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이정희: 진보 진영 통합을 끌어낸 울보 투사 |
진보정당 시즌 2 2011년 11월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새진보통합연대(진보신당 탈당파)가 드디어 통합진보당으로 통합을 이뤄냈다. 그리고 12월 5일 창당을 공식 선언하고, 당헌과 강령을 채택한 통합진보당은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와 국민참여당 유시민 대표, 새진보통합연대 심상정 대표가 공동 대표를 맡았다. 『한겨레21』은 이를 놓고 “‘진보정당 시즌2’가 시작됐다”고 평했다.1) 오랜 논의와 토론, 진통과 산고 그리고 서로의 양보 끝에 진보정당이 하나로 통합된 것이었다. 진보세력의 통합을 원한 사람들에게는 반가운 일이었고, 각 당 대표들의 선택과 각 당원들의 합의에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도 많았다. 서로 믿음이 없었다면 쉽사리 이뤄지지 않았을 통합이었기 때문이다. 각 당 대표들의 통합 의지가 크게 작용한 이번 통합의 공은 각 당 대표들과 당원 모두에게 돌아가야 하지만 그중에서도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의 역할은 소중했다. 다소 경직된 분위기의 민주노동당에 통합의 필요성을 꾸준히 전해오고 설득하면서 통합을 이뤄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2008년 정치계에 입문한 ‘새내기’가 한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거대한 통합을 이뤄낸 이정희가 주목받는 이유다. “똑 떨어지는 일처리로 유명한 율사이자 단심(丹心)을 가진 ‘울보 투사’”2) 조국 서울대 교수는 이정희를 이렇게 평가했다. 이런 평가대로 이정희는 18대 국회에 들어온 뒤로 참 많이도 울었다. 거대 공룡 여당이자 소통조차 무시한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권의 독주체제에 끊임없이 저항하다 들려나오고 실신하고 또 울기도 한 이정희는 이제 통합진보당과 함께 2012년 한 해를 승리의 해로 만들어가려 한다. 내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이정희는 잘 알려진 대로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집안은 그리 유복한 편이 아니었다.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정희는 조금은 가난하게 자랐다. “제가 찢어지게 가난했다고도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많이 유복한 가정도 아니었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으로 지하방을 벗어났죠. 그전엔 여름에 비가 오면 늘 집안으로 물이 들어와서 요가 흥건히 젖었던 기억이 나요. 2층으로 셋집을 옮겼는데 집안에 화장실이 있고 정말 행복하더군요.”3) 그런 경험 때문이었을까? 서울 서문여고를 졸업한 이정희는 1987년 학력고사에서 340점 만점에 326점을 받아 전국 여자수석을 차지했다. 그때 언론 인터뷰가 물밀 듯이 밀려들어 ‘앞으로 뭐가 되고 싶냐’고 물었고, 이정희는 “법조인이 돼서 소외된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대답과 함께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이에 대해 이정희는 이런 말을 했다. “어느 신문에서 ‘수석합격자들이 흔히 그렇게 말하는데 실제 그런 삶을 살고 있느냐’고 지적하는 칼럼을 읽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얼떨결에 한 답변인데, 그 답변이 그 이후로도 제 머릿속에 줄곧 남았던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4) 자기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줄곧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정희는 1980년대의 엄혹한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대학 시절 그는 서울대 총여학생회장까지 지내는 등 공부보다는 학생운동에 더 열정을 쏟았는데, 그 계기가 있었다. “여성 문제에 대한 자각 때문이었습니다. 1학년 때 여성 문제에 대해 분석한 글을 보고 계속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무렵에 동두천에서 주한미군에 의해 살해된 윤금이 씨 사건을 접했습니다. 제 동기들 가운데 동두천의 성매매 여성 쉼터에서 일했던 이들이 몇 있었는데, 그들을 도와주러 갔다가 그게 굉장히 심각한 문제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성매매 문제와 주한미군 문제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피해자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사법시험을 준비했으니까, 제 인생에서 여성 문제에 대한 자각이 큰 변환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5) 그 이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을 졸업한 이정희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매향리와 평택의 미군 관련 피해 사건, 군산 성매매업소 화재 사건, 호주제 위헌심판 청구 등 이정희는 주한미군과 성매매 등 여성 관련 사건들을 맡아 활동했다. 