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31
7월24일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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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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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5bNNSBgcoM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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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하느님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수동의 극점에 서 계신 우리의 하느님!>
잡초로 뒤덮인 과실 묘목 밭을 단장하기 위해 예초기를 돌리다가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세달 이상을 잘 견뎌내고 이제 겨우 자리를 잡은 어린 나무 하나를 건드리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릅니다. 상처나 덜렁거리는 부위를 노끈으로 정성껏 묶고, 지지대까지 하나 세워줬습니다. 사과하는 마음으로 물도 듬뿍 주었습니다.
상처 난 여린 묘목을 싸매주고 일으켜 세워주면서, 제 머리 속에 문득 떠오른 생각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지난 세월 내 인생 여정 안에서 하느님께서도 내게 이렇게 똑같이 하셨겠지? 하는 생각에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더 이상 손써볼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앞에서도 ‘이제 틀렸어! 다 끝나 버렸어!’ 하고 포기하지 않으셨던 하느님, 상처입고 쓰러져 있는 나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셨던 하느님, 어떻게 해서든 다시 한 번 나를 일으켜 세워주시고, 다시 살려주시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셨던 하느님, 그런 하느님이시라는 생각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인내의 달인이신 하느님의 모습이 오늘 복음에서도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마태오 복음 13장 29~30절)
공동체를 유심히 살펴보면 일생에 도움이 전혀 안 되는 가라지 같은 존재들, 독버섯 같은 존재들이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는데, 저 같았으면 눈에 띄는 족족 과감히 솎아내야 외쳤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수확 때 까지 그냥 두라고 하십니다.
혹시 모를 변화나 회개의 가능성, 대대적인 방향 전환이나 새 출발을 기대하며 또 다시 인내하시면서 우리를 향한 기대와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밀과 가라지를 함께 자라도록 놔둔다. 마지막에 가서 가라지만 따로 묶어 불태워버리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섬뜩함이었습니다. 초반에는 그냥 좀 봐주겠지만 막판에 가서 제대로 손 한번 보시겠다는 말씀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진의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크신 자비, 엄청난 인내심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죄를 짓는 순간순간 마다 하느님께서 진노하시고, 하느님께서 인간을 단죄하시고, 인간의 기를 꺾어놓는다면,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도 하느님의 심판 앞에 견뎌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떠하든 그저 묵묵히 참으십니다. 한없이 기다리십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어찌 보면 너무나 무력해 보이는 하느님이십니다. 때로 너무나 나약해 보이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 하느님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수동의 극점에 서 계신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철저하게도 참아내시는 분, 우리의 악행을 끝까지 견뎌내시는 분, 우리의 불효를 끝끝내 인내하시는 분, 끝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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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FJsNkTuUr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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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기만 하면 내 기분을 바꿔줄 성령의 통로를 언제나 발견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밀은 하늘 나라 사람이고 가라지는 불 속에 버려질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밭의 주인에게 가라지를 뽑아버리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라고 명령합니다.
이 말은 주님의 일꾼이라도 밀과 가라지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수확 때, 즉 종말에 밀과 가라지를 구분하겠다고 말합니다. 이 뜻은 그 사람이 죽어 심판받기 전까지는 인간이 감히 그 사람을 심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먼저 나 자신이 밀인지 가라지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라지인데 밀인 줄 알고 끝까지 잘 못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밀과 가라지를 구분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일꾼들이지 본인 자신들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밀인지 가라지인지 알려면 사제나 수도자들에게 물어보아서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 점검해보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밀과 가라지인지 스스로 점검해 볼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그렇다면 성장하며 밀은 하늘 나라의 열매로 가득 찰 것이고 가라지는 하늘 나라의 열매가 아닌 다른 것들로 자신이 채워질 것입니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가 하늘 나라를 어떻게 정의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하느님 나라는 육체적 행복이 아닌 ‘감정의 행복’이란 뜻입니다. ‘감정’을 자기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의로움은 사랑과 같은 말입니다. 죄책감 없는 감정, 이것이 의로움입니다. 이 의로운 감정은 사랑의 감정과 함께 솟아납니다. 그리고 기쁨과 평화. 이것도 감정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잘 살피며 살아간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자기감정을 바쁜 일이 없을 때 꺼내 보는 오래된 사진첩처럼 여깁니다. 기분 전환을 위한 다른 것들에 초점을 맞추다가 실상 감정은 자기 내면의 방 구석에서 썩어버려도 참아냅니다. 이것을 자기희생으로 여기고 삽니다. 하지만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황창연 신부님의 강의 중에 자기에게 딱지를 끊으려고 한 경찰에 화내다가 사망한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잊히지 않습니다. 그는 정말 고위급 경찰을 아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딱지를 떼려는 경찰관에게 자신이 누군지 아느냐며 따지다가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위급 경찰이 오기 전에 유치장에서 뇌출혈로 사망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분이 바라보아야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자기를 구해주고 원수를 갚아줄 고위급 경찰이 오기만을 기다렸어야 할까요, 아니면 자신의 뇌혈관까지 터뜨리게 만드는 감정을 바라봐 주어야 했을까요?
