애린”과 대면하는 국면을
노래한다. 그는 “애린”을 찾아 “더는 갈 곳 없는” 그러나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땅 끝”까지 이르렀다.
“기인 그림자 끌며 노을 진 낯선 도시”에서부터 “거리거리 찾아 헤맨”(「소를 찾아 나서다」)화자가 기어이
더 이상 갈 곳도 없는, 바다와 하늘만이 보이는 땅 끝까지 당도한 것이다. 이제 화자에게 남은 것은 “새,
고기, 바람, 구름, 귀신”으로나 변화는 것이다. “귀신이거나간에”의 “-나간에”라는 어미에는 체념의 탄식이
배어있다. 바로 이 단절의 벼랑 끝에서 화자는 역설적으로 “내 속에서 차츰 크게 열리어/저 바다만큼/저
하늘만큼 열리”는 극적인 반전의 순간을 맞이한다. 우주 생명의 범주로 무한 확대되던 자아는 다시 “이내
작은 한 덩이 검은 돌에 빛나는/한 오리 햇빛”으로 수렴된다. 이 수렴의 극점에서 화자는 “애린”을 발견한다.
우주적인 확산과 수렴, 밖으로 열림과 안으로 닫힘의 이중성의 동시적인 신비 체험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놀라운 극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그 “애린”은 “나”였던 것이다. 화자는 “땅 끝”의 절망의 벼랑에서 찾은
“애린”에게서 “나”를 발견한 것이다. 지금까지 “애린”을 찾아 헤매던 지난한 과정은 곧 자신을 찾는
과정이었음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애린”의 외피 속에 나 자신이 살고 있었으며, 나 자신 속에
“애린”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8 다시 말해, “모든 죽어가는 것, 죽어서도 살아 떠도는 것, 살아서도 죽어 고통
받는 것, 그 모든 것”이 그리고 “죽고 새롭게 태어남”( 「애린」간행에 붙여)이 곧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애린”이 “나”라는 깨우침은 내가 곧 “무궁 광대한 우주에 가득 찬 하나의 큰 생명, 처음도 끝도 없이
물결치는 한 흐름의 생명” 9 의 주체라는 점의 발견을 가리킨다. 이것은 수심견성의 계제를 밟아가는
「심우도」와의 병치관계로 이루어진 「애린」연작의 시적 과정이 화엄적 자아를 터득하는, 즉 우리의
일상경험이 그대로 비로자나불(우주 자체)의 반사이며 비로자나불 속에 포용된다는 해인삼매(海印三昧) 10
의 역정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화엄경』에 따르면 어떤 존재라도 자기만의 영역에 유폐됨이 없이
끝없는 대삼매 안에 있으며 동시에 대삼매를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전반적 정황을 다시 정리하면,
「애린」연작의 전개는 감옥의 콘크리트 창틀에서 돋아난 “새싹”을 통해 불현듯 직시한 “광대무변한
생명”의 이치를 자신의 일상 세계를 통해 반추하고 내면화하는 과정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애린」연작은
자신이 우주생명의 주체로서 “생명의 큰 이치를 마음과 몸에 익”히며 살아가고자 하는 화엄삼매 11 의 선정에
8 홍용희, 『대지의 문법과 시적 상상』,문학동네, 2007, 77쪽 참조
9 김지하, 「타는 목마름에서 생명의 바다로」,<<동아일보>>,(1990.10,21)
10 해인에 대한 화엄종 이론의 대성자인 법장(法藏)의 설을 들면 다음과 같다. “해인이란 진여본각(眞如本覺)이다.
망상이 다하고 마음이 맑아지매 만상이 함께 나타남이니, 대해는 바람에 의해 물결을 일으키되 만약 바람이 자면
물이 맑아져서 현상의 나타나지 않음이 없음과 같다.” 『妄盡還源觀』
11 해인삼매가 화엄경의 세계관이라면 화엄삼매는 화엄경의 인생관으로서 비로자나불의 세계를 한없이 사회적으로
실천해가는 일을 가리킨다. 다마키 고시로, 이원섭 역, 『화엄경의 세계』,현암사, 1996, 31쪽 참조
들 수 있게 한다. 자신이 곧 우주적 자아라는 화엄적 세계관이 외부 세계의 모든 대상에게 확장되면 연기(緣
起)와 자비의 원리에 기반 하는 우주공동체적 세계관을 낳게 된다.
4. 법계연기론과 생태적 상상
김지하의 시 세계는 『애린』을 거친 이후 『별밭을 우러르며』,『중심의 괴로움』, 『화개』등으로
이어지면서 도저한 내성의 탐구와 더불어 생태적 상상력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특히 그의 생태적
상상은 법계연기론에 입각한 불교생태학과 깊은 친연성을 지닌다. 불교생태학의 특성은 생태계 위기의
현상을 자원고갈과 환경파괴 등의 표면적 수준을 넘어서서 서구의 주체중심주의의 이원론적 세계관에
대한 부정과 더불어 무자성(無自性), 공(空), 연기 및 자비를 바탕으로 집착과 분별을 제어한다. 12 특히
법계연기란 세상의 모든 것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종횡무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하나의
사물에는 삼라만상이 그물처럼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가리킨다. 13 모든 사물의 존재는
상호의존적이므로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부증불감(不增不感)한다. 즉 모든 사물들은 서로 작용하고
순환하고 복잡하게 융섭하는(重重無盡) 과정 속에 생성됨으로 완전히 새로움도 없지만 완전한 소멸도
없다. 즉 모든 사물은 무자성의 공(空)에 해당하는 비실체성이므로 순환성, 상관성, 항상성을 지닌다. 14
물론, 이와 같은 세계의 존재론적 속성의 바탕은 법계연기의 원리이다. 김지하의 생태적 상상은 이와 같은
법계연기에 따른 상호의존의 순환성이 바탕을 이룬다.
