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제가 보는 하루끼문학관입니다만, 사실 그의 작품을 읽은 게 너무 부족하기
에 상실의 시대라는 작품을 어떻게 보았나 하는 감상문으로 이해하시면 좋겠습니
다. 거친 글이기에 손을 봐야할텐데....
상실의 시대 (노르웨이의 숲, 하루끼 저)의 사회적 의의와 작품 특성
이 작품은 일본은 물론 한국현대문학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품이라 할 수 있으
며 하루끼라는 작가를 세계적 작가반열에 올려놓은 데 지대한 공헌을 했었습니다.
90년대 한국문학은 사회에 대한 관심에서 개인에 대한 관심으로의 전향기였고, 일
본에서 히트한 이 작품은 하나의 텍스트가 되었습니다. 많은 관심과 논쟁 그리고
토론의 대상이 되어 사랑받았던 이 작품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
작품의 배경은 1970년 전후쯤으로 보입니다. 당시는 일본의 안보투쟁이 극단적으로
악화되어 학생운동이 최고의 절정기를 맞이하고 있을 때라고 여겨집니다.
그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사회적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 개인주의화 된
1980년대 후반에 쓰이고 각광받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
소설은 의도적이라 할만큼 사회적 배경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습니다. 국가와 사회
의 미래를 위해 피흘리며 투쟁하던 당시의 학생으로서 극도로 개인주의적이거나 심
지어 이기적으로까지 보이는 등장인물들을 90년대 독자들과 사회는 어떻게 이해했
던 것일까요 ?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강렬한 투쟁이 실패했을 때는 크나큰 허탈감과 함께 무기력
함 그리고 아쉬움의 여운이 남는 법이고, 이는 시간이라는 치료제가 필요하게 됩니
다. 이제 안보투쟁에 대한 미련은 희미해지고 대안부재라는 체념이 자리잡으면서
80년대 일본은 자본주의의 개인 주의와 쾌락주의가 대세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작품의 주인공들이 용납될만한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기에 이 작품이 나올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고, 이 작품은 그런 사회적 분위기에 가속패달을 밟아주었습니
다.
사회라는 불편한 참견자를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철저히 자기자신만의 세계에 집중
하려는 주인공의 성격은 90년대 독자들의 성향에 완전히 부합하는 면이 있었습니
다. 그들은 사랑을 하고 싶었고 감미롭고도 낭만적인 감성세계를 찾는 이들이었습
니다.
그런 그들도 어린시절 철저히 사회화되는 일본교육을 통해 사회라는 시선을 늘 부
담스러운 감시자로 여기고 있었겠지요. 그런데 그들을 이해하고 인도하는 정신적
지주를 만났으니 하루끼였고, 본받을만한 사랑학 교과서를 만났으니 노르웨이의 숲
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들이 지향하는 성향의 모델이었던 주인공 와타나베는 아주 근사하고 멋진 사나
이였기에 그들은 자랑스럽게 그를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세계관이 확고했으며 사회의 공격에 대한 자기방어능력이 확실한 사람
이었습니다. 음악과 낭만을 사랑하면서도 언제나 떳떳할 수 있는 자기 처신이 있었
기에 도덕적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은 그에게 열광할 수 있었던 거죠.
이 작품의 주인공은 사회와의 정면대결을 시도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단지 애써 사
회의 간섭을 거부하는 회피주의로서 자신의 도덕적 정당성을 방어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편이죠. 그의 이러한 성향은 90년대 일본과 한국의 젊은이들의 성향과 부합하
는 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정말 재밌는 작품이었을까요 ?
이 소설은 사건의 빠른 전개에 의해 재미를 찾아나가는 것보다는 인물들의 의식 여
행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영화로 각색한다면 기본 줄거리가 되
는 뼈대는 비교적 단순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 우리는 그 작품에 깊이 심취했었던 걸까요 ?
작품이 감성적이고 낭만적이었을까요 ? 등장인물은 그러했을지 모르나 작품의 묘사
가 꼭 그러하지는 않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단지 작가의 글쓰기에는 음악적 분위기
가 있다고 할까요 ? 그와 함께 떠나는 독서산책이 즐거운 기분을 선사하고 있었습
니다.
