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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7),충성(갈 5:22,23,마 25:14-30)
오늘은 성령의 일곱번째 열매인 충성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충성이라는 말은 한자어로 충성 충(忠)과 정성 성(誠)으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정성을 다해 충성을 다한다는 의미입니다. 헬라어 ‘피스티스’인데 이 말의 뜻은 ‘믿음, 신실, 진실, 성실, 충실’ 등입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서 주로 ‘믿음’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에서는 ‘믿음’으로 번역하지 않고 ‘충성’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주로 어느 때 충성으로 번역했는가 살펴보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충성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에서 충성된 종을 말할 때 믿음의 종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충성된 종”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으로 번역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충성스러운 자로 소개하였습니다. (고전 7:25)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이러한 때 믿음의 사람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충성스러운 자로 번역했습니다. 고전 4:2에서도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 때도 믿음이나 신실이 아니라 충성으로 번역했습니다.
딤후 2:2에서도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충성의 열매는 어떤 경우에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주어진 일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행위의 열매입니다. 어떤 환란과 역경이 다가와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변절하거나 배신하지 않고 맡겨진 일을 충실하게 시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충성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1. 이 모든 것의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십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종들을 불러 각각 그 재능에 따라 어떤 종에게는 다섯달란트를 어떤 종에게 두달란트를, 어떤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겨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많이 가졌든 적게 가졌든 다 주인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들은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무엇보다 .주인의 뜻을 잘 알아야 합니다.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있어서도 변함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갈 때가 많고, 심지어 믿음의 사람이라고 자부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럼에도불구하고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2:13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여기서 “미쁨”이라는 단어는 “신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우리는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그분은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그분은 자기를 부인할 수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도 가장 정확한 표현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내 편의 어떤 선한 것 때문이라면 나는 완전히 망할 수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내가 신실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이 은혜때문에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가장 완전한 모습으로 드러내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신실함은 결정적으로 십자가에서 나타납니다. (빌 2: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충성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드러내신 것이 예수님의 신실함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완전하게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속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신실하심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2:17-18은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죄의 용서와 질병에서의 치유하심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신실하심 속에서 완전하게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신실하신 예수님을 우리 중심에 모셨습니다. 우리 역시 신실하심을 드러내야 합니다.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믿음은 바로 신실하심입니다. 믿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5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닮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예수님의 마음이란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신실함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완전하게 드러내신 것처럼 우리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놓치않고 끝까지 지키는 것입니다.
인도의 캘커타에서 죽어가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사역했던 마더 테레사는 “완전한 순종”(total surrender)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완전한 순종은 예수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며, 예수님이 당신에게 묻지 않고 당신을 마음껏 쓰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마음껏 쓰실 수 있습니까? 마치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것처럼 나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무엇이든 드리겠습니다.
나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내 자존심조차도 다 내려 놓겠습니다. 여기에 바로 십자가의 도가 있는 것입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 앞에서 변절되거나 배신하지 않고 나자신을 다 내어놓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입니다.
그런데 달란트 비유를 보십시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왜 충성된 종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습니까? 왜 충성의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까? 마 25:24절,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이 사람은 주인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알고 있었습니까? 그는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24)"라고 말씀합니다. 굳은 사람이라는 말은 완고하고 거칠다는 말입니다.심지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악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지 못하고 오해하고 있는 한 달란트 맡은 종에게 26절,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악한 종이라고 말씀합니다.
"악하다"라는 말은 무가치한 악독하다는 뜻입니다. 주인의 뜻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자기 안일에만 심취해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착하다"는 말은 올바르고 정직하다는 말로 주인이 뜻대로 충실히 이행했다는 말입니다. 우리 중심이 신실하신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질 때 성령의 열매인 충성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됩니다. 우리가 충성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순종하는 것이 바로 지혜요 충성인 것입니다. 충성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맡은 일이 무엇이든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길 때 그 종들의 재능에 맞추어 맡겼습니다. 15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그러니까 그 사람의 그릇만큼 적당히 맡겼다는 의미입니다. 영어성경에 보니 according to his ability(그의 능력에 따라)라고 적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에 해당하는 돈을,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의 돈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의 돈을 맡기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평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매우 불공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어떤 사람에게는 더 많이 주는가? 왜 어떤 사람은 잘 살고 나는 못 사는가? 왜 저 사람은 키가 크고 나는 작은가? 왜 저 사람은 나면서부터 잘 생겼고 나는 못생겼는가?
왜 저 사람은 가문이 좋고 나는 사생아로 태어났는가?"라고 의문을 품으며 하나님을 불공평한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든 것이 공장에서 찍어 낸 공산품처럼 다 똑같다면 작품이 아닙니다. 예술가의 작품은 다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엡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그의 만드신 바라는 말이 새번역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세계 80억의 인구가 살고 있지만 지문이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얼굴이 비슷한 사람이 있지만 가까이서 보면 다 다릅니다. 다르다는 것은 차별이 아닙니다. 구별입니다. 하나님의 작품이기때문에 다 다른 것입니다. 피아노 건반이 다르면 다른 소리를 내듯 다 다르지만 하나의 화음을 소리를 내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성가대의 찬양이 화음을 맞추니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섭리였던 것입니다. 주인은 그 사람의 재능에 따라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균형과 조화를 시기심과 이기심과 미움으로 바꾼 것이 사탄의 역사였습니다.
