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大中(김대중) 前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 수상(2000년 10월13일)을 위해 자신이 직접 로비활동을 벌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국가정보원(이하 國情院)은 金대통령이 노벨상을 받도록 하기 위해 해외공작 라인을 동원해 광범위하게 로비활동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일부 國情院의 예산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金大中 前 대통령과 북한 金正日 간의 2000년 6ㆍ15 南北 정상회담 역시 金 前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로비를 하는 과정에서 그 필요성이 제기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노벨위원회 관계자로부터 노벨상 수상을 위해서는 南北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는 의견을 전해 듣고 南北 정상회담을 더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됐다는 것이다.
金大中 前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로비활동은 金漢正(김한정) 前 청와대 제1부속실장의 주도下에 스웨덴과 노르웨이 駐在 한국대사관에 파견된 國情院 직원들을 통해 이루어졌던 것으로 확인됐다. 金漢正 前 청와대 제1부속실장은 경남 마산 출신으로 휘문高와 서울大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했다.
金씨는 金大中 대통령 재임 초기인 1998년 5월부터 國情院에서 근무했고, 金 前 대통령 퇴임 이후부터 지금까지 金 前 대통령의 비서관(1급)으로 근무하고 있다. 金씨가 근무한 國情院內 부서는 국정원장 직속의 대외협력관실이었다. 대외협력관실은 國情院內 정상적 기구가 아니라, DJ의 노벨상 수상 로비활동을 체계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만든 기구였다고 한다. 당시 국정원장은 李鍾贊(이종찬)씨였다.
金大中 前 대통령과 북한 金正日 간 南北 정상회담 代價(대가)로 남한 측이 北韓에 제공한 금액도 現代그룹을 통한 5억 달러 정도가 아니라, 세 배인 15억 달러에 달한다는 주장도 아직 의혹으로 떠돌고 있다.
金大中 前 대통령이 직접 노벨상 로비활동에 관여한 사실을 입증해 주는 문건은 金 前 대통령이 스웨덴의 한 교포에게 보낸 서신이다. 이 서신은 당시 金대통령이 1998년 12월7일 정부의 외교행랑을 통해 스웨덴의 한 교포에게 보낸 것이며, 대통령 친필 서명이 담겨 있다. 수신인은 崔○○씨다. 崔씨는 호남 출신으로, 金大中 지지자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서신은 金 前 대통령 자신이 그동안 펴낸 「김대중 옥중서신」 등의 책을 스웨덴어판으로 번역ㆍ출판하는 것에 동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金漢正 前 청와대 제1부속실장과 스웨덴 및 노르웨이 주재 한국대사관의 國情院 파견관들은 金大中 前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로비활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이들 나라 국민들에 대한 金 前 대통령의 인지도가 낮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됐다. 이들은 金 前 대통령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金 前 대통령이 펴낸 「김대중 옥중서신」 등의 책을 스웨덴語로 출판하는 게 효과적일 것이라고 판단했고, 그 작업을 스웨덴에 거주하는 교포 崔모씨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金大中 前 대통령이 崔모씨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崔박사님께,
제가 쓴 책들을 번역·출판할 것을 결심하셨다니, 기쁩니다. 민주화와 인권, 세계평화의 동기를 부여받은 한국과 스웨덴 양 국민의 상호이해가 출간과 더불어 증진되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이 서한을 통해 崔박사님이 오늘(1998년 12월7일)로부터 향후 5년간 제가 쓴 책들을 번역하고 인쇄, 출간할 권한을 부여하는 바입니다.
제가 출판을 허용하는 저서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대중 옥중서신」(새빛문화, 1992)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김영사, 1993)
「한국과 아시아-에세이, 연설문 모음집」(亞太평화재단, 1994)
「문화는 운명인가?」(포린 어페어, 1994년 11ㆍ12월호)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 (亞太평화재단, 1994)
한국인들의 평화통일을 위한 노력과 민주화 투쟁을 스웨덴에 소개하고자 하는 박사님의 지침 없는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한국 정세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책의 출간이 도움이 되길 빕니다.