내 나이
몇인가 헤아려보니
지구에 생명 생긴 뒤 삼십오억살
우주가 폭말한 뒤 백오십억살
그전 그후 꿰뚫어 무궁살
아 무궁
나는 끝없이 죽으며
죽지 않는 삶
두려움 없어라
12 김종욱, 『불교생태철학』,동국대학교출판부,2004, 29-30쪽 참조
13 無盡藏 평역,『佛敎의 基礎知識』,弘法院, 1981, 167쪽 참조
14 “모든 사물의 형상이 공하니 생겨나지도 소멸하지도 않으며, 늘어나거나 줄어들지도 않는다.”(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增不感) (『반야심경주해』)
오늘 풀 한포기 사랑하리라
나를 사랑하리.
- 「새봄 8」전문
불교에서 연기설은 4법인을 기초로 구성된다. 4법인의 첫 번째인 제행무상(諸行無常)은 현상이 생멸변화
한다는 시간적인 인과관계와 연관된 것으로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멸하기 때문에
저것이 멸한다’는 연기일반의 구체적인 인과관계에 해당된다. 다음으로 제법무아(諸法無我)는 현상의
시간적 공간적인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연기일반의 추상적 논리관계에 해당된다. 세 번째로 일체개고(一切皆苦)는 생사윤회로 가치적
연기의 유전연기에 해당하고 네 번째인 열반적정(涅槃寂靜)은 고뇌가 멸한 깨우친 성자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가치적 연기의 환멸연기(還滅緣起)에 해당된다. 따라서 법계연기에서 개체생명은 역사적 전승
과정의 한 계기로서 죽어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不滅), 태어나도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不生),
영원히 변치 않고 남아 있는 것은 없다.(不常) 그래서 연기설에서 생명 현상은 일즉일절(一卽一切)
일절즉일(一切則一)의 속성을 지닌다.
이와 같은 법계연기론에 입각해 보면, “내 나이”가 “지구에 생명 생긴 뒤”는 물론이고 “우주가 폭발”하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무궁살”에 이른다. “나는 끊없이 죽으며/죽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4법인의 연기론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는 시적 상상이다. 이러한 법계연기설의 인식 속에서 시적 화자는
“잊었는가 /잎새가 나를 먹이고/물방울이 나를 키우고/새들이 나를 기르는 것”(「나 한때」)이라고
전언하고 더 나아가 “내 마음 열리어 /삼라만상을 끌어안”(「一山詩帖 4」)고 내 몸의 “뼛속에서 / 풀잎
자라고 / 해와 달 뜨”(「一山詩帖 5」는 우주의 풍경을 보기도 한다. 한 티끌 작은 속에 세계를 머금었고 (
一微塵中含十方) 낱낱의 티끌마다 우주가 들어 있다( (一切塵中亦如是) 15 는 화엄의 일깨움을 환기시킨다.
이러한 연기론적 인식 속에서는 “풀 한포기 사랑하”는 것과 “나를 사랑하”는 것은 근원 동일성을 지닌다.
다음 시편은 이점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겨우내
외로웠지요
새봄이 와
풀과 말하고
새순과 얘기하며
외로움이란 없다고
그래
흙도 물도 공기도 바람도
빈손 가득히 움켜쥔
햇살에 살아
벽에도 쇠창살에도
노을로 붉게 살아
타네
불타네
깊은 밤 넋 속의 깊고
깊은 상처에 살아
모질수록 매질 아래 날이 갈수록
흡뜨는 거역의 눈동자에 핏발로 살아
열쇠 소리 사라져 버린 밤은 끝없고
끝없이 혀는 짤리어 굳고 굳고
굳은 벽 속의 마지막
통곡으로 살아
타네
불타네
녹두꽃 타네
별 푸른 시구문 아래 목 베어 햇불 아래
햇불이여 그슬러라
하늘을 온 세상을
번뜩이는 총검 아래 비웃음 아래
너희, 나를 육시토록
끝끝내 살아
- 「녹두꽃」전문
죽임의 대상과 생의 의지가 강렬하게 충돌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쇠창살/매질/열쇠소리/굳은
벽/총검/육시” 등의 이미져리군으로 표상되는 죽임의 세력의 가중되는 압박과 위해 속에 굴하지 않고
살아내겠다는 결의를 절규처럼 다짐한다. 자기 결의를 강조하는 “살아”와 “타네/불타네”의 감탄적 어구의
반복이 생의 의지력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토록 팽팽한 죽임과 생의 의지의 대결은 어떻게
마무리될까? 그것은 물론 생의 의지의 우위로 나타날 것이다. 화자의 생명력은 “너희, 나를 육시”할지라도
“끝끝내” 죽지 않는 영원성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생명은 어떠한 죽임의 세력에 의해서도 결코
굴복되지 않는 불멸성을 속성으로 한다. 다시 말해, 생명은 어느 특정 개인의 실존적 차원을 넘어서는
광대무변한 절대성을 지닌다. 따라서 시적 화자의 강렬한 생의 의지는 생명의 영원성과 절대적 신성성에
대한 신념과 믿음에 다름 아닌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김지하의 이와 같은 생명의식은 농경 공동체의 대지적 생명력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시편은 대지적 생명력의 현재적 수난과 절대적 영원성이 암시적으로 드러난다.
참혹한 옛 싸움터의 꿈인 듯
햇살은 부르르 떨리고
하얗게 빛바랜 돌무더기 위를
이윽고 몇발의 총소리가 울려간 뒤
바람은 나직이 속살거린다
그것은
늙은 산맥이 찢어지는 소리
그것은 허물어진 옛 성터에
미친 듯이 타오르는 붉은 산딸기와
꽃들의 외침소리
그것은 그리고
시드는 힘과 새로 피어오르는 모든 힘의
기인 싸움을 알리는 쇠나팔소리
내 귓속에서
또 내 가슴 속에서 울리는
피끓는 소리
잔잔하게
저녁 물살처럼 잔잔하게
붓꽃이 타오르는 빈 들녘에 서면
무엇인가 자꾸만 무너지는 소리
무엇인가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소리.