마귀가 들어와서 비교하게 만들고 열등감을 갖게 만들고 우월감을 갖게 만듬으로써 하나님의 조화와 아름다움을 추한 것과 질투심과 경쟁으로 바꾸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맡겨주신 달란트는 많으나 적으나 다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입니다. 많다고 교만한 필요가 없습니다. 많으면 그만큼 책임이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맡았든 그 맡겨진 달란트에 얼마나 충실하게 살았느냐가 문제입니다. 결국 맡은 자가 구할 것은 더 많은 물질이나 환경이 아니라 바로 충성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눅 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작은 일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큰 일처럼 소중하게 다루는 신실한 사람이 충성스러운 사람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소인은 크고 특별한 것에만 충성하고, 대인은 평범한 것에도 충성하고, 성자는 작은 것에 크게 충성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한 달란트는 6천데나리온에 해당하고 1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인건비입니다.
이 돈은 한 사람이 20년을 벌어야 모아지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천지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께는 작은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큰 것입니다. 하나님은 충성된 종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0-21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다고 말씀하시면서 네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칭찬해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서 적은 일은 바로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달란트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6-17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바로 가서 주인의 뜻대로 장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면 바로 가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두 달란트를 남겼든 다섯 달란트를 남겼던 똑같이 "작은 일에 충성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작은 일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는 대통령 선거 유세기간 중에도 매주일이면 꼭 자기 본 교회에 가서 교회학교를 섬겼답니다. 그렇게 큰 교회도 아니었습니다. 23년 동안 20여 명의 교회학교 학생들을 가르쳤답니다.
대통령에서 퇴임하고 나서도 자기 고향 조지아의 옛 교회로 돌아가 교회학교를 섬기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 부인 로잘린 여사와 함께 한 달에 한 번씩 교회당을 청소했고 그 모습을 보려고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기도 했답니다.
우리모두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과 직분이 있습니다. 그것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습니다. 그 일이 크든 작든 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 여러분이 지금 갖고 있는 직분, 집사, 권사,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나라의 일꾼입니다. 지금 하나님앞에 선다면 여러분의 직분에 부끄러움이 없이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까? 무엇보다 하나님앞에 충성의 열매를 맺는 신실한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끝까지 변함이 없이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약속을 이루십니다. 충성은 그 약속을 믿고 끝까지 변함이 없어야 약속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약속을 분명하게 확신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앞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가데스바네아라는 곳에서 커다란 장벽에 부딪쳤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정탐꾼들의 말에 의하면 가나안 땅을 도저히 우리가 들어갈 수 없는 철옹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거인들이고 우리는 그들이 보기에 메뚜기와 같은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스라엘백성들은 민수기 14장 1절이하를 보면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그들은 절망했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절망하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야단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저 자기의 힘과 자기의 생각에, 자기의 판단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불신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불평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이들을 다 멸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니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수 없는 불신앙의 사람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믿음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민수기 14:6-9,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상황이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바로 정금같은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충성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사람은 환경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래서 제가 늘 선배목사님들의 가르침을 받아 중간결산을 하지 말라는 말을 했습니다. 중간에 성공했다고 다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중간에 실패했다고 다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을 보아야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가 전부입니까? 끝입니까? 아닙니다. 과정입니다. 과정이 아무리 힘들어도 과정은 과정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끝을 보지 못하고 과정을 전부로 보니까 어려움이 다가오고 위기를 만나면, 자신 맘에 들지 않는 일이 일어나면 충성하지 못하고 변질되고 배신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마지막 하나님 앞에 평가받을 날을 바라보며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질병에 걸리고 수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위선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돈에 욕심이 있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글은 잘 쓰는데 설교를 못한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습니다. 한 입으로 두말을 한다는 비판도 들었습니다. 수많은 환란을 당하였습니다.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돌로 맞았습니다. 배가 세번 파선하여 죽을 고비를 견뎌야 했고 굶주리고 헛벗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께서 맡겨준 일과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바울사도는 (딤후 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재판장 앞에 설 그날을 바라본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질되거나 배신자의 자리에 서지 않은 것입니다.
초기 서머나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갑이 순교할 때의 일입니다. 그는 자기를 체포하러온 병졸들을 정성껏 대접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준 뒤 화형대 앞에 섰습니다. 폴리갑이 화형을 당하기 전 로마의 호민관이 그에게 물었답니다. "어떠냐? 이제라도 네가 섬기는 예수를 모른다고 한 번만 부인하면 너는 살아날 수 있다." 그때 폴리갑이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그러나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폴리갑은 "나는 86년동안 그리스도를 섬겨왔고 주님은 나를 한번도 모른다고 하시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왕이시요, 나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부인하겠는가?" 하고 화형의 장작더미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화형을 집행하는 형리에게 외칩니다. "그대들은 한 시간 가량 사르고 없어질 불로 나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하여 장차 올 심판의 불을 모르는가? 왜 이리 지체하고 있느냐 어서 장작더미에 불을 붙여라“
그는 아주 평화롭게 찬양을 불렀으며, 불타고 있는 장작더미 위에서는 천사들이 그에게 화답하였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영원한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습니까? 마지막 하나님앞에 서는 날, 결산할 것입니다. 어떠한 유혹히 있어도 흔들리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의 약속을 붙잡으십시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충성이란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1)우리가 신실하신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2)맡은 일이 어떠한 일이든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3)끝까지 변함이 없이 충성해야 합니다. 이 충성은 오직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이런 충성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이와같이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동안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을 잘 알고 순종하다가, 언젠가 주님 앞에 서는 그날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듣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