그렇게 인권변호사로 민변에서 활동하던 그는 왜 갑자기 정치를 시작하게 됐을까? 이정희는 “소송을 하지 않고 현실의 문제를 빨리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하다가 법을 만드는 일을 선택하게 됐다”고 말했다.6)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큰아들이 “엄마 얼굴 못 보게 된다”면서 말렸지만 출마를 권유받은 지 이틀 만에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출마를 결심했다. 그렇다면 왜 민주노동당이었을까? “제가 법조인이 된 결정적 계기가 동두천에서 만난 한 여자아이예요. 그때 ‘주한미군 문제는 굉장히 심각한 우리 사회의 구조다. 그런데 남북관계를 평화와 화해의 방법으로 풀지 않으면 주한미군 문제 안 풀린다. 그걸 풀려는 곳이 민주노동당이다. 그런데 그로 인해 분당이 되고 또 비난을 받는, 그 이유 때문에라도 나는 민주노동당을 선택해야 한다’ 생각했어요.”7) 그렇게 이정희는 2008년 18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3번으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 길은 험난했다. 난폭한 공룡과의 싸움 18대 국회는 공룡 여당인 한나라당의 독주와 이명박 정권의 갖가지 실정으로 야당 의원들, 특히 원내 의석이 5석밖에 안 되는 민주노동당엔 힘겨운 투쟁의 현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초선인 이정희에게는 더욱 힘겨운 투쟁이었다. 강기갑과 더불어 이정희는 기륭전자, 쌍용자동차 등의 농성 현장과 촛불집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한나라당의 법안 단독 강행처리에 맞서다가 수차례에 걸쳐 떠밀려 나오고 실신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이정희는 사람들의 뇌리 속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도 방송법 직권상정 때 이정희가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끌려나오는 것을 본 후부터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두각을 나타내며 이정희는 2008년 5월에는 민주노동당 원내부대변인으로, 또 9월에는 민노당 정책위원회 의장으로 선임되는 등 당내에서 정치적 입지도 굳혔다. 국회에 입성한 뒤 이정희가 가장 먼저 맞닥뜨린 투쟁의 현장은 미국산 쇠고기 협상을 놓고 불거진 2008년 5월의 촛불정국이었다. 당시 ‘강달프’라 불리던 강기갑과 더불어 이정희는 촛불집회 현장에서, 또 국회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와 재협상을 촉구했다. 2008년 6월 25일 미국산 쇠고기 수입 위생조선 고시를 강행하자 이에 반발하며 미국산 쇠고기 재협상을 요구하는 시위대를 경찰이 물대포를 쏘면서 강경진압하는 과정에서 이정희는 시민들과 함께 경찰에 연행됐다. 시민들이 무차별적으로 연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나간 자리에서 이정희는 현역 국회의원이라고 신분을 밝혔지만 “해산 경고 방송이나 미란다 원칙이 고지되지 않은 불법 연행”을 당했고, 책임자의 설명을 요구했지만 무시당했다.8) 촛불집회 때 국회와 집회 현장에서 ‘대차게’ 투쟁한 이정희는 2008년 8월에는 기륭전자 파업 사태에 동참했다. 8월 4일 기륭전자에 직접 고용을 주장하며 55일째 단식 중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살려야 한다며 국회 본관 앞에서 동조 단식농성에 들어간 것이었다. 생애 첫 단식농성을 시작하며 이정희는 “벼랑 끝에 내몰린 기륭전자 여성 노동자들이 지난 1일 국회 각 당의 원내대표실을 찾아왔지만 한나라당한테 문전박대를 당하고 강제로 끌려나갔다”며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공정하게 중재하고 노동부가 적극 나서, 이들 노동자의 목숨을 구해야 한다”고 호소했다.9) 단식이 끝난 뒤 이정희는 다시 국회로 돌아와 이명박 정부의 부자감세안을 앞서서 반대했고, 복지예산 등이 대폭 삭감된 2009년 예산안을 한나라당에서 강행처리하는 과정에서 한나라당 여성의원들에게 들려나가는 수모를 당했다. 이와 관련해 2008년 12월 13일, 2009년도 예산안을 한나라당 단독으로 강행처리하고 난 뒤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는 예산안 통과를 “빛나는 승리였다”고 자축한 뒤 “특히 어제 보여주신 여성 의원들의 놀라운 전투력에 경의를 표한다. …… 이제 국회의사당에선 양성이 동등하다는 것을 느꼈다”는 놀라운 발언을 했다. 