흥미를 돋구는 일차적 요인은 주인공의 내적 세계관이 매우 흥미로웠다는 점입니
다. 와타나베의 시선을 통해 아기자기한 얘기들(룸메이트 등)이 펼쳐지는 동안 그의
개성이 뚜렷이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당시의 젊은이들과는 다른 그만의 성장과정과 철학이 드러나 있었고, 그의 개인주
의적인 낭만적 기질이 멋진 음악과 더불어 그를 아름답게 색칠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작품은 보이지 않게 독자와의 대화를 꾸준히 시도하고 있었지요. 나의 세계
관은 이러했고, 친구 나오꼬와 기츠키, 선배 나가사와와 하쓰미, 그리고 레이코 등
다양한 인물들의 세계관과 철학은 어떠했으며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며 연애
해나가는지 지켜보는 재미를 선사하고 있었습니다.
독자들은 기묘하다면 기묘한 인물들의 활동을 통해 어떤 긴장감을 소유하면서 읽게
되었으리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는 등장인물들이 사회와의 이질감을 지닌 위태로
운 존재들이었고 그런 그들이 빗어내는 결과 또한 불안과 어떤 기대감을 공유케하
였기에 가능했으리라 믿어집니다.
그러면서 항상 작품에는 어떤 궁금증과 호기심을 유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작
가와 작품의 와타나베는 어떤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을지 추측해보는 재미가 있었습
니다.
기즈키는 왜 죽었야만 했던가 ? 거기서 와타나베가 미친 영향은 무엇이었나 ?
기즈키와 나오코의 사랑은 도덕적 금기를 어긴 어떤 요소가 있었을까 ?
왜 나오코는 정신병으로 고통스러워야만 했을까 ? 나오코와 와타나베의 소설외적
실체적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
와타나베는 왜 나오코를 두고서 미도리에게 기울어져만 했을까 ? 주인공이 좀 더
나오코를 사랑할 수는 없었던 걸까 ? 정말 미도리는 정신병수용소에 갇혀 와타나베
와 만나지 못했던 것일까 ? 만날 수 있었음에도 불구 와타나베가 거리감을 둔 것을
소설적 차원에서 그녀를 수용소로 보낸 것일까 ?
나가사와와 하쓰미 사이에서 와타나베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 왜 그들은 삼각관계
처럼 되어 버렸을까 ?
레이코와 와타나베의 사랑은 소설외적 실재에서는 어떻게 펼쳐졌던 것일까 ?
과연 와타나베에게 사랑이란 무엇이었을까 ? 과연 그는 도적적으로 떳떳한 인물이
었을까 ?
왜 그가 가는 곳에는 끊임없이 사랑의 삼각관계가 형성되고 파탄자가 나오는 것일
까 ?
진정 그에게는 문제가 없었는가 ?
그런데 우리는 왜 그 작품을 아름다운 작품으로 받아들였던 걸까요 ?
사랑과 죽음, 고통과 이별, 도덕적 괴로움과 정신적 방황 속에서도 멋진 음악을 통
해 어떤 희망과 그리움을 색칠해낸 작가의 세계관이 근사해 보였을지요 ?
개인적으로 보건데 이 작품은 상당히 어려운 소설로 보입니다. 낭만적이고도 감성
적인 연애소설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뚜렷한 주제의식을 형상화했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은 매우 다층적이고도 미묘한 요소들이 교묘히 결합되어 있기에 애
초에 이러한 구성을 가지고 썼다면 더더욱 어려운 소설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했기에 작가 하루끼 역시나 음악을 들으며 마음 가는대로 작품을 써나가지 않
았을까 싶고, 그런 정서가 읽은이들에게도 전해져 즐거운 기분을 선사하지 않았을
지요. 작가도 이 작품의 상업적 대 히트까지는 예상치 못하지 않았을까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공전의 히트를 자랑하게 되었지요. 어떻게 이런 결과가 가능했
을지 추측해보고자 합니다.