金大中 드림>
스웨덴 거주 교포-『번역ㆍ출판료 명목의 35만 크로나 받았다』
金大中 前 대통령 측은 金 前 대통령이 펴낸 책을 스웨덴어판으로 번역ㆍ출판하기 위해 崔모씨에게 모두 35만SEK(韓貨 약 5350만원ㆍ크로나ㆍ스웨덴의 화폐단위)를 지급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月刊朝鮮은 崔씨가 자필로 작성한 영수증을 입수했다. 이 영수증은 1999년 8월6일 작성됐고, 영수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인 崔○○은 「옥중수기」 번역료 잔금 195,600SEK(십구만오천육백 크로나)를 금일 韓○○ 박사로부터 영수하였습니다.
이로써 총 번역료와 편집료 SEK 350,000(삼십오만) 전액을 영수하였는 바…>
위 영수증에 등장하는 韓○○ 박사는 스웨덴에 거주하는 교포다. 韓씨는 당초 의무지원 요원으로 스웨덴으로 간 뒤 현재까지 그곳에서 거주해 왔으며, 스웨덴 왕실 주치의를 지냈다. 경기高를 졸업한 韓씨는 金大中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을 위해 스웨덴 유력 인사들을 대상으로 로비활동을 벌였던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韓씨는 金大中 前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로비를 위해 스웨덴 측 인사들을 안내해 한국을 수차례 방문했고, 金 前 대통령이 노벨상을 수상하는 행사장에도 金 前 대통령으로부터 초청을 받았던 인물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자는 金大中 前 대통령 측의 노벨상 수상 로비활동 전반에 대한 사실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國情院 출신으로, 현재 美國에 거주하고 있는 김기삼씨를 美國 현지에서 만났다. 김기삼씨는 金大中 前 대통령의 측근인 金漢正씨가 國情院 대외협력관실에서 근무하면서 노벨상 수상 로비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던 1998년 5월 金漢正씨의 부하직원으로 근무했다. 김기삼씨는 그동안 국내 인터넷 매체를 통해 金大中 前 대통령 측의 노벨상 로비활동에 대한 과정을 폭로했던 인물이다. 金씨는 1993년 國情院에 입사한 뒤, 對共정책실을 비롯해 해외조사실(당시 1국), 국제정책실, 국정원장 비서실, 전략실 등 여러 부서에서 근무했고, 2001년 퇴사했다. 이 기사에서 언급된 國情院의 조직명칭은 변경되기 이전의 것이며, 현재의 명칭은 國情院 관련 규정에 따라 사용하지 않았다.
YS 측, DJ 노벨상 수상 저지 공작
─金大中 前 대통령이 노벨상 수상을 위해 치밀하게 로비활동을 벌였다고 주장해 왔는데, 그 구체적인 활동내역은 어떠한지요.
『金大中씨는 國情院을 동원해 전방위적인 로비활동을 벌였습니다. 일종의 집착 같은 것이었죠. 金大中 前 대통령은 1998년 2월 초대 의전비서관으로 權모 당시 노르웨이 주재 대사를 내정했다가, 일주일 만에 교체했습니다. 權씨가 金泳三(김영삼) 대통령 재임 시절 대사로 근무하면서 DJ(金大中 前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을 방해하는 활동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金泳三 前 대통령은 자신의 재임기간 중에 DJ가 노벨상 수상 로비활동을 벌이자, DJ가 노벨상을 타지 못하게 하기 위해 관련 駐在國 대사들을 통해 DJ의 노벨상 수상 방해공작을 벌이도록 國情院 등에 지시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죠』
김기삼씨는 『國情院이 노벨 평화상에 관심을 기울인 지는 상당히 오래됐다』며 『國情院內 담당부서는 해외조사국(1국) 동구과 북구팀이며, 이 부서의 주 임무 자체가 노벨상에 관한 업무』라고 했다.
