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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알 것 없다
사도행전 1장 6-8절 / 이재철 목사
➤“6. 그러므로 그들이 함께 왔을 때에 그분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주께서 이때에 그 왕국을 이스라엘에게 다시 회복시켜 주고자 하시나이까? 하매 7.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 때나 그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신의 권능 안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님]께서 너희에게 임하신 뒤에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땅의 맨 끝 지역까지 이르러 나를 위한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6-8 KJV)
고부 갈등은 동서양 똑같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갈등은 우리나라만의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애당초 남남이었던 두 여자 그것도 나이 든 여자와 젊은 여자가 단지 남편 혹은 자식이라는 한 남자를 매개로 고부사이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아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폴 투르니에는 비밀이라는 제목의 책 속에서 고부간의 갈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갓 결혼한 젊은 부부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가정의 경우를 상상 해보십시다. 어느 날 아들 내외가 출근한 뒤에 시어머니는 집안과 일터에서 수고 하는 며느리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하기로 작정을 합니다.
마침 며느리가 출근하면서 켜둔 세탁기에서 세탁물을 꺼내어서 말린 뒤에 정성스럽게 다림질을 합니다. 그리고는 곱게 개켜 그것을 며느리 방으로 들어가서 옷장을 열고 옷장 속에 가지런히 올려놓습니다. 하루 종일 그 일을 하는 내내 시어머니의 마음은 퇴근 후에 자기 옷장을 열어 보고 시어머니의 자상한 사랑에 감격해할 며느리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으로 그저 뿌듯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퇴근해서 돌아온 며느리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옷장을 열어 본 뒤에 보인 반응은 전혀 시어머니 의 예상과 달랐습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자기 방으로 마음대로 출입하고 심지어 옷장마저 함부로 여닫은 것에 대해서 심히 언짢아했습니다. 그 뜻밖의 반응에 하루 종일 며느리를 위해서 수고와 정성을 다한 시어머니도 불쾌해졌습니다. 시어머니는 자신의 수고를 전혀 이해해 주지 않으려는 며느리를 이해할 수 없었고 며느리는 자기 방과 옷장을 무담 침범한 시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두 사람 사이에는 허물 수 없는 장벽이 생겼고 갈등과 대립 의 골은 날로 깊어만 갔습니다.
이 사건은 순전히 시어머니의 선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시어머니는 결코 며느리에게 해를 끼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사랑하는 며느리를 돕기 위해서 손수 며느리의 빨래를 손질했고 며느리의 옷장에 갖다 놓았을 뿐 입니다. 그런데도 왜 이런 엉뚱한 결과가 초래되었겠습니까? 이에 대한 폴 투루니에의 진단은 이렇습니다. 며느리에게 그녀의 방과 옷장은 일반적인 개념의 단순한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한 지붕 아래에서 시어머니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그 며느리에게 자신의 방과 옷장은 그녀의 존재 자체였습니다.
그녀는 자기 방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자신의 실체를 대면할 수 있었고 그 방에서만 자신을 지킬 수 있었 고 그 공간에서만 진정한 안식을 얻고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며느리에게 자기 방과 그 방 속에 있는 집기는 자기 자신인 동시에 자기의 인격이었습니다. 따라서 며느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기 방과 옷장을 임의로 다룬 시어머니는 바로 자신의 존재와 인격을 깡그리 짓밟은 셈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선의를 선의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만약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빨래를 손질한 뒤에 그 빨래를 며느리의 옷장에 가져다 두는 것이 아니라 거실 테이블 위에 쌓아두었다면 퇴근한 며느리는 분명 시어머니의 자상한 사랑에 감격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시어머니와 며느리 간의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며느리들은 흔히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의 이름으로 소유하고 지배하려고 합니다. 상대에 대해서 미주알 깨주알 낱낱이 알려하고 시도 때도 없이 간섭 하려 합니다. 한마디로 상대가 자유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 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대에 대한 억압과 속박 일 뿐 결코 참된 사랑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폴투르니에는 사랑을 상대가 간직하거나 지키고 싶어 하는 시간과 공간 혹은 비밀을 존중해 주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상대의 존재 자체를 존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과 피조물 사이의 사랑도 이렇다면 하물며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 사이의 사랑이야 두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4복음서의 마지막 장인 요한복음 21장은 교회의 역사와 사도들의 행적을 밝혀주는 사도행전과 맞물려 있다는 관점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베드로의 순교에 대하여 예언
요한복음 21장의 마지막 단락은 이런 내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장차 순교할 것을 예고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주님을 따를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평소 자신이 라이벌로 의식하고 있던 요한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즉각 주님을 향해 요한의 앞날은 대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주님의 답변이 이러 했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내게 무슨 상관이냐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요한의 미래를 어떻게 인도하시던지 그것은 결코 베드로가 상관할 일이 아님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4복음서의 마지막 장 마지막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요한복음 21장과 맞물린 사도행전 1장 오늘의 본문에서도 같은 의미의 내용이 또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본문 6-7절 말씀입니다. ➤“6. 그러므로 그들이 함께 왔을 때에 그분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주께서 이때에 그 왕국을 이스라엘에게 다시 회복시켜 주고자 하시나이까? 하매 7.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 때나 그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신의 권능 안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제자들의 관심은 온통 로마 제국 신민 통치로 부터 이스라엘이 정치적인 독립 을 얻는 데 있었습니다. 한주 이래 살펴본 것처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 강림 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바로 그 성령의 강림 하실 때를 이스라엘의 해방의 시기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 하실 때가 바로 그때인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이 질문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본문 7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7.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 때나 그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신의 권능 안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주님께서는 때와 기한이라는 용어를 구별해서 사용하셨습니다.
