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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원행을묘정리의궤
8일간의 '정치 이벤트' 정조의 속뜻은…
1795년 정조의 화성 행차를 그린 '화성원행반차도'. 화성 행차는 정조의 개혁 의지가 반영된 정치적 이벤트였다.
아래 작은 책자는 '원행을묘정리의궤'.
1795년 윤2월 9일 새벽, 정조는 창덕궁을 출발하여 화성으로 향했다. 정조가 화성을 방문하는 것은 이 때가 처음이 아니
었다. 정조는 1789년에 자신의 생부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의 화산(花山) 아래에 모시고 현륭원(顯隆園)이라 승격한
이후 매년 이 곳을 방문한 바 있었다. 그러나 1795년은 정조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해였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회갑을 맞는 해였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는 동갑이었으니, 아버지가 살아있었더라면 함께
회갑 잔치를 올리는 해이기도 했다.
또한 왕위에 오른 지 20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서 왕권을 확실히 펼쳐 보일 필요성도 느꼈다.
# 화성 행차의 배경
정조가 국왕으로 있던 18세기 후반은 조선의 문예부흥기로서 사회 각 분야의 발전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정조는 아버지의 비극을 빚은 붕당정치를 극복하고 재야의 선비와 백성을 적극 포용하는 민국(民國)을
건설하며, 농업과 상공업이 함께 발전하는 새로운 경제 질서를 구축하려 하였다.
이와 함께 정조는 규장각과 장용영의 설치를 통해 개혁정치를 단행하여 부강하고 근대화된 나라를 만들려고 하였다.
정조의 화성 행차는 이러한 꿈을 펼치는 시금석이었다. 정조는 사도세자를 모신 화성을 자주 방문하여 어버이에 대한
효심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정조의 능행길은 현륭원에 참배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화성을 오가는 길에 백성들의 민원을 살피고 이를 해결하는 기회로 활용하였으며, 지방에 숨겨진 인재를 발탁하여
관리로 등용했다.
또한 경기도 일대를 직접 방문하여 수도권의 방위 체제를 점검하고, 수시로 군사들을 동원하여 훈련을 시켰다.
1795년의 화성 행차는 정조가 그동안 이룩했던 자신의 위업을 과시하고 신하와 백성들의 충성을 결집시켜 자신이 추진
하는 개혁에 더욱 박차를 기하기 위한 최대의 정치적 이벤트였다. 정조는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성대하고도 장엄한
행사를 지휘하였고, 행사의 전말은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라는 기록으로 정리되었다.
현륭원에 행차를 하였다고 하여 '원행', 1795년이 을묘년이어서 '을묘', 정리자(整理字)라는 활자로 인쇄하여 '정리'라는
명칭이 책의 제목에 붙여졌다.
# 화성행차, 그 8일간의 기록들
1795년 윤2월 9일, 창덕궁을 출발한 정조의 행렬은 7박 8일간의 공식 일정에 들어갔다.
당시 화성에서 있었던 7박 8일 간의 행사는 '원행을묘정리의궤'라는 책으로 생생히 남아 있다.
정조의 화성 행차는 1794년 12월부터 준비가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행사를 주관할 정리소(整理所)를 설치하고, 행사
경비로 10만 냥을 마련하였는데 모두 정부의 환곡을 이용한 이자 수입이었다.
환갑을 맞은 혜경궁 홍씨가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특별하게 설계된 가마가 2채 제작되었고, 1,800여명의 행렬이
이동할 수 있는 시흥로(오늘날의 1번 국도)를 새로 건설하고, 한강을 안전하면서도 적은 비용으로 건널 수 있도록 고안한
배다리가 건설되었다.
행렬의 모습을 담은 반차도에 나타난 인원은 1,779명이나 현지에 미리 가 있거나 도로변에 대기하면서 근무한 자를 포함
하면 6,000 여명에 이르는 엄청난 인원이었다.
새벽에 창덕궁을 출발한 일행은 노량진을 통해 배다리를 건너 노량행궁(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먹었고, 저녁에 시흥행궁
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묵었다. 휴식 시간에 간식을 먹거나 정식 식사를 할 때에는 음식의 그릇 수, 들어간 재료와 음식의
높이, 밥상을 장식한 꽃의 숫자까지 표시하였다.
둘째 날에는 시흥을 출발하여 청천평(맑은내들)에서 휴식을 하였고, 사근참행궁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 무렵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는데 정조는 길을 재촉하였고, 이날 저녁 화성행궁에 도착하였다. 행렬이 화성의
장안문을 들어갈 때에 정조는 갑옷으로 갈아입고 군문(軍門)에 들어가는 절차를 취하였다.
셋째 날에는 아침에 화성향교의 대성전에 가서 참배를 하고, 오전에는 낙남헌으로 돌아와 수원과 인근의 거주자를 대상
으로 한 문·무과 별시를 거행하여 문과 5인, 무과 56인을 선발하였다. 오후에는 봉수당에서 회갑 잔치를 예행 연습하였다.
넷째 날에는 아침에 현륭원에 참배를 하였다. 오후에 정조는 화성의 서장대에 올라 주간 및 야간 군사훈련을 직접 주관
하였다. 화성에 주둔시킨 5000명의 친위부대가 동원된 이 날의 훈련은 정조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던 노론 벽파 세력을
겨냥한 측면도 있었다.
다섯째 날에는 행차의 하이라이트인 어머니의 회갑연이 거행되었다. 봉수당에서 거행된 잔치에는 궁중 무용인 선유악이
공연되었고, 의식의 진행 절차, 잔치에 참가한 여자 손님 13명과 남자 손님 69명의 명단, 잔치에 쓰일 춤과 음악, 손님에
게 제공되는 상의 숫자와 음식이 준비된 상황이 낱낱이 기록되었다. 여섯째 날에는 화성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눠주고,
오전에 낙남헌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다. 양로연에는 화성의 노인 384명이 참가하였는데, 정조와 노인들의 밥상에 오른
음식이 모두 같았다.
공식 행사가 끝난 다음 정조는 화성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낮에는 화성에서 가장 경치가 뛰어났던 방화수류정을 시찰하고, 오후에는 득중정에서 활쏘기 시범을 보였다. 다음 날은 서울로 출발하는 날이었다. 정조는 오던 길을 돌아서 시흥에 도착
하여 하룻밤을 잤고, 마지막 날에는 노량을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의 묘소가 마지막으로 보이는 고갯길에서 정조는 계속 걸음을 멈추며 부친과의 이별을 아쉬워하였다. 현재 지지대(遲遲臺:걸음이 더뎌지고 머뭇거리게 된다는 뜻)라고 불리는 이 고개는 정조의 화성행차에서 유래하였다.
# 화성행차에 담긴 의미들
정조의 화성행차에는 여러 가지 뜻이 담겨져 있었다.
먼저 동갑인 어머니와 아버지의 회갑이라는 뜻 깊은 해를 맞아 정조는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을 표시하였다.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혀있는 현륭원을 참배하고, 화성의 행궁(行宮:국왕이 임시로 머무르는 궁궐)에서 어머니의 회갑연을 성대히 치렀다. 행차의 과정이라든가 동원된 병력, 회갑 잔치에 올린 상차림, 참석자, 공연된 무용과 준비된 꽃 등 모든 기록은 자세하게 의궤로 정리하게 하였다.
