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영화제 수상자 리스트
금곰상_ <터치 미 낫> 애디너 핀틸리(루마니아)
<터치 미 낫>으로 금곰상 수상한 애디너 핀틸리 감독.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다. 제68회 베를린국제영화제(이하 베를린영화제) 금곰상은 루마니아 출신의 여성 신예감독 애디너 핀틸리의 <터치 미 낫>에 돌아갔다. 독일 일간지 <디벨트>는 “이런 충격적인 선정은 30년 전에 한번 있었을 뿐”이라고 전했다. 이 작품은 평론가와 영화계 전문가들이 별점을 기고하는 <스크린 데일리>에서 4점 만점에 평점 1.5를 기록했다. 영화제에 잔뼈가 굵은 전문가들에게 낮은 평점을 받은 작품이 영화제 최고의 영예에 해당하는 상을 수상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터치 미 낫>은 베를린에서 공개된 뒤 낮은 별점을 받았으나 기존의 가치와 충돌하는 영화, 생각을 요하는 영화라는 평을 받았다. 독일 주간지 <슈피겔>은 <터치 미 낫>의 수상 결과에 대해 ‘대담한 금곰상 선정’이라 전했고, 독일 라디오 <도이체벨레>는 “미래지향적”이라고 평했다. 심사위원장 톰 티크베어는 “영화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금곰상 선정의 변을 밝혔다. <터치 미 낫>은 그해 최고의 데뷔작에 수여하는 ‘최우수 데뷔작품상’도 수상했다.
<터치 미 낫>은 기존의 영화문법에서 벗어난, 실험정신이 빛나는 영화다. 다큐멘터리와 픽션이 섞여 있고 등장인물의 행동에 대한 스토리와 전후 맥락은 희미하게 암시될 뿐 생략되었다. 감독은 “‘친밀함’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싶었다”는 말로 연출의도를 설명한다. <터치 미 낫>은 심리치료 연구 프로젝트 7년의 과정을 좇는 영화로, 대부분의 장면이 심리치료나 워크숍을 조명한다. 이곳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서로를 만지고 함께 친밀감에 대한 소감을 나눈다. 특히 중증 장애인 크리스티안이 눈길을 끈다. 괴상한 그의 모습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걸리지만 그의 푸른 눈, 풍성한 머리칼 등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신체 일부를 이야기할 때 관객은 그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또 다른 주인공 라우라는 타인과의 물리적 접촉을 극도로 싫어하는 자신의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 치료에 나선다. 감독은 피학적·가학적 섹스클럽에까지 카메라를 들이댄다. 워크숍 참가자들의 섹스와 애무에 관한 고백은 실제 상황으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이들의 마음을 드러내는 대화 내용을 좇다보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에 대한 기존 생각이 전복되는 순간이 온다. 불편하지만 논쟁의 여지가 많은 주제다. 한편 <터치 미 낫>의 금곰상 수상은 베를린영화제가 쏘아올린 혁신의 신호탄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는 평이 많다. 지난해 79명의 독일 영화인들이 베를린영화제의 혁신을 촉구하며 보낸 공개서한에 대한 일종의 답과 같은 수상 결과라는 것이다.
은곰상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얼굴>의 마우고시카 슈모프스카 감독.
베를린국제영화제에도 불어온 미투 운동의 바람
한편 올해의 베를린영화제에서는 전세계를 뜨겁게 달군 ‘미투(Me Too) 운동’이 화제였다. 집행위원장 디터 코슬릭은 개막 전부터 미투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입장을 취했지만 한국 감독 김기덕의 여배우 폭행 논란이 베를린영화제에 재를 뿌린 격이 되었다. 독일 보수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이 문화혁명(미투 운동)이 베를린영화제에 그늘을 드리운다. 결과적으로 베를린영화제의 상영작은 예전보다 덜 조명받고 있다”고 전했다. 그렇잖아도 독일 영화인들의 공개서한 사건으로 입지가 좁아진 코슬릭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해 더욱 궁지에 몰렸다. 그의 영화에 대해 코슬릭이 모호한 입장을 취하자 현지 언론들의 질타가 쏟아졌다. 독일 일간 <쥐트도이체 차이퉁>은 “만일 디터 코슬릭이 작품과 예술가 개인을 어떻게 분리해서 볼 것인가에 대한 논쟁을 불붙이기 위해 김기덕의 영화를 초청했다고 분명히 이야기했다면 지금같이 공격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썼다. 김기덕 감독 역시 기자회견에서 영화에 대한 질문보다 여배우 폭력 사태에 대한 질문을 더 많이 받았다. 여성을 타깃으로 한 폭력에 대한 반감 그리고 여성의 권리와 해방에 대한 지지의 물결은 <터치 미 낫>을 비롯한 올해의 수상 결과에 여실히 반영된 듯하다. 심사위원대상에 해당하는 은곰상 역시 폴란드 출신의 여성감독 마우고시카 슈모프스카(<얼굴>)에 돌아갔기 때문이다.