이는 12월 12일 밤 예산 부수법안 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의장석 주변을 점거한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을 한나라당 여성의원 4명이 달려들어 팔다리를 붙잡고 강제로 끌어낸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이에 대해 『경향신문』 김근철 기자는 “여당 대표가 예산안 처리 이후 의원들을 격려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욕설과 몸싸움 속에서 일방처리한 예산안과 그 과정에서 야당의 여성 의원을 테러범 진압하듯 완력으로 끌어내린 것을 극구 칭찬하고 나선 것은 여권 지도부의 인식과 균형감각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한나라당이 172석을 앞세운 일방통행과 상명하복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들어 ‘난폭한 공룡’이 될까 봐 걱정이다”라고 논평했다.10) 2008년 12월 이정희는 국회에서 거대하고 난폭한 공룡과 싸움을 벌였다. 그러다 과로로 쓰러졌고, 12월 17일 퇴원했지만 쉴 틈이 없었다. 예산안 단독 강행처리에 이어 한나라당이 한*미 FTA 비준동의안을 단독 상정했기 때문이었다. 2008년 12월 18일 국회 외통위 박진 위원장실 문 앞에 겹겹이 바리케이드를 친 채 처리한 것이었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회의장을 모두 빠져나간 뒤 야당 의원들과 뒤늦게 회의장에 들어간 이정희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 정부와 여당이 얼마나 가는지 두고 보자”며 분노했고, “더러운 이름들”이라며 여당 의원들의 명패를 집어던져 깼다.11) 이 일로 이정희는 민주당 문학진 의원, 보좌진 5명과 함께 국회 사무처로부터 ‘국회 회의장 모욕죄’와 ‘공용 물건 손상죄’로 검찰에 고발당했다. 임채진 검찰총장은 고발장이 접수된 서울 남부지법에 법과 원칙에 따라 신속하고 철저하게 수사할 것을 명했고, 한나라당은 2009년 1월 9일 이정희, 문학진, 강기갑 의원 등의 의원직 사퇴 촉구 결의안을 제출했다. 그리고 6월에 이정희는 검찰로부터 불구속 기소됐고, 11월 벌금 50만원 형을 받았다. 그는 명패를 집어던졌던 때의 심정을 이렇게 말한다. “아침 7시부터 오후 2시까지 꽁꽁 숨어 있다가 경위들을 불러 집기를 쌓고 문을 틀어막고, 외통위 위원들에게 2시까지 다 들어오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놓고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가며 의결을 하고 뒷문으로 도망간 사람들이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부끄러운 이름을 그냥 두고 싶지 않았어요. 제가 평생 해왔던 것 중에 가장 감정을 많이 표출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싶네요.”12) 정치는 연출이 아니다! 하지만 명패를 집어던진 후에도 이정희가 분노할 일은 계속되었다. 2009년 1월 용산참사가 일어나자 이정희는 경찰의 폭력진압과 진압 과정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2009년 2월 5일 이정희는 “용산 철거민 참사 당시 경찰이 시위 진압에 소방장비를 동원한 것은 경찰관 직무집행법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또 “소방 차량이 물을 뿜기 시작한 시점은 건물에서 불이 나기 전”이라며 “경찰의 거듭되는 방수 요청에 따라 진압작전을 엄호하기 위해 물을 뿜은 것으로, 이는 화재 진압과 인명 구조 등 소방에 필요한 활동이 아니라 경찰과 함께 철거민 농성을 진압한 것”이라고 주장했다.13) 이정희는 다음날 경찰의 채증사진 4장을 제시하며 또 다른 문제를 제기했다. 용역업체 직원이 소방호스로 물을 뿌리며 진압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이 사진을 검찰이 수사 초기부터 확보했다는 것이었다. 이정희는 “경찰의 진압작전에 용역업체 직원이 동원된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주장해온 검찰의 주장이 거짓말이었음이 명백히 드러났다”며 “검찰 수사가 경찰의 과잉진압에 대해 면죄부를 주고 철거민들에게만 죄를 덮어씌우기한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주장했다.14)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정국에서 이정희는 이명박 대통령의 사과와 국정기조 전환을 촉구하며 대한문 앞에서 단식농성을 하고, 서울광장에서 열린 ‘6월항쟁 계승·민주회복을 위한 범국민대회’를 앞두고 무대차량을 강제철거하려는 경찰과 대치하다 실신하기도 했다. 6월의 투쟁은 평택에서도 계속됐다. 쌍용자동차 평택 공장의 농성 현장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8월 수많은 상처를 남기고 노사 양측이 합의에 이르기까지 이정희는 서울과 평택을 오가며, 어떤 때는 평택에서 계속 머물며 쌍용자동차 평택 공장을 지켰다. 이 와중에 이정희는 경찰에 폭행당했고 연행당했다. 그런데 그 현장에서 이정희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했다. “음. 이건 제가 미안해서 이야기 안 했던 건데, 작년 쌍용자동차 파업 때 물도 음식도 못 들어가는 상황이 벌어졌고 그걸 지켜보는 게 굉장히 고통스럽더라고요. 