어떤 사람은 가족을 위해서 자기의 감정을 바라보지 않고, 어떤 사람은 목표를 위해, 어떤 사람은 그냥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두려워서 감정을 바라보기를 회피합니다. 이렇게 속이 텅 빈 쭉정이, 혹은 가라지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숀 탠’이란 작가가 쓴 『빨간 나무』란 그림책이 있습니다. 그림책 안에 있는 대부분 그림은 우리 일상에서의 우울한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책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때로는 하루가 시작되어도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날이 있습니다.”
어떤 날은 안 좋은 일만 겹쳐서 일어나기도 합니다. 아무도 날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습니다. 그냥 나 자신이 세상이라는 거대한 기계 안에 사는 한 부속품처럼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나는 희망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지, 난 어디쯤 와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끝은 이렇습니다. “하루를 시작한 것처럼 그렇게 또 하루가 끝나갑니다. 그러나 문득 바로 앞에 밝고 빛나는 모습으로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 방 안에 조용히 자라고 있었던 ‘빨간 단풍이 든 나무’입니다. 빨간 단풍은 내 기분을 즐겁게 해 줄 무엇입니다. 파랑새와 마찬가지로 밖에서만 찾던 행복에 내면에 있다는 뭐 그런 뜻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그가 그린 모든 그림 안에 그 빨간 단풍잎을 숨은그림처럼 하나씩 그려놓았다는 것입니다. 신경 써서 찾아보지 않으면 거의 누구도 이 사실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소녀는 자신을 웃게 해 줄 다른 것들만 찾기만 하였지 정작 자신 주위에 떨어져 있던 빨간 단풍잎은 보지 못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이 책의 표지에는 온통 낙서투성이인 작은 종이배를 탄 소녀가 물 위에 뜬 빨간 단풍잎 하나를 바라보는 그림이 있습니다. 다른 것들을 보지 말고 빨간 단풍잎을 보라는 메시지입니다. 빨간 단풍잎은 우리 마음을 하느님 나라로 만들어줄 성령의 통로입니다. 내 노력이 아닌 성령께서 바꿔주시는 색, 바로 작게나마 용솟음치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단풍잎은 작은 나무가 되고 점점 커갈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안에 알곡을 채워가는 사람이 하늘 나라의 알곡을 채워가는 밀과 같습니다.
감정의 승리를 거두십시오. 어제보다 오늘 더 행복하고 작년보다 올해가 더 행복해지게 하십시오. 사람은 분명 어디엔가 초점을 맞추고 살아갑니다. 통장 액수나 자녀의 성장과 성공, 혹은 나의 지위 등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나의 감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목표를 위해 내 감정을 무시합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밀인지 가라지인지도 모르고 살게 됩니다.
나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그 감정을 기쁨으로 바꿔줄 성령의 통로를 찾으십시오. 찾기만 하면 항상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얻었는데 내가 가라지였다는 판정을 받는다면 어쩌겠습니까? 내 감정의 행복, 이것만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가라지가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운전할 때 길을 주시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살아갈 때 내 감정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연료 게이지도 보고 속도 게이지도 보고 음악도 틀며 즐겁게 가야 합니다. 그러면 결코 길을 잃지 않고 가라지처럼 될 일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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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3,24-30: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 함께 있으면서 악의 폐해가 있지만 결국에 악은 가려져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자연 식물로서의 가라지는 결코 밀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악한 사람으로 나타나는 인간은 언제나 회개하면 선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판단은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두라고 하신다.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이다. 영혼 깊이 좋은 것이 뿌려진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그 좋은 씨를 뿌린 이는 ‘말씀’이신 하느님이시다. 말씀이신 하느님은 이 세상에 계속 말씀의 씨를 뿌리신다. 이 말씀의 씨앗은 우리 마음속에 뿌려진 좋은 씨앗이며 우리 인간은 저마다 영적인 열매를 맺는다. 열매를 맺는 삶은 항상 하느님의 자녀로서 깨어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즉 주님의 계명을 잘 실천하지 못하는 나태한 때에, 악마는 좋은 씨들 사이에 악한 생각들이라는 가라지를 덧뿌린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마태 26,41)고 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좋은 씨를 뿌렸지만 악한 자가 깨어있지 못하는 그때에 가라지를 뿌렸고, 악에서 돋아난 그것들은 악한 자의 자녀이다. 이렇게 세상이라는 밭에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살고 있다.