작가 하루끼는 일본 안에서는 매우 이질적인 기질의 소유자라고 할만 합니다. 폐쇄
적이고도 동질성 강한 일본 사회 안에서 이러한 서구 지향적 작가가 나타났다는 것
은 놀라울 정도이지요. 그의 이런 성향이 사회적인 분위기와 젊은이들의 감성에 크
게 어필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으리라 추측해 봅니다. 항상 새로운 것은 외부의 영
향을 받아 들어오고 반향을 일으킨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이문열 또한 그런 작가로
보이구요.
그의 문학성과 문학역량이 뛰어나서 그가 대작가 되었던 것은 아니라고 보고싶습니
다. 단지 그는 사회와 젊은이들이 바라는 바로 그 작가이미지와 성향을 지니고 있
었기에 사회가 기다리는 작가가 될 수 있었다고 보고싶습니다.
작품의 특질에 대하여
잘 기억나지는 않습니다만, 예전에 그의 인터뷰를 기억나는 대로 되살려 보고자 합
니다.
왜 소설의 제목이 노르웨이의 숲인가 ?
작가가 말하길, 어떤 음악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혹시나 노벨상을 수상하는 노르웨이 한림원(?)을 의식하지는 않았을
지에 대해서도 추측해 본 바가 있습니다.)
제목에 왜 숲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가 ? 등장인물들이 삼각관계를 펼쳐보는 게
한자의 삼(森)과 연관이 있는가 ?
와타나베, 기즈키, 나오코--와타나베, 나오코, 미도리--와타나베, 나오코, 레이코--
와타나베, 나가사와, 하쓰미 이들은 끊임없이 돌아가면서 삼각관계를 형성하고 있
고, 기즈키가 죽고 나오코, 하쓰미가 죽음으로써 3각관계는 깨지면서 마치 둘만 남
은 林이 되거나 혼자만 남은 木이 되는 듯한 기분도 들게 하더군요.
작가 하루끼에 대한 인터뷰는 그의 많은 책들과 잡지에서 수없이 이뤄지고 있습니
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작가라는 직업은 고도의 집중력과 인내력을 요구하는 직업이기에 그 어떤 직업보
다도 체력이 중요시된다. 그래서 난 오래 전부터 마라톤에 심취하면서까지 자기관
리에 노력을 게으르지 않고 있다."
하루끼와 노르웨이의 숲을 키워드로 했던 90년대 한국문학도 이젠 한시대를 마감하
는 기분을 들게하고 있습니다. 과연 앞으로 펼쳐질 21세기 문학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지켜보고자 합니다.
2002 7 14 일 오후
- 노르웨이의 숲 -
나는 예전에 한 여자를 소유했었지,
아니 그녀가 나를 소유했다고도 할 수도 있고,
그녀는 내게 그녀의 방을 구경 시켜 주었어,
멋지지 않아?
노르웨이의 숲에서
그녀는 나에게 머물다 가기를 원했고
어디 좀 않으라고 말했어,
그래서 주위를 둘러 보았지만
의자하나 없었지.
양탄자 위에 앉아
시계를 흘끔거리며
와인을 홀짝이며
우리는 밤 두 시까지 이야기했어.
이윽고 그녀가 이러는거야.
"잠 잘 시간 이잖아"
그녀는 아침이면 흥분한다고 말했어.
그리곤 깔깔 거리며 웃기 시작했지.
나는 하지 않겠다고 말하곤
목욕탕으로 기어들어가 잠을 잤어
눈을 떴을 때,
난 혼자였어,
그 새는 날아가 버린거야,
난 벽난로 불을 지폈어.
멋지지 않아?
나는 원칙적으로 소설에 후기를 붙이는 일을 좋아 하진 않지만, 이소설에서는 그것
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로, 이 소설은 5년 전쯤에 쓴 <개똥벌레>라는 소
설을 그 축으로 하고 있다.
나는 단편을 기본으로 해서 4백자 원고지300분량으로 깔끔한 연애 소설을 써 볼까
하고 있었다.<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마치고 다음 장편을 시작하기
전에 기분전환정도의 가벼운 기대를 가지고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원고분량이 900매로 불어나 '가볍다' 고 하기 어려운 소설이 되고 말았다. 아마도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 이상의 그 무엇이 이소설을 쓰여져 있으리라 생각한다.
