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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한 마디의 말, 사람 관계, 죽음에 대해서 아는 것 외
한국교육자선교회 김형태 이사장님께서 나누신 글입니다.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한 마디의 말
말 한 마디에 살고 죽는다는 말이 있다.
말 한마디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뜻하는 말이다.
절망중에 빠진 사람에게
"용기를 내라.이번 일만 잘 극복하면 당신은 잘될 수 있다. " 고 말하며 격려한다면
그사람은 살기위해 힘을 낼 것이다.
하지만 " 당신은 이미 끝났어. 아무리 해 봐도 희망이 안 보여." 라고 한다면
다시 일어날 생각을 포기해 버린다.
실제로 무너진 굴에 갇힌 사람이나 참혹한 절망 가운데 놓인 사람들에겐
두 가지 현상이 뚜렷이 나타났다고 한다.
희망을 가진 사람은 살았고, 절망에 빠져 포기한 사람들은 죽었던 것이다.
한 마디 말도 신중하게 하라,
한 마디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게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라.
한마디 말은 핵폭탄보다 더 강한 폭발력을 지녔다.
여기에 말의 위대성이 있는 것입니다.
-백년 후에 읽어도 좋은 잠언
김육림
오늘 누구를 만나 희망과 긍정을 심어주어야 하나? 에 해답하는 순간을 갖자.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 세상을 말(언어)들이 지배하고 있다.
지혜 있는 자는 감언이설에 속지 않지만
이레 속고 저래 속아야 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 아니던가!
사회라는 바다를 떠나지 않고야
늘 타인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으니,
심지어 아베의 망언 때문에 우리 국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닌 것은
국력에도 문제가 있음을 안다.
그렇다고 이웃의 치졸한 감정에 편승해서 질 낮은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자기라는 맨발의 앞길에 가시를 뿌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먼 장래를 바라볼 줄 알면 오늘 분연히 말조심 해야 한다.
일본을 이기려면 조용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쥐잡는 고양이에서 배울 수 있다.
쥐를 잡을 고양이는 민첩한 실력으로도 침묵하며
인내하는 기지로 열정을 모아 단번에 쥐를 제압 한다♡♡♡♡
💖 사람 관계 💖
사람의 마음은 간사해서 수많은 좋았던 기억보다
단 한번의 서운함에 오해하고 실망하며 틀어지는 경우가 참 많아요.
서운함보다 함께한 좋은 기억을 먼저 떠올릴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 되세요.
먼저 고맙다고, 먼저 미안하다고 말한다면
사람관계는 나빠지려고해야 나빠질 수 없습니다.
사람 관계에서는 이기고 지는 것이 없습니다.
먼저 고맙다고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세요.
식사 후 적극적으로 밥값을 계산 하는 이는 돈이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돈보다 관계를 더 중히 생각하기 때문"이고,
일할 때 주도적으로 하는 이는 바보스러워서 그런 게 아니라
"책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다툰 후 먼저 사과하는 이는 잘못해서 그러는게 아니라,
"당신을 아끼기 때문" 입니다.
늘 나를 도와주려는 이는 빚진 게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진정한 친구로 생각하기 때문"이며,
늘 카톡이나 안부를 보내주는 이는 한가하고 할 일이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마음 속에 늘 당신을 두고 있기 때문" 입니다!
잊지마세요
소중한 인연을 아끼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진정 행복한 삶이란 것을..~♡
인생의 정답에 관하여
dr.shalom
인생에 정답이 없다하나
진실은 인생에는 정답이 있으나
모를 뿐이라는 것
없다함과 모른다함은 매우 다른 것
애초 없는 것은 찾을 필요가 없고
모르는 것은 배울 필요가 있는 것
정답은 매번 있으나
없다고 막막하게 살고
모른다고 막연하게 살면 안되는 것
인생엔 참 길이 있어 길을 따라 감이 정답이요
인생엔 참 문이 있어 문을 따라 감이 정답이라.
영은 하나의 답을 알아 정답을 따르나
혼과 육은 여러 답을 알아 답답하니라.
인간이 모르는 미래를 비전은 알아 인도하니
비전은 미래를 좇지만 정답으로 인도하니라.
욕심 부리지 말기/양 의섭 목사
오래 살겠다는 욕망
그것이 퍽 큽니다
그런데 나는 바보같이
적당히 살고픕니다
부족함 없이
내게 적당한 삶
그것으로 족하고
행복하게 살고픕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들
너무 오래 독점하여
누군가가 궁하지 않도록
그러고 싶습니다
물론 그 적당함이
어디까지냐고 따지겠지만
그래도
적당히 살고픕니다
얼마를 살던
인생은 늘 아쉬움
그러니 욕심을 버리고
적당히 미소 지으며 안녕!
