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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8월 6일 목요일
[(백)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은 공관 복음서가 공통으로 전하는 말씀에 따른 것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리는 날이다. 이 축일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 14일)에서 사십 일 앞서 지낸다. 교회의 전승에 따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사십 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 주시고자 거룩한 변모의 표징을 드러내셨다. 1457년 갈리스토 3세 교황이 보편 전례력에 이 축일을 받아들였다.
말씀의 초대
다니엘 예언자는,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은 분이 앉으신 옥좌 앞으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인도되는 환시를 본다(제1독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신화가 아니라 목격한 자로서 알려 주었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오르셨는데,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신다(복음).
제1독서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었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7,9-10.13-14
9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10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
13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우리는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 베드로 2서의 말씀입니다. 1,16-19
사랑하는 여러분,
16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줄 때,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한 것입니다.
17 그분은 정녕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18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19 이로써 우리에게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9
그 무렵 1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2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3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4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5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6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8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습니다(마태 17,2 참조). 여기서 ‘변하였다’는 말은 변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 변화를 바라보는 사람에게도 해당합니다. 곧 보는 사람도 그전과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 왜 그렇게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는지, 그것이 보는 이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래서 그 대상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변하였다’는 말에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면, 빵과 포도주가 축성되어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할 때, 그것을 보는 우리의 눈도 함께 변하기 마련입니다. 빵과 포도주로만 바라보는 시선에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바라보는 신앙의 눈으로 바뀝니다. 실체 변화 후에도 그저 빵과 포도주로만 본다면,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보인 모습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셨음에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는 눈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변모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초막을 짓고 지내자는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는데도 베드로는 눈앞의 영광스러운 모습만 볼 뿐입니다.
변화를 알아보려면 먼저 자신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데 익숙함에 젖고 타성에 젖으면 고정 관념이 생기고, 내가 보는 것,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주님의 도움을 받아 마음가짐을 새로이 해야 합니다. 이것이 변화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내 생각과 마음이 주님의 도움으로 바뀔 때, 변모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뜻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처참한 십자가에서도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유청 안셀모 신부)
우리는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2사도들 가운데서도 최측근 제자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사도를 데리고 높은 산(타볼산)으로 오르십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세 사도는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스승님의 모습을 목격하게 되고,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살짝 맛보게 됩니다.
왜 하필 높은 산일까요? 산은 구약시대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의 계시를 접하던 장소였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산은 곧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라는 위대한 현현은 우리에게 장차 도래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는 삶의 신비를 살짝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변모 사건은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와 영광을 아주 조금 드러냅니다. 완전히 보여주는 것은 아니고 그야말로 맛만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주님 나라의 모든 것을 볼 수는 없고, 파악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언젠가 다가올 결정적인 날, 주님 얼굴을 마주 뵙게 되는 날, 영광스런 하느님 나라의 실체를 명명백백하게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갑작스레 영광에 싸여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 두 인물, 모세와 엘리야는 왜 나타나신 것일까요? 상황 설정이 조금은 갑작스럽고 생뚱맞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유가 있더군요. 모세는 이스라엘 최고의 사제요 율법의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역사 안에 가장 탁월한 예언자였습니다. 두 사람의 등장은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서의 주인이요 주님이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한 신약 성경이 저술되던 당시 유다교 안에서 모세와 엘리야는 지상의 삶을 마친 다음 하늘나라로 승천한 인물이며, 언젠가 다시 돌아올 인물로 여겨지는 사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하느님의 나라가 아주 잠깐동안이지만 우리를 대신한 세 제자에게 드러난 은혜로운 사건입니다. 타볼산 위에서는 아주 잠깐 하느님 나라가 드러났지만, 예수님의 영광스런 수난과 부활 이후에는 결정적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분의 수난과 부활로 인해 일시적이었던 하느님 나라는 항구적인 것인 것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와 관련해서, 아직 갈 길이 먼 우리이기에 세 제자들처럼 어안이 벙벙할 것입니다. 분위기 파악이 잘 되지 않아 많이 답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그분을 직접 마주하게 될 그날, 그분의 수난과 영광에 결정적으로 참여하게 될 그 날, 우리 앞을 짙게 가렸던 구름과 너울이 사라지고, 우리 역시 찬란한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이토록 초라하고 남루한 옷을 훌훌 벗고 거룩한 주님의 옷으로 갈아 입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 얼굴도 주님처럼 변모되어 영원히 빛나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는 죽어도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죽는자 할지라도 반드시 되살아날 것입니다. 