올해의 영화제는 개성 강하고 유머가 넘치며, 어떻게 전개될지 그 향방을 알 수 없는 영화들에 손을 들어줬다. <박물관>과 <상속녀> <얼굴>이 특히 그런 작품들이다. 각본상 수상작 <박물관>은 멕시코에서 1985년 마야문명 전시물이 도난당했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웅장한 화면과 음악이 할리우드영화를 연상시키지만 멕시코 특유의 유머와 스토리 전개 방식이 독특한 개성을 불어넣었다. 심사위원대상을 차지한 마우고시카 슈모프스카의 <얼굴>은 폴란드 가톨릭 교회 중심으로 돌아가는 어느 시골의 인간관계를 풍자와 유머를 통해 보여준다. 주인공 야체크는 헤비메탈 음악을 듣고, 여자친구와 함께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며 즐거움을 찾는 청년이다. 하지만 동네에 세울 세계 최대의 예수상 공사장에서 건설 노동자로 일하다 큰 사고를 당해 아름답던 얼굴이 흉측하게 변한다. 영화는 얼굴이 변한 다음 주인공이 겪게 되는 좌충우돌 사건을 가벼운 터치로 그린다. 슈모프스카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1989년부터 폴란드를 관통하는 물질과 돈에 대한 욕망, 타자에 대한 공포를 나타내는 은유”라고 설명했다.
여우주연상과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한 <상속녀>는 남미의 고질적 문제인 식민지 잔재와 쇠락한 상류층의 삶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는 파라과이 수도 아순시온에 사는 파산 위기의 부르주아 레즈비언의 삶을 은밀한 시선으로 따라간다. 칠라는 소심하고 소극적인 여성이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과 가옥에서 살지만 그녀는 거의 파산 지경이다. 믿고 의지하던 파트너 치키타가 빚 때문에 감옥에 가면서 칠라의 삶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우연히 스스로를 가둔 틀을 벗어날 기회를 갖게 된다고 할까. 여성해방의 시각과 파라과이의 모순된 계층 문제를 다룬 영화. <스크린 데일리>는 이미 주인공을 연기한 아나 브룬의 여우주연상을 점쳤다. 독일 일간 <타츠>는 “인물의 행동을 낡은 사회질서와 연계해 일관성 있게 잘 묘사했다”고 평했다.
<상속녀>
현실과 밀접한 영화들
경쟁부문에 초청된 영화 중에는 인간 내면의 고통을 치료하는 대화와 심리치료를 중심에 둔 세편의 작품이 눈에 띈다. 앞서 소개한 <터치 미 낫>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안토니 바종이 열연한 <프레이어>, 구스 반 산트 감독의 <돈 워리, 히 원트 겟 파 온 풋>이다. 프랑스 출신 세드릭 칸 감독의 <프레이어>는 알프스 산자락에 있는 마약중독자 치료 가톨릭공동체를 조명한다. 22살 토마가 새로운 애착 관계를 형성하며 변화하는 모습이 놀랍다. 주인공은 노동, 기도, 형제애를 통해 자신의 내면과 만난다. 현대 프랑스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엄격한 공동체에서 동료를 돌보는 헌신적인 모습, 절망과 고통에 빠져 있던 주인공 토마가 스스로를 구원하고 사랑을 찾아가는 모습이 설득력 있게 전달된다. 주인공 토마로 분한 안토니 바종은 “원래 기도하는 방법조차 몰랐지만 영화를 찍으면서 진짜 기도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세드릭 칸 감독은 “마약은 현대사회의 모든 중독에 관한 상징이자 은유”라며 “중독된 상태에서는 애착 관계를 형성할 수 없다”고 말했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신작은 알코올중독자였던 주인공 칼라한이 알코올중독자 그룹에서 서로의 내밀한 마음을 나누며 치유하는 과정을 그렸다. 그런 치유는 타인의 지지와 관심이 바탕이 되어야 하고, 내면의 상처와 직면하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는 기적이기도 하다. 마치 퍼즐을 맞추듯 사건이 일어난 시간의 순서를 재배열하는 묘미가 있지만 아쉽게도 이 작품은 할리우드 클리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번 영화제의 화제작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작품은 <U-July 22>다. 2011년 노르웨이 청소년 캠프에서 일어난 브레이비크 테러 악몽을 스크린에 재현한 영화다. <스크린 데일리>에서 별점 4개를 받은 이 작품은 실제 상황 같은 급박한 연출이 돋보인다. 에리크 포페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과 우리 모두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 영화는 사전에 유가족들에게 보여주고 동의를 얻는 힘든 과정을 거쳤다. 유가족을 고려해 영화 속 인물과 상황은 픽션으로 만들었다.