밀과 가라지는 주님의 밭이라고 하는 교회에 언제나 함께 있는 것이다. 사람과 진짜 밀과 가라지는 다르다. 밭에 있던 밀은 가라지가 될 수 없고, 가라지는 밀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밀이었던 것이 가라지가 될 수도 있고, 가라지였던 것이 밀이 될 수도 있다. 우리 자신이 내일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종들처럼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28절)하면서 가라지를 뽑거나 잘라버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주인은 추수 때까지 그냥 두라고 한다.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29절) 다른 사람을 쉽게 단죄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오늘 악으로 타락하였다 해도, 내일 진리를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30절)고 말씀하신다. 또 가라지는 싹이 튼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대가 자라나지 않았을 때는 밀과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확실하지 않은 것은 판단을 하느님께 맡기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나는 “세상 종말”(마태 13,39) 때에, 즉 심판 때에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나라 전체에서 가라지들을 모두 거두어 타오르는 불구덩이에 던져버릴 것이다. 그 때서야 그들은 자기들이 자는 동안에 받아들인 것이 악마의 씨앗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울부짖으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42). 그리고 의인들은 그저 빛나는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 13,43)라고 하신다. 항상 깨어있는 삶으로 좋은 씨를 받고, 가꾸고 키워서 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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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신자들이 저에게 성경에 대하여 질문을 많이 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여 답하지만, 마지막은 언제나 “성경에는 정답이 없다.”라고 마무리하게 됩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네 삶을 바탕으로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삶이 다르고, 그 삶 속에서 해석되고 이해되기에, 매번 다르고 새롭게 드러나야 합니다. 똑같은 말씀을 읽는다고 하더라도 어제의 이해와 오늘의 느낌이 다릅니다. 그러나 다른 것일 뿐, 틀린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의 손으로 쓰였지만 ‘성령께서 지금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씨앗은 가능성입니다. 다만 씨앗을 먹는 것만으로는 배부름과 행복을 느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하늘 나라를 실현시켜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 말씀과 가르침에 따라 살아갈 때, 씨앗은 싹을 틔우고 자라 먹음직스러운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장애물들을 하나씩 걷어 내야 합니다. 일상의 무게로 지치고 힘들다는 이유로 말씀을 멀리하는 나태함과 게으름을 걷어 내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와 논리를 좇으며 그러한 것들에 익숙해져 깊이 생각하지 않고 습관처럼 판단하는 우리의 익숙함을 버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둘러보지 않고 자신의 욕심과 꿈만을 뒤쫓아 살아가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늘 나라를 실현하려면 말씀의 씨앗을 날마다 다르게 다가오는 삶의 자리에서 새롭게 해석해야 합니다. 그 자리가 언제나 좋은 땅일 수는 없습니다. 많은 장애물과 허물을 제거했다 하더라도, 비옥해진 땅은 다시 딱딱하게 굳어 버리고 돌과 가시덤불이 무성한 불모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씨앗을 싹틔우고자 날마다 삶을 가꾸어 나가며 좋은 열매를 함께 나누는 천국을 맛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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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카톡으로 좋은 글을 보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중에 하나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느 주일 저녁에 두 청년이 도박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도박장 근처에 작은 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교회 입구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그날 설교 제목이 적혀 있었습니다. 한 청년이 그 설교 제목을 보고는 마음이 찔려서 말했습니다. '얘, 도박장에 가지 말고 교회에 가자.' 그러자 다른 청년이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한 번 결심했으면 가야지, 교회는 무슨 교회야.' 결국 한 청년은 교회로 가고 다른 청년은 도박장으로 갔습니다.
30년 후, 그 때 교회로 갔던 청년은 미국의 22대(1885-1889), 24대(1893-1897) 대통령이 된 그로버 클리브랜드(Grover Cleveland)입니다. 클리브랜드가 대통령이 되자 각 신문들은 앞 다투어 발표했습니다. 이 신문은 시골 구석 구석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미국 교도소에 조그마한 감방에도 전해졌습니다. 교도소의 초라한 감방 2층 끝 방에는 얼굴에 흉측한 칼자국이 있는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간수가 이 죄수에게 신문을 건네주었습니다. 이 신문을 받아든 사형수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리고는 땅을 치며 통곡하며 후회했습니다. ‘그때에 올바른 선택을 했더라면’ 그 사형수는 그로버 클리브랜드 대통령의 친구 '조지'였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비슷한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린 기간은 대략 7년쯤 됩니다. 1491년부터 1498년까지 그렸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렸을까요? 그건 실제 모델을 보고 그린 것도 아니었고 순전히 상상에 의해 그려야했기 때문인데, 다빈치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찾았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대신할 만한 아름답고 선한 청년입니다. 다빈치는 자신이 상상하는 예수님의 순수함을 표현하기 위해 6개월이란 시간을 정성스럽게 그려 넣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제자들의 얼굴까지 그려 넣은 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의 사악함을 표현할 모델을 구하지 못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마의 한 사형수를 만나고 다빈치는 그가 자신이 생각하는 유다의 이미지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을 느꼈고 그 이후 그의 작업실에서 몇 달에 걸친 작업 끝에 유다의 모습은 완성되었습니다. 유다의 모습이 완성된 후 다빈치는 이제 그만 감옥으로 데려가라고 말하는데 연행되던 그가 갑자기 다빈치 앞에 무릎을 꿇고 질문했습니다. ‘제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난 당신 같은 사람은 만난 적이 없소!’ 그러자 죄인이 흐느끼며 말했습니다. 제가 바로 6년 전 예수의 모델이었습니다.