누군가는 뭔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서 며칠을 그 앞에서 기다리면서 안에 계신 분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어요.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그런데 그 문자를 보고 안에 계시던 분들이 많이 울었다고 하셨어요. 고맙다고. 해결하지 못한 게 굉장히 가슴이 아프고 반성이 되면서도, 그런 말씀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찌릿찌릿한 걸 느꼈어요.”15) 이 경험으로 이정희는 “정치는 연출이 아니다, 정치는 결국 진심으로 하는 것이다. 약삭빠르고, 제 앞길만 찾고, 제 이익만 추구하고, 만날 거짓말하는, 그런 정치를 깰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16) 이후 이정희는 국군기무사령부가 민간인을 사찰했다고 주장했다. 2009년 8월 12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연 이정희는 “이명박 정부가 기무사까지 동원해 다수 민간인을 사찰한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며 8월 5일 쌍용자동차 노조에 대한 경찰 진압을 항의하는 평택 집회 현장에 있던 기무사 소속 신 아무개 대위가 소지한 수첩과 동영상 자료, 신분증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17) 기무사에서는 이를 전면 부인했지만 수첩에 기록된 내용과, 한 사람을 집요하게 쫓고 있는 동영상을 보면 기무사 사찰 의혹의 근거가 충분했다. 이정희는 책임자 처벌과 전모를 밝힐 것을 요구했지만, 이 사건은 유야무야 넘어가고 말았다. 평화주의자가 싸우는 이유 18대 국회에 들어온 이후 이정희는 이렇게 싸워왔다. 그가 싸워온 기록은 이 지면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싸울 만한 상황이었고 싸워야 될 상황이었지만 일각에서는 ‘왜 항상 싸우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이정희의 답변은 이렇다. “제가 원래 변호사를 하지 않았습니까. 토론하고 반박하고, 그렇게 일하는 게 가장 쉽고 편합니다. 국회가 그런 곳이라고 생각하고 왔구요. 그런데 와서 보니까 그런 토론이 불가능한 상황이 너무 많이 벌어집니다. ‘(의원) 숫자가 많으니까 다 해버리겠다’고 하는데, 거기에다 ‘저는 토론 좀 해야겠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면 제 책임이 끝나는 것인지, 국민이 ‘당신은 할 일 다 했다. 숫자 적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할지에 의문이 있습니다. 국회의원과 변호사가 다른 점이 뭐냐 생각해 보면, 변호사 때는 정말 냉정하고 차분하고 아주 조용히 일을 했습니다. 일부러 거리를 두기도 했구요. 그런데 정치는 그렇게 냉정하게만 해선 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국민에겐 화나는 일까지 대변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18) 국민에게는 화나는 일까지 대변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 공감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이정희의 말에도 십분 공감한다. “전 평화주의자예요. (웃음) 평화주의자가 왜 싸우게 됐는지 절박한 설명들은 잘 전달되지 않죠. 미디어에서 형성하는 이미지도 그렇고. 그런데 2008년 12월 정기국회부터 올해 지방선거 전까지 국회가 열리는 기간 동안, 2009년 용산참사 직후인 2월 국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직권상정이 없던 적이 없어요. 민주주의의 파괴도 일어났고. 도저히 통과되어선 안 될 일이 통과되는 것을 보면서 그런 상황이 죄스러웠어요. 그래서 결심했어요. 다시는 지지 말아야겠다고.”19) 다시는 지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이 야권연대와 통합을 불러온 것은 아니까? 사실 이정희는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 야권 연대와 통합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이정희는 ‘다음 아고라’에 이런 글을 남겼다. “노무현 전 대통령께, 안타까움도 많았습니다. 이라크 파병이며, 한·미 FTA며, 국가보안법 폐지에서 물러설 때며, 자신을 지지하던 사람들로 하여금 정을 떼게 하는 그 모습에 속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를 좋아했습니다. 부산시장 선거에 나섰다가 떨어진 뒤, 라디오 아침 방송에서 그는 ‘농부가 어찌 밭을 탓하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출근길에 들은 그 한마디에 그가 좋아졌습니다. …… 그가 대통령으로 한 시도가 제가 바라는 역사의 흐름과 똑같지 않았더라도, 그가 10·4 선언으로 대통령 임기를 마감했다는 하나만으로도, 그가 구시대의 권력을 휘두르지 않는 최초의 대통령으로 남고 싶어 했다는 것만으로, 그가 임기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야, 기분 좋다’고 외칠 수 있었던 것만으로, 가슴 아프게, 떠나보냅니다.