- 「들 녘」일부
시적 화자는 “들 녘”에서 “참혹한 옛 싸움터의 꿈인 듯” 펼쳐지는 격전의 풍경을 감지한다. 그 싸움의
구도는 “몇 발의 총소리”와 이에 대항하는 “타오르는 산딸기와/꽃들의 외침소리” 이다. 날카로운 금속성의
죽임과 부드러운 들녘의 생명이 서로 충돌하는 현장이다. 이에 대해 시적 화자는 “시드는 힘과 새로
피어오르는 모든 힘의/기인 싸움을 알리는 쇠나팔 소리”임을 예감한다. “시드는 힘” 이란 “몇 발의
총소리”로 표상되는 죽임의 세력을 가리키고 “새로 피어오르는 모든 힘”이란 “들 녘”의 생명의 기운을
가리킨다. 죽임과 생명의 대결 앞에서 시적 화자는 스스로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울리는 “피끓는 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앞으로 펼쳐질 “긴 싸움” 에 대한 비장한 결의를 가리킨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들 녘”의
생명력이 죽임의 세력에 압도당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리하여 “붓꽃이 타오르는 빈 들녘에 서면/무엇인가
자꾸만 무너지는 소리”를 감지한다. “조금씩 조금씩/무너져 내리는 소리”는 시적 화자가 느끼는 절박한
위기감이며 동시에 대지적 생명력을 전투적으로 응집시키는 배경이기도 하다.
한편, “들 녘”으로 표상되는 농경 공동체의 살림의 문화와 이를 와해시키는 불온한 세력의 실체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붕괴되어가는 재래적인 삶의 터전과 1960,70년대 도시화, 공업화, 산업화를
지상 과제로 내세운 개발독재 이데올로기에 직접 연관된다. 다음 시편은 이러한 정황을 실감 있게
드러낸다.
간다
울지 마라 간다
흰 고개 검은 고개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길
몸팔러 간다
언제야 돌아오리란
언제야 웃음으로 돌아오리란
댕기풀 안쓰러운 약속도 없이
간다
울지 마라 간다
모질고 모진 세상에 살아도
분꽃이 잊힐까 밀 냄새가 잊힐까
사뭇사뭇 못 잊을 것을
꿈꾸다 눈물 젖어 돌아올 것을
밤이면 별빛 따라 돌아올 것을
간다
울지 마라 간다
하늘도 시름겨운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길
몸팔러 간다
- 「서울길」전문
시적 화자에게 “서울길”은 “몸팔러” 가는 길이다. “흰 고개 검은 고개 목마른 고개”란 표현은 고향 마을의
불모성과 고단한 인생행로를 예견하는 서울길의 비극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급격한 농촌 공동체의 와해로
인해 떠밀리듯이 상경한 이농민들에게 “서울”은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가치까지도 쉽게 사물화 시킨다.
그리하여 상경한 이농민들에게 “분꽃”과 “밀냄새”가 그리운 고향으로 “언제야 돌아오리란/언제야 웃음으로
화안히 /꽃피어 돌아오리란” 기약은 지키기 어렵다. “붓꽃이 타오르는 빈 들녘”은 이미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 내리”(「들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향은 “꿈꾸다 눈물 젖”거나 “밤이면 별빛 따라
돌아올” 절대적 그리움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서울길”이 곧 고향과의 격절을 강요하는 경계선이 된다.
이별과 상실의 정서가 3음보의 전통적인 민요조 율격과 어우러지면서 시적 전반의 비관적인 여운과
절조를 심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시적 배경은 1960,70년대 당시 시대적 상황과 직접 연관된다. 개발독재의 경제 전략은 ‘경제발전 =
공업화’의 등식에 지나치게 치중됨으로써 선진국형인 농공업 상호의존론이 외면되고 ‘농업경시론’으로
치닫는 양상을 드러낸다. 점차 농업이 공업자본의 축적을 위한 수탈의 대상이 되면서 한국 전래의
공동체적 살림의 터전은 급속도로 와해되기 시작한다. 또한 이와 더불어 개발독재 이데올로기는 산술적인
경제 성장에 집중하는 ‘기술로서의 근대’에 치중함으로써 억압과 권위로부터의 자유를 도모하는
‘해방으로서의 근대’는 외면되고 만다. 그래서 개인의 인권과 자율을 강조하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이
배제되고 자본주의의 인간 소외현상과 상품화 논리가 급증하는 반생명적인 현상이 초래된다. 이와 같은
반생명적인 산업화의 진행 속에서 “서울길”을 거슬러 “분꽃”과 “밀 냄새”를 잊지 못하고 “꿈꾸다 눈물 젖어
돌아”오고, “밤이면 별 빛 따라 돌아오”고자 열망하는 것은 대지적 생명의 질서의 재건에 대한 갈망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서울길”을 건너오기 이전의 전래의 농경 공동체의 생명의식이 김지하 초기시의 저항과 반역의
작동요소이다. 실제로 그는 누구보다 반생명적인 지배 권력과 대결하는 “시드는 힘과 새로 피어오르는
모든 힘의/기인 싸움을 알리는 쇠나팔 소리”의 전선에서 부정과 반역의 투쟁을 직접 전개한다. 그리하여
특권지배층에 대한 통렬한 폭로, 풍자, 고발을 노래한 담시,『오적』을 비롯하여 시집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등의 시 세계는 남성적인 공격성과 대결의지로 표면화 된다.