크로노스는 일반적인 의미의 연대기적 시간을 뜻합니다.
태초에서부터 시작해서 역사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일직선상을 흘러가는 시간이 곧 크로노스입니다. 그에 반해서 기한으로 번역된 카이로스는 특별한 사건과 관련된 시간의 한 정점을 읽었는데 특히 성경적으로 는 주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종말의 시기를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해방의 시기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모든 역사의 기한과 때는 오직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 축근 속에 달려있음을 밝혀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그것은 너희의 알바가 아니라고 천명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원문을 직역하면 “그것을 아는 것은 너희의 것이 아니다.” 라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려서 그것은 너희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의미였습니다. 내게 무슨 상관이냐는 말씀으로 복음서의 막을 내리신 주님께서 바로 그 복음서와 맞물린 사도행전 1장 도입부에서 또다시 제자들에게 너희의 알바가 아니다. 라고 강조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까.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이 창조주의 영역에 뛰어들어 창조주를 간섭하거나 상관하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고유 영역과 하나님의 자유로우심을 온전히 존중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믿음이요 겸손한 사랑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 역시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를 그렇게 대해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46장3-4절에서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 ¶ 오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내게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는 배에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부터 내게 업혔나니 4. 너희가 노년에 이를 때까지 나는 그니라. 백발이 될 때까지 내가 너희를 업으리라. 내가 만들었은즉 내가 안을 것이요, 내가 너희를 업고 건져 내리라.”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어디에 있든 항상 그곳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의 표현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디로 가든 주님의 품으로 안고 또 품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없고 우리의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영으로 성령님으로 존재하십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눈에 보이는 형체를 지니신 분으로 밤낮 우리를 품고 계시는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다. 친부모라도 성인이 된 자식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면 자식이 부모에게 등을 돌리지 않습니까? 아무리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빨래를 대신해 주어도 옷장까지 함부로 여닫으면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경멸하지 않습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형체를 지니신 분으로 우리를 품으시고 밤낮 우리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간섭하신다면 우리는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인해 질식하고 말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형체가 없는 성령님으로 우리를 품고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우리 각자 고유한 삶의 영역과 우리의 자유를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시고 존중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로봇처럼 의지도 없는 단순 기계가 아니라 우리의 온 의지를 다해서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우리 각자의 취향과 개성에 따라 구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해서 안달하는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7.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 때나 그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신의 권능 안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님]께서 너희에게 임하신 뒤에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땅의 맨 끝 지역까지 이르러 나를 위한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상관할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고유 영역과 하나님의 자유로우심을 온전히 존중해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유의지에 맡겨주신 자기 삶의 영역에서 주님을 따르며 그리스도의 증인 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이 서로 각자의 고유 영역과 자유를 존중하면서 창조주와 피조물의 역할에 서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신뢰와 사랑의 관계입니다.
저는 1986년도에 영락교회에서 교육전도사 생활을 시작하는 것으로 목회 현장에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올해로 목회 경력 20년째가 되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지난 20년 기간 동안에 수련회나 야유회 등 얼마나 많은 야유회 행사를 교회에 가고 또 치렀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그 숱한 야유회 행사를 치르면서 그 행사를 위해 기도할 때 좋은 날씨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서 좋은 행사를 교회에 간다 할지라도 그 행사의 현장에서 누군가를 위해서 비를 내려야 할 하나님의 필요가 있으시다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와 상관없이 반드시 비가 내리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결정사항이요.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계획된 행사를 위해서 기도할 때 행사 당일 날 날씨가 어떠하든 주어진 자연 여건 속에서 목회자답게 처신하고 최선을 다해서 계획한 행사를 주관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고는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지난 20년 동안 주님의 은혜 속에서 계획되었던 야유회 행사가 날씨로 인해 위축되거나 제한받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결혼을 앞둔 청년이나 청년의 부모들 가운데 자신 혹은 자식의 배우자가 될 사람의 외모, 학력, 직업 등 모든 조건까지 스스로 결정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이를테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되는 배우자의 모든 조건을 합쳐서 자기 마음속에 배우자의 모습을 그린 뒤에 자신이 그린 그 그림에 부합되는 배우자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와 믿음은 중요한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인생을 천지를 주관하신 하나님께서 이끌고 계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배우자의 외모와 학력, 직업 모든 조건까지 자신이 직접 결정하고 하나님께 통보한다면 실은 그 자신이 하나님이오. 하나님은 그의 하수인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사람에 관한 한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세팅이 끝난 완제품 보석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원석을 원석 그대로 주십니다. 