우리 주님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 자비의 품 안에서 불사불멸할 것입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 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죽지 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 순식간에, 눈 깜박할 사이에, 마지막 나팔 소리에 그리될 것입니다. 나팔이 울리면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이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것을 입어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관련해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빈치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기 위해서 맑고 순수한 모습을 지닌 사람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의 얼굴을 그리기 위해서 다시 사람을 찾았습니다. 마침내 탐욕과 절망이 얼굴에 드러난 한 사람을 찾아 유다의 모델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다빈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예전에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때 모델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이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정확한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에게 깊은 묵상을 전해 줍니다. 사람의 얼굴은 시간이 지나면 변합니다. 그러나 얼굴보다 더 깊이 변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닮았던 사람이 유다의 얼굴을 닮게 되었다면, 그것은 외모가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했습니다.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이 말하는 변모는 단순히 외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빛나고 옷이 하얗게 변한 것은, 예수님 안에 계신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안에 있는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거룩함이 빛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 자리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나타났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끌어냈고,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받았습니다. 모세의 마음은 하느님의 뜻을 듣고, 그 뜻을 백성에게 전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예언자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우상 숭배와 거짓 예언이 가득했던 시대에 홀로 하느님을 증언했습니다. 엘리야의 마음은 세상의 힘에 굴복하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를 지키는 마음이었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율법과 예언이 예수님 안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 하느님의 진리를 따르는 마음, 하느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마음이 바로 거룩한 변모의 마음입니다.
세상은 변모의 기준을 다르게 말합니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면 변했다고 말합니다. 더 많은 재물을 가지면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더 큰 권력을 얻으면 빛나는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다른 기준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명예를 얻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변모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거룩한 변모의 핵심은 빛나는 얼굴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입니다. 베드로는 그 산 위에 머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은총의 순간에 머물고 싶습니다. 기도가 잘될 때, 마음이 평화로울 때, 모든 일이 순조로울 때, 그 자리에 머물고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산 아래로 내려오십니다. 산 위에서 본 영광은 산 아래의 삶을 위해 주어진 은총입니다. 거룩한 변모는 현실을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변모는 다시 일상으로 내려와 하느님의 뜻을 사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본당 공동체에서,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어둠이 있습니다. 미움의 어둠이 있고, 분노의 어둠이 있습니다. 욕심의 어둠이 있고, 교만의 어둠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마음속에 날이 밝아 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기 시작하면 우리 안에도 샛별이 떠오릅니다. 얼굴은 그대로일지라도 마음이 달라집니다. 말투가 달라지고, 눈빛이 달라지고, 선택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한 변모입니다. 우리는 모두 변모의 길 위에 있습니다. 누군가는 상처 때문에 마음이 굳어졌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실패 때문에 얼굴에서 웃음을 잃었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세상의 걱정 때문에 기도의 빛을 잃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산으로 부르십니다. 잠시 멈추어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소리보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변합니다. 마음이 변하면 삶이 변합니다. 삶이 변하면 우리가 머무는 자리도 하느님의 빛으로 밝아집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보여 주는 축일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축일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기준으로 변모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준으로 변모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더 많이 가지는 사람이 아니라 더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더 높이 오르는 사람이 아니라 더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더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더 부드러운 마음으로 용서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외모가 아니라 마음이 변해야 합니다. 세상의 명예가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함을 닮아야 합니다. 세상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바라보며 우리도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제 얼굴이 아니라 제 마음을 바꾸어 주십시오. 주님, 세상의 빛이 아니라 당신의 빛을 따라 살게 해 주십시오. 주님, 제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당신 아드님의 말씀을 듣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이미 변모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공동체는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빛을 드러내는 공동체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마음을 닮고, 주님의 길을 따르며 거룩한 변모의 삶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초막>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 17,4)
산 아래서
벗들을 품어야할
보잘것없는 거친 초막에
지친 당신의 사람들과 함께
산 위에서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빛나는 초막을 맛보이시려
주님께서 올라가시네
산 위에
아쉬울 것 없는
우리만의 초막을 짓자는
들뜬 당신의 사람들과 함께
산 아래에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모든 이 깃들 초막을 지으시려
주님께서 내려오시네
오늘의 축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은 예수님께서 수난을 앞두시고 제자들 앞에서 당신의 신적 영광을 미리 보여 주신 것(마태 17,1-8)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일부 지역 교회에서 기념해 오다가 10세기경에 전례로 도입되었으며, 1456년 교황 갈리스토 3세 때에 보편 교회의 축일로 제정되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40일 앞두고 우리는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낸다.이 축일은 5세기부터 동방에서 지내 왔다.