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20) 이 글에서 알 수 있듯 이정희는 비록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과 달랐고, 아쉬움도 많았지만 노무현을 좋아했다.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야권 연대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용산에서 철거민이 죽고 화물 택배 노동자가 죽고 대통령이 죽는데, 모두가 일치하는 문제이다. 이렇게 민주주의 위기가 오는데 민주당과 정책적 차이를 따지기보다 적어도 이 순간에는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싸우는 게 중요하다. 개혁적인 가치로 갈지, 진보적인 가치로 갈지, 급진적 가치로 갈지는 잃은 것을 찾고 난 뒤에 생각할 문제 아니냐. 지금은 힘을 모아 광장에서 시민들과 함께 싸우는 게 우선이다. 이제 곡을 할 판인데, 곡해야 할 사람들이 어디 갔냐고 시민들이 얘기한다. …… 1987년 6월항쟁 때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정도의 강력하게 헌신할 수 있는 연대틀이 필요하다.”21) 2010년 1월 시민사회단체가 진행한 야권연대 릴레이 토론회에서 이정희는 그 어느 당보다 야권연대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6월 지방선거와 관련해 “민주주의 후퇴를 되살려내기 위해 이번 선거에서 한나라당을 이겨야 한다”면서 “야당과 시민사회가 힘을 모아 ‘반MB(이명박 대통령) 연합’을 하자. 민노당은 결심이 서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야권연합을 성사시키는 것 자체가 야당과 국민의 힘을 키워가는 과정이고 선거에서 이기는 유일한 길”이라며 야권연대의 필요성을 토로했다.22) 그리고 2010년 6·2지방선거에서 한명숙 서울시장 후보의 대변인을 맡아 연대를 실천했다. 야권 연대와 관련해 이정희는 “어떤 야당도 국민의 전폭적 지지를 못 받는 상황에서 ‘한나라당 심판해야 하니 표를 달라.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호소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데 민노당이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자평한 뒤 “민노당이 야권연대를 이뤄낼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다. 국민들이 가장 원하는 것을 실현시켜 드려야 한다는 의무감”이었다고 말했다.23) 이런 의무감 그리고 진보세력의 통합을 위한 노력, 그것이 이정희를 민주노동당 대표로 만든 힘이었을 것이다. 그가 민주노동당 대표가 된 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나이도 젊었고 초선의원인, 더구나 여성으로 민노당에 가입한 것도 얼마 되지 않은 이정희가 민노당 대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18대 국회에서 그가 보여준 리더십 덕분이었다. 2010년 6월 강기갑 민노당 대표가 “젊고 참신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며 대표 불출마 선언을 하고 이정희에게 대표 출마를 권유했다.24) 그리고 2010년 7월 15일 이정희는 찬반투표를 거쳐 민주노동당 대표로 확정됐다. 이정희는 자신이 당대표가 된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많은 노동자와 농민, 지역주민들. 이분들이 저를 국회의원으로 만들어주신 거고 그런 분들이 자신이 해왔던 일과 해야 할 일들을 제가 책임감 있고 안정감 있게 해주리라는 기대감을 담아주신 것 같아요. 국민에게 부드러우면서도 명쾌하게, 또 민주노동당의 원칙을 지키면서 좀 더 다가서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생각해요.”25) 이 말처럼 이정희는 민주노동당 대표를 맡고 난 뒤 “부드러우면서도 명쾌하게, 또 민주노동당의 원칙을 지키면서” 국민에게 다가서기 시작했고, 그것은 진보정당 간의 본격적인 통합 움직임으로 구현되기 시작했다. 진통과 산고 끝에 이룬 통합 진보정당의 통합 움직임은 처음에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사이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2011년 1월 20일 민노당과 진보신당 그리고 여러 시민단체들이 참여한 ‘진보정치대통합과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8인 연석회의’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2011년 안에 새로운 진보정당을 출범시키기로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그 길은 험난했다. 우선 진보신당과의 입장 차를 줄이는 게 힘들었다. 오랜 진통을 겪어야 했지만, 그 과정에서 이정희도 또 진보신당 조승수 대표도 통합에 대한 의지를 굳혀 나갔다. 