두 번째로 이소설은 지극히 개인적인 소설이다.<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에서는 자전적인 요소가 있다고 말하는것도 같은 의미인데,f.스코트 피츠 제럴드
요소가 있다고도 간은의미와,위대한게츠비>가 자전적 소설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의 자전적 소설이다. 아마도 이는 감각의 차원에 속하는 문제일 것이다.
나라는 인간이 쓸 만하지 않다거나 하는 것처럼 이 소설도 역시 좋거나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 작품이 나라고 하는 인간 됨됨이를 넘어서 존속하기를
바랄 뿐이다.
셋째로, 이 소설은 남부 유럽에서 쓰여졌다. 1986년 12월 21일에 그리스 미케네 섬
의 한 빌라에서 쓰기 시작해서,11987년 3월27일로마의 아파트와 호텔에서 완성했다.
일본이 아닌 곳에서 쓰여 졌다는 사실이 이 소설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다고 뚜렷하
게 판단 하기는 어렵다.어떤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고, 전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단지 전화도 없고 찾아오는 손님도 없이 오직 글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할 뿐이다.
그밖의 큰 환경 변화는 없었다.
이 소설의 전반부는 그리스에서, 중반부는 시실리에서, 후반부는 로마에서 쓰여졌
다. 아테네의 싸구려 호텔방에는 테아블과 의자가 없었었다. 나는 매일 타베루나9주
점0에가, '서전트 피퍼즈 론리 하츠클럽 밴드(Sergean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의 테이프를 워크맨을 통해 120회정도 반복해 들으면서 이 소설을 써
내려 갔다. 그런의미에서 이소설은 레논과 매카트니에게 약간의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넷째로, 이 소설은 이미 죽음으로 이별한 나의 친구들과, 살아 나있지만 떨어져 있
는 나의 몇몇 친구들에게 바친다. 1987년6월.. 무라카미 하루키...
에이스 (2003-07-03 09:55:20)
이문열 이야기가 나오네요...
시대의식, 사회인식이 조금 남다른(부족) 사람인것 같은데요.
한국사회에서 시대인식을 빼고 말할게 있나요.
마리린 (2003-07-03 12:35:31)
하루키가 말한 '그 어떤 노래'란 비틀즈의 Norwegian Wood를 말하죠..
본문중에 노래가사를 보니 하루끼가 쓴 "노르웨이의 숲" 이란 책때문에 비틀즈의 노래 Norwegian Wood란 곡의 가사가 "노르웨이의 숲"이란 뜻으로 잘못 해석되어왔다는 사실이 생각나는군요.
프리첼에 있는 비틀즈 동호회에 이런 글이 올라와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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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Norwegian wood는 노르웨이의 숲이 아니라 '노르웨이산 원목'을 말합니다.
1960년대 당시 노르웨이산 원목은 가격이 싼 좀 품질이 떨어지는 거였다고 합니다.
노래는 존이 만들었구 어떤 여성과의 하룻밤관계를 갖고 난후 만들었는데 ...
노래가사에서 "She showed me her room, "Isn't it good Norwegian wood?"
부분은 뜬금 없이 '노르웨이의 숲'이 나오는게 아니라 약간은 농담조로 자기 방이 괜찮지 않냐는-원래 노르웨이 원목이 싸구려니까-물음이구요
마지막의 "So I lit a fire , Isn't it good Norwegian Wood?'부분은..
존이 아침에 화장실에서 일어나보니 하룻밤을 같이 했던 여자는 일하러 가고 없고(This bird has flown.--->영국에선 여자들을 bird로 부릅니다..그리고 이말은 누군가를 찾고 있는데 그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쓰는 문구라고 합니다..(콜린스코빌드 사전에서)
당시 60년대서 이런상황이면 남자들은 일종의 복수를 생각하게 되는데 홧김에 불을 지르면서 빈정대는 투로 "어때?괜찮은 노르웨이 원목으로 꾸민 방이잖아"말하는거라고 합니다.
