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779
■ 3부 일통 천하 (102)
제12권 사라지는 영웅들
제 12장 조무령왕과 호복기사 (3)
초회왕(楚懷王)이 연금되었다는 소식은 즉각 초나라의 수도인 언영에도 전해졌다.
"어떻게 이럴수가.......!"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초회왕을 무관으로 나가도록 권유했던 친진파(親秦派)는 얼굴을 들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이대로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
그 무렵, 초(楚)나라는 묘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 초회왕(楚懷王), 함양성 연금
- 세자 횡, 제(齊)나라 볼모
임금과 그 계승자인 세자가 모두 타국에 억류되어 있는 것이었다.
상황으로 보아 진(秦)과 제(齊)나라가 쉽게 초회왕과 세자 횡을 돌려보낼 것 같지도 않았다.
미증유(未曾有)의 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럴 때 진(秦)과 제(齊)가 연합해 공격해온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대관절 이를 어찌 처리해야 좋은가?"
적어도 이 순간에는 친진파도 친제파도 없었다.
모두들 한자리에 모여 이 국난을 어떻게 타개해나갈 것인가 머리를 짜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근상(靳尙)의 입에서 엉뚱한 말이 흘러나왔다.
"할 수 없습니다. 공자 난(蘭)을 왕위에 올리는 수밖에요."
모든 신료의 눈이 근상에게로 쏠렸다. 그럴 듯한 안(案)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이 난 근상(靳尙)은 덧붙여 설명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왕도 세자도 모두 타국에 억류되어 있는 형편입니다. 돌아올 가망성도 없습니다. 국내에 있는 공자라도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 초(楚)나라는 조석간에 멸망당하고 말 것입니다."
"괜찮은 생각이오만.... 왕과 세자가 다 살아 있는데 다른 사람을 왕위에 올린다는 것이 어쩐지 내키지 않는구려."
이렇게 말하고 나선 사람은 영윤 소저였다.
"내키지 않는다고 이대로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차라리 제(齊)나라에 사람을 보내 국상이 났다고 거짓말을 하여 세자 횡을 돌려달라고 청하는 것이 어떻겠소? 만일 그래도 제나라가 들어주지 않으면, 그때 가서 공자 난(蘭)을 왕위에 모셔도 늦지 않을 것이오."
"그것이 좋겠구려."
근상(靳尙)이 순순히 동의함으로써 조정의 의견은 일단 하나로 모아졌다.
초(楚)나라 조정은 분주히 움직였다.
제나라로 갈 사자로는 친제파의 대표인 굴원(屈原)이 지명되었다.
굴원은 곧 제나라의 수도인 임치로 갔다.
이때 제나라의 임금은 여전히 제민왕(齊湣王)이었다.
- 우리 나라 왕이 죽었습니다. 세자 횡을 돌려보내주십시오.
이런 제안을 받은 제민왕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초(楚)나라를 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고심 끝에 많은 문객을 거느리며 점차 국내외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맹상군(孟嘗君)을 불러 자문을 구했다.
- 초나라 세자를 돌려보내지 말고 회수 이북 땅을 할양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어떻겠소?
이에 대해 맹상군(孟嘗君)은 명쾌하게 대답했다.
- 그것은 안 될 말입니다. 초왕(楚王)의 아들은 세자인 횡만 있는 게 아닙니다. 초나라가 우리의 요구를 거절하고 다른 아들을 왕위에 올려놓는다면 우리는 졸지에 아무 효력이 없는 인질을 붙잡고 있는 셈이 되고 맙니다.
- 또한 천하의 모든 나라로부터 의롭지 못하다는 비난만 들을 것입니다. 그러지 마시고 세자 횡을 초(楚)나라로 돌려보내 왕위에 오르게 하십시오.
맹상군의 충고에 제민왕(齊湣王)은 마음을 정했다.
굴원을 불러 세자 횡을 내주었다.
이로써 굴원(屈原)은 무사히 세자 횡을 모시고 초나라로 돌아와 왕위에 오르게 하니, 그가 곧 초경양왕(楚頃襄王)이다.
초나라의 영윤 소저는 초경양왕을 모시자마자 가장 먼저 진(秦)나라에 사자를 보내 통보했다.