3. “애린”과 화엄적 자아의 발견
김지하의 시 세계는 1980년대 『애린』에 이르면 남성적인 대결과 공격성이 점차 약화되고 여성적
수렴과 포용성으로 선회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현상은 억압적인 지배세력에 대한 저항의식의
지층을 이루던 “저녁 물살처럼 잔잔하게/붓꽃이 타오르는 빈 들녘”(「들녘」)이나 잊혀지지 않는 “분꽃”과
“밀 냄새”(「서울길」)로 표상되던 농경공동체의 생명의식과 감성이 외화된 것으로 파악된다. 다시 말해,
억압적인 지배 세력에 항거하는 상대적 관계 속에서 작동했던 농경공동체의 생명의식과 감성이 스스로
절대적이고 독자적인 존재로 전면화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김지하의 시 세계에서 투쟁과 투옥이 반복되던 죽임의 극점에서 역동적으로 생명의
화두가 표면화된 계기는 어디에 있을까? 다음 인용문은 이러한 정황을 상술하고 있다.
그 무렵 철창 아래쪽 콘크리트와 철창 사이 작은 홈 파인 곳에 흙먼지가 쌓이고 거기에 풀씨가 날아와
빗방울을 빨아들여 싹이 돋고 잎이 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본 날 감방에 돌아와 얼마나
울었던지. 생명! 이 말 한마디가 왜 그처럼 신선하고 힘 있게 다가왔던지. 무궁 광대한 우주에 가득 찬
하나의 큰 생명, 처음도 끝도 없이 물결치는 한 흐름의 생명, 그것 앞에 담과 벽이 있을 리 없고 죽음과
소멸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나는 작아지고 좁쌀이 되고 협심증이 되고 분열증에
빠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이 생명의 큰 이치를 마음과 몸에 익힐 수 있을까. 3
시인은 철창으로 감금된 실존적 위기 속에서 광대무변한 우주적인 자아를 발견하고 있다. 콘크리트와
철창 사이에 피어난 “풀씨”는 “처음도 끝도 없이 물결치는 한 흐름의” 유기적인 생명의 그물의 산물이다.
그래서 “그것 앞에 담과 벽이 있을 리 없고 죽음과 소멸이 있을 까닭이 없”다. 김지하의 초기 시 세계의
밑그림을 이루던 농경공동체의 생명의식의 집약적 인식과 자각이 열리는 순간으로 파악된다.
농경공동체의 생명의식은 ‘나락 한 알’에도 우주적 협동과 공공성이 배어 있다는 유기적 세계관의 체험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에서 “감방”은 일차적으로는 시인이 감금된 폭압의 현장을 가리키지만, 궁극적으로는 죽임의
세력과 맞서는 투쟁과 저항의 반생명적인 공간, 그 악무한적인 대결 구도의 표상으로 해석된다. 이제,
시인은 상극적인 대결 구도를 벗어나서 “생명의 큰 이치를 마음과 몸에” 체득할 수 있는 길을 떠나고자
한다. 그는 닫힌 자아로부터 우주생명으로 열린 자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싹이 돋아 오른 “풀”은 곧 시인 자신의 자화상으로도 해석된다. “풀”은 시인 자신의 본질을
명징하게 비추고 있는 거울이다. 이제 그의 상상력은 비좁은 감방 안에서 담과 벽이 없는 생명의 바다로
3 김지하, 「타는 목마름에서 생명의 바다로」,<<동아일보>>,(1990.10,21)
펼쳐지고 있다. 그가 스스로 우주 속의 화엄적 자아로 거듭 태어나는 찰나이다.
실제로 「애린」연작부터 그의 시 세계는 경직된 대항담론에서 탈피하여 억압적인 세력까지 순치시켜
포용해내는 살림의 언어의 화법과 미의식을 추구한다. 대결구도의 날카로움은 “모난 것/딱딱한 것, 녹슨
것/낡고 썩고 삭아지는 것뿐/이곳은 온통 그런 것들뿐/내 마음마저 녹슬고 모가 났어”(「결핍」)라고
호소하듯, 투쟁의 대상은 물론 자기 자신마저도 붕괴시키게 된다. 그래서 그의 시 세계는 직선의 파시즘을
넘어 곡선의 포용성 4 을 추구한다. 이것은 상극적인 직선(양)의 성향이 극단에 이르면서 결핍된 상생적인
곡선(음)의 성향을 불러오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사과알 자꾸만 만지작거리는
건/아니야/먹고 싶어서가 아니야/돈이 없어서가 아니야/모난 것, 모난 것에만 싸여 살아/둥근 데 허천이 난
내 눈에 그저/둥글기 때문” (「둥글기 때문」)이라고 노래하게 된다. 이러한 시적 정조의 선회는 “이기기
위해/죽어 너를 끝끝내 이기기 위”(「서울」) 해 더욱 첨예했던 “천둥, 번개, 폭풍, 피, 햇불”등의 이미져리를
점차 “노을” 5 등의 역동적인 균정의 이미져리로 전환시킨다. 낮의 밝음(양)과 밤의 어둠(음)이 습합된 “노을”
이미지는 직선을 포용한 곡선의 성향에 상응한다. 이처럼 양을 포용한 음의 세력은 6 생명을 포태하는
모성성의 근본 생리에 해당한다. 따라서 음양의 포용적 균정의 형질은「애린」연작의 “죽고 새롭게
태어남”(「애린」간행에 붙여)의 세계를 노래하는 토양으로 작용할 수 있게 된다.
김지하의 시 세계가 죽임의 상극으로부터 “풀씨”에서 돋아 오른 “싹”으로 표상되는 생명의 세계를
집중적으로 추구할 때 가장 선행되는 과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이다. 자기 자신의 본성과
근원에 대한 이해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우주 생명의 실재에 대한 이해의 출발이며 종착이기 때문이다.