김기삼씨는 『金泳三 前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절에도 YS의 노벨상 수상을 위해 활동을 벌였지만, 수상 가능성이 낮다는 자체 판단에 따라, YS의 노벨상 수상 로비를 중단했다』고 했다. 金씨는 『YS의 수상 가능성이 낮은 상황에서 DJ가 수상 로비를 벌이자, 國情院 측은 「YS의 노벨상 수상」 대신 「DJ의 노벨상 수상 저지」에 활동의 초점을 맞추게 된 것』이라고 했다.
『金大中씨의 노벨상 수상 로비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시기는 DJ 정권 출범 초기에 초대 國情院 원장으로 李鍾贊씨가 부임하면서부터였습니다.
1998년 5월, 李鍾贊 국정원장은 비서실 산하에 「대외협력보좌관실」이라는 부서를 신설하고, DJ의 공보비서 출신인 金漢正씨를 담당관(5급 상당)으로 특별 채용했습니다. 당시 美國 럿거스大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박사과정 수료)하고 귀국한 金漢正씨는 곧바로 「金大中의 노벨상 수상 전략」을 담은 보고서를 DJ의 측근들을 통해 DJ에게 전달했다고 합니다.
金漢正씨의 보고서를 본 DJ는 李鍾贊 국정원장에게 지시해 金漢正씨를 특별채용토록 한 것이라고 전해 들었습니다. 李鍾贊 국정원장은 金漢正씨가 귀국한 당시 전셋집을 구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난을 겪자, 國情院의 安家(아파트)에서 거주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었습니다. 당시로는 상당히 이례적인 혜택이었죠』
국정원內의 로비 지휘부
─國情院內 대외협력관실의 인원은 어떻게 구성됐는지요.
『대외협력관실에는 일반 사무직 여직원까지 포함해 모두 10명 정도가 근무를 했습니다. 대외협력관실을 총괄한 것은 李○○씨였습니다. 李씨는 전주高 출신으로 육사(24기)를 졸업했으며, 정규과정 7기로 國情院에 들어 왔습니다. 李씨는 노르웨이에서 연수를 했고, 현지에서 파견관으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李씨는 國情院 본부에서 근무를 했고, 노르웨이와 스웨덴을 담당하는 부서의 과장을 맡기도 해 이들 나라의 사정을 잘 아는 일종의 전문가입니다. 1998년 8월부터 2000년 7월까지 국정원장 산하의 대외협력관실 보좌관(2급)으로 근무했습니다.
대외협력관실 직제상 李씨 바로 밑의 부하직원이 金漢正씨였고, 저는 金漢正씨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金漢正씨는 개인 친분이 있던 趙모씨를 직원으로 특채했는데, 趙씨는 金漢正씨의 개인비서 겸 직원으로 일을 했습니다. 趙씨는 판사를 지냈고, DJ와도 친분이 두터운 趙모씨의 친조카이기도 합니다.
金漢正씨는 직속상관인 李모씨에게는 자신의 노벨상 수상 로비활동에 대해 제대로 보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金漢正씨는 李鍾贊 당시 국정원장에게만 보고한 뒤 곧바로 金大中 前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李보좌관과 金漢正씨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李보좌관은 노벨상 수상 로비활동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마 노벨상 공작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金大中 정권 당시 전주高 출신들 가운데 아마 진급을 하지 못하고 옷을 벗은 특이한 경우라고 생각됩니다. 이분은 지역색을 잘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金漢正씨가 國情院에 근무하면서 金大中 前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로비활동을 벌인 사실을 國情院內 직원들은 몰랐겠군요.