전례는 사순 제2주일에 이미 거룩한 변모 사건을 기념한다.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주님의 세례를 또 다른 관점에서 기억하는 사건이다.
'예수님을 둘러싼 구름’과 ’사랑하시는 당신의 아들’이라고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은 요르단 강의 계시를 새롭게 한다
(입당송:빛나는 구름 속에서 성령께서 보이고 아버지의 소리가 들려 왔도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여기에서는 율법과 예언서를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는데, 그들은 훗날 예수님께 일어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알려 준다(루가 24,26-27 참조).
그러므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십자가 죽음의 걸림돌을 극복하도록 제자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감사송).
그러나 이 사건은 세례와 마찬가지로, 모든 믿는 이를 하느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실 하느님의 놀라운 선택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본기도).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때에 (영성체송: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과 같은 사람이 되리니, 그 때에는 그분의 참모습을 뵈올 것이니라),
당신께서 보여 주신 그 영광이 당신의 몸인 교회 안에도 나타날 것을 보여 주셨다(감사송).
예수님께서 거룩한 변모 때에 사도들에게 나타내 보이신 모습은 그리스도 자신의 참모습이며,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있는 그대로 그리스도를 뵙게 될 그 날의 모습이다(영성체송).
우리는 성찬례를 거행하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그 빛나는 모습을 닮으려고 준비한다(영성체 후 기도).
오늘의 성인
성 유스토 (Justus)
활동년도 : +304년
신분 : 소년,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유스또, 유스뚜스, 유스투스
성 파스토르 (Pastor)
활동년도 : +304년
신분 : 소년,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빠스또르, 빠스똘, 파스또르, 파스톨
성 유스투스(또는 유스토)와 성 파스토르(Pastor)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학생이었다. 박해자들이 지금의 에스파냐 알칼라 데 에나레스에 도착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고 다닐 때, 성 유스투스와 성 파스토르는 그곳의 초급학교에서 기초 과목을 배우는 어린이였다. 이 두 소년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 것이 두렵지도 않은지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인지, 하여튼 그 지방 관리에게 가서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판관은 그들을 겁주려고 무서운 형구들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확고한 의지로 하느님을 찬미하여 그리스도를 끝까지 증거하였고, 그로인해 결국 모진 채찍질을 당하고 순교하였다.
성 호르미스다 (Hormisdas)
활동년도 : +523년
신분 : 교황
지역 :
같은 이름 : 호르미스다스
이탈리아 중부 프로시노네(Frosinone)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호르미스다는 결혼한 지 얼마 후에 아내를 잃고 홀로 되었으나, 514년에 성 심마쿠스(Symmachus, 7월 19일)를 계승하여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 당시 그는 로마(Roma)에서 교황 성 심마쿠스의 부제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교황의 후계자로 지명된 듯 하다. 그의 재임 기간에 가장 돋보이는 일은 아카키우스(Acacius) 이단을 소멸시킨 것이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로마와 재결합한 것은 아카키우스를 공식으로 단죄하고 로마 주교좌의 수위권과 무류성을 이구동성으로 선언한 소위 ‘호르미스다 신앙 고백문’의 결과였다. 여기에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요한 2세(Joannes II)을 비롯하여 동방 주교 약 250명이 그 당시에 서명하였다. 그러므로 이 문서는 교황의 권위와 수위권에 대한 획기적인 선언임과 동시에 세기를 통하여 이 요구를 구체화시킬 때마다 인용되어 왔다. 또 그의 재임 초기에는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이단을 교회로 복귀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세상을 떠난 후 성 베드로 대성전에 안장되었고, 그의 아들은 후에 교황이 된 성 실베리우스(Silverius, 6월 20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