- 우리는 신령스러운 사직(社稷)의 가호 아래 새 왕을 옹립했소.
이 말을 풀이하면 이렇다.
함양에 연금되어 있는 초회왕(楚懷王)은 이제 아무 소용없다.
그러니 진왕은 검중(黔中) 땅을 얻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
이런 조롱이 아니겠는가.
초(楚)나라로부터 뜻하지 않은 통보를 받은 진소양왕(秦昭襄王)은 분노보다는 허탈감이 앞섰다.
대국의 체모를 버려가면서까지 속임수를 써 초회왕을 인질로 삼았는데, 그 인질이 그만 공질(空質)이 되고 만 것이었다.
공질이란 '효력이 없는 인질'이라는 뜻이다.
허탈감이 사라지자 분노가 치밀었다.
"군사를 일으켜 초(楚)나라를 쳐라!"
진소양왕(秦昭襄王)의 분풀이였다.
진나라는 백기(白起)가 대장이 되고 몽오(蒙鰲)가 부장이 되어 초나라의 영토를 유린했다.
석읍 등 열다섯 개의 고을을 빼앗고 돌아갔다.
불쌍하게 된 것은 공질(空質)이 된 초회왕뿐이었다.
더욱이 그는 이제 왕이 아니었다.
그는 진소양왕 보다는 고국의 신하들이 더 원망스러웠다.
'돌아가 다시 왕위에 오르리라!'
이렇게 결심한 그는 그때부터 탈출을 계획했다.
1년여를 그렇게 보내는 중에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감시병이 졸고 있는 틈을 타 옥(獄)을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일반 백성의 옷으로 갈아 입은 초회왕(楚懷王)은 함양성을 나와 초나라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뒤늦게 초회왕의 탈출을 안 진소양왕(秦昭襄王)은 초나라로 이어지는 모든 길을 막았다.
초회왕(楚懷王)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경계망을 뚫고 초나라로 달아날 수가 없었다. 어쩔수 없이 발길을 북으로 돌려 조(趙)나라로 향했다.
조(趙)나라 국경을 지키고 있던 관리는 초회왕이 망명을 신청해오자 자신이 결정한 사안이 아님을 알고 즉시 도읍인 한단(邯鄲)으로 사람을 보내 물었다.
- 초왕(楚王)이 지금 국경에 와 있습니다.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여기서 잠시 조나라에 대해 알아보자.
소진(蘇秦)에 이어 장의(張儀)가 출현하여 진나라 재상에 올라 바야흐로 한창 연횡책을 유세하고 다닐 무렵인 BC 326년(진혜문왕 12년)에 조숙후가 죽고 그의 아들 옹(雍)이 군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조무령왕(趙武靈王)이다.
조무령왕은 조나라를 세운 조양자(趙襄子)만큼이나 유명한 왕이다.
단순히 유명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많은 공적을 세우기도 했다.
조(趙)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명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니, 그는 명군이라기보다 좀 별난 왕이었다.
그가 유명하게 된 것은 중원 국가 최초로 기마대(騎馬隊)를 창설했기 때문이었다.
조무령왕(趙武靈王)은 즉위할 무렵 나이가 어렸다.
왕이 어려 정무를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박식한 관리 세 사람과 사과(司過) 세 사람, 여섯사람이 보좌하였다.
<사기(史記)>의 <조세가(趙世家)>에 기록되어 있는 글이다.
사과(司過)란 군주의 과실을 사찰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관리다. 사부(師傅)인 셈이다.
이들로 하여금 어린 조무령왕을 도와 정사를 살피게 했다.
이때의 대표적인 사부가 비의(肥義)라는 현신이다.
하지만 조무령왕(趙武靈王)은 생각처럼 그렇게 어리지는 않았음이 분명하다.
조무령왕 5년, 한나라 여자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당시 대개의 남자들은 30세가 되어서야 결혼을 했다.
만혼(晩婚)의 풍습때문이었다.
예외적으로 일찍 결혼하기도 했으나 일러야 20대였다.
조무령왕(趙武靈王)은 재위 5년 만에 부인을 맞이해 들였으니 아마도 재위 당시 나이 15세 정도이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부(師傅) 여섯 명으로 하여금 보좌하게 했다는 것은 조무령왕이 그만큼 신중하고 겸손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