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고산성
오 사감은 "식비까지 너희들이 간섭하는 것은 옳지 못하니 그만 두라.
매달 식비를 일제히 내지 않으니 식사가 나빠진다."는 등의 말을 하셨다.
매달 식비를 기일 내에 내도 식사가 좋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심 형이 개선하였던 것이다.
사감의 부정을 기숙사생들이 눈치챘고 일부 선생님들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이 결국 죄 없는 학생들을 퇴사로 몰고 간 것 같다.
졸업생 환송회 때 술을 마셨다는 구실은 명분이 서지 않았다.
나는 조카(양원)와 함께 기숙사를 나와야 했다.
다행히 생물반에서 함께 활동하던 정병영(鄭秉英) 군이 나의 사정을 듣고 자기의 자취방에
우리 숙질을 "함께 있자."라고 제의하는 것이었다. 나는 솔직히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 자취방은 학교에서 약 3킬로미터 거리의 기린봉 기슭의 산비탈에 있었다.
그 집은 영어 담당의 이종택 선생님 댁이었다.
학교에서 돌아가면 등에서 식은땀이 나와 옷이 흠뻑 젖었다.
한 달 이상을 자취하고 먼길을 걸어다녔더니 몸이 쇠약해질 대로 약해졌다.
이때의 고생은 일생동안 잊혀지지 않는다.
이러한 비참한 나의 모습을 이종택 선생님이 동정어린 눈으로 보신 것 같다.
어느 때인가 담임인 황호면 선생이 준호 너 고생한다면서,
이종택 선생님한테서 이야기를 들었다. 라고 말씀하였다.
뒤에 들으니 심형이 매일같이 교감과 사감 선생들을 찾아다니며 퇴사생들의 입사 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10월 초순에 기숙사에 입사해도 좋다는 지시가 내렸다.
입사해 보니 김 모라는 어용사장(御用舍長)이 임명되어 학생자치회는 없어지고
식사 사정은 사감 본위로 운영되어 전보다 후퇴했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180도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오직 공부에만 열중하기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고난의 한 해였는데도 묻혀서 공부한 덕분에 나에게는 우등상이 안겨졌다.
1년 뒤에 선배들이 졸업하여 어용사장의 얼굴을 보지 않아 좋았고,
심종학 형이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에 합격하여 당당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주어 마음 속에 승리를 외쳤다.
학우들의 끈끈한 정 /
49년 9월 1일부터 기숙사에서 최고 학년이 되어 기숙사 학생자치회의 역원이 되어야할 차례였다.
학생자치회는 선거에 의해서 사장을 뽑고 사장이 각 부장을 임명하는 것이 전례였다.
그런데 9월의 어느 날 밤 회의 소집의 통문이 돌았다.
동급생인 김영군(권투선수였고 졸업 후 스님이 되었다가 작고했음) 군이 앞에 나와내가 사장이
되고 모모가 부장이 되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방적인 선언이다.
부당함을 직감한 나는 "언제 누가 선거를 해서 네가 사장이 되겠다고 선언하는가."라고 공박하였다.
그러자 그는 변명할 생각도 안하고 쏜살같이 나에게 달려와서 따귀를 때리는 것이 아닌가.
힘으로는 내가 김 군을 당할 수 없지만 이론적으로는 나의 발언이 옳았음인지 수긍하던
하급생들이 뜯어말려서 더 이상의 불상사는 없었다.
그 후 김 군과는 화해를 하고 깊은 우정을 유지하였다.
기숙사에 유숙하는 동안 초기에는 박지용과 유기선(이상 47년 7월 졸업),
양동철, 안신모, 김상기, 이영복(이상 48년 7월 졸업),
심종학, 백영기, 장주열, 정우봉(이상 49년 6월 졸업) 선배와 같은 방에서 생활하거나 교우하였고,
동급생으로는 김영규(영홍), 김완수 안두영, 장중식, 최인풍, 정종환, 진웅기, 구윤섭,
후배로는 성규철, 박혁, 임관순, 임완순, 신준식 엄익록, 장선하, 김두환, 조용순, 조당래, 강용구,
황성기, 이정팔, 장진성, 공창수, 김영무, 강영록, 이장옥과 교본이 두터웠다.
나의 졸업을 앞두고 기숙사 후배들은 조촐한 송별회를 해주었다.
2년 전에 졸업생 송별회로 물의를 일으켰지만 이것은 기숙사의 전통으로서 1년 중의 중요한 행사였다.
내가 실장으로 있던 제11실의 후배들은「추억의 새봄」이라고 표제를 쓴 사인첩을 써 주었다.
나와 고락을 함께 한 후배들의 끈끈한 정이 잘 나타나 있어 그 내용을 적어본다.
「불평 많은 기숙사 생활도 이제는 끝!! 진리는 된장국에도 있지요(황성기).」
「믿음직하던 형님의 앞길을 사내에서 진심으로 축복하오. 언제나 웃는 얼굴 다시 볼 수 있을까요(이장옥).」
「글렀다 낙심 말고 성공하여 뽐내소(신준식).」
「근면하신 생물학자. 장래의 국립서울박물관장 만세(이정팔).」
「어서어서 노력하여 대한에서 1위 가는 생물학박사 되기를 ...(장현수).」
「안녕히 가오. 생물학계의 주인공이시어. 이 자리에서 축복하나이다(강영록).」
「생물학계의 선도자이시어! 나는 원하노라.
쌀 한 개에 하루 양식하기를(김영무).」「A rolling stone has no moss! (강용구․Skangku).」
전주 향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