『그렇지요. 國情院內 일반 직원들은 金漢正씨의 활동내역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金漢正씨는 國情院에 근무하면서 DJ의 노벨상 수상을 위해 어떤 로비활동을 벌였는지요.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구지역 국가들의 국민들에게 金大中 前 대통령을 알리기 위해 DJ의 햇볕정책과 민주 투사로서의 인생역정, 외환위기 극복 등을 홍보하기 위해 현지 국가언어로 여러 책자를 발간하고 국제적인 세미나를 열기도 했습니다』
─月刊朝鮮은 최근 金大中 前 대통령이 자신의 저서를 스웨덴語로 번역ㆍ출판하기 위해 스웨덴에 거주하고 있는 崔○○씨에게 보낸 서신과 崔씨의 자필 출판료 수수 영수증을 외교채널을 통해 확보했습니다.
『崔씨는 평범한 인물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崔씨가 비록 金大中 前 대통령 측으로부터 번역ㆍ출판료를 받았다고 해도, 그 일은 실질적으로 國情院이 나서서 공작했을 것입니다. 당시 國情院의 스웨덴 파견관은 李○○씨였습니다. 李씨가 金漢正과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그와 같은 일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다는 얘기를 金漢正씨의 측근으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金大中 옥중서신」 번역본 발간 비용은 金漢正으로부터 받았다』
月刊朝鮮은 김기삼씨의 주장에 대한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당시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한국대사관에 근무했던 직원들을 수차례 만났다. 당시 韓國 정부와 스웨덴ㆍ노르웨이 간 외교채널 라인에 근무했던 외교관들도 만났다. 그 결과 김기삼씨의 증언은 상당 부분 사실로 확인됐다.
月刊朝鮮이 확인한 결과, 金大中 前 대통령이 펴낸 「김대중 옥중서신」을 스웨덴語로 번역ㆍ발간한 시기는 1999년 8월이었다. 총 발행부수는 약 4000부였고,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 등 북구지역 국가들의 대학 도서관과 공공도서관, 유력 교수 등에게 배포됐다. 「金大中 옥중서신」은 1996∼1997년 독일어와 일본어, 영어로 번역ㆍ출판되기도 했다.
金漢正씨가 金大中씨의 책을 현지언어로 번역ㆍ출판하는 등 현지 로비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1998년 5월경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 당시 스웨덴 駐在 한국대사관에 근무했던 한 인사는 『金漢正씨가 李鍾贊 당시 국정원장의 편지(金漢正씨의 활동을 적극 지원해 주라는 내용)를 가지고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방문했다』면서 『金漢正 씨는 이 자리에서 DJ의 책을 현지언어로 번역ㆍ출판하는 업무를 도와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밝혔다.
金漢正씨의 요청을 받은 스웨덴과 노르웨이 駐在 한국대사관 관계자들은 金大中 前 대통령의 책을 발간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고, 1999년 8월 영어판 「金大中 옥중서신」이 「감옥에서 대통령까지」라는 제목의 스웨덴語로 번역ㆍ출판된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한 사람은 스웨덴 문학가인 구테르겐씨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감옥에서 대통령까지」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한 주체는 스톡홀름大 부설 亞太평화연구소(당시 소장은 루디엔 교수)였다. 이 대학 亞太평화연구소 측이 DJ의 책을 발간하게 된 것은 스웨덴 駐在 한국대사관 측에서 책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이 연구소에 특별히 부탁한 결과라는 것이다.
