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2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욥의 인내 》
욥 6:11~13
〈 총각 집사 〉
제가 고등학교 입학직전, 아버님께서 가족회의를 소집하셨습니다.
“너희 어머니가 교회 집회에 참석하고 오랫동안 앓던 병이 나으셨다.”
“그러니 지금부터 우리 집은 기독교를 믿기로 한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아버님의 그 말씀에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어머님이 고생하신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부터 주일이 되면 온 가족이 성경을 들고 교회에 나갔습니다.
저는 마침 입학한 고등학교가 ‘전주영생고등학교’ 미션스쿨입니다.
군에서 제대하고 취업한 첫 근무지에서 교회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시골 면 단위 교회입니다.
“목사님, 고등학교 때부터 성가대 베이스를 했습니다. 군인교회에서도 성가대를 했습니다.”
“저를 성가대에 넣어 주세요!”
목사님께서 싱긋싱긋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첫 주일 예배에 갔습니다.
시골 교회라 성가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성가대에 넣어달라고 했던 겁니다.
그 이후로 목사님께서 저에게 “‘황 ‘선생님’이 우리 교회 성가대를 만들어보시지요!”
권유가 시작되었습니다. 음악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단지 베이스 파트 경력이 전부입니다.
몇 차례 권유를 듣다가 결단했습니다. ‘성가대를 만들어보자!’
그때까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성가대 지휘자가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성가대 지휘자가 된 저에게 ‘집사’ 직분을 주셨습니다. ‘총각 집사’입니다.
결혼했습니다. 고향처녀입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후배입니다.
믿음 좋은 집안 출신입니다. 그렇게 만나 가정을 꾸렸습니다.
교회에서 성가대 봉사는 기본이고, 청년회장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저희 가정에 딸, 아들, 두 자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이들 모두 청각장애인입니다.
☞ ‘하나님! 이건 아니지않습니까?’ 저는 미련 없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 아내 혼자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것까지 말리지는 않았습니다.
〈 하나님께 대들어봤자 나만 손해 〉
그렇게 사는 동안 세월은 정주행했습니다.
제가 힘들다고 빨리 흐르거나, 붙잡는다고 느리게 흐르는 법 없는 것이 세월입니다.
아이들과 의사소통이 원활치 못한 가운데, 아이들에게 사춘기가 왔습니다.
아이들이 저에게 대들기 시작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한편 ‘아차!’싶었습니다.
소통이 어렵다고 부모와 자녀로서 기본적인 훈육까지 포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했을까?’를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 제가 어떻게 해야했을까요?
아이들이 장애인이라고 하나님께 등졌던 행태가 잘못이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께 의지하고 매달려야 했었다는 것을 절감했지만 늦었습니다.
늦었다고 깨달은 순간이, 한편으로는 가장 빠른 때입니다.
‘하나님께 대들어봤자, 나만 손해’라는 진리를 깨닫고 늦었지만 교회로 되돌아왔습니다.
되돌아왔다고 고난이 끝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만하고, 게을렀던 대가는 오롯이 제가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았습니다.
감당해나가고 있는 중, 둘째인 아들이 스물일곱에 스스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그때 언뜻, ‘한번 더 하나님께 치받고 하나님을 떠나?’ 하는 유혹이 잠깐 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들어봤자 나만 손해’라는 깨우침이 더이상 시행착오를 막아주었습니다.
저에게 ‘욥기’는 남다른 책입니다.
물론 제가 당한 고난을 ‘욥의 고난’에 견주는 일이 터무니없음을 잘 압니다.
☞ 성경에 나오는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큰 고난을 겪은 사람이 ‘욥’입니다.
당대 최고의 재산과 10남매의 자녀를 하루 만에 모두 잃는 비극을 당합니다.
이때 욥은 어떻게 반응했는지, 욥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욥 1:21~22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욥의 믿음이 놀랍습니다.
☞ 욥의 이 믿음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욥도 사람입니다.
〈 이어지는 욥의 고난 〉
전 재산, 모든 자녀, 다 잃었습니다. 욥에게 고난은 여기까지 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건강까지 잃었습니다. 온몸에 상처가 나 진물이 줄줄 흐릅니다.
하도 고통스러우니, 깨어진 기와 조각으로 ‘득득’ 긁어댑니다. 피가 흐릅니다.
그런 남편에게 아내가 막말을 합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라!”(욥 2:9)
소식을 듣고 달려온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처음 일 주일은, 욥이 당한 고탄을 멍하니 바라만 봅니다.
사실은 ‘바라봐 주는 것’으로 위로를 할 수 있을 뿐인 상황입니다.
이 상황에서 누가 먼저 입을 떼었을까요?
욥이 먼저 입을 뗍니다. 첫 마디가 무엇일까요?
