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23일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34-40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주님은 유덕(有德)하신 임
정석가(鄭石歌)
작자미상
삭삭기 셰몰애 별헤 나난난 삭삭기 셰몰애 별헤 나난난 구은 밤 닷되를 심고이다 그바미 우미 도다 삭나거시아 그바미 우미 도다 삭나거시아 유덕(有德)하신 님믈 여해아와지이다.
옥(玉)으로 연고즐 사교이다 옥(玉)으로 연고즐 사교이다 바희 우희 접주하요이다. 그 고지 삼동(三同)이 퓌거시아 그 고지 삼동이 퓌거시아 유덕(有德) 하신 님 여해 아와지이다.
이 정석가를 지금 말로 바꾸면 이렇답니다.
바삭바삭한 가는 모래 벼랑에 바삭바삭한 가는 모래 벼랑에 구운 밤 닷 되를 심습니다. 그 밤이 움이 돋아 싹이 나야 그 밤이 움이 돋아 싹이 나야 유덕하신 임을 이별하고 싶습니다.
옥(玉)으로 연꽃을 새깁니다. 옥(玉)으로 연꽃을 새깁니다. 그 꽃을 바위 위에 접 붙입니다. 그 꽃이 세 묶음 피어야 그 꽃이 세 묶음 피어야 유덕하신 임을 이별하고 싶습니다.
고려 시대에 사랑하는 임과의 연모의 심정을 역설적, 반어적으로 표현한 노래 정석가(鄭石歌)의 5연 중 2연과 3연의 노래입니다. 구운밤이 어떻게 싹이 나며, 옥으로 새긴 연꽃을 어떻게 바위에 접붙이며, 그 접붙인 옥 연꽃이 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절대로 사랑하는 임과 이별할 수 없는 불가능을 보여주는 기가 막힌 노래입니다.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는 속에서 사랑의 아름다움과 영원성을 느낍니다. 또한 거꾸로 생각한다면 내 사랑이 진실하여 하느님이 감동하시어 바삭바삭한 모래에 바삭바삭하게 구워진 밤을 심고 물을 준다면 싹이 나서 밤이 아주 탐스럽게 열리게 해 주실 것입니다. 옥돌에 연꽃을 조각하여 돌에다가 접을 붙여도 연꽃이 탐스럽게 피어 세 묶음뿐만 아니라 백 묶음 천 묶음까지도 꺾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사랑이 진실하지 못하고, 내 사랑이 아름답지 못하며, 내가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치부할 것입니다.
내가 사랑 받고 있다면 나는 ‘유덕하신 임’인가 생각해 봅니다. 유덕하신 임은 덕(德)이 많으신 분입니다. 천주교 요리문답 제13문답에서는 이렇게 하느님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문 13 천주는 누구시뇨 답 13 천주는 만선만덕을 갖추신 순전한 신이요 만물을 창조하신 자 시니라.
정말 유덕한 분은 만선만덕(萬善萬德)의 근원이신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마태오 19, 17)라고 만선만덕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고려시대의 한 여인이 사랑하는 임과 헤어질 수 없고, 영원히 사랑한다는 그 고백처럼 무궁무진(無窮無盡) 사랑하는 그 유덕한 임은 바로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을 닮은 사랑하는 임일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는 유덕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고귀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처럼 생각도 되어지고,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나를 슬프게 합니다.
정말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한다면, 바삭바삭하게 구워진 밤이 바삭바삭한 모래에서도 싹이 날 것이고, 옥돌에 새긴 연꽃도 활짝 필 것입니다. 사랑은 불가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그렇게 사랑할 수 없다고 나를 탓하면서 주저앉고 있기 때문에 서글프기도 합니다. 그런데 마냥 주저앉아 서글퍼 한다면, 나는 율법 교사와 다름없이 말만 늘어놓는 파렴치한일 수밖에 없습니다. 용기를 내어 유덕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닮은 크리스천이 되는 것입니다. 작심삼일(作心三日) 일지 몰라도 오늘은 다시 결심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