저는 두 이야기를 읽으면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밀과 가라지’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밀과 가라지는 분명 구분됩니다. 밀이 가라지가 될 수 없고, 가라지가 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성적으로 밀과 가라지는 구분되지 않습니다. 밀이 가라지가 될 수 있고, 가라지가 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교회 앞에서 멈칫했던 두 젊은이에게서 보았습니다. 두 사람은 어쩌면 당시에 가라지였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설교의 제목에 마음을 바꾸었고,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밀이 되었고,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설교의 제목을 보고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도박장으로 갔고 여전히 가라지로 살았습니다. 사형수가 되어 감옥에서 대통령이 된 친구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한 사람에게서도 보았습니다. 6년 전에는 누가 보아도 예수님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빈치는 그 젊은이를 모델로 예수님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바로 밀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같은 젊은이가 6년 후에는 예수님을 배반했던 유다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같은 사람이었지만 밀은 가라지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비단 이야기에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에서도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바로 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베드로는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바로 가라지의 모습이었습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잡아 감옥에 가두는 일을 하였습니다. 가라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바오로가 이제는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로 밀의 모습입니다. 신앙 안에서 밀과 가라지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오늘 제1독서는 명확하게 전해 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실행하고 따르는 사람은 모두 밀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부유한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아픈 사람도, 건강한 사람도, 남자도, 여자도, 노인도, 젊은이도, 아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 신앙의 거울로 한번 비쳐 보면 좋겠습니다. 나의 영적인 모습은 밀일까요? 가라지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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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의 비유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집주인처럼 주님은 선하시고 자비하실 뿐 아니라 그 인내심이 엄청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밭에 뿌려진 씨앗 가운데 밀뿐만이 아니라 가라지가 있는 것을 아시고도, 이를 뽑아 버리자는 종의 탄원에 수확 때까지 둘 다 자라도록 내버려 두자고 하십니다.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하루라도 빨리 가라지를 잘라 버리고 정리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지 않나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밀도 방해받지 않고 훨씬 더 풍성한 결실을 맺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하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에 모두가 다 구원받을 수 있기를 원하시고 마지막까지 기다리시는 것을 선택하십니다.
참고 견디며 기다리는 것은 사랑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그것은 우선 상대방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고, 또한 지금은 비록 잘못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변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마지막까지 열어 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더 발전할수록 우리는 신속하고 효과적인 것에 익숙해져 갑니다. 훨씬 편하게 세상을 살아가게 되지만, 동시에 인내심은 줄어들고 조급증만 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 안에서 주님의 인내와 기다림을 깊이 묵상해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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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을 보면서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 마지막 때에 가라지들을 거두어 태워 버리시겠다는 예수님의 경고도 귀담아 들을 말씀입니다.
세상의 악을 허용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두 가지 가능성을 우리에게 열어 놓으십니다. 살면서 자기 주변의 숨겨진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회심하여 악행을 버릴 기회를 찾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죄악의 결과에 대하여 마지막 날에 책임을 져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계약과 배반의 역사는 하느님을 섬기는 우리 자신의 역사의 예표가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악과 악행을 치유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가 가라지로 가득 찬 밭에서 헤쳐 나오지 못해 결실을 맺지 못하는 밀이 될 수도 있다는 경고도 됩니다.
비록 내 삶의 밀밭에서 많은 가라지들을 한꺼번에 뽑아낼 수는 없겠지만, 밀이 자랄 수 있도록 하나씩 뽑아 버리는 용기를 가져 보는 하루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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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제1독서에서 모세가 주님의 모든 말씀과 법규를 일러 주자 온 백성은 한 목소리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겠다고 답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기념 기둥을 세운 뒤 피까지 뿌리며 주님과 맺은 약속을 지키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곧 주님의 말씀을 어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하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그런데 그 비유 말씀을 듣다 보면 조금 어색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를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유하시는데, 사실 비유 안에서 하늘 나라는 씨를 뿌리는 사람이 아니라, 밀을 거두어서 모아 놓는 곳간과 연결되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왜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유하셨을까요? 그것은 좋은 씨를 뿌리는 당신 자신이 바로 하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하늘 나라는 하느님께서 계시는 장소를 의미한다기보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통치하시는 곳이면 어디나 하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전 존재가 하느님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당신이 행하신 기적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통치하고 계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자체로 하늘 나라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니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예수님 당신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을 뜻하고(마태 4,7 참조), 하늘 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는 말은 당신 자신이 폭행을 당하고 있다는 말이며(마태 11,12 참조), 하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한다는 것은 종말 때 당신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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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태오복음>에서 세 번째 설교집인 13장은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핵심 메시지인 “하늘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일곱 가지의 비유를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중 두 번째인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24)
당신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밭으로 삼아 좋은 씨를 뿌리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분명 좋은 씨는 좋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신의 밭”에 침입자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마태 13,25).