특히 이정희는 “태아를 품었으면 낳아서 키워야 한다. 임신 11개월이 되면 아이가 위험하다”며 통합에 굳건한 의지를 내보였다.26) 그리고 2011년 6월 1일 새벽 민노당과 진보신당이 통합 합의문에 동의하며 진보대통합이 드디어 이뤄진 듯 보였다. 하지만 이정희는 더 큰 통합을 원하고 있었다. 2011년 6월 7일 국회 비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이정희는 “6·15 공동선언마저 부정하는 극소수 반북 반통일 세력과 맞설 준비가 되어 있다면,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하고 양극화를 부추기는 신자유주의를 털어낸다면, 누구든 새로운 진보정치 실현의 길을 함께 열어나갈 수 있다”고 밝혔다. 또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를 묻지 않겠다”며 “우리 사회의 진보와 개혁을 위한 열망과 가치를 공유한다면 폭넓고 과감하게 손잡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27) 이정희가 염두에 둔 것은 국민참여당이었다. 국회 연설에 앞서 출연한 라디오 방송에서 이정희는 “(진보통합) 연석회의에서 국민참여당이 최종 합의문에 대해 동의 의사를 보내오면 참여 문제를 논의하기로 공감을 이루었다”며 “참여당은 당원 민주주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정당이고 지역주의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정당이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통합과 관련해) 진지한 논의들이 앞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28) 이에 대해 민노당 강기갑 원내대표는 “오이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라는 옛말이 있는데, 이 대표의 최근 행보를 보면 오해를 부추기고 있는 행보가 아닌가 생각돼 참으로 우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며 이정희의 국회 연설은 “연석회의에 참여했던 단체들, 특히 진보신당에 잘못된 메시지를 줄 수 있으며 시기도 적절하지 않았다. 진보대통합 합의문을 흔들고 있는 것이며 매우 부적절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참여당의 참여 문제는 진보신당 등 진보 진영의 참여 문제처럼 사활적인 게 아니다. 선택의 문제일 뿐,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29) 하지만 이정희의 생각은 달랐다. 이정희는 “국민참여당은 당 차원에서 ‘진보 진영 대표자 연석회의’ 최종합의문에 동의했고, 참여정부의 오류와 한계에 대해 성찰한다고 했다”며 “참여당이 들어온다고 해서 통합진보정당의 방향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진보정당의 운영 원리, 정책의 기본 방향이 정해졌다면, 그다음엔 폭넓게 생각하는 게 맞다”며 보다 폭넓은 통합 가능성을 내보였다.30) 그러나 2011년 9월 4일 진보신당 당대회에서 통합안이 부결돼 진보신당과의 통합은 사실상 물 건너가게 되었다. 이후 진보신당에 통합을 주장해온 노회찬, 심상정 그리고 조승수 등이 탈당하게 되고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의 통합이 가시화되는 듯했지만, 9월 25일 민노당 당대회에서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안이 부결되면서 진보통합이 무산된 것처럼 여겨졌다. 진보통합의 불씨가 다시 살아난 것은 10·26재보궐선거 이후였다.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선대위에 야권 인사 모두가 참여하면서 다시 한 번 연대와 통합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민노당과 국민참여당, 새진보통합연대 사이에 통합을 위한 구체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2011년 11월 통합에 합의하고, 12월 통합진보당을 공식 출범시킬 수 있었다.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새진보통합연대의 통합을 두고 『경향신문』은 기사 표제로 이렇게 평한 바 있다. <이정희 ‘뚝심’ 노·심·조 ‘재기’ 유시민 ‘중재’>라고 말이다. 이 말처럼 통합진보당의 출범은 각 당 대표들의 노력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터이다. 그 중에서도 민주노동당의 경직성을 깨뜨린 이정희의 뚝심이 빛난 통합이었다. 그가 울지 않아도 되는 세상은… 초선의원이었지만 18대 국회에서 펼친 활약으로 이정희는 당내에서, 또 당외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해찬 전 총리는 “이정희 의원이 참 잘한다. 그래서 후원금도 냈다”고 했고, 정세균 민주당 대표 역시 공식 당 회의에서 이례적으로 “이정희 의원의 노력에 존경과 격려의 말씀 드린다”고 말했다.31) 또 이해찬은 “13대 국회의 노무현 의원을 보는 것 같다”고 극찬하기도 했다.32) 심지어 4대강 반대에 앞장선 민주당의 김진애 의원은 이정희를 “나의 롤모델이다. 