「애린」연작이 불교의 심우도와 병치관계를 이루며 자신의 삶의 본성에 대한 성찰과 탐구를 시도하는
주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불법을 알기 쉽게 대중에게 널리 전도하고 선시 발전을 도모한 「심우도」 7 는
열개의 원으로 된 공간 안에 1. 소를 찾아 나서(尋牛), 2. 그 발자국을 보고(見跡), 3. 그 다음에 소 자체를
보게 되고(見牛) 4. 마침내 소를 붙잡아(得牛) 5.소를 길들이고(牧牛) 6. 잘 길들여진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 다음(騎牛歸家) 7. 집에 돌아가자 소의 생각 따위는 다 잊어버리고(到家忘牛) 8.급기야는 사람도
소도 다함께 생각하지 않게 되는 상태에 이르고(人牛俱忘) 9.본래의 맑고 깨긋한 무위의 경지에
이르렀다가(反本還源)10.사립문을 열고 시정으로 나와 자유분방하게 속인들을 교화하는(立廛垂手
)모습을 그린 것이다. 여기에서 자신의 본래면목을 상징하는 “소”가 「애린」연작에서 “애린”으로
치환되어 노래되고 있다.
우거진 풀 헤치며 아득히 찾아가니
물은 넓고 산은 멀어 갈수록 험하구나
몸은 고달프고 마음은 지쳐도 찾을 길 없는데
저문 날 단풍숲에서 매미울음 들려 오네
- 열 가지 소노래 첫째
4 채광석, 「「황토」에서 「애린」까지 1」, (『애린』첫째권 해설), 실천문학사, 1986 참조
5 「애린」연작에는 빛과 어둠이 습합된 “노을”이미지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안산」,「안팎」,「남한강에서」,「노을
무렵」등의 시편들에는 “노을”이 시적 정황의 밑그림을 이룬다.
6 양은 공격적, 확장적, 경쟁적 성격 혹은 그러한 존재를 상징하고 음은 방어적, 통합적, 협동적인 것을 상징한다.
7 「심우도」로는 각각 보명과 확암 선사의 도본과 게송이 있다. 전자 보다 나중에 나온 후자가 짜임이나 발상이 더욱
치밀하고 확연하다. 송준영, 「소 찾는 노래」, <<서정시학>>, 2008,7 참조근 5월 8일 별세한 고 김지하 시인의 영면을 추모하는 마음에서 김지하 시인의 시 세계 전반의 미적 특성과 가치를 탐색
15 의상대사의 「法性偈」에서 제시한 화엄적 세계관이다.
모두 다 형제라고
형제보다 더 높은
어른이라고
그리 생각하게 되었지요
마음 편해졌어요
축복처럼
새가 머리 위에서 노래합니다.
- 「새봄⋅3」전문
법계연기론에서 우주는 상호 의존과 순환을 바탕으로 하는 생명 공동체이다. 따라서 집착이나 자타의
이기적 분별이란 있을 수 없으며 오직 상호 존중하는 자비가 있을 따름이다. 이를 정리하면, ‘연기-
공(무자성)-자비’로서 ‘상호의존성- 비실체성 - 상호 존중성’ 16 이 된다. 그래서 법계연기론은 비실체성을
매개로 상호 의존성이 상호 존중성(자비)으로 승화되는 윤리성을 확보하게 된다.
따라서 시적 화자가 “흙도 물도 공기도 바람도/모두 형제라고/형제보다 더 높은/어른이라고”생각하는 것은
법계연기론의 상호 의존성의 원리와 상호 존중성(자비)의 윤리가 바탕을 이루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주의
존재원리를 체득하면서부터 “머리 위에서 노래하는” 새가 “축복처럼”느껴진다. 자신만의 선정이나 자비가
아니라 화엄적 대선정과 자비에서 오는 축복이다. 깨달음의 즐거움이란 우리의 현실을 떠난 초월적
경지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주생명의 실상에 대한 이해라는 것을 환기시킨다.
한편, 이와 같은 법계연기론의 세계인식은 김지하의 시적 삶의 원적에 해당하는 농경공동체의 생명의식과
친연성을 지닌다. 농경공동체사회에서 자연은 조화와 순응의 대상이다. 만물의 생육은 해와 달의
순환주기와 대지의 자기조직화 원리에 공명하고 참여하는 과정을 통해 완수될 수 있다.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어 있음을 시범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농경공동체의 생활문화인 것이다. 따라서 김지하가
『애린』연작을 마디절로 하여 1990년대 이후 불교의 법계연기론의 원리에 입각한 생태주의적 상상력을
집중적으로 노래하는 것은 그의 시적 삶의 근원에 해당하는 “저녁 물살처럼 잔잔하게/붓꽃이 타오르는 빈
들녘”(「들녘」)이나 잊혀지지 않는 “분꽃”과 “밀 냄새”(「서울길」)로 표상되던 농경공동체의 생명의식과
감각의 창조적 고양으로 정리된다. 이렇게 보면, 김지하의 시 세계에서 농경공동체의 생명의식은
1960,70년대에는 억압적인 지배 세력에 대한 부정의 동력으로,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생태적
상상력의 원형성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5. 결론
김지하의 시 세계는 전통적인 생명공동체를 급속하게 와해시키는 불온한 지배세력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에서 불온한 지배세력까지 순치시켜 포괄하는 생명의 문화 재건으로 나아간다. 그의 이와 같은 생명
16 김종욱, 위의 책, 90쪽 참조
지키기에서 생명의 문화 건설을 위한 창조적 전환의 이면에는 일관되게 농경공동체의 생명의식과 감성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다만 전반부에는 대결과 반역의 경직된 직선(양적)의 시 세계의 이면적
질서로 존재했다면, 후반부에는 외화 되면서 곡선적(음적)인 원환의 시 세계를 통한 포용과 조화의
역동적인 균정의 세계를 열어나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의 농경공동체의 생명의식은 「심우도」와
병치관계를 통해 전개되는「애린」연작을 거치면서 화엄적 자아의 발견과 우주생명의 순환성, 무자성,
존중(자비)의 윤리를 직시하는 생명의 세계관에 이르게 된다. 그의 이러한 법계연기론에 입각한 전일적인
생명의 세계관은 생태적 상상력의 철학적 원리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많은 생태주의 시편들이
생태계 위기의 현실에 대한 고발, 비탄, 풍자의 소재주의적 차원에 머물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화엄적
우주관은 근원적인 철학적 대안과 인식론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그의 이러한 생명적 세계관은 이천년대 간행된 『새벽강』(2006),『비단길』(2006),
『시김새』(2012), 『흰그늘』(2018)등에서 제시되는 생명과 평화의 길을 구현하는 대안 문명의 원형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농경공동체의 생명의식과 화엄적 상상력이 김지하 시 세계의
원형요소라는 점의 확인과 더불어 21세기 문명적 지표를 제시하는 ‘오래된 미래’로서의 소중한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해준다.