「감옥에서 대통령까지」의 序文(서문)은 스웨덴 사회당 당수이며 총리를 역임한 팔메 前 총리의 부인인 팔메 女史가 썼다. 팔메 女史는 유니세프 스웨덴 총재를 역임했고, 노벨위원회 관계자들과 교분이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金漢正씨는 미얀마에서 아웅산 수지 여사를 만나 이 책의 序文을 써줄 것을 요청해 수지 女史의 序文도 받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金漢正씨는 南阿共의 만델라 前 대통령으로부터 책의 序文을 받으려고 현지까지 가 만델라를 만났으나 만델라 측이 지나친 代價를 요구하는 바람에 성사되지 않았다는 게 현지 외교 관계자들의 주장이다. 金漢正씨는 이후 亞太재단 부설 亞太평화민주지도자회의가 서울에서 주최한 만델라 前 대통령의 초청을 시도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책 출판비용은 國情院 예산일 가능성 높다』
「감옥에서 대통령까지」를 출간하는 데 소요된 총 경비는 14만5000달러(韓貨로 약 1억7400만원)였다고 한다. 이 예산은 스웨덴 駐在 한국대사관 측에서 金漢正 씨에게 요구해 金씨로부터 전달받았다고 한다. 國情院의 한 관계자는 『金漢正씨가 DJ의 책 출판을 위해 스웨덴 대사관 측에 보낸 돈은 國情院 예산일 가능성이 높다』면서 『당시 金漢正씨는 국정원장 산하의 대외협력관실에 근무하면서 이 부서의 예산 전액을 국정원장 비서실 예산에서 충당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國情院의 또 다른 관계자는 『金漢正씨가 노벨상 수상 로비를 위해 사용한 돈은 국회의 감사대상이 아닌 國情院 특별예산 중 일부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金大中 前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로비를 위해 金漢正씨는 수차례 스웨덴과 노르웨이 등을 방문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金漢正씨는 1998년 5월과 10월, 1999년 3월과 8월 등 다섯 차례 스웨덴을 방문했고, 네 차례 노르웨이를 방문했던 것으로 月刊朝鮮의 취재 결과 확인됐다. 金漢正씨가 5박6일 일정으로 스웨덴을 방문했을 때는 당시 국정원장으로 근무하던 李鍾贊씨도 동행했다.
스웨덴 駐在 한국대사관에 근무했던 한 관계자는 『金漢正씨가 스웨덴을 방문했을 때 주로 스웨덴 駐在 한국대사관 관저에 머물렀고, 시계와 옷 등의 명품 리스트를 가지고 와 자주 쇼핑을 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DJ의 노벨상 수상을 위해 金大中 정부가 어느 정도까지 적극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를 전해주었다.
『당시 金大中 정부는 외교부를 통해 당시 이집트에 파견돼 있던 공보관을 南阿共(만델라 겨냥)에, 스페인의 공보관을 스웨덴에 파견하는 방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내용의 전문을 스웨덴 駐在 한국대사관 측에 보내온 적이 있었습니다. 이 전문은 1999년 10월21일자로 된 것이었습니다. 다시 스웨덴 駐在 한국대사관 측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는 의견을 本國에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현지 대사관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1999년 11월6일자로 「공보관을 이동시키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본다」는 의견과 함께 이집트 공보관을 南阿共으로, 스페인 공보관을 스웨덴으로 보내는 인사를 단행했습니다』
다시 國情院 前 직원 김기삼씨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DJ의 노벨상 수상을 위해 스웨덴과 노르웨이 현지 유력 인사들을 한국에 비밀리에 초청했었다는 주장이 여러 곳에서 제기되고 있는데요.
『정확한 얘기입니다. 1998년 1월 앞에서 얘기한 스웨덴 왕립 주치의였던 韓○○씨의 주선으로 엘리아센 당시 스웨덴 외무부 차관(前 유엔 사무차장)이 서울을 방문해, DJ의 아들인 弘一(홍일)씨를 만났습니다.