이정희가 대통령 하는 거 한번 봤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33) 국민참여당 대표였던 유시민은 “살벌한 정치계에서 저렇게 착하게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정희의 장점으로 꼽았다.34) 도대체 이정희의 어떤 점이 이런 평가를 가져왔을까? 짧은 정치 경력에도 뚝심 있게 저항하고, 통합진보당을 출범시킨 정치적 능력과 진정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어준의 이런 평을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평생을 업이나 지위와 무관하게 아무런 연출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인으로 살아내는 자, 극히 드물다. 그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타고나야 한다. 이건 가르치거나 흉내 낼 수 없다. 게다가 그로 인한 비용을 감당해낼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 부분은 더 어렵다. 그 획득의 노정은 대단한 분량의 용기와 그것이 그저 곤조에 머물지 않도록 성찰할 지성까지 요구하기 때문이다. 타고났다고 모두 그리 살아내지 못하는 건 그래서다. 노무현은 그 두 가지가 되는, 내가 아는 유일한 정치인이다. 대통령 노무현조차 자연인이었다. …… 진보 진영 누구도 거기 도달하지 못했다.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 그런데 이정희는 거기 근접한 최초의 진보 정치인이다. 사람이, 보인다. 내가 대놓고 그를 응원하는 이유다. 으라차차.”35) 또 이윤영 인디고 유스 북페어 팀장은 『한겨레』에 기고한 「고통을 감각하는 정치 멘토」란 글에서 이정희를 이렇게 평가했다.“‘정치는 고통에 책임지는 것’이라고 최근 말한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의 정치적 가치관과 신념은 한 줄기 빛이다. 타인의 고통을 감각하는 정치적 신념과 청소부의 삶을 헤아릴 줄 아는 젊은이들의 감성이 보편화될 때, 우리 사회의 희망 또한 점점 커질 것은 분명하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세대, 특히나 청소년의 공동체적 감성이 주요 국가 중 최하위라는 이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약자의 고통에 대한 감각, 우리 시대의 정치 멘토가 갖춰야 할 진정한 자질이자 우리 스스로 회복해야 할 인간의 감성이다.”36) 사람이 보인다는 김어준의 말처럼, 또 약자의 고통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윤영의 평처럼, 이정희에게는 진정성이 느껴진다. 이정희 본인이 말한 것처럼, 정치는 연출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것이고, 이정희는 그동안 그렇게 정치를 해왔다.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통합진보당이 출범한 이후 그는 더 재미있게 싸워나가겠다고 말한다. 또 자신이 철의 여인이 될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철의 여인이 될 생각은 없다. ‘울면 지는 거야’ 하는 분도 있고, ‘울어줘서 고마워’ 하는 분도 있다. 정치라는 게 정책만으로 되는 게 아니고, 국민들 느끼는 바를 ‘내 마음과 저 사람이 똑같애’ 하고 여기게 하는 게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울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빨리 만들자’는 분도 있다. 정말 그런 세상을 빨리 만들고 싶다.”37) 그렇다면 이정희가 만들고 싶은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이정희는 민주노동당이 실현시킨 정책 중에 진보의 가치를 잘 구현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저희가 실현시킨 정책 중에 영유아 무상예방접종이 있습니다. 이런 겁니다. 누구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숨을 쉬고 있다면 가난하든 부자든 간에 한국 사회에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살아가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은 우리 사회가 함께 보장해야 된다, 이런 저희의 인식이 반영된 정책입니다.”38) 이런 세상이 아마도 이정희가 울지 않아도 되는 세상일 터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정희가 울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 주 | 1) 이지은, 「국회서 ‘시민권’ 얻게 될까?」, 『한겨레21』, 2011년 12월 19일, 26면 2) 조국, 「시론 : 심상정과 이정희, “고고 씽”!」, 『경향신문』, 2010년 2월 23일, 35면 3) 김제동, 「[김제동의 똑똑똑 12] 이정희 민주노동당 새 대표」, 『경향신문』, 2010년 7월 22일, 4면 4) 인터뷰 박찬수, 정리 김지은, 「[한겨레가 만난 