정조의 화성 행차는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효심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정조는 이 행차를 통해 왕권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자신의 친위군대를 중심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하고자 했으며, 행차와 연계하여 과거시험을 실시하여 인재를 뽑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 또한 어머니와 같은 노인들을 위해서는 성대한 양로연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행차에는 화성을 정치, 군사, 경제의 중심도시로 키워나가려는 정조의 꿈과 야망이 담겨 있었다.
행차 도중에 격쟁(擊錚:꽹과리를 두드리며 억울함을 호소함), 상언을 통하여 백성들의 생생한 현장 목소리를 들으며
이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정조는 세손 시절 항시 불안감을 느끼며 갑옷 차림으로 잠자리에 들었을 정도로,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이 관여한 노론
벽파들에게 심한 압박을 받았다.
정조가 자신과 학문, 정치를 함께 할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규장각을 건립한 것이나 친위 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세운
것도 독자적인 정치 기반을 갖추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화성 건설과 화성 행차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정조는 1795년 기획된 장엄한 화성행차를 통해 자신을 짓눌러오던 '죄인의 아들'이라는 굴레를 훌쩍 던져 버리고 자신이
구상한 개혁정치를 실천하고자자 했다. 철저하게 행차의 전말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이러한 정조의 꿈과 실천
이 담겨져 있었다.
■ 화성원행반차도
화성행차의 보습을 보다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로 규장각에는 '화성원행반차도'가 소장되어 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의 앞부분에도 63면에 걸쳐 반차도가 그려져 있지만 목판으로 찍은 것이어서 흑백인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런데 '화성원행반차도'라 이름이 붙여진 두루마리 형태의 반차도는 채색 그림이어서 보다 생동감이 있다.
또한 이 그림은 측면도로 그려진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반차도와는 달리, 항공 촬영을 하듯 위에서 사진을 찍은 듯한 모습의 후면도로 그려져 있다. 그림의 총 길이는 15m가 넘을 정도로 당시 행사의 성대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행렬의 중심부에는 혜경궁과 정조의 가마가 보이고, 주변에는 각종 의장 깃발을 비롯하여, 갑옷을 입은 호위병력, 음식을
실은 수라가자(水刺駕子), 행렬의 앞에서 군기를 잡는 군뢰(軍牢:지금의 헌병), 분위기를 북돋우는 악대들의 모습도 친근감 넘치게 묘사되어 있다. 정조는 그리지 않고 그가 탔던 좌마(座馬)만 표시하고 있으며, 혜경궁의 가마를 사람이 직접 들지
않고 말이 끌고 가는 모습도 흥미롭다.
'원행을묘정리의궤'의 철저한 기록과 함께 반차도까지 남김으로써 정조 화성 행차의 모습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25> 일성록
날씨부터 국사까지 임금이 손수 쓴 일기장
국보 153호 일성록(2329책)
정조는 조선의 국왕 중 여러 면에서 모범을 보인 인물이다.
그 중에서도 매일 일기를 쓰고 이것이 국정의 기록으로 이어지게 한
점은 국왕으로서 정조의 능력을 다시금 새겨 보게 한다.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써 온 일기는 왕이 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783년(정조 7) 이후에는 신하들이 기록하는 방식으로 정착되었지만, 이후의 왕들 역시 정조를 모범 삼아 국정 일기를 써 내려갔다.
이렇게 해서 모인 책이 '일성록(日省錄)'이다. 하루에 세 번 살핀다는 '논어'의 글귀에서 그 제목을 따 왔다. '일성록'은 정조부터 마지막 왕
순종까지 150년간에 걸쳐 기록된 2327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보 153호로 현재 규장각 국보 서고에 보관된 '일성록'을 통해 조선시대 기록 문화의 또 다른 면모들을 만나보기로 하자.
# '일성록'을 만들기까지
'일성록'의 모태가 된 것은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 쓴 일기인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였다.
정조는 증자가 말한 '오일삼성오신'(吾日三省五身·나는 매일 나를 세 번 반성한다)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일찍부터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었다. 이것은 정조가 '일성록' 편찬을 명하면서 증자의 이 글귀를 인용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1785년(정조 9) 정조는 그가 탄생한 후부터 '존현각일기'에 이르기까지의 내용과 즉위한 후의 행적을 기록한 '승정원일기' 등을 기본 자료로 하여 중요 사항을 강(綱)과 목(目)으로 나누어 왕의 일기를 편찬할 것을 명하였다.
규장각의 신하들이 실무를 맡았고, 1760년(영조 36)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의 기록이 정리되었다. 책의 제목은
증자의 말에서 따와 '일성록'으로 정해졌고, 조선이 멸망하는 1910년까지 151년간에 걸쳐 '일성록' 편찬은 이어졌다.
이처럼 '일성록'은 정조의 세손 시절의 일기에서부터 출발했지만, 정조가 왕으로 즉위한 이후에는 국정의 주요 내용들이
수록되었다. 그러나 당시 왕의 비서실에서 작성하는 '승정원일기'가 있었기 때문에 정조는 '승정원일기'와는 다른 방식의
편찬을 지시했고, 결국 '일성록'은 주요 현안을 강과 목으로 나누어 국정에 필요한 사항을 일목요연하게 찾을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 표제(表題), 요점 중심의 기록
'일성록'은 국왕 주변에서 매일 매일의 일들을 요점 정리 방식으로
간추린 기록이다.
신하들이 올린 상소문을 비롯하여, 국왕의 동정과 윤음(綸音·임금이 백성이나 신하에게 내리는 말), 암행어사의 지방 실정 보고서, 가뭄·
홍수에서의 구호 대책, 죄수에 대한 심리, 정부에서 편찬한 서적,
왕의 행차에서의 민원 처리 사항 등이 월, 일 별로 기록되어 있다.
내용은 주요 현안을 요점 중심으로 정리하고 기사마다 표제를 붙여서 열람에 편리를 기하였다. 예를 들어 1776년(정조 즉위년) 3월 4일의 경우 '강계의 삼(蔘)값과 환곡의 폐단을 바로잡도록 명하였다'는 표제어를 기록하여 이 날의 주요 현안이 환곡 문제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일성록'의 첫 부분은 날씨다. '일성록'의 날씨 기록은 '승정원일기'의 그것과 함께 조선시대 기상 상황을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어쩌면 오늘날 어린이 일기에도 날씨를 꼭 쓰는 것도 이러한 전통의 산물인지도 모르겠다. 한 글자 한 글자 붓으로 써 내려간 이 책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용어가 나를 지칭하는 용어인 '여(予)'이다. 일인칭 한자인 '予'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
국왕을 지칭하는 '상(上) '과 대비되면서, 왕 스스로가 쓴 일기임을 확실히 증명해 준다.
'일성록'에는 위민 정치를 실천한 정조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격쟁(擊錚·꽹과리를 두드려 억울함을 호소함), 상언(上言)에 관한 철저한 기록이 그것으로서, '일성록'에는 1300여 건 이상의 격쟁 관련 기록이 실려 있다.
정조는 행차 때마다 백성들의 민원을 듣고 그 해결책을 신하들에게 지시하였다. '일성록'에는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는
없는 내용들도 다수 수록되어 있고, 국정의 참고를 위해 자주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일성록'에 기록된 수치들이 매우 구체적인 것은 선례를 참고하여 국정을 원활히 이끌어 나가기 위함이었다.