홍용희 :
경희대학교 및 동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로,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으로 등단한 이래 문학평론가로서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평론집 '김지하 문학연구' '현대시의 정신과 감각' '꽃과
어둠의 산조' '한국문화와 예술적 상상력' '통일시대와 북한문학' 등 다수가 있다. 제 1회 젊은 평론가상, 제
13회 편운문학상, 애지문학상, 시와시학상, 김달진문학상, 유심문학상 등을 수상하면서 널리 알려졌으며,
계간 <시작> <작가세계> <쿨트라> 편집위원, 국제한인문학회 회장을 거쳐 현재 '한국비평문학회'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경희사이버대학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로서 문화예술창작 분야를 담당하고
있다.
빈손 가득히 움켜쥔
햇살에 살아
벽에도 쇠창살에도
노을로 붉게 살아
타네
불타네
깊은 밤 넋 속의 깊고
깊은 상처에 살아
모질수록 매질 아래 날이 갈수록
흡뜨는 거역의 눈동자에 핏발로 살아
열쇠 소리 사라져 버린 밤은 끝없고
끝없이 혀는 짤리어 굳고 굳고
굳은 벽 속의 마지막
통곡으로 살아
타네
불타네
녹두꽃 타네
별 푸른 시구문 아래 목 베어 햇불 아래
햇불이여 그슬러라
하늘을 온 세상을
번뜩이는 총검 아래 비웃음 아래
너희, 나를 육시토록
끝끝내 살아
- 「녹두꽃」전문
죽임의 대상과 생의 의지가 강렬하게 충돌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쇠창살/매질/열쇠소리/굳은
벽/총검/육시” 등의 이미져리군으로 표상되는 죽임의 세력의 가중되는 압박과 위해 속에 굴하지 않고
살아내겠다는 결의를 절규처럼 다짐한다. 자기 결의를 강조하는 “살아”와 “타네/불타네”의 감탄적 어구의
반복이 생의 의지력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토록 팽팽한 죽임과 생의 의지의 대결은 어떻게
마무리될까? 그것은 물론 생의 의지의 우위로 나타날 것이다. 화자의 생명력은 “너희, 나를 육시”할지라도
“끝끝내” 죽지 않는 영원성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생명은 어떠한 죽임의 세력에 의해서도 결코
굴복되지 않는 불멸성을 속성으로 한다. 다시 말해, 생명은 어느 특정 개인의 실존적 차원을 넘어서는
광대무변한 절대성을 지닌다. 따라서 시적 화자의 강렬한 생의 의지는 생명의 영원성과 절대적 신성성에
대한 신념과 믿음에 다름 아닌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김지하의 이와 같은 생명의식은 농경 공동체의 대지적 생명력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시편은 대지적 생명력의 현재적 수난과 절대적 영원성이 암시적으로 드러난다.
참혹한 옛 싸움터의 꿈인 듯
햇살은 부르르 떨리고
하얗게 빛바랜 돌무더기 위를
이윽고 몇발의 총소리가 울려간 뒤
바람은 나직이 속살거린다
그것은
늙은 산맥이 찢어지는 소리
그것은 허물어진 옛 성터에
미친 듯이 타오르는 붉은 산딸기와
꽃들의 외침소리
그것은 그리고
시드는 힘과 새로 피어오르는 모든 힘의
기인 싸움을 알리는 쇠나팔소리
내 귓속에서
또 내 가슴 속에서 울리는
피끓는 소리
잔잔하게
저녁 물살처럼 잔잔하게
붓꽃이 타오르는 빈 들녘에 서면
무엇인가 자꾸만 무너지는 소리
무엇인가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소리.
- 「들 녘」일부
시적 화자는 “들 녘”에서 “참혹한 옛 싸움터의 꿈인 듯” 펼쳐지는 격전의 풍경을 감지한다. 그 싸움의
구도는 “몇 발의 총소리”와 이에 대항하는 “타오르는 산딸기와/꽃들의 외침소리” 이다. 날카로운 금속성의
죽임과 부드러운 들녘의 생명이 서로 충돌하는 현장이다. 이에 대해 시적 화자는 “시드는 힘과 새로
피어오르는 모든 힘의/기인 싸움을 알리는 쇠나팔 소리”임을 예감한다. “시드는 힘” 이란 “몇 발의
총소리”로 표상되는 죽임의 세력을 가리키고 “새로 피어오르는 모든 힘”이란 “들 녘”의 생명의 기운을
가리킨다. 죽임과 생명의 대결 앞에서 시적 화자는 스스로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울리는 “피끓는 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앞으로 펼쳐질 “긴 싸움” 에 대한 비장한 결의를 가리킨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들 녘”의
생명력이 죽임의 세력에 압도당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리하여 “붓꽃이 타오르는 빈 들녘에 서면/무엇인가
자꾸만 무너지는 소리”를 감지한다. “조금씩 조금씩/무너져 내리는 소리”는 시적 화자가 느끼는 절박한
위기감이며 동시에 대지적 생명력을 전투적으로 응집시키는 배경이기도 하다.
한편, “들 녘”으로 표상되는 농경 공동체의 살림의 문화와 이를 와해시키는 불온한 세력의 실체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붕괴되어가는 재래적인 삶의 터전과 1960,70년대 도시화, 공업화, 산업화를
지상 과제로 내세운 개발독재 이데올로기에 직접 연관된다. 다음 시편은 이러한 정황을 실감 있게
드러낸다.
