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전 황욱(黃旭 1898~1993), 1990년 작, 국립전주박물관.
* 성균관유도회 전북회장 유당(由堂) 황병근 선생은 지난 1999년부터 선친(先親)인 석전(石田) 황욱(黃旭 1898~1993) 선생의 유작(遺作)과 유품(遺品), 그리고 본인이 수집한 문화재 등 5000여점을 국립전주박물관에 기증하였고, 이에 박물관 측은 곧바로 독립적인 ‘석전 기념실’을
개설(開設)하여 전시 운영하여 오고 있다.
전라북도를 대표하고 우리나나 서예(書藝) 계에서 큰 족적을 남긴 거목으로 통하는 석전 선생은 한국의 근현대기 격동(激動)의 시절을 보내며 그 시대만큼이나 격정적(激情的)인 삶을 살았다. 그는 노년(老年)의 신체적 한계를 굳은 의지로 극복하고 자기만의 새로운 경지를 이룬
투혼(鬪魂)의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다.
석전 황욱 선생의 가문은 15대를 내려온 문한세가(文翰世家)로 1898년 영조 때의 실학자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의 종가(宗家) 7대손으로,
전북 고창(高敞)군 성내(城內)면 조동리 만석꾼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황효익의 5남3녀 중 2남이었다.
6세 때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시작하며 서예에 입문하였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유복(有福)하였으나 시대적 배경은 녹녹치 않았다.
일제강점기를 맞아 1914년 중앙고보에 입학했으나 부친의 만류로 학업을 중단하고 1920년
23세의 청년 황욱은 금강산 돈도암(頓道庵)에 들어가 망국(亡國)의 한을 달래며 서도(書道)에 전념(專念), 중국 서예(書藝) 대가(大家) 왕희지(王羲之)와 조맹부(趙孟頫)의 글씨를 공부하였다.
1930년 33세에는 고향인 고창에 머무르며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인 신위[申緯1769(영조
45)∼1845(헌종 11]를 사숙했는데, 이것은 우리 역사와 산천이 낳은 서예야말로 진정한 한국 선비가 지향(指向)해야 할 점이라는 석전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선비로서는 드물게 문예(文藝)와 기예(技藝)에도 능했는데 율계회를 꾸리고 정악(正樂)과
가야금 등을 연주할 정도로 예술적인 능력이 탁월(卓越)하였고, 평소 활쏘기도 즐겨할 정도로 활동력이 강한 면모도 보여줬다.
3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음에도 평생을 장남처럼 부모님을 모셔왔던 황병근씨가 이번에 밝힌 선친 석전선생의 일화(逸話)를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6.25 동란 후 좌익성향의 두 아들 중 큰아들 황병선이 빨치산 최후의 조직인 전주시당 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온갖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집행만을 기다리고 있었다한다. 석전선생은 오직 큰 자식 하나 살려야 되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가산을 헐값으로 처분하고 각계에 구명운동을 펼쳤다. 이승만 대통령께 진정서와 탄원서를 수차례 보내어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석전의 명필(名筆) 명문(名文)의 탄원서에 감동되어 “이 탄원서가 사형수의 아비가 쓴 글씨란 말이냐?”라고 비서들에게 하문하심에 “그렇습니다.”라고 답하자, “이렇게 깨끗한 선비의 자식이라면 목숨을 살려줘야겠다.”라고 하며 대구
형무소에서 사형집행만 기다리고 있던 큰 아들 황병선의 사형결재서류를 반송케 하여 무기형으로 감형하는 재결재를 하였다 한다.
대통령의 재결재사건은 일찍이 없었던 일로, 투철한 선비정신에서 비롯된 상호 서도(書道)의 높은 경지에서의 의기투합(意氣投合)으로 도출된 감동적인 합작품이라 한다.
한국전쟁과 그 이념의 틈바구니에서 두 아들과 생이별을 하는 아픔을 겪었고, 가세(家勢)는
기울었다. 석전은 이러한 아픔을 지필묵(紙筆墨)과 시조(時調),
가야금으로 달랬다. 환갑 이후에는 수전증(手顫症)이 찾아와 손바닥으로 붓을 쥐고 글씨를
쓰는 악필(握筆)로 전환(轉換)하였다.
악필과 함께 하나의 필획(筆劃)을 쓸 때 세 번을 꺾는 듯이 쓰는 삼과절법(三過折法)을 폭넓게 활용하여 금석기(金石氣)가 돋보이는 황욱의 서예가 되었다. 87세 이후에는 수전증이 심하여 오른손 악필마저 어렵게 되자 왼손으로 바꾸어 이를 극복하였다.
악필로의 전환은 석전의 예술 생명을 연장(延長)했음은 물론이고, 힘차고 활달(豁達)한 독특한 서풍(書風)을 보여 주었다. 이는 “하직하는 날까지 내가 지닌 가능성을 불태우고 가겠다.”는 석전의 신념(信念)의 결과였다.
‘사람과 글씨는 더불어 나이 든다[人書俱老].’는 말처럼 석전은 90세 이후에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자기극복과 정진으로 이루어낸 석전의 글씨에는 자신만의 개성적인 필의
(筆意)가 담겨있다. 이것은 옛 서풍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탐구 끝에 얻어낸 것이다.
석전은 삶의 애환 속에서 틈틈이 독서와 거문고, 활쏘기를 하며 마음의 수양을 쌓았다.
그의 글씨는 고유한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유어예(游於藝)에서 생겨난 것이다.
호는 석전(石田)·남고산인(南固山人)·칠봉거사(七峰居士)·백련산인(白蓮山人)·금강산인(金剛山人)·몽유금강산인(夢遊金剛山人)·물기헌 주인(勿欺軒 主人) 등이다.
석전의 서맥(書脈)은 1993년 대한민국서예대전 대상(大賞) 수상자이며 손자인 성재(醒齋)
황방연(黃邦衍 1954~ )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칠언시는 중국 북송(北宋)사람 정호(程顥)가 지은 추일우성[秋日偶成=가을날에 우연히
짓다]이라는 시로,
閑來無事不從容(한래무사부종용)=한가롭자 일마다 조용하지 아니함이 없고
睡覺東窓日已紅(수각동창일이홍)=잠 깨자 동창에 해가 이미 붉었구나.
萬物靜觀皆自得(만물정관개자득)=만물을 조용히 바라보면 모두 스스로 득의함이요
四時佳興輿人同(사시가흥여인동)=사계절의 흥취도 인간과 더불어 같은 것이라
道通天地有形外(도통천지유형외)=도는 천지의 형체 가진 것 밖으로 통하고
思入風雲變態中(사입풍운변태중)=생각은 풍운의 변화 속에서 얻어진다.
富貴不淫貧賤樂(부귀불음빈천락)=부귀에 빠지지 않고 빈천을 즐겨하니
男兒到此是豪雄(남아도차시호웅)=남아가 여기에 이르면 영웅호걸이라.
는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