또한 '고종실록'이나 '순종실록'이 일제의 주도 하에 편찬되어 그 한계가 많은 점을 고려하면 '일성록'의 기록들은 매우
의미가 있다.
# 칼에 잘린 흔적이 있는 까닭
'일성록'은 원칙적으로 국가의 주요 정책이나 전례의 고증이 필요한 경우 왕실의 열람을 허용했다. '왕실의 비사(秘史)'로
인식하여 보관에 주력한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일성록'은 국정 참고용 기록물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성록'은 큰 수난을 당하였다. 최고의 집권자 측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불리
한 기록을 오려내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현재 '일성록'에서 오려진 곳은 정조 10년 12월 1일부터 정조 23년 11월 5일까지 총 635곳에 달한다.
누가 왜 '일성록'을 오려낸 것일까? 그것은 19세기 세도정치기 왕을 마음대로 즉위시킨 외척 세도가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헌종 사후 왕을 임명할 수 있는 최고 위치에 있었던 사람은 순원왕후(순조의 비) 김씨였다.
순원왕후는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정점에 있었던 인물로, 헌종의 후계자로 강화에 귀양을 가 있던 이원범(후의 철종)을
지명하였다.
이원범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후손으로, 은언군은 정조대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강화도에 귀양을 왔다가 결국
천주교 박해 사건에 연루되어 죽었다. 원범은 은언군의 아들인 전계군의 셋째 아들로 역모죄로 강화도에 귀양을 온 선대를 따라 조용히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평범한 인물이었다. 그런 원범에게 갑자기 왕의 자리에 오르라는 조정의 분부가 떨어진 것이다. 19세기 후반 추락하는 조선 왕조의 단면을 보여주는 해프닝이지만 어쨌든 얼떨결에 원범은 조선의 25대 왕 철종
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원범의 선대가 역적이라는 점은 철종을 왕으로 지목한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 세력에게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되었다. 마침내 '일성록'의 정조시대 기록 중 원범의 선대와 관련된 주요 기록이 도삭(刀削·칼로 삭제됨)되었다.
도삭된 날짜를 '철종실록'과 비교하면 대부분 은언군이나 상계군과 관련된 기록으로 도삭의 정치적 배후에는 순원왕후를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 세력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현재 '일성록' 원본에는 칼로 잘려나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일성록'이 조선 후기 세도정치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음을 씁쓸하게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 조선시대 일기문화
- 전쟁·질병·풍속 등 자세한 기록
조선시대 선비들 역시 꾸준히 일기를 썼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비롯하여 유희춘의 '미암일기',
이귀의 '묵재일기', 오희문의 '쇄미록(鎖尾錄)', 이필익의 '북찬록(北竄錄)', 유만주의 '흠영(欽英)' 등 많은 일기류 자료가
남아 있다.
이순신은 전쟁이라는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한 줄 한 줄 일기를 써 내려갔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정리하는 한편
새로운 전쟁을 준비해가는 방편으로 활용했을 것이다. '난중일기' 외에도 '용사잡록', '난중잡록', '고대일록' 등 임진왜란과 관련된 일기가 다수 남아 있다.
'쇄미록'은 임진왜란 중 민간인 오희문이 겪은 상황을 일기로 정리한 점에서 주목된다. 유배일기도 눈에 띈다.
바쁜 관직생활 보다는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았던 유배기가 오히려 일기쓰기에 전념하게 한 셈이다.
'미암일기'에는 꿈이나 질병, 지방의 풍속 등 저자의 일상사에 관한 기록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16세기 생활사
연구에 큰 도움을 주며, '북찬록'은 이필익이 안변에서의 유배 생활을 일기로 기록한 것으로서 북방지역의 생활상이 잘
드러나 있다.
'흠영'은 유만주(1755~1788)가 21세부터 33세로 요절하기까지 1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쓴 144권의 일기라는 점이
주목된다. 자신이 공부했던 내용들을 중심으로 서양 문물에 관한 것과, 생활사에 관한 기록들이 잘 정리되어 있어서 18세기 지성들의 학문적 수준을 파악하는 데 중요 자료가 된다.
국왕 정조의 일기가 모태가 된 '일성록'부터 전쟁 일기, 유배 일기, 생활 일기 등 다양한 일기류 자료들을 통하여 전통시대
선조들의 투철한 기록 정신과 함께 생생한 삶의 현장들을 접할 수 있다.
<26> 연려실기술
방대한 조선야사 정리한 재야학자의 역작
이긍익이 지은 역사책 '연려실기술'. 조선 태조~현종 때까지의 중요한 사건들을 각종 야사 일기 문집 등에서 자료를 수집, 분류하여
기사본말체 형식으로 59권 42책을 엮었다.
조선시대 정치사를 다룬 역사서로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 국가가 주도적으로 편찬한 기록들이
다수 남아 있다.
그러나 정보와 자료의 수집이 오늘날 보다 훨씬 어려웠던 조선시대
에 한 개인이 당대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관(史官)이라는 요즈음으로 치면 전문기자와 같은 사람들을 활용하는 관찬 역사서에 비하면 개인이
그 많은 사건들을 수집하여 정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놓은 인물이 있었다.
그것도 철저히 객관적이고 실증적으로 조선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긍익(李肯翊·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
室記述)'은 개인이 남긴 조선시대 최고의 역사 기록물이다.
# 기사본말체 서술 방식
역사학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것이 있다. 자신이 살아온 한 시대의 역사를 객관적이면서 실증적으로 정리하여 후세에 길이 읽힐 역사서를 저술하는 작업이다. 조선시대 이러한 원칙을 가장 충실히 수행했던 인물은 누구일가? 필자는 주저 없이
'연려실기술'의 저자 이긍익을 손꼽고 싶다.
'연려실'이란 '명아주(藜)를 태운(燃) 방(室)'이란 뜻으로 이긍익의 호이다.
중국 한(漢)나라 때 유향(劉向)이라는 사람이 어둠 속에서 글을 읽고 있는데, 푸른 명아주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나타나서
지팡이에 불을 붙이고 홍범오행(洪範五行)의 글을 주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아마도 밤에도 불을 밝히면서 열정적인 저술 활동을 해 나갔던 자신의 삶을 형용한 것이리라.
'연려실기술'은 조선시대 역사 편찬의 체제와 역사의식을 이해함에 있어서 빼 놓을 수 없는 역사서이다.
역사서의 서술 방식은 크게 기전체, 편년체, 기사본말체 등으로 나눈다.
기전체는 왕의 행적을 주로 기록한 본기(本紀), 인물들의 행적을 정리한 열전(列傳), 본기나 열전에 담을 수 없는 항목을
분류하여 정리한 지(志)로 구성된다. '삼국사기'의 전통을 이어받은 '고려사'가 대표적인 기전체 역사서이다.
편년체는 연, 월, 일의 순서대로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으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의 연대기 역사서가 이에
해당한다.
'기사본말체'는 역사를 시대순으로 구성하되, 시대별 주요 사건에 대해 본(本)과 말(末)을 설정하여, 각 시대별 사건에서
주요한 내용들이 우선적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한다. '연려실기술'은 기사본말체를 대표하는 조선시대 역사서이다.
'연려실기술'은 여러 종류의 필사본이 전한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주목했기 때문일 것이다.