간다
울지 마라 간다
흰 고개 검은 고개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길
몸팔러 간다
언제야 돌아오리란
언제야 웃음으로 돌아오리란
댕기풀 안쓰러운 약속도 없이
간다
울지 마라 간다
모질고 모진 세상에 살아도
분꽃이 잊힐까 밀 냄새가 잊힐까
사뭇사뭇 못 잊을 것을
꿈꾸다 눈물 젖어 돌아올 것을
밤이면 별빛 따라 돌아올 것을
간다
울지 마라 간다
하늘도 시름겨운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길
몸팔러 간다
- 「서울길」전문
시적 화자에게 “서울길”은 “몸팔러” 가는 길이다. “흰 고개 검은 고개 목마른 고개”란 표현은 고향 마을의
불모성과 고단한 인생행로를 예견하는 서울길의 비극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급격한 농촌 공동체의 와해로
인해 떠밀리듯이 상경한 이농민들에게 “서울”은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가치까지도 쉽게 사물화 시킨다.
그리하여 상경한 이농민들에게 “분꽃”과 “밀냄새”가 그리운 고향으로 “언제야 돌아오리란/언제야 웃음으로
화안히 /꽃피어 돌아오리란” 기약은 지키기 어렵다. “붓꽃이 타오르는 빈 들녘”은 이미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 내리”(「들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향은 “꿈꾸다 눈물 젖”거나 “밤이면 별빛 따라
돌아올” 절대적 그리움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서울길”이 곧 고향과의 격절을 강요하는 경계선이 된다.
이별과 상실의 정서가 3음보의 전통적인 민요조 율격과 어우러지면서 시적 전반의 비관적인 여운과
절조를 심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시적 배경은 1960,70년대 당시 시대적 상황과 직접 연관된다. 개발독재의 경제 전략은 ‘경제발전 =
공업화’의 등식에 지나치게 치중됨으로써 선진국형인 농공업 상호의존론이 외면되고 ‘농업경시론’으로
치닫는 양상을 드러낸다. 점차 농업이 공업자본의 축적을 위한 수탈의 대상이 되면서 한국 전래의
공동체적 살림의 터전은 급속도로 와해되기 시작한다. 또한 이와 더불어 개발독재 이데올로기는 산술적인
경제 성장에 집중하는 ‘기술로서의 근대’에 치중함으로써 억압과 권위로부터의 자유를 도모하는
‘해방으로서의 근대’는 외면되고 만다. 그래서 개인의 인권과 자율을 강조하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이
배제되고 자본주의의 인간 소외현상과 상품화 논리가 급증하는 반생명적인 현상이 초래된다. 이와 같은
반생명적인 산업화의 진행 속에서 “서울길”을 거슬러 “분꽃”과 “밀 냄새”를 잊지 못하고 “꿈꾸다 눈물 젖어
돌아”오고, “밤이면 별 빛 따라 돌아오”고자 열망하는 것은 대지적 생명의 질서의 재건에 대한 갈망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서울길”을 건너오기 이전의 전래의 농경 공동체의 생명의식이 김지하 초기시의 저항과 반역의
작동요소이다. 실제로 그는 누구보다 반생명적인 지배 권력과 대결하는 “시드는 힘과 새로 피어오르는
모든 힘의/기인 싸움을 알리는 쇠나팔 소리”의 전선에서 부정과 반역의 투쟁을 직접 전개한다. 그리하여
특권지배층에 대한 통렬한 폭로, 풍자, 고발을 노래한 담시,『오적』을 비롯하여 시집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등의 시 세계는 남성적인 공격성과 대결의지로 표면화 된다.
3. “애린”과 화엄적 자아의 발견
김지하의 시 세계는 1980년대 『애린』에 이르면 남성적인 대결과 공격성이 점차 약화되고 여성적
수렴과 포용성으로 선회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현상은 억압적인 지배세력에 대한 저항의식의
지층을 이루던 “저녁 물살처럼 잔잔하게/붓꽃이 타오르는 빈 들녘”(「들녘」)이나 잊혀지지 않는 “분꽃”과
“밀 냄새”(「서울길」)로 표상되던 농경공동체의 생명의식과 감성이 외화된 것으로 파악된다. 다시 말해,
억압적인 지배 세력에 항거하는 상대적 관계 속에서 작동했던 농경공동체의 생명의식과 감성이 스스로
절대적이고 독자적인 존재로 전면화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김지하의 시 세계에서 투쟁과 투옥이 반복되던 죽임의 극점에서 역동적으로 생명의
화두가 표면화된 계기는 어디에 있을까? 다음 인용문은 이러한 정황을 상술하고 있다.
그 무렵 철창 아래쪽 콘크리트와 철창 사이 작은 홈 파인 곳에 흙먼지가 쌓이고 거기에 풀씨가 날아와
빗방울을 빨아들여 싹이 돋고 잎이 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본 날 감방에 돌아와 얼마나
울었던지. 생명! 이 말 한마디가 왜 그처럼 신선하고 힘 있게 다가왔던지. 무궁 광대한 우주에 가득 찬
하나의 큰 생명, 처음도 끝도 없이 물결치는 한 흐름의 생명, 그것 앞에 담과 벽이 있을 리 없고 죽음과
소멸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나는 작아지고 좁쌀이 되고 협심증이 되고 분열증에
빠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이 생명의 큰 이치를 마음과 몸에 익힐 수 있을까. 3
시인은 철창으로 감금된 실존적 위기 속에서 광대무변한 우주적인 자아를 발견하고 있다. 콘크리트와
철창 사이에 피어난 “풀씨”는 “처음도 끝도 없이 물결치는 한 흐름의” 유기적인 생명의 그물의 산물이다.
그래서 “그것 앞에 담과 벽이 있을 리 없고 죽음과 소멸이 있을 까닭이 없”다. 김지하의 초기 시 세계의
밑그림을 이루던 농경공동체의 생명의식의 집약적 인식과 자각이 열리는 순간으로 파악된다.