사람]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 “나도 변호사땐 차분…정치인은 국민 분노도 대변해야”」, 『한겨레』, 2009년 10월 9일, 22면 5) 인터뷰 박찬수, 앞의 글 6) 이지은, 「‘새내기’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 “실력 있는 진보로 서민 대변”」, 『한겨레』, 2008년 6월 8일, 8면 7) 김어준, 「[김어준이 만난 여자] 이정희 민노당 대표 “진보정당의 꿈인 대통령, 준비해야죠”」, 『한겨레』, 2010년 7월 29일, 33면 8) 최현준, 「“미란다 원칙 안 지키고 마구잡이로 잡아가”」, 『한겨레』, 2008년 6월 27일, 10면 9) 황예랑, 「이정희 의원 “기륭전자 비정규직 해결” 단식」, 『한겨레』, 2008년 8월 5일, 10면 10) 김근철, 「기자 메모 : ‘빛나는 승리였다’는 박희태」, 『경향신문』, 2008년 12월 15일, 4면 11) 송호진·성연철, 「한나라 FTA 비준안 단독 상정 일방독주 대 격렬저항…‘전쟁터’로 변한 국회」, 『한겨레』, 2008년 12월 19일, 3면 12) 최희진, 「이정희 민노당 원내부대표 “우린 국회 권위에 문제제기 하는 것… 악수하면 끝나나”」, 『경향신문』, 2009년 1월 15일, SC면 13) 강희철·최현준, 「민노당 “농성 진압에 소방장비 투입은 위법”」, 『한겨레』, 2009년 2월 5일, 3면 14) 권오성, 「철거민들이 말하는 ‘용역-경찰-소방 합동작전’」, 『한겨레』, 2009년 2월 6일, 3면 15) 김어준, 앞의 글 16) 김어준, 앞의 글 17) 송호진, 「“군 기무사, 민간인 불법사찰 부활”」, 『한겨레』, 2009년 8월 13일, 1면 18) 인터뷰 박찬수, 앞의 글 19) 김제동, 앞의 글 20) 이정희, 「“안타까움 많았지만 당신을 존경합니다”」, 『한겨레』, 2009년 5월 24일, 2면 21) 정리 이정해,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진보 진영 과제 토론 “MB국정기조 변화·악법 철회 이끌어내야” “정치권 진보개혁세력 ‘창조적 연대’ 필요”」, 『한겨레』, 2009년 6월 8일, 6면 22) 안홍욱, 「야5당 초청토론회-[연합정치 실현, 길을 묻다] 3. 민주노동당 이정희」, 『경향신문』, 2010년 1월 21일, 8면 23) 김의겸·이세영, 「진보의 재구성 길을 묻다 2. 이정희 “진보대통합 위해 연대 경험 쌓아야”」, 『한겨레』, 2010년 6월 17일, 6면 24) 이인숙, 「[진보의 재구성] 41세 이정희 내세워 ‘젊은 민노’로」, 『경향신문』, 2010년 6월 14일, 13면 25) 김제동, 앞의 글 26) 석진환, 「“태아를 품었으면 낳아야 적극적 양보 각오돼 있다”」, 『한겨레』, 2011년 5월 31일, 8면 27) 성한용, 「이정희-유시민 ‘통합’ 한걸음 더」, 『한겨레』, 2011년 6월 8일, 6면 28) 성한용, 앞의 글 29) 박홍두, 「강기갑 “이정희 대표 행보 부적절”」, 『경향신문』, 2011년 6월 10일, 8면 30) 이지은·김외현, 「취임 1주년 맞는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 “참여당 들어와도 통합진보정당 흔들리지 않아”」, 『한겨레』, 2011년 7월 27일, 5면 31) 인터뷰 박찬수, 앞의 글 32) 장관순, 「이정희 민노당 새 대표 확정 “야권과 유연한 연대로 민노당 폭 더 커질 것”」, 『경향신문』, 2010년 7월 16일, 2면 33) 김어준, 「[김어준이 만난 여자] 4대강 반대 앞장선 민주당 김진애 의원 “한나라당도 사석에선 ‘미친 짓’ 수군”」, 『한겨레』, 2010년 9월 9일, 37면 34) 박홍두, 「유시민·이정희·조국 ‘변화 2012 공개콘서트’」, 『경향신문』, 2011년 3월 24일, 6면 35) 김어준, 「[김어준이 만난 여자] 이정희 민노당 대표 “진보정당의 꿈인 대통령, 준비해야죠”」, 『한겨레』, 2010년 7월 29일, 33면 36) 이윤영, 「[야! 한국사회] 고통을 감각하는 정치 멘토」, 『한겨레』, 2011년 3월 29일, 30면 37) 장관순, 「“재·보선도 반MB 야권연대로 승리” 민노당 대표선거 출마 이정희 의원」, 『경향신문』, 2010년 6월 17일, 10면 38) 신동호, 「[신동호가 만난 사람] “국민의 바람은 이미 진보로 가고 있어요”」, 『주간경향』, 2011년 4월 19일, 인터넷판 |
첫댓글 눈물 납니다.
존경스럽네요..정말 아까운 분입니다.(현재)
퍼갑니다.
울지 않아도 되는 세상, 눈치를 보지 않고도 따듯한 밥을 먹을 수 있는 세상을
이정희 대표님을 통해서 이룰 수 있음, 합니다.
그렇군요! 누구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숨을 쉬고 있다면 가난하든 부자든 간에 한국 사회에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살아가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은 우리 사회가 함께 보장해야 된다, 이런 세상이 아마도 이정희가 울지 않아도 되는 세상일 터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정희가 울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기다려지는 이유!... 공감합니다!...()
차차기 여성 대통령 이정희!! 이 때 쯤 통일의 물길도 터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