크게 보면 태조부터 현종까지 각 왕대의 중요한 사건을 고사본말(故事本末)의 형식으로 엮은 '원집', 숙종 당대의 사실을
기록한 '속집', 역대의 관직을 위시하여 전례·문예·천문·지리·대외관계 및 역대 고전 등을 여러 편목으로 나누어 그 연혁을
기재하고 출처를 밝힌 '별집'의 세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여러 종의 책들은 수록된 내용은 거의 일치하지만, 전체 권수가 같지 않은 경우도 있다. '원집'이 가장 정형화된 형태로
구성되어 있고, '속집'은 '원집'과 달리 인용된 도서의 제목이 들어가 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별집'은 '원집'과 '속집'에서
빠진 부분을 보충한 것으로, 규장각에는 원집과 속집, 별집을 갖춘 '연려실기술'이 소장되어 있다.
#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정신 -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서술
'연려실기술'에서 기본적으로 흐르고 있는 정신은 '술이부작'이다. 가능한 자료만을 나열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게 하는
한편 자신의 견해는 거의 밝히지 않았다. 물론 인용된 서책을 취사선택했다는 점에서는 저자의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할 수
는 없지만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을 보였다.
'연려실기술'의 처음은 보통 책의 서문에 해당하는 의례(義例)로 시작한다. 이는 이긍익이 이 책을 쓴 목적을 밝힌 부분
으로, 이긍익은 먼저 동방의 야사(野史)들 중 체계적으로 정리된 책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우리 동방의 야사는 큰 질(帙)로 엮어진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대동야승(大東野乘)', '소대수언(昭代粹言)' 같은 것은
여러 사람들이 지은 책을 모으기만 했기 때문에 설부와 같아서 산만하여 계통이 없고 또 말이 중복된 것이 많아서, 열람
하고 상고하기가 어렵다.
'춘파일월록(春坡日月錄)'이나 '조야첨재(朝野僉載)'와 같은 책은 편년체를 썼는데, 자료 수집을 다하지 않고 빨리 책으로
만들어 내었으므로 상세한 데는 지나치게 상세하고, 소루(疏漏)한데는 지나치게 소루하여 조리가 서지 않았으며… 지금
내가 편찬한 '연려실기술'은 널리 야사를 채택하여 모아, 대략 기사본말체를 좇아서 자료를 얻는 대로 분류, 기록하여
다음에 계속 보태 넣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내가 자료를 얻어 보지 못하여 미처 기록에 넣지 못한 것은 후일에 보는 이가 자료를 얻는 대로 보충하여 완전한 글을
만드는 것이 무방할 것이다.' ('연려실기술', 의례)
이어 무엇보다도 역사서의 서술 원칙은 객관적이고 실증적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처음에 이 책을 만들 때에 가까운 친구들이, 남에게 보이지 말라고 권고하는 이가 혹 있었다. 나는 답하기를, 남이 이
책을 알지 못하기를 바란다면 만들지 않는 것이 옳고, 만들어 놓고서 남이 알까 두려워한다면 도(道)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남의 귀나 눈에 익은 이야기들을 모아 분류대로 편집한 것이요, 하나도 나의 사견(私見)으로 논평한 것
이 없는데, 만일 숨기고 전하지 않는다면 남들이 눈으로는 보지 못하고 귀로만 이 책이 있다고 듣고서 도리어 새로운 말
이나 있는가를 의심한다면, 오히려 위태롭고 두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연려실기술', 의례)
'하나도 나의 사견으로 논평한 것이 없다'고 밝힌 것이나, 어느 시대, 어떤 자리에서 공개되어도 떳떳하다는 점을 강조한
부분에서는 객관적 역사 서술에 대한 저자의 자신감이 돋보인다.
# 400여 종에 달하는 인용 서적들
400여 종의 자료를 광범하게 인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려실기술'은 객관성을 위해 '최선을 다한' 역사서라고 평가해도
좋을 듯하다. '연려실기술'은 당시의 도서 분류법인 경(經)·사(史)·자(子)·집(集)을 망라하고 있다.
사부에서 인용한 서책은 '고려사' '국조보감' '삼국사절요' '동각잡기' '조야첨재' '해동잡록' '춘파일월록' 등으로 정사보
다는 야사에 보다 비중을 두고 있다.
이것은 '의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제가(諸家)들의 야사를 널리 수집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긍익은 국가의 공식 기록보다는 민간에서 정리된 야사 중에서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연려실기술'을 편집하였다. 문집은 100여 종이 인용되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문집은 이이의 '율곡집'(204회), 이수광의 '지봉유설'(195회), 김시양의 '하담집'(134회), 허균의 '성옹지소록'(65회) 등의 순이다. 이론이나 철학에 중심을 둔 정통 성리학자보다는 실무 관료로서 활약한 인물 문집에 보다 비중을 두고 있는 점이 두드러진다. 실사(實事)를 중시하는 저자의 입장이 나타나는 대목이다. 또한 '연려실기술'의 편찬에는 외국 자료의 인용이 거의 없다는 것도 특징이다. '당서' '대청회전' '사기' '진서' 등이 약간 인용될 뿐 우리측 문헌 기록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정치사, 사건사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서술한 만큼 국내측 문헌만으로도 우리 역사를 충분히 서술할 수 있을 만큼 자료가 풍부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최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라는 책이 출간되면서, 기존의 '해방전후사의 인식'에서 보여 주었던 현대사 이해와 관점을
달리하면서 현대사 논쟁에 불을 붙이고 있다. 일제시대 친일파 논쟁이라든가, 1960~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 대한 평가
등 우리가 살아왔던 현대사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의견들이 엇갈리고 있다.
역사학자들 또한 주관적인 관점에서 현대사를 서술하는 입장이 강하나 최근에는 현대사 관련 자료집을 모은 책도 눈에 띈다. 자료만을 제시하고 독자들에게 그 판단을 맡긴 것이다. '연려실기술' 또한 조선시대판 '자료모음집'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단순한 자료 모음집은 아니었다. 조선의 역사를 관통할 수 있는 자료들을 광범하게 모아 본말(本末)을 구성하고,
자료들이 서로 연결될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그리고 사건에 대한 평가는 후세의 몫으로 남겨 두었다.
우리 시대에도 이긍익 만한 역사가를 찾을 수 있을까?
# 이긍익은 누구
- 영조·정조 시대 학자, 과거 포기 야인생활
이긍익(李肯翊·1736~1806). 조선 영조, 정조 때의 학자. 정종(定宗)의 아들 덕천군의 후예로서 이광사의 아들이다.
부친 이광사는 서법(書法)에 뛰어나 동국진체(東國眞體)로 평가를 받았으나, 정치적으로 소론의 중심인물로 당쟁에
개입되어, 1755년(영조 31) 나주 괘서(掛書) 사건으로 부령으로 유배를 당한 후 신지도에 유배지를 옮겨간 후 사망했다.
당쟁의 충격은 이긍익의 진로에도 깊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가 과거를 포기하고 평생 야인으로 지내며 책을 엮는
일로 일생을 보낸 것은 당쟁에서 파급된 가정적 불운과 관계가 깊다. 이긍익은 13세께 역사에 관심을 가진 후, 평생의 노력을 집대성해 조선의 야사(野史) 총서(叢書)라 할 수 있는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을 남겼다.