욥 3:1~4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2 욥이 입을 열어 이르되 3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4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시작하여 욥기 3장은 욥이 자신의 출생을 한탄하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그런 고난 앞에서 이렇게 탄식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11절)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욥을 낳아주신 부모님이 들었더라면 불효막심한 언사입니다.
☞ 기독교에서 욥을 말할 때, 욥을 의인으로 말하는 데에 치중합니다.
구약의 3대 의인으로 추앙합니다.
노아, 다니엘과 함께 욥을 구약의 3대 의인이라고 추켜 올립니다.
틀리지 않습니다. 이들 3인이 의인인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의인임을 강조하기에 급급하다보면, 욥의 인간 됨을 놓칠 수 있습니다.
욥은 자신이 당한 고난 앞에서 한없이 탄식하고 자기의 탄생을 저주합니다.
☞ 나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 하나님께 답을 구하는 욥 〉
욥은 자기가 직면한 고난 앞에서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저주와 탄식을 쏟아냈습니다.
욥의 그러한 태도를 본 세 친구, 처음 7일은 침묵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태어나지 않았어야 한다는 욥의 말을 듣고 친구들이 입을 뗍니다.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욥과 세 친구와의 대화는 어떻게 흘러갑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네가 착하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 아니냐?”
“너에게는 우리가 모르는 범죄가 있는 것 같다.”
욥과 세 친구 간 대화는 이런 프레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친구들이 욥을 정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욥은 절망 중 또 다시 절망에 빠집니다.
욥이 부르짖어야 할 대상이 누구입니까? ~ 하나님입니다.
욥은 하나님께 항변을 합니다. ~ “하나님! 이게 뭡니까?”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 대답해 주십니다.
욥은 친구와의 대화에서는 밀리지 않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무릎을 꿇습니다.
우리는 간혹 어떤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사람들과 토론을 합니다.
사람들과의 토론에서 답이 나올까요?
사람들과의 토론에서는 결코 답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욥기는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경험, 자기의 생각을 주장합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다릅니다.
☞ 진리의 답은 하나님의 입을 통하여 나옵니다.
〈 욥기의 대단원 〉
욥은 처절한 상황에서, 끝내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욥 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기는 욥이 당한 고난에서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막을 내립니다.
〈 욥의 고난 vs 욥의 인내 〉
오늘날 우리는 욥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습니까?
“욥은 고난의 사람입니까, 인내의 사람인가?”
대부분 “고난의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큰 고난을 당한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욥은 한 인간이 평생에 당할 수 있는 고난의 총합을 모두 경험한 인물입니다.
욥을 고난의 사람으로 기억하는 것,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합니다.
욥은 고난의 사람이지만, 중요한 것은 욥이 “인내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욥기 6장 11절로 13절까지를 오늘 본문으로 삼은 이유입니다.
(11~13절) “내가 무슨 기력이 있기에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기에 그저 참겠느냐
12 나의 기력이 어찌 돌의 기력이겠느냐 나의 살이 어찌 놋쇠겠느냐 13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나의 능력이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
이 대목에서 욥은 자신이 더 이상 참아낼 힘이 없음으로 토로합니다.
자기에게 힘이 없다는 것, 견딜만한 기력이 없다는 것, 아무 능력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지금 욥에게 힘이 필요한 이유, 기력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내하기 위해서입니다. 욥은 인내할 힘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내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감내하기 어려운 상황에 닥치면 인내하기 위한 힘도 함께 사라집니다.
이때 힘을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 지난 주일에 설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라!”(살후 3:5)
사람의 힘으로는 한계에 부딪합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고난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인내하며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인내하는 일, 그것이 ‘그리스도의 인내’에 드는 것입니다.
구약의 3대 의인, 노아, 욥, 다니엘, 하는 행동이 우리와 달라서 의인이 아닙니다.
인내해야 할 때, 자기의 한계를 고백하고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인내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욥을 기억할 때, “인내의 사람 욥”으로 기억해야합니다.
성경에는 꼭 기억해야 할 주제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빠뜨리면 안 되는 것 중의 하나가 “욥의 인내”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저의 간증을 잠깐 했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고난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고난이 있다고 해서 인생이 가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이 있기에 인생이 빛이 날 수 있습니다.
큰 고난, 작은 고난, 고난을 만나거든, 주님께 인내할 힘을 청하십시오!
주님, 저는 이 고난 감당할 수 없습니다. 차마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힘 주시면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인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해 주시면서, 인내하도록 이끌어주옵소서!
“하나님, 이게 뭡니까?” 하고 돌아서면 나만 손해입니다.
“하나님이 이 고난도 주셨으니, 인내할 힘도 주옵소서!”
이렇게 할 때 의인이 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