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4년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루카 17,1-6
내가 용서 안 하면 그 사람을 지옥에 버리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내용상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남을 죄짓게 하는 자는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고 하십니다.
지옥에 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죄를 짓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주제는 이제 용서로 나아갑니다. 마치 용서하지 않으면 남을 죄짓게 만드는 것처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이제 세 번째 주제입니다. 세 번째 주제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하고 말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이 상관도 없어 보이는 세 주제를 이어보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이 남을 죄짓게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겨지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용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용서할 수 있는데, 용서해 주지 못하면
그 사람은 영원히 죄에 매이게 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먼저 용서받지 못한다면.
용서받지 못하는 시스템에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과 타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런 곳이 군대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군대는 용서가 안 되는 시스템으로 그려집니다.
승영은 자대에 배치되었을 때 강한 신념과 이상주의적인 가치관을 지닌 청년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친구이자 상관인 태정을 만납니다. 태정은 군대 시스템에 적응한 선임으로서 친구인
승영을 보호해주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승영을 혼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후임들에게는 가차 없는 폭력도 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승영은 갈등합니다. 용서하는 사람이어야 하는지, 그럴 수 없는 존재인지. 그리고 군 시스템에
적응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태정이 한 것처럼 선임에게는 복종하고 후임에게는
어쩔 수 없이 야단을 치기도 합니다.
후임이 애인과 헤어지고 힘들어할 때 승영은 자신이 살자고 후임을 때리고 후임은 자살합니다.
승영은 본래 군 시스템에 저항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태정이 산 것처럼 살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합니다. 태정은 밖에서 잘만 삽니다. 아무 일 없었듯이. 승영은 그럴 수 없습니다.
자신이 용서하지 못해 죽은 후임 때문에 자신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도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용서받지 못하면 용서받지 못하는 시스템에 매이게 됩니다. 거기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용서받지 못하면 자신이 용서할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이 시스템을 깨고 자신을 용서해 주는 존재를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이들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자신도 용서하지 못하는 존재가 어떻게 타인을 용서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을까요?
전에 락 토마스(Rock Thomas)의 사례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해
항상 자기 자신을 ‘패배자, 노동자, 애정결핍’으로 정의했습니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넘어서기 위해 아버지에게 애정을
구걸하였습니다. 새엄마로부터 아버지가 암으로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자신이 죽도로 일해 번 돈으로
아버지의 병원비와 세금을 내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아들은 여전히 패배자이자 노동자이며
애정 결핍자라고 여기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동산 회사에 취직하여 야근하던 중 지배인이 그를 보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칭찬이었고 그는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지배인은 그에게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것을 알아내고는
하루에 이 말을 500번 반복하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다.”
정말 500번이냐고 놀라며 되물었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듣게. 인간의 뇌는 언제든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어.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습을 끝없이
반복해서 상기시킨다면 자네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다고 해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지.
문제는 많은 사람이 자신이 되고픈 게 아니라 ‘남들이 자신에게 원하는 모습’을 만들기 위해
뇌를 길들인다는 거야.”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는 “나는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고
가슴이 북받쳐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는 사업에 성공하였고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믿음은 누군가의 용서로 주어집니다. 믿게 되면 용서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그 누군가를
지옥에서 해방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영원히 지옥에 매일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느님 자녀가 지옥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