예술적 감성이 살아 있는 영화들도 호평받았다. 알렉세이 게르만 주니어의 <도플라토프>에선 1970년대 초 소련을 배경으로 문학, 예술계 모임의 낭만을 엿볼 수 있다. 감독은 망명을 하게 되기까지 천재 작가 도플 라토프가 겪는 고뇌의 길을 따라간다. <할리우드 리포터>는 “당시 소련의 압박과 수많은 모순에도 불구하고 고유하며 대체할 수 없는 예술 창작의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는 점을 관객에게 이해시키는 영화”라고 극찬했다. 또한 현지 언론에 가장 많은 별점을 받았던 필리핀 감독 라브 디아즈의 <악마의 시절>도 실존 예술가를 조명하는 영화다. 필리핀 마르코 독재정권 시절 시인 후고 하니웨이가 겪었던 폭력과 야만을 영화는 흑백 스크린에 담았다. 대사는 단순한 멜로디의 노래로만 이뤄져 있다.
<U-July 22>
정치는 행간에 녹아 있을 뿐
경쟁부문 네편의 독일영화 중 수상 후보로 물망에 올랐던 작품은 <트랜지트>와 <통로에서>다. 특히 <트랜지트>는 독일의 유명 작가 안나 제거스의 1944년 작품을 현대 시점을 배경으로 한 영화로 옮겨와 화제가 됐다. 베를린파에 속하는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은 나치 시절 유럽을 떠나려는 독일인들이 마르세유에서 비자를 기다리며 불안에 시달리는 내용을 현대적인 관점으로 재구성했다. <통로에서>는 동독지역 작은 도시에 있는 대형 슈퍼마켓에서 포클레인을 운전하며 일하는 직원들의 세계를 다룬 영화다. 독일 일간 <디벨트>는 “독일영화가 앞으로 성장하게 될 거라는 믿음을 주는 영화제였다. 이렇게 다양하고 힘 있는 독일영화들이 영화제에 나오게 된 것이 그 증거”라고 환호했다. 정치적인 영화들이 매년 화제가 되곤 하는 베를린이지만 올해 정치적인 이슈를 선보인 영화는 난민 문제를 다룬 <트랜지트>가 유일했다. ‘정치영화’의 풀을 확장하자면 극우 문제를 스치듯 다룬 웨스 앤더슨의 <개들의 섬>이나 타자에 대한 공포를 우화적으로 다룬 폴란드 영화 <얼굴> 정도가 있을 것이다. 다른 작품들은 정치를 전면에 표방하지는 않았다. 정치는 행간에 녹아 있었다.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내면으로 침잠하여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성장영화, 여성간의 갈등과 연대, 성장을 다루는 여성주의 영화들 (<상속녀> <나의 딸>), 실험정신으로 도전하는 예술영화(<터치 미 낫> <악마의 시절> <마이 브러더 이스 이디엇> <트랜지트>) 등이 올해 영화제의 주목을 받았다. 저물어가는 디터 코슬릭의 시대는 이처럼 새로운 변화를 기약하고 있다. 변화 없는 안정보다 파격을 선택한 베를린영화제의 미래는 어디로 향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