그렇습니다. 가라지가 뿌려진 것은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벌어진 일입니다. 곧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나아가, 자신의 밭에 뿌려진 “좋은 씨”를 방치한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자신 안에 심어진 말씀의 씨앗에 응답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편리와 안주로, 자신이 잠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가라지는 뿌려집니다. 그러기에,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먼저 “좋은 씨”의 존귀함을 깨닫고, 깨어 지켜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가라지와 밀을 분별할 줄을 알아야 하고, 가라지가 기승을 부리는 것을 막고 “좋은 씨”가 잘 자라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 13,28)라고 말하는 종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29-30)
사실, 가라지는 밀보다 뿌리를 깊이 내리기도 하고, 밀의 뿌리와 서로 얽혀 있기에 자칫 가라지를 뽑으려다 밀까지 뽑히게 되기 때문에 수확 때에 뿌리를 함께 뽑아서 분리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두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밀’인 사람들에게 수확 때까지 견뎌내는 성실함을 당부함이라 말하며, 히에로니무스는 ‘가라지’인 사람들에게 회개의 가능성을 열어 둠을 시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자신이 가라지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성 베네딕투스는 그의 [수도규칙]에서 말합니다.
“악습은 미워하되 형제들은 사랑할 것이다. 책벌함에 있어서는 현명하게 할 것이며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 것이니, 녹을 너무 지우려다 그릇을 깨뜨리는 격이 되지 않기 위함이다.”(규칙서 64,12)
사실, 공동체 안에도, 가정 안에도, 우리 자신 안에도,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고 있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참으로 망막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때,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마태 6,14)라는 주님께서 가르쳐준 기도를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혹이나 악을 제거하거나 없애주거나 해결해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그것으로부터 구해달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 속에서 당신이 주님이심을 깨닫고, 주님이신 당신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동행하시는 주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 속에서 주님 사랑하기를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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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25)
주님!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 되게 하소서!
제 안에 하늘이 열리고 당신의 나라가 자라나
온갖 나쁜 것들을 도려내고 당신 형상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이 세상과 형제들과 공동체를 밭으로 주셨으니
제 손이 당신 사랑을 뿌리게 하소서.
오늘, 우리 안에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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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13,30)
어제 복음묵상글을 받아보신 어느 자매님께서 이런 답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수시로 길가로 돌밭으로 가시덤불로 가끔씩 좋은 땅으로 우왕좌왕 천국과 지옥을 넘나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답글을 남겼습니다. "그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고, 내일 복음인 밀과 가라지의 비유가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밀이 자라는 밭에 가라지가 함께 자랍니다. 밀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의 모습'을, 가라지는 '악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합니다. 우리 안에서 밀만 자라면 좋겠는데, 원수가 뿌려놓은 가라지도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십니다.
왜, 그러셨을까? 아마도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에 밀과 가라지의 모습을 넘나드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고, 우리의 여정이 끊임없는 가라지와의 싸움을 통해 밀의 모습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회개의 여정이기 때문에 그렇게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셨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독서(창세24,3-8)를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법규를 일러주자,
온 백성이 한목소리로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실행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힘주어 "yes!" 라고 대답했지만, 그들의 삶은 'yes와 no'를 넘나드는 삶이었습니다. 때로는 선의 모습인 하느님의 모습을 하고, 때로는 악마의 모습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이것이 지금의 우리의 모습, 나의 모습은 아닌지요? 그러니까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무위도식의 삶을 살아도 괜찮다는 말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내 안에서 밀과 함께 가라지도 자라고 있다는 것을 항상 인식하면서, 우리의 모습이 하느님의 모습인 '밀의 모습'이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도 악과 싸워 승리하는 자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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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눈길 마음길>
마태오 13,24-30 (가라지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눈길 마음길>
가라지를
보고 있으니
확 뽑고 싶지만
밀을
보고 있으니
곱게 키우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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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람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다릅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에 대해서 좋고 싫고가 갈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이해해보면 다른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방송인 중에 누구를 너무 싫어한다고 말합니다. 그의 ‘큰 목소리’ 때문이었습니다. 큰 목소리는 상대를 윽박지르는 것 같다고, 청각에 예민한 자신에게는 너무나 싫은 목소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방송인이 자신의 목소리가 크다는 것을 어느 방송에서 인정하면서, 귀가 어두웠던 아버지를 위해 목소리를 키우다 보니 지금의 목소리가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이 이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전히 그 큰 목소리가 좋지는 않지만 혐오스러울 정도로 싫지는 않았습니다. 상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미움의 감정이 생길 때, 이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 합니다. 입장도 바꿔보고 경청도 하면서 말입니다. 주님의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 편이셨습니다. 우리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 죽음을 선택하시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 편이 되셔서 큰 사랑을 계속 전해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이 사랑은 오늘 복음의 가라지 비유 말씀을 통해서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밭에 좋은 씨만 있는 줄 알았는데, 원수가 뿌린 가라지가 자라고 있습니다. 종들은 가라지를 뽑아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종들을 만류합니다.