이곳은 잠시 머무는 곳
저곳에 영원이
나를 기다리는데
갈 때 가야죠.
♡성경에는 실패한 부자 두 사람이 소개되어 있다.
1. 농업소출이 풍성한 부자(눅 12:16~20)
2. 응당 행할 일을 행치않은 부자(눅 16:22~25)
부자가 도리어 불행이 된 경우다.
돈은 소유권보다 사용권이 축복하다
소유하면 나쁜 주인이 되고, 사용하면 좋은 하인이 된다.
불효 / 이 경화
어머님 살아생전
즐겨 입던 옷 묻길래
콧줌배기 실로 꿰맨 검정 고무신
밤색 스웨터 몸빼바지
말하고는 껄껄 웃었다
어떤 점을 좋아했느냐고 묻길래
시골집 황토벽에
무쇠솥 걸린 부엌
방고래에 매콤한 연기 퍼져도
열두 식구 밥해주는 낙으로 살았노라
말하고는 피식 웃었다
좋아하던 음식 묻길래
가마솥의 누룽지
생선 대가리라고 소리쳐 말하고는
하늘을 바라보며
목 놓아 울었다.
♡ TV 프로에 '그때를 아시나이까' 또는 '인간시대' 나 '전원일기' 를 보는것 같다.
지금은 개인소득 3만불시대 세계에서 11번째로 잘 산다지만 1960년대는 개인소득 83불로 세계 최빈국으로 원조를 받아서 살았다. 불과 60년 전의 일이다.
그래도 우리 부모님들은 5~6남매씩 낳아 기르며 옷도 얻어다 기워입히며 초근목피 속에서도 잘 길러내셨다. 일찍 일어나 늦게 자며 근면 성실로 오늘을 만들었다.
부모와 근본과 뿌리를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수많은 노력과 우방의 도움속에 오늘이 있게 된 것이다.
시월 / 오 세영
무언가 잃어 간다는 것은
하나씩 성숙해 간다는 것이다
지금은 더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돌아보면 문득
나 홀로 남아 있다
그리움에 목마르던 봄날 저녁
분분히 지던 꽃잎은 얼마나 슬펐던가
욕정으로 타오르던 여름 한낮
화상입은 잎새들은 또 얼마나 아팠던가
그러나 지금은 더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이 지상에는
외로운 목숨하나 걸려있을 뿐이다
낙과여 ,
네 마지막의 투신을 슬퍼하지 말라
마지막의 이별이란 이미 이별이 아닌 것
빛과 향이 어울린 또 한번의 만남인 것을
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별을 갖기 위해서
오늘도
잃어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죽음에 대해서 아는것:
1. 반드시 죽는다
2. 나 혼자서 죽는다
3. 아무것도 갖고 가지 못한다
죽음에 대해서 모르는것:
1. 언제 죽을지 모른다
2.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
3.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이 세상의 많은 악행들은 자기가 죽을 것을 모르는 자들에 의해 저질러진다
현재 국민들을 힘들게하는 사람들도 언젠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알면 저렇게 하지 않을것이다.
어름판 위에다 집을 짓는 억지 수고를 안할 것이다.
지혜를 잃은 지식은 이처럼 처절한 것이다.
'노인과 바다'에서 헤밍웨이는 83일간 사투를 벌여 끌어올린 고기가 겨우 뼈만 앙상하게 남은 헛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백성들은 물과 같다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엎기도 한다.
'소수의 사람들을 오랫동안 속일수 있고, 다수의 사람들을 얼마동안 속일수도 있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을 오랫동안 속일수는 없다'(에이브러햄 링컨)
진실을 말할 땐 쉽다 그러나 거짓을 말할 땐 고도의 기억력이 필요하다. 거짓말한 것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거짓이 진실을 이긴 적은 한번도 없다.
하나님이 보고 듣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는 세가지 원칙이 있다.
1. 비밀이 없다
2. 공짜가 없다
3, 정답이 없다
없는 것을 있다고 믿는 자(지록위마)만 속은 것이다. 결국 그의 패배로 끝나게 돼있다.
역사는 진리, 진실, 정직의 역사다. 종종 거짓이 조연을 해줄 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쫒기는 짐승처럼 덫을 향해 계속 질주한다.
브레이크 깨진 자동차처럼 .....
죽음에 대하여 또 아는 것이 있으니
1. 죽음이 다가 아니고, 끝도 아니라는 것
2. 죽음 후에 심판이 있고, 그 결과에 따라 천국에서의 영원이 있고, 지옥에서의 영원이 있다는 것
3. 죽음은 그래서 하나를 졸업하고, 새로운 곳으로 가는 문이라는 것
[ 어떻게 죽을 것인가 ]
- 소설가 김훈
망팔(望八)이 되니까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벗들한테서 소식이 오는데, 죽었다는 소식이다. 살아 있다는 소식은 오지 않으니까, 소식이 없으면 살아 있는 것이다.