그는 불운한 환경을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극복했고, 집권층인 노론이 성리학에만 중점을 둔 것과는 달리 양명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는 등 개방적인 사상의 소유자였다. 그의 후손 중 이건창은 조선시대 당쟁사를 정리한 '당의통략(黨議通略)'을 저술하였는데, '연려실기술'과 '당의통략'은 오늘날 조선시대 정치사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27>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
66세 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
1759년 간행된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 표지
조선시대 왕실 행사의 이모저모를 기록과 함께 그림으로 정리한 의궤(儀軌)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것을 꼽으라면 단연 왕실의 결혼식을 기록한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결혼식 장면을 담은 것이 1759년 66세의 영조가 15세의 어린 신부 정순왕후를 맞이한 과정을 기록한 '영조정순후(英祖貞純后)가례도감의궤'이다. 영조와 정순왕후라는 굵직한 역사적 인물의 만남이라는 측면과 함께 51세의 연령차가 나는 결혼식도 무척이나 흥미를 갖게 한다. 의궤를 통해 1759년 6월에 벌어졌던 결혼식 현장으로 들어가 본다.
# 51살 연하 신부와의 결혼식
1759년(영조 35) 6월 창경궁에서는 큰 잔치가 열렸다. 35년이나 재위한 국왕 영조는 왕비 정성왕후가 사망한 후, 신하들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하며 어린 신부를 맞이하는데 동의하였다. 6월 22일은 신부가 왕비 수업을 받고 있는 별궁 어의궁에
행차하는 날, 조정의 신하들은 현왕의 결혼식이라는 국가 최고의 행사 준비로 분주했고, 왕의 결혼식을 직접 볼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된 백성들의 마음도 덩달아 뛰어올랐다.
영조(1694~1776)는 1704년 달성 서 씨인 진사 서종제의 딸과 혼인하였다. 영조는 당시 숙종의 제4왕자인 연잉군의 위치에 있었으며, 연잉군과 혼인한 정성왕후는 달성군 부인에 봉해졌다. 당시 '숙종실록'의 기록에 '이 혼인은 사치가 법도를 넘어 비용이 만금(萬金)으로 헤아릴 정도였다'고 표현하여 대단히 호화로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영조가 계비를 맞이한 정순왕후(1745~1805)와의 결혼식에서 철저히 사치를 방지하라고 강조한 것은 이 때의 경험이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서 씨 부인은 1721년 세제빈에 봉해졌으며, 1724년 영조가 왕으로 즉위한 후 정성왕후가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영조와의 사이에 후사가 없이 1757년 사망했고, 영조는 3년상(실제 2년 3개월)을 끝낸 1759년 경주 김 씨 김한구의 딸을 계비로
맞아들였다. 66세의 영조에게 15세의 꽃다운 신부가 계비로 들어온 것이다. 51세의 나이 차가 무척이나 커 보였지만 어린
계비 또한 영조 못지않게 야심에 찬 여걸이었음은 후대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조선시대 왕의 첫 부인을 왕비라 하고 왕비가 살아있는 한 아무리 왕이 총애하는 궁녀라도 그녀는 후궁일 수밖에 없었다.
정비 소생의 왕자가 왕이 되는 것이 기본이지만, 정비가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는 경우 후궁 소생의 왕자 중에서 경쟁하여
왕이 되었다. 영조 역시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 소생이었고, 영조 앞의 왕 경종은 그 유명한 장희빈의 아들이었다.
정비가 사망하면 왕은 계비를 맞이하게 되고, 계비는 정비의 법적 지위를 이어가게 된다.
그런데 왕이 언제 계비를 맞이하든 계비의 나이는 왕이 첫 번째 결혼할 당시 왕비의 나이인 15~18세의 처녀를 뽑는 것이
흥미롭다. 정비가 일찍 죽는 경우에야 왕과 계비의 나이 차가 얼마 되지 않겠지만 정성왕후는 영조와 무려 50여 년을 해로
하다가 사망하였기에, 영조와 정순왕후는 66세의 신랑과 15세의 신부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게 된 것이다.
19세가 되던 해에 51세 선조의 계비가 되었던 인목왕후의 사례도, 정순왕후에 비하면 매우 양호한 편이다.
# 결혼식 과정을 기록한 의궤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에는 신부의 간택을 비롯하여 왕실 혼인의 여섯 가지의 예법인 '육례(六禮)'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간택은 후보 중에서 왕비감을 선택하는 것으로, 대개 3차에 걸친 간택의 과정을 거쳤다. 1차에서 6명, 2차에서 3명, 3차
에서 1명을 선발하였다.
삼간택 날짜는 1759년 6월 9일이었다. 육례는 납채(納采), 납징(納徵·납폐라고도 함), 고기(告期), 책비(冊妃), 친영(親迎), 동뇌(同牢)를 지칭하였다. 납채는 간택한 왕비에게 혼인의 징표인 교명문을 보내고 왕비가 이를 받아들이는 의식으로 6월
13일에 행해졌다.
납징(6월 17일)은 혼인 성립의 징표로 폐물을 보내는 의식으로 요즈음 함을 들이는 것과 유사하다.
6월 19일 혼인 날짜를 잡는 의식인 고기가, 6월 20일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인 책비가 행해졌다.
행사 중에서도 가장 하이라이트는 영조가 별궁인 어의궁(지금의 서울 종로구 기독교회관 부근)에서 왕비 수업을 받고 있던 정순왕후를 친히 궁궐로 모셔오는 의식인 친영이었다. 별궁에 예비 왕비를 모신 것은 사가(私家)에서 왕을 맞이하는 부담을 줄이고 미리 왕실문화를 배우게 하기 위해서였다. 6월 22일에 행해졌던 친영 의식은 의궤의 말미에 반차도(班次圖)로 정리하였다. 신한평 이필한 현재항 등 17명의 화원들이 그린 세밀한 반차도는 당시 결혼식 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친영 후 왕이 왕비를 대궐에 모셔와 함께 절하고 술을 주고받는 의식인 동뇌가 행해졌다.
의궤에는 육례에 필요한 각종 의복과 물품 등의 내역을 비롯하여 의장기, 가마 등을 준비한 장인들의 명단, 소용된 물자의 구체적인 내용, 반차도를 그린 화원들의 이름까지 기록하여 당시 결혼식의 상황을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게 해 준다.
특히 말미에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현장의 모습을 담은 반차도는 당시 참여자들의 숨결을 그대로 느끼게 해 주고 있다.
# 반차도로 보는 결혼식 행렬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 반차도 중 일부.
'가례도감의궤'의 반차도에는 모두 국왕이 별궁에 있는 왕비를 맞이
하러 가는 친영 때의 모습을 담고 있다. 친영을 가례의 하이라이트라고 여긴 때문이다. '반차'는 '나누어진 소임에 따라 차례로 행진하는 것'을 일컫는 말로써 '반차도'는 행사의 절차를 그림으로 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반차도에는 영조가 탄 대가(大駕)를 앞에서 호위하는 선상(先廂)과 전사대(前射隊)를 비롯하여 주인공인 왕과 왕비의 가마 및 이들을 뒤에서 호위하는 후상(後廂), 후사대(後射隊) 등과 행사에 참여한 고위 관료, 호위 병력, 궁중의 상궁, 내시를 비롯하여 행렬의 분위기를 고취하는 악대, 행렬의 분위기를 잡는 뇌군(헌병) 등 각종
신분의 인물들이 자신의 임무와 역할에 따라 위치를 정하여 행진한다. 이들 중에는 말을 탄 인물의 모습도 보이고 걸어가는 인물의 모습도 나타난다. 말을 탄 상궁을 비롯하여 침선비(針線婢) 등 궁궐의 하위직 여성들의 모습까지 다양하다.
