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있는 5개 한인 단체는 우리 정부를 향해 '러시아와 CIS 한인들은 어떤 경우라도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지원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24일 발표했다. 참여한 한인 단체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연해주·사할린한인회와 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한인회다.
유라시아(러시아·CIS) 한인회 연합회에서 가장 큰 규모인 모스크바한인회를 비롯해 카자흐스탄과 타지키스탄, 그루지야(조지아) 한인회 등은 논의를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크라이나에 생활 터전을 둔 교민들은 이 성명에 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2021년 4월에 발간된 모스크바 한국인 30년사
5개 한인회는 성명에서 "러시아와 CIS 한인들은 대한민국이 국제사회 일원으로서 우크라이나에 인도적 지원을 하는 것에 찬성한다"며 "현장에서 그 누구보다 경제·사회적 피해를 보고 있음에도 대한민국 정부를 믿고 지지하며, 묵묵히 버텨왔다"고 밝혔다. "그러나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가능성에 대한 입장을 접하며 가만히 있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고 한인 전체의 목소리를 담아 성명을 발표하기로 했다"고 발표 이유를 밝혔다.
성명은 "대한민국이 주변 강대국 사이 분쟁에 휘말려 국민이 원하지 않는 피해를 볼 수 있는 현 상황을 크게 우려한다"며 "대한민국 정부는 어떤 상황에도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천명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날 성명은 윤 대통령이 지난 19일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만약에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공격이라든지, 국제사회에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대량 학살이라든지, 전쟁법을 중대하게 위반하는 사안이 발생할 때는 인도 지원이나 재정 지원에 머물러 이것만을 고집하기 어려울 수 있다"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가능성을 연 데 대한 현지 교민들의 공식적인 첫 반응이다. 현지 교민사회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우크라이나에 대한 한국의 무기 지원은 분쟁에 대한 일정한 개입을 뜻한다"는 경고가 나오면서 생업과 신변안전 등에 불안감을 느낀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반영하듯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한국총영사관은 이날 한국에 불만을 가진 현지인들과 마찰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며 교민들이 신변안전에 각별히 유의할 것을 당부했다.
블라디보스토크총영사관의 공지(위)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홈페이지의 '총영사관 영사민원및 각종 공지'코너/사진출처:한겨레, 홈페이지 캡처
총영사관은 공지에서 "여러 사람이 모인 곳 또는 현지인들이 있는 장소 등에서 우크라이나 문제와 관련한 의견 표명이나 대화 등을 가급적 삼가 달라"며 "심야에 단독 외출 등을 지양하고 불가피한 경우 2인 이상 이동하는 등 신변안전에 최대한 유의해 달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 공지는 한 차례 수정된 뒤 최종 삭제됐다. 한겨레에 따르면 공지는 “최근 한국 정부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가능성 언급과 관련해 불만을 가진 현지인들의 시비, 폭행 등 한국인의 피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고 했다가 “최근 정세와 관련, 한국에 불만을 가진 현지인들과 마찰이 발생할 우려가 제기됐다”로 수정됐다. 그리고 몇시간 뒤 공지가 삭제됐다.
한겨레는 "외교부 관계자가 '극동 지역은 북한 노동자도 많고 치안이 좋지 않은 곳'이라며 '영사관에 미확인된 첩보가 들어와 우리 교민에 대한 위해 요인이 있을까봐 공지를 올렸는데, (첩보는) 사실이 아닌 걸로 확인돼 글을 내렸다'고 설명했다"고 전했다. 한겨레는 그러나 "윤 대통령의 (무기 지원 가능) 발언에 러시아가 강경한 반응을 보이면서 현지 교민들의 불안감이 커졌는데, 이런 상황을 ‘확인’해주는 듯한 공지문을 낸 데 부담을 느낀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고 지적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사진출처:영사관 페북
보도에 따르면 공지의 전체 내용은 평이하다. △현지인들이 있는 장소에서 우크라이나 문제 관련 의견 표명이나 대화를 삼가고 △심야 시간 단독 외출(꼭 필요시 2인 이상)이나 인적 드문 지역의 통행을 지양하고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면 신속히 현장을 이탈하라고 안내했다. 또 외출 시엔 합법적인 체류를 증명하는 서류(여권과 비자)를 지참하고, 운전할 때도 교통법규를 철저히 지키며 차량 내 필수 서류와 안전장비를 구비할 것을 당부했다.
이 정도의 교민 안전 공지는 주모스크바 한국대사관 등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전후(2022년 2월)부터 16번이나 나왔다. 러시아에 체류하는 주재원들과 유학생, 현지 교민들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공관으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우리나라가 러시아로부터 '비우호적인 국가'로 지정된 이상, 언제든지 우리 교민들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안보 환경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