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189]
L 부장이 떠나고 P 부장이 새로 왔다. 여우를 피하면 호랑이를 만난다고 나에게는 더 고단한 세월이 기다리고 있었다. L 부장이 떠나면서 나에게 “영어실력을 활용한 논문을 구상해 보라”는 얘기가 생각났다. 따라서 나는 기업관련 타부서에서 발간된 우량 논문에 대한 영역을 한 번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사실 전문적인 내용의 논문을 완벽한 영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며칠간, 이 궁리 저 궁리를 해보다가 문득 기상천외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우리은행에 잠시 근무하고 증권 회사로 떠나 간 미국인이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그는 기독교 계통 선교사로 오랫동안 한국에 살아 한국어와 영어 양쪽을 완벽하게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국내 TV에도 여러번 출연한 적이 있을 정도로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나는 그를 찾아가서 나의 사정을 얘기하고 논문의 영역을 부탁했다. 논문 제목은 “한국 컴퓨터 산업의 최근 동향과 향후 전망” 이었다.
그는 며칠 후에 해당 논문을 완벽하게 번역해 주었다. 아마 이 번역은 그 당시 국내에서 누가 번역해도 이 이상 더 잘 번역할 수 없을 정도로 최고 수준의 번역이었다. 나는 그에게 고마운 표시로 촌지를 전달했다. 나는 이제 이 논문 하나로 논문에 대한 고민 없이 몇 달 동안을 느긋하게 버틸 수 있었다. 나는 몇 개월을 자유롭게 놀다가 드디어 기가 막힌 문제의 논문을 부장에게 제출했다.
그런데 나는 부장이 내가 진짜 작성했는지를 시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전에 내용을 충분히 숙지(熟知)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나를 불러서 논문 내용 중 어려운 부분을 지적하며 해석해 보라고 하였다. 나는 막힘없이 해석함으로써 책을 잡히지 않았다. 부장은 의아해했다. 그는 자기의 실력으로도 이 정도 수준의 영역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또 한 가지는 그는 남을 포용하는 너그러운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수준 높은 본 논문에 대해서 어떻게든 잘못을 잡아내어 논문결제를 하지 않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내가 제출한 논문이야말로 그가 가진 정통 엘리트 조사부 출신이라는 자부심을 손상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국제부에 근무하는 미국인 직원을 오라고 해서 내 논문 내용을 스크린하게 했다. 혹시 영역이 엉터리가 아닌지 발견하기 위함이었다. 논문을 꼼꼼하게 살펴본 미국인 직원은 부장에게 전혀 문제가 없는 완벽한 영어 문장이라고 평가해 주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얘기였다. 원어민 미국인이 쓴 영어문장이 틀린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나는 이 기막힌 사실을 부장에게 사실대로 얘기할 수 도 없고 속으로 답답했다. 결국, 영역된 문장이 전혀 하자가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났다.
그러나 부장은 애초부터 논문을 통과시키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논문 내용이 현 은행 업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궤변을 내세워 논문결제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주장대로 한다면, 결과적으로 원래 오리지널 논문을 작성한 기업분석부도 은행 업무에 도움이 되지 않는 논문을 만든 것이 되어버렸다. 결국 P 부장에 의해서 어렵게 만든 나의 영어 논문은 아쉽게도 폐기되고 말았다. P 부장은 그의 독불장군 같은 모난 성격 때문에 기획부서의 L 부장과도 업무상 충돌을 빚는 등 좌충우돌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그와 마찰을 빚었던 L 부장이 상무를 거쳐 은행장으로 어느 날 승격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격언이 생각나게 하는 극적인 장면이었다. 그러나 은행장이 된 L 씨는 그에게 보복으로 어떤 인사상의 불이익도 주지 않았다. 그만큼 은행장은 P 부장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는 품격을 가진 분이었다. 바로 그 은행장이 내게 여의도지점에서 사랑을 듬뿍 주었던 이갑현씨였다.
첫댓글 글을 읽는 내내 너무 스릴을 느꼈어요
혹시 검증에서 들킬까 싶어서요^^
그분 뭔 악연일까요?
어쩌면 다저스님이 호불호가 반드시 갈리는
아주 강렬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닐까
생각들었어요
보통은 환은 정도 들어가신 분이면?
두리뭉실 무난한 범생이들이잖아요 ㅋㅋ
서강대 경제과를 나온 분인데 성격이 강한 분이죠ㅡ IMF때 은행을 퇴직하고 은행연합회에 들어갔죠ㅡ은행재직 때 조사부와 기획부에 근무했고 해외학술연수(석사과정)을 갔다왔죠. 저와는 케미가 전혀 맞지 않았죠ㅡ
다저스님 정말 여러 모로 스트레스를 받으시고 곤란을 당하셨네요.
저라면 그런 조직에 적응 불가능이었겠습니다.
교사들은 세상 물정에 어두운 우물 안 개구리라서 퇴직 후 사기를 많이 당한대요.
퇴직 후 사기 당하기가 제일 쉬운 직업군이 군인, 그 다음이 교사랍니다.
오늘도 흥미 진진한 글 잘 읽었습니다.
우리가 했던 것은 저런 류의 전문적인 업무 분석을 하기 위한 논문이 아니라,
학문적 연구 성과를 가름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학생의 자세가 얼마나 진솔하고 진중하게 연구자로서의 품격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부분에서 거의 판가름이 난다고 봐야겠죠~~
저 같은 경우는 이러저런 선입견을 배제하고 논문 그 자체에 몰두하려 애 쓰긴 했습니다만,
일부 지도나 심사를 맡게 된 교수들은 그것도 권력이라고,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제자들을 애 먹이는 경우를 많이 보기도 했죠,,,
그리운님도 교수로서 제자들의 논문을 심사하셨겠네요. 인성이 워낙 좋으신 방장님이시라 학생들은 다 좋아했겠습니다ㅡ
우리의 신데렐라 항아리님 오늘도 저의 방에 오셔서 격려의 글을 보내 주시네요. 조사부는 점잖고 품격있는 부서이지만 적성에 맞지 않은 직원은 버텨내기가 만만치 않은 부서입니다
저도 여기 있는 동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죠. 그러나 지난 세월 돌이켜보면 고난의 세월일 수록 지금은 더 아름다운 추억으로 자리 잡습니다. 항아리님 이번주가 더위의 고비라고 하네요. 무더위에 피서하시기 바랍니다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