반차도에 나타난 행렬의 모습은 뒷모습을 그린 것, 조감법으로 묘사한 것, 측면만을 그린 인물도 등 다양하다. 다양한 각도에서 인물들을 묘사한 것에서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행렬의 모습에 악센트를 주어 보다 생동감 있는 모습을 연출한 화원들의 센스를 느낄 수 있다. 반차도에 나타난 인물은 각 신분에 따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이 서로 다른 것이 이채롭다. 갖은 색깔의 옷의 모습과 너울을 쓴 여인의 모습이나 각종의 군복을 착용한 기병, 보병들의 모습은 당시의 복식 연구에도 귀중하고
생생한 자료가 될 것이다.
행렬의 분위기를 한껏 돋구는 의장기의 모습도 흥미롭다. 행렬의 선두가 들고가는 교룡기와 둑기를 비롯하여 각종 깃발과 양산, 부채류는 당시 왕실의 권위를 상징해 주고 있다. 수백명이 대열을 이루어가는 이 행렬은 바로 당시의 국력과 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최대의 축제 퍼레이드였다. 그리고 이 행렬의 모습을 2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현장 그대로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겐 큰 행운이다.
총 50면에 걸쳐 그려진 반차도의 각 면은 세로 45.8, 가로 33㎝이며, 총 길이는 1650㎝에 달한다.
# 왕의 결혼식 행렬구성
왕의 결혼식 행렬 구성은 아래와 같다.
①전반부:왕의 행차를 앞에서 인도하는 선상군병(先廂軍兵)과 독(纛·쇠꼬리로 장식한 큰 깃발), 교룡기(蛟龍旗·교룡을
그린 깃발, 교룡은 상상속의 큰 용) 등 왕을 상징하는 의장물로써 구성된 부분이다.
②어가행차:왕의 행렬을 이루는 부분 어가행렬의 앞에서 화려하고 장엄하게 어가의 출현을 알리는 부분. 각종 기치(旗幟)와 의장물을 들고 가는 의장병과 내취(內吹·악대),시신(侍臣)과 친시위(親侍衛) 의물 및 고취악대 등으로 구성되었다.
③수행행차:문무백관 등 호위 배종 신하들로 구성된 부분 어가의 뒤편에서 수행하는 어가를 수행하는 모습을 띠고 있다.
사관 의관 등이 꼭 따른다.
④왕비행차:왕비의 책봉에 관계된 교명, 금보 등을 실은 가마와 왕비의 가마, 왕비를 배종하는 궁녀들로 구성되었다.
⑤후반부:행차를 마무리하는 부분. 후미에서 국왕을 경호하는 후사대 등으로 구성되었다.
<28> 신증동국여지승람
조선시대 영도는 목장, 한양에는 24시간 소방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의표지
500여 년 전 조선시대 전국 곳곳의 모습을 타임머신을 타고 간 듯이 쏙쏙들이 들여다 볼 수 있는 자료가 있다. 바로 '동국여지승람(東國
與地勝覽)'이다.
'동국여지승람'은 원래 성종 때인 1481년(성종 12)에 50권으로 편찬
되었고, 1497년에 55권으로 재간행되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전질이 남아 있는 책은 중종 때인 1530년에 '동국
여지승람'의 내용을 보완하여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었으나, 광해군
때인 1611년 목판본으로 다시 간행하였다.
규장각에는 광해군 때 재간행한 '신증동국여지승람' 55권 25책이
보관되어 있어서, 500년 전 조선사회의 이모저모를 살펴볼 수 있게 한다.
# '동국여지승람'을 만들기까지
우리나라의 지리지는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지리지가 수록된 것으로 보아 그 전통이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수록된 것은 모두 소략한 내용의 역사 지리지로서 주로 주·군·현의 소속 관계와 변천 관계를 기록하였다. 조선 전기 중앙집권화가 강화되면서 국가는 각 지역의 정보를 제대로 파악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따라 각
지역의 연혁 토지 호구 성씨 인물 물산 문화유적 등에 대한 정보를 기록한 지리지 편찬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지리지 편찬은 세종 시대에 본격화되었는데 이때 편찬된 팔도의 지리지는 '세종실록'의 '지리지' 부분에 반영되었다.
세종 대에 편찬된 팔도의 지리지로는 유일하게 '경상도지리지'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세조대에는 양성지 등이 주도하여 1478년(성종 9)에 '팔도지리지'를 완성하였으나, 다른 지리지는 모두 없어지고 역시 '경상도속찬지리지'만이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 전기 지리지 편찬사업은 '동국여지승람'의 완성으로 그 결실을 보았다. '동국여지승람'은 '팔도지리지'를 토대로 하여 서거정이 편찬한 '동문선'의 시문을 합한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처음에는 훈구파 세력들이 중심이 되었
다가 후에 김종직, 최부 등 사림파 세력이 이 책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동국여지승람'은 훈구파와 사림파들이 힘을 합쳐 간행한 지리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후 중종은 기존의 '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을 보완하고 수정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행 윤은보 홍언필 등이 중심이 되어
1530년 '새롭게 증보했다(新增)'는 뜻을 담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여 문화사적인 내용을 많이 보강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55권 25책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으로 전국 군현의 사회, 경제, 문화에 관한 모든 사항을 자세하게
담았다.
#성리학 이념과 문화의 반영
'신증동국여지승람' 중 동래현 부산 부분. '산이 가마솥 모양과
같아서 이런 이름을 지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첫머리에는 이행의 진전문(進箋文)과 이행
등이 쓴 서문(序文)과 구본(舊本) '동국여지승람'의 서문 등이 실려
있다.
서문에는 '비록 역대가 오래된 풍속이나 사경(四境)의 먼 것이라도
한번 책을 펼치면 분명히 손바닥에 놓고 가리키는 것과 같으니 실로 일국의 아름다운 볼거리(勝覽)로서 열성(列聖:역대 제왕)이 미처하
지 못하였던 것이다'라 하여 국토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필요성에서 본 책이 편찬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어 경도(京都) 한성부 개성부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 강원도 함경도 평안도 등으로 나누고 각 부와 도에 속하는 329개 지역의 연혁과 관원 군명 성씨 풍속 형승(形勝) 산천 토산 성곽 관방(關防) 봉수 누정 학교 역원 불우(佛宇) 사묘 능묘 고적 명환(名宦) 인물 시인의 제영(題詠) 등의 순서로 지역적 특성을 기록해 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연혁은 시대에 따른 각 군현의 지명 변화를 기록한 것으로 삼국시대
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지명 변천의 과정을 알 수 있다.
풍속은 그 지역의 특징적인 기질과 풍속을 적고 있는데, 안동의 경우 '부지런한 것과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농사 짓고 누에 치는 일을 힘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안동의 석전(石戰)이 매년 음력 정월 16일에 열린다는 내용도 기록하고 있다.
