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이 관용이다
내가 보는 남과, 남이 보는 나는 서로 견해가 다를 수 있고, 때로는 같을 수 있다. 또는 견해가 다르면서도 같고, 같으면서도 다를 수 있다. 개인의 견해란 다르면서도 때로는 같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견해가 같다가 또 어떤 때는 견해가 다를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람은 과거에 행한 업의 과보가 달라서 견해가 항상 똑같을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일에서 공동의 견해를 가질 때가 있어 다르면서도 같다. 모든 것은 무상해서 항상 그대로 있지 않다. 하지만 어떤 일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서로가 같은 견해를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견해가 다를 때는 다른 것을 존중하고 견해가 같을 때는 같은 것을 존중해야 한다. 다르다고 내치지 말고 같다고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은 변하므로 같고 다른 것도 변화의 흐름 속에 있으므로 항상 그대로 유지되지 않는다. 이것이 무상, 고, 무아다. 이때 바뀐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내가 과거의 일을 기억하여 사라진 것을 붙잡고 있다면 아직 상상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현실이 아닌 상상의 세계는 관념이고 실재가 아니라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아니다. 인간은 항상 진실을 알아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괴롭지 않다.
나와 남의 견해가 다른 것을 발견할 때가 많다. 누구나 자기가 관심이 있는 분야라면 상대가 하는 말의 진실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다. 특히 남이 법에 대해서 말할 때 그가 진실을 알고 하는 말인지 모르고 하는 말인지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내가 체험한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체험이 진실이다. 물론 이때 내 수준으로 그의 말을 판단하는 것이라서 완전한 기준으로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와 다른 견해라고 즉각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고 끝내는 것보다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고 판단을 유예해야 한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 해서 완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 이런 것도 느껴야 한다. 남이 말을 할 때 내가 판단하듯이, 내가 말할 때도 남이 판단할 수 있다고 알아야 한다. 판단은 나만 하는 것이 아니고 남도 한다.
때로는 내가 남의 판단을 받는 대상이라고 느끼면 섬뜩할 수 있다. 이렇듯 나는 판단만 하는 자가 아니고, 나도 판단을 받는 자다. 이렇게 알면 나의 판단이 일방적이지 않은 객관성을 가져 독단에 빠지지 않는다. 자아가 강한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해서 항상 독단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주관적인 독단은 괴로움이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말을 하고 산다. 자기 기준에서 자기 말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남의 말의 내용이 옳고 그른 것은 다른 차원이다. 누구나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바른 기준을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남의 말만 옳고 그른 것을 따질 일이 아니다. 나의 말도 옳고 그름은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견해를 배척하지 않고 서로 존중할 때 진실이 발견된다.
나의 견해가 남의 견해와 비교될 때 비로소 객관성을 가질 수 있다. 설령 남의 견해가 잘못된 것이라고 할 때는 나의 견해를 확립하는 데 필요한 부분도 있다. 그래서 남의 말은 그 내용에 상관없이 일단 존중하고 들어야 한다. 이것이 저마다 자기 말을 하고 사는 사회에서 다투지 않고 진실을 찾아가는 유익한 방법이다.
내가 남의 말을 존중하면 남도 나의 말을 존중한다. 설령 남이 나의 말을 존중하지 않아도 이는 그의 일이지 나의 일이 아니다. 나는 어느 상황에서나 나의 일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의 일은 남이 아닌 나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인생은 남이 살아줄 수 없고 오직 나밖에 살지 못한다. 남을 존중하면 내 마음이 나를 존중한다. 존중은 선한 마음으로 관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