지난달에도 형뻘 되는 벗이 죽어서 장사를 치르느라고 화장장에 갔었다. 화장장 정문에서부터 영구차와 버스들이 밀려 있었다.
관이 전기 화로 속으로 내려가면 고인의 이름 밑에 '소각 중'이라는 문자등이 켜지고, 40분쯤 지나니까 '소각 완료', 또 10분쯤 지나니까 '냉각 중'이라는 글자가 켜졌다. 10년쯤 전에는 소각에서 냉각까지 100분 정도 걸렸는데, 이제는 50분으로 줄었다.
기술이 크게 진보했고, 의전을 관리하는 절차도 세련되다. '냉각 완료'되면 흰 뼛가루가 줄줄이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서 나오는데, 성인 한 사람분이 한 되 반 정도였다. 직원이 뼛가루를 봉투에 담아서 유족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유족들은 미리 준비한 옹기에 뼛가루를 담아서 목에 걸고 돌아갔다.
원통하게 비명횡사한 경우가 아니면 요즘에는 유족들도 별로 울지 않는다. 부모를 따라서 화장장에 온 청소년들은 대기실에 모여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제 입으로 "우리는 호상(好喪)입니다" 라며 문상객을 맞는 상주도 있었다.
그날 세 살 난 아기가 소각되었다. 종이로 만든 작은 관이 내려갈 때, 젊은 엄마는 돌아서서 울었다. 아기의 뼛가루는 서너 홉쯤 되었을 터이다. 뼛가루는 흰 분말에 흐린 기운이 스며서 안개 색깔이었다. 입자가 고와서 먼지처럼 보였다. 아무런 질량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물체의 먼 흔적이나 그림자였다. 명사라기보다는 '흐린'이라는 형용사에 가까웠다.
뼛가루의 침묵은 완강했고, 범접할 수 없는 적막 속에서 세상과 작별하고 있었다. 금방 있던 사람이 금방 없어졌는데, 뼛가루는 남은 사람들의 슬픔이나 애도와는 사소한 관련도 없었고, 이 언어도단은 인간 생명의 종말로서 합당하고 편안해 보였다.
죽으면 말길이 끊어져서 죽은 자는 산 자에게 죽음의 내용을 전할 수 없고,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죽음을 인지할 수 없다. 인간은 그저 죽을 뿐,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다.
화장장에 다녀온 날 저녁마다 삶의 무거움과 죽음의 가벼움을 생각했다. 죽음이 저토록 가벼우므로 나는 남은 삶의 하중을 버티어낼 수 있다. 뼛가루 한 되 반은 인간 육체의 마지막 잔해로서 많지도 적지도 않고, 적당해 보였다.
죽음은 날이 저물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자연현상으로, 애도할 만한 사태가 아니었다. 뼛가루를 들여다보니까, 일상생활하듯이,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하듯이, 그렇게 가볍게 죽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 들이지 말고 죽자, 건강보험 재정 축내지 말고 죽자, 사람을 힘들게 하지 말고 가자, 질척거리지 말고 가자, 지저분한 것들을 남기지 말고 가자, 빌려 온 것 있으면 다 갚고 가자, 남은 것 있으면 다 주고 가자, 입던 옷 깨끗이 빨아 입고 가자, 관은 중저가가 좋겠지. 가면서 사람 불러 모으지 말자, 빈소에서는 고스톱을 금한다고 미리 말해두자….
가볍게 죽기 위해서는 미리 정리해놓을 일이 있다. 내 작업실의 서랍과 수납장, 책장을 들여다보았더니 지금까지 지니고 있었던 것의 거의 전부(!)가 쓰레기였다. 이 쓰레기더미 속에서 한 생애가 지나갔다. 똥을 백자 항아리에 담아서 냉장고에 넣어둔 꼴이었다.
나는 매일 조금씩, 표가 안 나게 이 쓰레기들을 내다버린다. 드나들 때마다 조금씩 쇼핑백에 넣어서 끌어낸다. 나는 이제 높은 산에 오르지 못한다. 등산 장비 중에서 쓸 만한 것들은 모두 젊은이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나머지는 버렸다.
책을 버리기는 쉬운데, 헌 신발이나 낡은 등산화를 버리기는 슬프다. 뒤축이 닳고 찌그러진 신발은 내 몸뚱이를 싣고 이 세상의 거리를 쏘다닌, 나의 분신이며 동반자이다. 헌 신발은 연민할 수밖에 없는 표정을 지니고 있다. 헌 신발은 불쌍하다. 그래도 나는 내다 버렸다.