토산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특산물, 관방은 주요 방어처, 누정은 정자, 불우는 사찰을 기록한 것이다.
역원과 봉수 항목이 있는 것은 왕명의 전달이나 긴급한 상황에서의 연락망 확충이 당시에 매우 중시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이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와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토지, 호구, 군사 항목이 없는
대신에 인물이나 제영의 비중을 크게 한 점이다. 이것은 성리학의 이념이 조선사회에 점차 확산되면서 성리학 이념에 충실했던 충신, 효자, 열녀의 행적을 널리 전파하고, 관리나 학자들이 쓴 시문들을 알려 문화국가로서의 면모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편찬이 학문과 문화를 중시하는 사림파 학자들에 의해 주도됨으로써 이러한 면모가 더욱 강조되었다.
# 500년 전 조선 팔도의 모습들
1920년대 영도의 모습.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500여 년 전 조선 사회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우선 지방의 특산물들을 살펴보자. 영광의 조기, 영덕
의 대게, 풍기의 인삼, 담양의 대나무, 상주의 감, 제주의 귤 등 현재
까지 전국적인 명망을 얻고 있는 특산물들이 이 때도 '토산(土産)'
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게는 자해(紫蟹) 즉 붉은 게로 기록되어 있
으며, 귤은 금귤(金橘), 산귤(山橘), 동정귤(洞庭橘), 왜귤(倭橘),
청귤(靑橘)의 다섯 종류가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토산들은 역사적 뿌리가 있는 신토불이 물산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서울에 소방서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사실 조선의 궁궐 및 관청 건물은 모두 목재로 만들어져 있어서 화재의 위험이
매우 높았는데, 화재를 막기 위해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라는, 지금의 소방서와 같은 관청이 서울의 종루에 설치되었음이 나타나 있다. 당시 수성금화사에는 각종 소화기구가 갖추어져 있었고, 멸화군(滅火軍)이라고 불리는 소방대원 50여 명이
24시간 근무를 했다고 한다. 한성부의 '교량' 항목에는 혜정교, 대광통교, 소광통교, 통운교, 연지동교, 동교, 광제교, 홍제교 등 조선 전기부터 있었던 다리들의 명칭과 위치가 기록되어 있어서 청계천을 중심으로 한 조선시대 시가의 모습을 추리할 수 있게 한다.
부산에 관한 내용으로는 부산의 연원에 대한 기록이 주목된다. 조선시대의 부산은 동래현의 '산천' 항목에 기록될 정도로
도시의 의미보다는 산의 의미가 컸다. '동평현(동래현의 속현)에 있으며 산이 가마솥 모양과 같아서 이런 이름을 지었다.
그 아래가 부산포이니, 늘 살고 있는 왜호(倭戶)가 있으며 북쪽으로 현까지의 거리는 21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래현의 '산천' 항목의 '절영도(絶影島)'에는 '동평현의 남쪽으로 8리에 있으며, 목장이 있다'고 기록하여 현재의 영도
지역이 목장으로 활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 거제현의 형승(形勝) 항목에는 고려시대의 학자 이규보의 시를 인용하여 '여름이면 벌보다 큰 모기가 사람을 깨무는데 참으로 무섭다'고 하였고, 개성부의 '탁타교(橐駝橋)' 항목에서는 '고려 태조 왕건이 거란에서 보내온 낙타를 굶겨 죽인 데서 다리의 이름이 연원하였다'는 등 흥미로운 기록들이 있다. 정몽주의 죽음으로 유명한 '선죽교(善竹橋)'에 대해서는
'좌견리 북쪽에 있다'고 짧게만 언급한 것도 주목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동람도(東覽圖)라는 지도를 그려 넣어 지리지와 지도집의 성격을 갖추고 있다. 첫머리에 팔도총도(八道總圖)라는 제목을 붙인 조선전도를 넣었고, 각 도 첫머리에는 도별로 지도들이 그려져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이들 지도들은 지리지의 기록과 함께 보급을 위해 목판으로 인쇄되었다. 각 지도의 옆에 독특한 형태의 파도 무늬가 보
이는 것은 이 지도들이 목판으로 인쇄한 것임을 잘 보여준다.
지도들은 모두 동서의 폭은 넓고 남북의 길이가 짧아 통통한 모습을 띠고 있는데, 이것은 목판에 맞추어 찍기 위한 때문
으로 풀이된다. '팔도총도'의 울릉도 왼쪽에는 독도로 여겨지는 우산도(于山圖)가 그려져 있다.
또한 동해, 남해 등이 바다 부분에 적혀있지 않고, 육지에 적힌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바다에 제사를 올리던 곳을
표시한 것이다.
<29.끝> 중인들의 활약
신진 사회세력, 조선후기 문화 꽃피우다
조선 후기 중인들이 편찬한 '풍요속선(風謠續選·1797년)'과 '풍요삼선(風謠三選·1857년)'의 표지 및 책 속의 내용.
"김정호는 자신의 호를 고산자(古山子)라 하였다. 그는 본래 공교한 재주가 많았고 특히 지도학에 취미가 있었다.
그는 두루 찾아보고 널리 수집하여 일찍이 '지구도'를 제작하고, 또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는데 자신이 그림을 그리고 새겨 세상에 펴냈다. 그 상세하고 정밀한 것은 고금에 짝을 찾을 수가 없다. 내가 한 질을 구해 보았더니 진실로 보배로 삼을 만한 것이었다. 그는 또 '동국여지비고' 10권을 편집했는데 탈고하기 전에 세상을 떴으니 정말 애석한 일이다."
위의 기록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지도 전문가로 손꼽히는 김정호의 일생에 관해 쓴 것으로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전해온다. 위대한 지도학의 대가였지만 중인 신분이었던 관계로 김정호에 대한 기록이 거의 전해지지 않는 점을 고려할 때 '이향견문록'의 기록은 단비처럼 느껴진다. '이향견문록'은 조선 후기의 문인인 유재건이 1862년에 편찬한 책이다.
이향(里鄕)이란 '백성들이 사는 동네'를, '견문록'은 '보고 들은 기록'을 뜻하는데, 곧 이곳 저곳에서 들은 이야기를 정리한 기록이란 뜻이다. 양반 사대부와 같이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은 등장하지 않고 중인, 상민, 천민, 노예, 신선, 도사, 점쟁이, 여자 스님 등 중인 이하 신분층의 다양한 모습들을 담고 있다.
# 조선시대 중인의 존재와 역할
조선시대 양반과 상민의 중간에 위치했던 계층, 중인. 조선시대에는 주로 기술직에 종사한 역관, 의관, 율관이나 양반의
소생이지만 첩의 아들인 서얼, 중앙관청의 서리나 지방의 향리 등을 총칭하여 중인이라 불렀다. 양반은 아니면서 상민보다는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이 중인이었던 것이다. 이들 중 역관이나 의관, 율관은 오늘날 외교관, 의사, 변호사에 해당하는 사람들로서 요즈음에는 최고로 잘 나가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신분차별이 엄연히 존재했던 조선시대에
이들은 양반이 아니라는 이유로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한 채 사회의 주변부를 떠돌았다.