가라지를 깨끗하게 없애겠다고 뽑아내다가 같이 있는 좋은 밀까지도 뽑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고 하시지요. 지금 우리의 잘잘못을 곧바로 따지고 벌하시는 주님이십니까?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죄를 짓고 있으며 때로는 뻔뻔한 모습으로 주님을 배반하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냥 뽑아서 제거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시간을 허락해주십니다. 이는 좋은 밀이 될 시간으로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되길 원하시는 시간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주님의 모습에 어떤 모습으로 다가가야 할까요? 죄를 지어도 가만히 놔두는 모습에, 힘없는 주님이구나 하면서 더 큰 죄를 짓는 못된 가라지가 되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우리 역시 주님처럼 나의 이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의 길을 걸을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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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낮추는 겸손>
유럽 중세 때에 큰 공이 있는 사람의 동상을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동상을 남이 세워주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세웠다고 하네요.
영국에 ‘가단’이라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워서 모든 이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동상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단’에게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가단은 어째서 동상을 세우지 않는가 하고 묻기를 원하지, 사람들이 가단은 어째서 동상을 세웠느냐고 묻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후에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 수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스스로 높이는 것은 결코 아름다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낮추는 겸손은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입니다. 주님보다 위에 오르지 않으려는 겸손한 자만이 진정으로 주님의 뜻을 성실하게 따르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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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끝이 좋아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윤동주-
하늘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고, 원인대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하늘에 순종하는 사람은 살고, 하늘을 거역하는 사람은 망하는 법입니다. 수확 때에 가라지는 거두어서 태워버리고 밀은 곳간에 모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알곡이 되어야 합니다.
농사일을 하는 종이 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뿌린 씨는 좋은 것이었는데 어찌 가라지가 생겼습니까? 가라지를 거두어낼까요?’하고 묻자 주인은 말합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우리는 내 맘에 들지 않는 것을 뽑아버리는 것이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추수 때까지 두어서 기회를 주십니다. 결정적으로 알곡은 곳간에 모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추수 전에 밀과 가라지를 판별하여 골라내려는 노력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인의 계획을 간섭하는 일이 됩니다. 판단의 권리는 주인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로마12,19) 주인은 가라지와 그로인한 피해를 참아주며 기다립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잡으십시오.
가라지 같은 인생이라면 서둘러 밀과 같은 인생으로 바꿔야 합니다. 방황을 끝내고 과거에 안주하지 않으며 하늘을 보고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성경인물 중에 훌륭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모세, 다윗, 베드로, 바오로도 한때 방황의 삶을 살았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렇고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방탕한 삶을 끝내고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야말로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선과 악은 밀과 가라지가 추수 때 구분되듯이 세상 종말에 분명하게 구분될 것입니다. 가라지와 같은 악인들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영원히 살 것 같지만 추수 때 따로 베어져 불태워지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시련 속에서도 좋은 열매를 맺었던 밀과 같은 선한 사람들은 하늘의 곳간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겪게 되는 시련이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나를 견고케 하는 귀한 은총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끝날을 아름답게 맞이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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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선과 악이 공존하는 영적전장(靈的戰場)>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고 끝까지 기다리십시오!”-
하늘 나라의 비유들중 오늘은 두 번째,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이어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가라지로 상징되는 악과 밀로 상징되는 선의 공존 속에 살아내야 할 하늘 나라임을 깨닫습니다. 하늘 나라는 마냥 이상적이고 환상적인 현실이 아니라 선과 악의 치열한 영적전쟁의 현실임을, 참으로 주님의 평화의 전사, 인내의 전사, 자비의 전사, 지혜의 전사로 살아야 하는 현실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점을 분명히 통찰하셨을 것이며 가라지의 비유 또한 예수님의 삶의 지혜를 보여줍니다.
악의 신비입니다. 악의 기원을 찾는 것은 부질없는 헛수고입니다. 이미 선과 악이, 밀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선과 악의, 밀과 가라지의 공존의 현실을 인정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 종들과 집주인의 대화가 이런 현실을 분명히 일깨워 줍니다.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들을 거두어 낼까요?”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 지도 모른다. 수확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이 대화 안에 삶의 모든 지혜가 다 들어 있습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지혜를, 예수님의 지혜를, 삶의 지혜를 보여줍니다. 선과 악이, 밀과 가라지가 염연히 공존공생하는 현실입니다. 이런 선과 악이 공존공생하는 세상의 축소판이 우리 마음입니다. 100% 순도純度의 순수한 마음은 없다는 것입니다. 선한 밀밭같은 마음안에 끊임없이 솟아나는 가라지들의 현실 역시 우리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실존적 체험입니다.
악이 없는, 가라지가 없는 유토피아 세상은 환상입니다. 가라지들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 처방일까요. 자비와 지혜는 함께 갑니다. 자비의 마음에서 지혜도 겸손도 나옵니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나의 내면을 인정하는 것 또한 자비와 지혜요 겸손입니다.
도대체 나는 밀입니까 가라지입니까? 누가, 무엇이 밀이고 가라지입니까? 가라지인 줄 알고 뽑았는데 밀이면 어떻게 합니까? 참된 회개를 통해 변하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가라지 같아도 언젠가 밀이 될 수도 있고, 현재는 밀같아도 악한 생활이 습관화되면 가라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라지같은 사람도 실상 만나보면 밀로 드러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참으로 진상眞相을 보기 보다는 내 선입견, 편견의 색안경을 쓰고 보기에 가라지인지도 모릅니다. 참으로 착각과 오해로 가라지같은 존재로 단정해 버리는 경우는 얼마나 비일비재한지요. 또 세상에 자기를 가라지같은 존재라 하면 분노하지 않을 자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분별하기 힘든 것이 선과 악, 밀과 가라지입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께서는 악의 가라지도 당신 섭리의 도구로 쓰실 수도 있습니다.