뼛가루에게 무슨 연민이 있겠는가. 유언을 하기는 쑥스럽지만 꼭 해야 한다면 아주 쉽고 일상적인 걸로 하고 싶다. ―딸아, 잘생긴 건달 놈들을 조심해라. ―아들아, 혀를 너무 빨리 놀리지 마라. 정도면 어떨까 싶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는 스스로 '광야를 달리는 말(!)'을 자칭했다. 아버지는 집 밖으로 나돌면서 평생을 사셨는데,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미안허다. 를 남겼다. 한 생애가 4음절로 선명히 요약되었다. 더 이상 짧을 수는 없었다.
후회와 반성의 진정성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이것은 좋은 유언이 아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늦었고, 대책 없이 슬프고 허허로워서 어쩌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퇴계 선생님은 죽음이 임박하자 ―조화를 따라서 사라짐이여! 다시 또 무엇을 바라겠는가. 라는 시문을 남겼고, 임종의 자리에서는 ―매화에 물 줘라. 하고 말씀하셨다고 제자들이 기록했다. 아름답고 격조 높은 유언이지만 생활의 구체성이 모자란다.
내 친구 김용택 시인의 아버지는 섬진강 상류의 산골 마을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사셨다. 김용택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김용택을 불러놓고 유언을 하셨는데 ―네 어머니가 방마다 아궁이에 불 때느라고 고생 많이 했다. 부디 연탄보일러를 놓아드려라.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이야기를 김용택의 어머니 박덕성 여사님한테서 직접 들었다. 몇 년 후에 김용택의 시골집에 가봤더니 그때까지도 연탄보일러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 퇴계 선생님, 김용택의 아버지, 이 세 분의 유언 중에서 나는 김용택 아버지의 유언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이 유언은 건실하고 씩씩하고 속이 꽉 차 있다.
김용택 아버지는 참으로 죽음을 별것 아닌 것으로, 아침마다 소를 몰고 밭으로 나가듯이 가볍게 받아들이셨다. 그리고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인생의 당면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 정도 유언이 나오려면, 깊은 내공과 오래고 성실한 노동의 세월이 필요하다.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삶은 무겁고 죽음은 가볍다. 죽음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의술의 목표라면 의술은 백전백패한다. 의술의 목표는 생명이고, 죽음이 아니다. 이국종처럼, 깨어진 육체를 맞추고 꿰매서 살려내는 의사가 있어야 하지만, 충분히 다 살고 죽으려는 사람들의 마지막 길을 품위 있게 인도해주는 의사도 있어야 한다.
죽음은 쓰다듬어서 맞아들여야지,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다. 다 살았으므로 가야 하는 사람의 마지막 시간을 파이프를 꽂아서 붙잡아놓고서 못 가게 하는 의술은 무의미하다. 가볍게 죽고, 가는 사람을 서늘하게 보내자.
단순한 장례 절차에서도 정중한 애도를 실현할 수 있다.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의술도 모두 가벼움으로 돌아가자. 뼛가루를 들여다보면 다 알 수 있다. 이 가벼움으로 삶의 무거움을 버티어낼 수 있다. 결국은 가볍다.■
인생의 삶은 잠시왔다가 가는 안개와 같으나 영원한 삶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오늘의 삶에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 지식과 지혜 "
영리한 것과 지혜로운 것은 다르다.
지혜는 세월과 함께 자라난다.
오랜 경험이 쌓이고 그 경험들에서
삶의 슬기가 우러나온다.
지식과 지혜도 다르다.
지식은 책을 통해 알고 공부를 통해 터득할 수 있지만 지혜는 인생의 온갖 경험들이 응축되어 쌓여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생의 내공이
무르익어 생기는 것이다.
* 지식은 책에 있습니다.
인터넷에, 핸드폰에 가득합니다.
그러나 지혜는 전혀 다릅니다.
뇌가 아닙니다.
마음에 있습니다.
삶에서 무르익습니다.
독서와 고난과 사색과 명상에서
진액처럼 우러나옵니다.
인생은 사막과도 같습니다
http://m.blog.daum.net/jmu3345/2367?categoryId=6
One Moment In Time - Dana Winner
이범용 & 한명훈 - 꿈의 대화
오늘말씀🍒2019.10.5.토.QT.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요한복음 3장 16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로마서 5장 8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 스바냐 3장 17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 요한일서 4장 10절
† 기도💒
사랑의 주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변치 않는 그 사랑에 감사드리오니 우리도 그 사랑을 배우고 닮아가게 하시며, 그 사랑을 주위 사람에게 흘려보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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