이후 1998년 3월 벌커 당시 스웨덴 국회 부의장이 극비리에 서울을 방문해, 李鍾贊 국정원장과 金大中 前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슐만 노벨재단 사무총장도 1998년 3월1일부터 5일까지 한국을 방문한 데 이어, 1999년 12월에도 서울을 비밀리에 방문해 金大中 前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슐만 총장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는 金漢正씨가 직접 비행기 안에까지 들어가 영접을 했습니다』
노벨상 수상 로비 대상자들에게 줄 금액이 적힌 서신 확보
月刊朝鮮 취재팀은 이같은 김기삼씨의 주장에 대한 사실여부를 파악한 결과, 모두 사실로 확인됐다. 외교채널의 한 관계자는 『당초 노벨상 로비는 韓박사로부터 시작됐다』면서 『그는 DJ가 대통령 당선자 시절이던 1998년 1월 DJ의 아들인 弘一씨에게 노벨상 수상을 위해서는 南北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노벨재단 관계자들의 의견을 전달했고, 그 이후 얼마간은 그가 노벨상 관련 활동을 한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韓박사는 그 후 金漢正씨가 노벨상 로비활동을 실질적으로 이끌기 시작한 1998년 5월부터는 공식 라인에서 제외됐다』면서 『다만, 韓박사는 노벨상 수상 로비대상자인 유력인사들을 서울로 불러들이는 업무는 계속 맡아온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金大中 정부가 南北이산가족들이 상봉하는 현장에 노벨재단 관련 인사들을 극비리에 초청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DJ의 노벨상 수상이 확정되기 1개월쯤 전인 2000년 8월15일 제1차 南北이산가족상봉 행사였습니다. 정부 관계자들은 南北이산가족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만나도록 했습니다. 이산가족들이 서로 껴안고 울고불고 하는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서였겠죠. 이 장면을 비밀리에 본데비크 前 노르웨이 총리가 지켜본 것입니다. 본데비크 총리는 노벨상 수상자이자, 노벨재단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실력자였습니다.
본데비크 총리를 서울에서 안내한 사람은 당시 國情院의 朴○○씨였습니다. 朴씨는 전주高 출신으로 노르웨이 파견관을 지냈고, 당시에는 國情院 동구와 북구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金漢正씨는 노벨위원회 副위원장이자 5人 심사위원회의 일원인 노르웨이의 스톨셋 주교(오슬로 대학 학장)를 비밀리에 서울로 초청했습니다. 스톨셋 주교는 金大中씨의 노벨상 시상식에서 사회를 맡은 사람입니다.
金漢正씨는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東티모르의 라모스 호르타 외무장관으로부터 노벨상 추천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라모스 호르타는 金大中씨의 노벨상 시상식에 초대된 사람입니다. 金大中 前 대통령이 자신의 재임 중 東티모르에 경제적인 지원과 함께 상록수 부대를 파견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보인 것도 노벨상 수상 노력의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호르타 장관은 月刊朝鮮 지난 2월호의 인터뷰에서 『亞太민주지도자회의(亞太재단 부설)로부터 20만 달러를 받은 것은 구스마오 대통령이었다』고 말했다.
─金漢正씨가 國情院에서 DJ의 노벨상 로비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던 1999년 5월 왜 亞太재단 부설 亞太평화민주지도자회의로 자리를 옮기게 된 것인지.
『李鍾贊씨는 金大中 정부 출범 초기인 1998년 3월부터 1999년 5월까지 국정원장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때 국정원장이 李鍾贊씨에서 千容宅(천용택) 씨로 바뀌었습니다. 새로 국정원장에 부임한 千容宅씨는 金漢正씨의 활동에 대한 보고를 받고, 「國情院內에서 노벨상 로비활동을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金씨의 자리를 옮기게 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金漢正씨는 1995년부터 亞太평화재단 부설 亞太평화민주지도자회의 사무 副총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것이죠. 金씨의 직책이 비록 사무 副총장이었지만, 당시 사무총장이 공석이었기 때문에 이곳의 실질적 책임자는 金漢正씨였던 것입니다. 金씨는 이곳에서 청와대 제1부속실장으로 자리를 옮긴 1999년 12월까지 노벨상 수상 로비활동을 계속하게 된 것이죠』
─金漢正씨가 亞太평화재단 부설 亞太평화민주지도자회의에서 노벨상 수상을 위해 어떤 활동을 했는지요.