폴의 말로는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가사를 벽난로에 불을 지피는거로 생각하겟지만 사실은 위의 의미라고 하면서 그렇다고 해도 그게 나쁘지는 않고 오히려 낭만적으로 들리니 더 괜찮은것 같다고 하더군요. [펌]
강세진 (2003-07-03 19:53:43)
에이스님/
가볍게 넣은 이문열을 크게 보시는군요. 난 이문열이 스스로의 사고의 힘으로 자신의 문학세계를 건설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언제보니 생각보다는 세계문학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알게되서 거기에 이문열을 넣어보았습니다. 이문열도 하루끼도 자국의 문학보다는 이방의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는 공통점이 있지 않나 해서요. 그 부분에서 작가들에 대한 선호도는 반영되진 않았습니다.
마리린님/
올려주신 글을 보니 노르웨이가구로된 서민적인 방과 생활을 의미한다고 이해되더군요. 분명 오역의 가능성이 있고 의도적으로 번역에 변화를 주지 않았나도 싶습니다.
글쎄요...하루끼는 이런 부분에 어떻게 생각할지요 ? 그의 말을 들어보고 싶어지는군요.
아래 테츠님이 올려주신 글이 참으로 좋더군요. 그분의 글을 참고하심이 좋겠어요. 전 엉성하게 한번 읽은 사람인데 그분은 9번이나 읽었다니... 존경스런 맘까지 듭니다.
두번 읽은 책이 많지 않습니다. 하나, 정말 좋은 책은 음악과 마찬가지로 자주 접할수록 또다시 새로운 맛이 난다고들 하더라구요. 저도 그런 멋진 책들 좀 선정해보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성장시켜온 좋은 이야기 많이 들려주시길 빌며...다음에 뵙지요.
첫댓글참 이해하기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해에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참 힘들었던 시기에 이소설을 읽던중에 그 어둠과 우울함 무기력함,그리고 철저히 자신만의 울타리로 들어가버린 사람들의 시려움이 다 내것이 되어버리던.....다시 읽을때가 된것 같군요^^*
노르웨이의 숲(가구)라는 노래의 가사가 가슴을 파고드는군요. 넉넉하지 않은 시절 사랑하는 연인들의 달콤함이 있고 낭만이 있었다. 그들은 사랑할 많은 시간도 갖지 못한 채 삶의 시간들을 보내고보니 사랑은 이미 떠나가버렸다. 그리고 벽란로의 불을 보면서 추억을 노래하고 있지..의 분위기랄까요 ?
첫댓글 참 이해하기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해에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참 힘들었던 시기에 이소설을 읽던중에 그 어둠과 우울함 무기력함,그리고 철저히 자신만의 울타리로 들어가버린 사람들의 시려움이 다 내것이 되어버리던.....다시 읽을때가 된것 같군요^^*
너무 힘들게 이해라려고 하면 할수록 어려웠던 작품이라서...님은 어떻게 근사치에 접근하셨네요. 공감가는 부분과 그렇지 않았던 부분이 저를 혼돈으로 내몰아서 어려웠는데요 님의 이해의 폭이 부럽네요
노르웨이의 숲(가구)라는 노래의 가사가 가슴을 파고드는군요. 넉넉하지 않은 시절 사랑하는 연인들의 달콤함이 있고 낭만이 있었다. 그들은 사랑할 많은 시간도 갖지 못한 채 삶의 시간들을 보내고보니 사랑은 이미 떠나가버렸다. 그리고 벽란로의 불을 보면서 추억을 노래하고 있지..의 분위기랄까요 ?
시처럼 음악처럼 흐르는 그의 문체가 읽는 재미를 한층 높인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단지 보는 것만으로, 읽는 것만으로 그 어떤 감성의 즐거움을 불러일으키는 문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시와 음악과 소설은 그렇게 인간의 감성을 노래하는 예술로 통한다는 는낌....
잘 봤습니다. 유익한 내용 이었습니다. 저도 쉽게 이해하지 못해서 몇번이나 읽다말다를 반복한 책 이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