분명 가라지라 합시다. 가라지를 뽑아 버리는 것이 그리 단순합니까? 발본색원拔本塞源한다 하지만 악을 뿌리 뽑은 적은, 범죄와의 전쟁을 한다 하지만 이긴적인 한번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악순환惡循環으로 인한 후유증이 너무큽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온통 가라지밭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가라지가, 악이 없는 세상이 바람직한 세상일까요? 그럴리도 없겠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사람되기는 불가능합니다. 가라지와, 악과 영적전쟁중에 성장 성숙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가라지가, 악이 없다면 애당초 분투의 수행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라지와 함께 가는 밀의 성장이듯 악과의 영적전쟁중에 영적성장입니다. 문제는 조화와 균형입니다. 바로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의 비교가 좋은 깨우침을 줍니다. 서양의학은 병의 원인을 제거하는데 집중합니다만, 동양의학은 병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 병과 건강의 조화와 균형에 중점을 둡니다. 가라지를 없애기 보다는 밀의 세력을 강화시켜 가라지 세력을 서서히 약화시키는 원리와 흡사합니다.
이래서 칭찬과 격려가 백배 효과적입니다. 가라지 단점을 추궁하고 지적하기 보다는 장점을 칭찬 격려하여 단점을 서서히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7의 장점에 3의 단점을 지녔다면 7의 장점을 칭찬, 격려하고 3의 단점은 그대로 놔둬도 점차 시들어 없어질 것입니다. 녹을 지우려다 그릇을 깰 수 있습니다. 참 약한 인간이라 3의 단점을 고치려 하다가 7의 장점도 위축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깨달아 알 때 까지 끝까지 기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끝까지 참고 견디며 기다리는 자비와 지혜, 인내의 사람이 결국은 승리합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무한한 희망을, 신뢰를 둘 때 이런 인내의 기다림이 가능합니다. 참으로 분별하기 힘든 밀과 가라지이니 최종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고 가라지 현실 속에서도 변질, 부패되지 않도록 내 자신을 강화하는 수행이 절대적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하느님께 가까워질수록 밀이요 하느님께 멀어질수록 가라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가라지하니 쓰레기가 연상됩니다. 참 인스탄트 시대 쓰레기가 넘치는 세상입니다. 때로는 사람을 비하할 때 쓰레기 같다하여 심지어는 기자들을 기레기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니 가라지같은 쓰레기 같은 삶이 되지 않도록 주님을 닮은 참 나를 살기위한 분투의 수행이 절실한 시절입니다. 바로 제1독서 탈출기의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 앞에서 다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실행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
밀과 가라지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입니다. 세상 종말까지 이런 현실은 계속될 것입니다. 말 그대로 영적전쟁의 현실입니다. 최종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고 하루하루 주님의 자비의 전사, 지혜의 전사, 겸손의 전사, 평화의 전사, 인내의 전사가 되어 영원한 현역의 전사로 분투의 수행을 다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우리가 모시는 주님의 성체가 우리 내면의, 공동체의 악의 가라지 세력을 약화시키고 선의 밀의 세력을 강화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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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영적 삶에서 가라지와 같은 장애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가르쳐 주십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마태 13,25)
사람들이 잠든 사이에 가라지가 뿌려졌다는 말씀에는 상징적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복음서 곳곳에는 "깨어 있어라"는 예수님 말씀이 새겨져 있지요. 잠들었다는 것은 육신의 잠만을 의미하지 않고 영적 각성이 무뎌진, 영혼의 무방비 상태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나는 잠들었지만 내 마음은 깨어 있었지요."(아가 5,2)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영혼의 상태를 아가의 한 구절이 잘 표현했습니다. 잠들었지만 깨어 있는 상태! 영적 삶에서 목적의식이 분명하고 추구하는 바가 확실한 이는 비록 육신이 잠든 때라도 항상 사랑하는 분을 향합니다. 주님은 그러한 이의 육신이 깨어 있을 때나 잠들어 있을 때나 상관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오셔서 일치를 이루시지요.