『1999년 7월, 金大中씨에게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을 안겼습니다. 이 賞의 수상자 11명 중 6명이 노벨상을 탔기 때문에, 이 賞의 수상은 노벨상을 타기 위한 일종의 前단계인 셈입니다』
北, 스웨덴에서 굴착기 사가다
月刊朝鮮은 金正日 정권이 南北 정상회담이 추진되던 1999년 이후부터 외국에서 무기관련 장비를 현금으로 사들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國情院의 한 관계자는 『1999년 7∼8월 사이 7명으로 구성된 北韓 공작단 2개 조직이 스웨덴을 방문해 암반 굴착기를 현금으로 매입했다』면서 『당시까지만 해도 北韓 측은 스웨덴에서 외상으로 구입해 간 장비의 대금을 상환하지 못해 현금이 아니고서는 거래를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북한 공작원들은 스웨덴을 방문해 지하 200∼300m에 설치돼 있는 지하시설을 견학한 뒤, 굴착기 5대를 현금(韓貨 약 72억원)으로 매입했고, 매입가격은 대당 120만 달러였다고 한다. 이 굴착기는 스웨덴의 ATLAS社 제품으로 지하 300m까지 암반 굴착이 가능하다고 한다. 북한 측은 이 굴착기를 지하 곡식창고 설치 명목으로 구입했으나. 실은 지하에 核 관련 시설을 하기 위해 구입한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國情院의 당시 스웨덴 파견관들도 북한 측의 굴착기 구입과 관련, 『북한이 核 시설을 위해 스웨덴에서 굴착기를 구입한 것이라는 보고를 했으나, 國情院 본부에서 북한 측이 내세운 「곡식창고 설치용 장비」로 보고서를 다시 작성하라고 지시해, 그 뒤 보고서를 다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月刊朝鮮은 S그룹 측이 金大中 前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로비활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노벨재단에 200억원 규모의 국내 노벨박물관을 건립해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1998년 3∼4월 전달했던 것으로 확인했다. 당시 노벨재단 측은 세계 주요 지역 10곳에 노벨박물관을 건립한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S그룹 측은 또 「김대중 옥중서신」의 스웨덴어판 번역본 출판비용을 부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민간 차원의 발간은 곤란하다』는 국정원內 관계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고 한다.
기자는 國情院의 스웨덴 파견관으로 근무하면서 金漢正씨의 지시를 받아 스웨덴 현지에서 金大中 前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로비활동을 벌였던 李○○씨에게 수 차례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李씨는 『지금은 그 사실을 밝힐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李씨는 『DJ의 노벨상 수상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많은 돈이 金正日에게 전달됐고, 이 돈이 결국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무기구입에 사용된 내용들에 대해 국회 차원의 국정감사 등이 실시될 경우, 증인으로 나가 보관하고 있는 모든 증거들을 공개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李씨는 『金漢正씨에게는 심한 배신감을 느낀다』면서 『다만 내가 그동안 했던 노벨상 로비관련 사실들을 밝힐 경우, 근무해 왔던 조직(國情院)이 곤경에 처할 우려가 높아 지금은 모든 사실을 공개할 수 없다』고 말했다.
金大中 前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는 과정에서 국가정보원의 조직과 자금이 사용되었다. 現代의 금강산 관광료 및 남북 頂上회담용 對北 불법송금 5억 달러 중 일부가 北측이 해외에서 무기를 구입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정보도 입수되고 있다. 한 개인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서 國益이 손해를 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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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金大中 前 대통령과 북한 金正日 간 南北 정상회담 代價(대가)로 남한 측이 北韓에 제공한 금액도 現代그룹을 통한 5억 달러 정도가 아니라, 세 배인 15억 달러에 달한다는 주장도 아직 의혹으로 떠돌고 있다. <----- 1조 팔천억이 되나??
고 박대통령 기념관 30개 만들고도 남을돈이죠...강원도에 있는 김일성 별장도 보수공사 하면서 나쁜놈들...ㅜㅜ
스크랩이라는 것이 생겼네요. 모하는 거죠?. 스크랩 금지?>
어쩌다가 때중이가 노벨평화상을 탔는지;;; 하기야 돈 주고 사 온거나 다름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