조선이 건국되고 15세기까지는 그리 신분차별이 심하지 않았지만 16세기 이후 성리학 이념이 사회 곳곳에 투입되면서
양반과 천민, 남자와 여자, 적자와 서자의 차별이 심해지면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조선시대의 사회상이 자리를 잡게 된다. 중인들이 양반과는 완전히 차별되는 존재로 자리를 잡은 것도 16세기 이후이다.
기술이나 행정실무 능력을 소지하고 있었던 중인들의 의식은 17세기 이후 점차 깨어나게 된다.
1613년 서얼들이 중심이 된 은상 살해 사건은 소설 '홍길동전'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18세기 영조, 정조시대 국왕들이
서얼들의 능력을 주목하게 되고, 상업과 무역의 발달로 기술직 중인들의 존재가 중시되면서 중인들의 위상은 보다 강화
되어 간다.
# 중인층의 위항(委巷)문학운동
조선후기, 특히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중인층을 중심으로 신분상승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중인층의 신분상승 운동의
모델은 양반이었다. 중인들은 무엇보다 양반을 닮아가려고 했다. 그래서 기획한 것이 지금의 문학 동호회쯤 되는 시사(詩社)를 결성하고 정기적으로 모여 그들이 지은 시와 문장을 발표하는 것이었다. 대개 중앙관청의 하급 관리로 일했던 중인들은 인왕산 아래 옥계천이 흐르는 곳에 주로 밀집해 살았다. 따라서 이들의 시사 활동은 인왕산과 옥류천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고, '옥류천 계곡'에서 따온 '옥계'라는 말을 제목삼아 '옥계시사'라 하였다.
중인들의 문학 운동을 위항(委巷)문학 운동이라 한다. '위항'이란 누추한 거리를 뜻하는 말로서 중인층 이하 사람들이 사는 거리를 뜻하였지만, 대체로 중인들의 문학 운동을 지칭하는 용어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중인들의 시사 활동은 단순히 모여서 시를 읊조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중인들은 그들의 공동 시문집을 편찬하기 시작했고, 그 결실이 1712년 홍세태가
편찬한 '해동유주(海東遺珠)'를 시작으로 하여 '소대풍요(昭代風謠·1737년)', '풍요속선(風謠續選·1797년)', '풍요삼선(風謠三選·1857년)'으로 이어졌다. 1791년에는 옥계시사 동인들의 시와 옥계의 아름다운 경치를 담은 '옥계사시첩(玉溪社詩帖)'을 만들기도 하였다. 중인들은 시문집 발간을 통해 결속력을 강화하는 한편 양반 못지 않는 학문적 수준이 있음을 널리 과시하였다. '소대풍요'에서 '풍요삼선'까지 60년 마다 공동시집을 내자고 한 약속을 120년간 지킨 것에서 이들의 튼튼한
공동체 의식을 엿볼 수가 있다.
조선후기에 들어 현격해진 중인들의 자신감은 전기문을 스스로 기록한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에 와서 편찬되는 조희룡의 '호산외사(壺山外記·1844년)'와 유재건의 '이향견문록(1862년)', 이경민의 '희조일사(熙朝佚史)' 등이 대표적인
중인 전기문이다.
이제 중인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존재감을 널리 알리고 역사적으로 이름을 빛낸 선배들의 행적에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방의 향리들 중에서도 자신의 가문을 정리한 기록을 남겼다. 월성 이씨 향리 가문인 이진흥이 쓴 '연조귀감(椽曹龜鑑)'이 대표적인 저술로서, 이제 당당히 자신의 뿌리를 찾아 세상에 공개하는 향리 신분의 자신감을 나타냈다.
# 서얼들의 몸부림과 '규사(葵史)'
기술직 중인, 관청의 서리, 지방의 향리와 함께 중인의 다른 한 축을 형성한 신분이 서얼들이다.
양반 첩의 자손이었던 조선시대 서얼들은 양반의 폐쇄적인 신분적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한 희생양이었다.
16세기 이후 성리학 이념이 강화되면서 중인으로 완전히 고착화된 서얼들은 '홍길동전'의 홍길동과 같이 아버지가 있으되 제대로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비운의 존재였다.
자신의 운명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던 서얼들도 조선후기에 이르면 신분사회의 벽을 극복하려는 노력들을 전개하게 된다.
보통의 양반들처럼 주요 관직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는 청원 운동인 통청(通淸) 운동을 전개하게 되고, 정조 때에 서얼의 관직 등용을 허용하는 서얼허통절목(庶孼許通節目)이 만들어지면서 서얼들의 노력은 일부 결실을 맺게 된다.
조선후기 서얼들의 자부심은 1859년 대구의 달서정사에서 간행된 '규사'라는 그들의 전기를 편찬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해바라기를 뜻하는 '규(葵)'자를 넣어 해를 향한 해바라기처럼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 변함없음을 약속한 그들의 전기
'규사'는 이제 서얼도 당당한 역사의 주인공임을 만천하에 공포한 기록이었다.
# 조선후기 문화의 또다른 주역
우리 역사에서 보면 최상위 신분층 바로 아래에 위치했던 지식인 집단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사회의 길로 들어선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골품제도의 차별 속에 있었던 신라 하대의 6두품 세력은 지방 호족과 연합하여 고려왕조를 여는 데 주도
적인 역할을 하였고, 권문세족에 맞섰던 고려후기의 신진사대부층은 조선건국의 주역이 되었다.
지식과 기술로 무장한 조선후기의 중인층 또한 양반을 대신할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인들은 양반 신분사회를 극복할 생각보다는 자신들도 양반을 닮아가고자 했던 안일한 입장에 머물렀다.
중인들의 시문집 편찬이나 개인 전기 편찬에 주력한 것 역시 이들의 한계를 보여준다.
결국 중인층은 새로운 사회변화 세력으로서 역사적 기능을 하지 못하고, '그들만의 리그'로 그친 중인 문화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중인들이 남긴 다양한 저작물들은 조선후기의 문화를 보다 풍요롭게 하고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역동적인 삶을 살았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 중인들의 백일장 '백전'
- 위항문학 참가열기 대단
조선후기 중인들은 시회를 결성하여 시와 문장을 짓는 한편 백전(白戰)이라는 백일장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 중에서도 18세기 중인문화의 중심지였던 인왕산 아래 송석원(松石園)에서 주관한, 봄과 가을의 백일장에는 수백 명이
몰려들었다. 이 백일장은 무기 없이 맨 손으로 종이 위에 벌이는 싸움이란 뜻으로 '백전'이라 하였는데, 참가하는 것 자체를 영광으로 여길 정도였다.
당시 치안을 맡았던 순라꾼도 백전에 참가한다면 잡지 않았다고 하며, 시상(詩想)을 떠올리기 좋은 곳에 자리를 잡기 위한 참가자들의 경쟁도 치열했다고 한다. 참가자들이 쓴 시축(詩軸:시를 쓴 두루마리 종이)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양반들도
중인들의 백전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당대의 최고 문장가들이 백일장의 심사를 맡아볼 정도였다.
백전은 정조 시대에 특히 활발하였다. 문예 중흥을 국가의 기치로 내건 시대 분위기에 맞추어 자신의 능력을 한껏 발휘하는 중인들의 위항문학 운동이 전개되면서 문화의 저변은 보다 확산되어 갔다.
백전이 벌어지는 날 인왕산과 옥류천 일대에 울려 퍼졌던 중인들의 함성은 새로운 변화의 시대로 나아가는 목소리였다.
신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