농경공동체의 생명의식은 ‘나락 한 알’에도 우주적 협동과 공공성이 배어 있다는 유기적 세계관의 체험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에서 “감방”은 일차적으로는 시인이 감금된 폭압의 현장을 가리키지만, 궁극적으로는 죽임의
세력과 맞서는 투쟁과 저항의 반생명적인 공간, 그 악무한적인 대결 구도의 표상으로 해석된다. 이제,
시인은 상극적인 대결 구도를 벗어나서 “생명의 큰 이치를 마음과 몸에” 체득할 수 있는 길을 떠나고자
한다. 그는 닫힌 자아로부터 우주생명으로 열린 자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싹이 돋아 오른 “풀”은 곧 시인 자신의 자화상으로도 해석된다. “풀”은 시인 자신의 본질을
명징하게 비추고 있는 거울이다. 이제 그의 상상력은 비좁은 감방 안에서 담과 벽이 없는 생명의 바다로
3 김지하, 「타는 목마름에서 생명의 바다로」,<<동아일보>>,(1990.10,21)
펼쳐지고 있다. 그가 스스로 우주 속의 화엄적 자아로 거듭 태어나는 찰나이다.
실제로 「애린」연작부터 그의 시 세계는 경직된 대항담론에서 탈피하여 억압적인 세력까지 순치시켜
포용해내는 살림의 언어의 화법과 미의식을 추구한다. 대결구도의 날카로움은 “모난 것/딱딱한 것, 녹슨
것/낡고 썩고 삭아지는 것뿐/이곳은 온통 그런 것들뿐/내 마음마저 녹슬고 모가 났어”(「결핍」)라고
호소하듯, 투쟁의 대상은 물론 자기 자신마저도 붕괴시키게 된다. 그래서 그의 시 세계는 직선의 파시즘을
넘어 곡선의 포용성 4 을 추구한다. 이것은 상극적인 직선(양)의 성향이 극단에 이르면서 결핍된 상생적인
곡선(음)의 성향을 불러오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사과알 자꾸만 만지작거리는
건/아니야/먹고 싶어서가 아니야/돈이 없어서가 아니야/모난 것, 모난 것에만 싸여 살아/둥근 데 허천이 난
내 눈에 그저/둥글기 때문” (「둥글기 때문」)이라고 노래하게 된다. 이러한 시적 정조의 선회는 “이기기
위해/죽어 너를 끝끝내 이기기 위”(「서울」) 해 더욱 첨예했던 “천둥, 번개, 폭풍, 피, 햇불”등의 이미져리를
점차 “노을” 5 등의 역동적인 균정의 이미져리로 전환시킨다. 낮의 밝음(양)과 밤의 어둠(음)이 습합된 “노을”
이미지는 직선을 포용한 곡선의 성향에 상응한다. 이처럼 양을 포용한 음의 세력은 6 생명을 포태하는
모성성의 근본 생리에 해당한다. 따라서 음양의 포용적 균정의 형질은「애린」연작의 “죽고 새롭게
태어남”(「애린」간행에 붙여)의 세계를 노래하는 토양으로 작용할 수 있게 된다.
김지하의 시 세계가 죽임의 상극으로부터 “풀씨”에서 돋아 오른 “싹”으로 표상되는 생명의 세계를
집중적으로 추구할 때 가장 선행되는 과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이다. 자기 자신의 본성과
근원에 대한 이해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우주 생명의 실재에 대한 이해의 출발이며 종착이기 때문이다.
「애린」연작이 불교의 심우도와 병치관계를 이루며 자신의 삶의 본성에 대한 성찰과 탐구를 시도하는
주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불법을 알기 쉽게 대중에게 널리 전도하고 선시 발전을 도모한 「심우도」 7 는
열개의 원으로 된 공간 안에 1. 소를 찾아 나서(尋牛), 2. 그 발자국을 보고(見跡), 3. 그 다음에 소 자체를
보게 되고(見牛) 4. 마침내 소를 붙잡아(得牛) 5.소를 길들이고(牧牛) 6. 잘 길들여진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 다음(騎牛歸家) 7. 집에 돌아가자 소의 생각 따위는 다 잊어버리고(到家忘牛) 8.급기야는 사람도
소도 다함께 생각하지 않게 되는 상태에 이르고(人牛俱忘) 9.본래의 맑고 깨긋한 무위의 경지에
이르렀다가(反本還源)10.사립문을 열고 시정으로 나와 자유분방하게 속인들을 교화하는(立廛垂手
)모습을 그린 것이다. 여기에서 자신의 본래면목을 상징하는 “소”가 「애린」연작에서 “애린”으로
치환되어 노래되고 있다.
우거진 풀 헤치며 아득히 찾아가니
물은 넓고 산은 멀어 갈수록 험하구나
몸은 고달프고 마음은 지쳐도 찾을 길 없는데
저문 날 단풍숲에서 매미울음 들려 오네
- 열 가지 소노래 첫째
4 채광석, 「「황토」에서 「애린」까지 1」, (『애린』첫째권 해설), 실천문학사, 1986 참조
5 「애린」연작에는 빛과 어둠이 습합된 “노을”이미지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안산」,「안팎」,「남한강에서」,「노을
무렵」등의 시편들에는 “노을”이 시적 정황의 밑그림을 이룬다.
6 양은 공격적, 확장적, 경쟁적 성격 혹은 그러한 존재를 상징하고 음은 방어적, 통합적, 협동적인 것을 상징한다.
7 「심우도」로는 각각 보명과 확암 선사의 도본과 게송이 있다. 전자 보다 나중에 나온 후자가 짜임이나 발상이 더욱
치밀하고 확연하다. 송준영, 「소 찾는 노래」, <<서정시학>>, 2008,7 참조근 5월 8일 별세한 고 김지하 시인의 영면을 추모하는 마음에서 김지하 시인의 시 세계 전반의 미적 특성과 가치를 탐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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