배우자, 자식, 친구, 동료 등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인생 고유의 영역과 자유를 존중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원석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하나님 고유의 영역이요,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목적이라면 그 원석을 그리스도의 증인답게 자발적으로 진리 안에서 세팅해 가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삶의 영역이요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의 몫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행복이 창조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한 젊은 주부로부터 매우 감동적인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녀의 시댁은 소문난 기독교 가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그녀와 결혼하겠다며 그녀를 시부모 앞에 가서 소개시킬 때 그녀는 교회당의 문턱도 넘어 본 적이 없는 불신자였습니다. 믿음 좋은 가문의 부모들이었으니 자신의 아들이 독실한 신앙의 며느리를 얻게 해달라고 얼마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겠습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아들이 선택한 며느리 감이 불신자라는 사실에 대해서 시부모의 실망이 컸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추스른 시부모가 그녀에게 말을 했습니다. 내 아들이 선택한 배우자가 믿지 않는 너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참으로 천만 뜻밖의 일이다. 믿지 않는 며느리가 들어온다는 것이 우리 가문의 얼마나 실망스러운 일인지 너는 아직 모를 것이다. 그러나 내 아들이 믿음으로 너를 선택한 이상 우리 부부는 네가 우리 기도의 응답임을 믿는다. 부디 우리 가족과 더불어 살면서 훌륭한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결혼한 뒤에 시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주일이 되어도 교회에 가지 않고 집안에서 쉬는 며느리를 시부모는 단 한 번도 야단치지 않았고 교회에 가자고 다그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치 친정 부모처럼 언제나 따뜻한 사람으로 대해주었습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살다 보니 며느리가 시부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외출했다가 귀가 길에 보니 마침 동네교회당에 특별 새벽 기도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튿날 새벽에 자발적으로 그 교회 새벽 기도회에 참여했습니다.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에 하나님의 음성이 그녀를 맞아 주셨습니다. “애야 왜 이제야 오니?” 자신을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그 음성 앞에서 그녀는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고 그 순간부터 크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끝까지 믿어주었던 시부모님의 사랑에 신앙의 자부가 되는 것으로 보답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이 시대의 위대한 크리스도인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그녀의 시부모입니다. 그들은 자기 아들이 독실한 크리스도인을 배우자로 얻기를 오래도록 기도하였음에도 불신자인 그녀를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고유역력과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뜻을 믿고 존중한 것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는 며느리가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위해 예비하신 원석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다고 매 주일 아침에 예배당에 가자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며느리가 자신의 의지로 차발적으로 교회에 나갈 것을 굳게 믿으면서 그 며느리 앞에서 크리스도의 증인답게 불신자인 며느리를 오직 지성으로 사랑했습니다. 그 결과 며느리는 자발적으로 교회의 문턱을 넘어갔고 그 가정을 통해 그 여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목적이 아름답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바로 그 가정이야말로 죽었던 영혼이 되살아나는 이 시대의 땅 끝이오, 그 시 부모는 명실상부한 땅 끝의 증인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령님 창조주 하나님 되심을 믿으신다면 하나님의 고유 영역과 하나님의 자유로우심을 침범하고 상관하려는 우를 범치 마십시다. 하나님께서 무소부재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함께하시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으로 함께하시면서 우리의 영역과 자유를 존중해주고 계심을 잊지 마십시다. 하나님께서 진정 전능하신 분임을 믿으신다면 지금 내게 주어진 상황과 사람들 속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뜻이 있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십시다.
지금 주어진 상황 속에서 나를 품고 계시는 성령님을 힘입어 오직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십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람들 앞에서 성령님을 쫓아 그리스도의 증인답게 살아가십시다. 그때 우리가 어디에 있든 우리가 두 발 딛고 선 곳이 땅 끝이요, 우리는 명실상부한 땅 끝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그곳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목적이 바로 우리의 삶을 통해 기적처럼 펼쳐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주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창조주를 믿는다면서도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의 영역과 하나님의 자유로우심을 상관하려는 어리석음을 더 이상 범치 않도록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사랑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삶과 자유를 침해하는 오류도 범치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십시오.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이시면서도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성령님으로 우리와 함께 하심이 우리 삶의 영역과 자유를 존중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가 상관할 것은 주어진 상황과 사람들 속에서 오직 성령님을 힘입어 자발적으로 주님을 따라 사는 것임을 그리스도의 증인답게 살아가는 것임을 잊지 말게 도와주옵소서! 우리가 어디에 있든 바로 그곳이 죽었던 영혼들이 살아나는 땅 끝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우리 모두 성령님 안에서 명실상부한 땅 끝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희열을 날마다 누리게 도와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음원녹취 / 김은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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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감사합니다.
아멘! 말씀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철길은 왜 하나가 아니고 둘인가?
길은 혼자서 떠나는게 아니라는 뜻 이랍니다.
멀고 험한 길일수록 둘이서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구요.
사랑을 한다는 것은 둘이 만나 행복하게 하나가 되는 것이지만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둘 사이에 알맞은 거리가 필요 해서 라고도 합니다.
아름다운 사랑을 위하여 건강하게 행운이 가득한 주일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