육신과 함께 영혼이 잠든 때는 원수가 활동하기 좋은 때입니다. 신분이나 지위, 영적 학문적 성취로 기본 진리와 양심에 무감해진 영혼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고 스스로 만족해 자기도취의 잠에 빠진 순간, 언제라도 원수의 먹잇감이 되기 쉽지요. 그러면 주님이 아무리 좋은 씨를 뿌리셨어도 어느새 덧뿌려진 가라지 때문에 밭 전체가 몸살을 앓게 됩니다.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마태 13,28)
예상에 없던 가라지의 출몰로 종들이 수선을 피웁니다. 열매를 맺을 때에 비로소 드러난 가라지가 밀들과 온통 뒤섞여 있어 쉽게 제거하기도 어려울 듯 보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오히려 담담하지요. 가라지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고, 앞으로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도 아는 까닭입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30)
이것이 주인의 해법입니다. 주인은 가라지를 뽑다가 자칫 소중한 밀 한 가닥이라도 상할까 걱정합니다. 좋은 밭에 좋은 씨를 뿌리고서는 추수 때까지 밀과 가라지를 함께 두고 보아야 하지만 주인인 본인이 감수하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영혼에게 뿌려진 가라지를 그렇게 인내하십니다. 이 세상에 혼재하는 가라지들도 마찬가지십니다. 그가 잠들거나 무뎌졌다고 나무라지 않으시고 그저 묵묵히 바라보며 밀들이 가라지에게 치이지 않기를 격려하고 응원하십니다.
사실 가라지로 인해 손해를 보는 이는 종들이 아니라 주입니다. 거둬들일 밀의 상태나 수확량에 영향이 미칠 것이 뻔하지만 그분은 감수하십니다. 어쩌면 밀도 가라지와 함께 자라는 불편하고 성가신 기간을 견뎌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마태 13,30)
당장 가라지를 제거하고 해치워 원래의 순결하고 청정하고 완벽했던 상태를 구현하는 일은 주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가라지에게 곳간의 자리를 내어주지도 않지요. 가라지 때문에 오염되고 훼손되었다고 밀을 가라지와 뭉뚱그려 태워 버리지도 않으실 겁니다. 수확 때에 비로소 밀과 가라지의 운명은 갈릴 것입니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주님의 계약이 체결되는 장면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와서 주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법규를 일러 주었다.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실행하겠습니다.'"(탈출 24,3)
"계약의 책을 들고 ... 백성에게 들려 주었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탈출 24,7)
짐승의 피를 뿌리며 계약을 체결하기까지 모세는 반복하여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원하시는 바를 들려 줍니다. 그리고 백성도 그대로 따르겠다고 반복해 선언하였지요. 백성은 하느님 영광과 권능을 체험했기에 그 순간 진지했고 의욕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이 결심은 오래지 않아 불안과 맞바꾼 금송아지 숭배로 변질되어 하느님의 진노를 사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 여정에서 중요한 순간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입교, 세례, 견진, 영적 체험의 순간들... 그때마다 얼마나 우리 마음이 타올랐고 열정이 충만했으며 힘주어 신앙을 고백하고 약속들을 바쳤는지요!
그토록 신앙과 사랑이 충만했던 우리건만 잠든 사이, 깨어 있지 못한 사이에 어느새 가라지들이 우리 존재 곳곳에 들어와 깊숙이 박혀 버립니다. '이게 뭐지? 내가 왜 이러지?' 하고 의식한 순간은 이미 혼자 힘으로 뽑아내기 어려운 상태로 자란 뒤입니다. 놀라며 소란을 피워보지만 자기 손으로 뚝딱 제거하기는 정말 어렵지요.
이때는 자칫 자신 안에서 주님의 은총으로 자라난 밀들을 바라보기보다 가라지만 바라보며 슬퍼하고 절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가라지보다 주인의 자비를 바라보며 힘과 용기를 내어 함께 품고 가야합니다. 그분이 인내하시니 우리도 인내하며, 그분께서 거두어 주실 때까지 말입니다.
행여 우리 존재 안에 가라지가 보이더라도 너무 놀라거나 절망하지 맙시다. 어쩔 수 없이 수확 때까지 동행해야 하는 가라지는 이미 주님도 잘 아시니 그분께 숨기거나 외면하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늘 깨어 있도록 영혼을 정비하면서 원수에게 더는 틈을 주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지요. 그래서 우리에게 말씀이 주어지는 겁니다. 말씀을 경청하고 머물고 사랑하고 실천하는 동안에는 적어도 우리 영혼이 깨어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여라. 그 말씀에는 너희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다."(복음 환호송)
가라지만 보지 말고 말씀을 주목해 우리의 영적 여정을 채워나가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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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TKe7eEMrP3Y&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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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 30)
우리 내면에
귀를
기울여야할
믿음의
시간이다.
믿음은
마음을 되찾는
마음의
만남이다.
우리 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밀과
가라지와의
끊임없는
싸움이다.
그 누구도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가라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가라지를
수용하지
않고서는
우리 삶은
평화로울 수
없다.
신앙은
가라지를
주님께서
하시도록
맡겨드리는
믿음이다.
가라지에
묻혀버리는
밀이 되어서는
안된다.
가라지가
우리 발목을
붙잡게 해서는
안된다.
밀의 반대는
가라지가
아니다.
그 어떤 것에도
갇혀있길
바라지 않으시는
주님이시다.
밀의 진정성은
밀로 풍요롭게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성찰의
정체성이다.
밀은
가라지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삶의 새로운
기쁨이란
가라지를
뽑으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수확의 주님을
우리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분열과 대립이
아니라
소통과 통합의
주님이시다.
수확의 주님께
밀과 가라지를
맡겨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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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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