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862) - 아직도 가시지 않은 6.25전쟁의 상흔
지난주로 6.25전쟁 71주년을 맞았다. 그때 초등학교 1학년 꼬마는 60주년을 맞은 2010년에 부모님과 함께 떠났던 옛길을 회상하며 통일의 염원을 안고 피란길에 동행했던 동생들과 함께 그길을 뚜벅뚜벅 걸었다. 아직도 이루지 못한 평생의 간절한 염원은 하나 된 조국을 눈앞에 보는 것, 그것이 어렵다면 전쟁의 위험 사라지고 자유로이 남북을 오가는 날이라도 맞았으면.
엊그제 신문에서 살핀 한국전쟁의 상흔, 3년간의 ‘소규모 세계대전’에서 피아(彼我) 560만 명이 죽고 다쳤다. 우리 집안에서도 가족을 고향으로 피란시키고 홀로 서울에 남은 작은 아버지는 내내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다가 4년 전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에 따라 납북자로 결정되어 그 이름이 임진각 공원에 있는 납북자 기념관 벽에 새겨져 있다. 6.25 직후 열여덟에 전장으로 나간 작은 형은 생사를 알지 못하다가 남북이산가족 찾기를 통하여 25년 전 북녘에서 고향을 그리며 이승을 떠난 것을 알게 되었고 남녘가족을 대표한 큰형님이 북녘에 사는 형수와 조카를 2007년에야 금강산에서 가까스로 상봉할 수 있었다. 누구나 겪은 6.25의 아픔, 최근에 살핀 사례를 한두 개 살펴본다.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한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모습, 3주 전에 찾았다
1. 사랑합니다, 당신
토요일 아침마다 60~80대의 나이든 이들이 겪은 삶의 이야기를 통해 세대를 어우르는 공감 무대 KBS의 ‘황금연못’을 아내와 함께 열심히 시청한다. 지난 주말의 주제는 어머니와 고향, 그중 6.25전쟁으로 남편과 헤어진 91세 어머니와 70대 아들의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주인공은 열아홉에 결혼하여 이듬해 전장에 나간 남편과 헤어진 채 평생을 갓난아이 때부터 지금까지 함께 산 이순규 할머니와 그 아들... 7살이 되어서 아버지가 어디계시냐고 물어보고, 어머님의 아픔을 이해한 그가 그 이상은 물어보지 않고 지금껏 어머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삶, 2015년 남북이산가족상봉을 통해 북한의 아버지를 극적으로 상봉하고 그때 남편의 정표로 받은 스카프를 이날도 매고 나온 어머니, 그 진한 사랑과 그리움이 어머니와 아들의 얼굴에 깊은 주름으로 패여 새겨진 것 같다. 헤어진 지 65년 만에 만났지만 얼굴에 남은 남편의 옛 모습이 낯설지 않다는 이순규 할머니의 말이 마음에 닿는다. 처음으로 아버지를 만난 아들의 간절한 소원은 죽기 전에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더 볼 수 없을까! 평생 남편을 그리며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헌신한 어머니에게 바치는 상패, ‘사랑합니다. 당신’의 내용은 이렇다.
‘사랑하는 어머니께!
한 평생 아들을 위해 희생하셨던 어머니의 삶이 존경스럽습니다.
통일이 되어 아버지를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게 옆에 계셔주세요.
지금껏 어머니가 제 버팀목이 되어주신 것처럼 제가 당신의 버팀목이 되겠습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이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청주에 거주, 방송에 나온 날 산책길에 나선 아내는 옆에 걷는 이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곁에 사는 아무개 할머니 모자가 오늘 아침 TV에 크게 나왔다네!’
지난주말 황금연못 후반의 '사랑합니다 당신'에 출연한 이순규 할머니와 아들
2. 별이 된 나의 어머니
6.25 피란길에 남편과 헤어진 숙모님은 다섯 살, 두 살 어린 남매와 뱃속에 든 태아 등 3남매를 고이 길러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시켰다. 숙모님이 남편과 헤어진 지 50년이 되는 2000년 12월, 가문에서는 숙모님께 ‘장한 어머니’라는 공로패를 증정하였다. 그 내용, ‘최말순 님께서는 1943년에 청도 김 공 재철 선생과 결혼하여 한용‧명희를 낳으시고 낙진을 잉태 중 1950년 민족적 비극인 6.25전쟁으로 남편과 생이별한 채 홀로 어린 삼남매를 키우시어, 나라와 사회의 중진으로 성장시키셨습니다. 특히 님께서는 온 나라와 백성이 곤궁에 처한 험난한 시절 속에서도 곧은 의지와 절제로 지난 50년 세월을 잘 견디시면서 현숙한 아내로서의 본분과 장한 어머니 역할을 훌륭히 감당하시었습니다. 효성과 인격이 높으신 김 공 하용 선생의 후손으로 큰 긍지를 지닌 저희들은 님께서 가문의 존엄과 명예를 드높이신 정절과 승리의 삶에 대하여 한없는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새기며 살아갈 것입니다. 이에 저희들은 님의 75회 생신을 맞이하여 그 숭고한 정신과 공덕을 기리는 뜻을 이 패에 담아 드립니다.’
25세에 남편과 헤어진 숙모님은 54년을 더 사신 후 79세 때인 2004년에 우리 곁을 떠나셨다. 평소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펴신 숙모님은 곤궁한 중에서도 1천만 원의 장학금을 쾌척하셨고 돌아가시기 전에는 1억 원의 기금을 자녀들에게 내놓으시며 후손들이 한데 모여 잔치하며 화목과 우애를 돈독히 가꾸라고 당부하셨다. 그 10주년이 되는 2014년 자녀들은 어머니를 기리며 ‘어머니의 향기’라는 가족문집을 만들었다. 그 내용을 접한 주변에서 숙모님의 숭고한 행적을 칭송하며 그 일대기를 소설로 다루자는 제안을 내놓기도 하였다. 최근 한 저술가가 취재수첩에 새긴 삶의 본이 되는 어머니의 사연들을 한데 모아 ‘오늘 하루가 전부 꽃인 것을’이라는 이야기책을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 지난 주말에 그 책을 받았다. 이 책의 첫 번째 이야기가 ‘별이 된 나의 어머니’라는 제목의 숙모님 사연이다. 그 앞과 마지막부분의 내용은 이렇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다. 북한군은 단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한 뒤 무섭게 남하했다. 8월 30일 충무로 명고당 안주인은 뱃속의 아이를 품고 다섯 살과 세 살배기 어린 남매를 앞세워 광나루에 도착했다. 이미 광나루는 피난민들이 개미떼처럼 몰려 있었다. 명고당 안주인은 아버지가 미리 준비해 둔 배에 떠밀리시다시피 올라탔다. 이들의 목적지는 전북 고창군 고산마을. 며칠이 걸릴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기약 없는 길을 그렇게 걸었다. ---
2004년 9월 16일, 이날은 어머니가 피난을 내려오던 54년 전 그 날이다. 이날 아침 어머니는 79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하늘의 별이 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굴시내 선영에 있는 아버지의 유골함 곁에 잠들었다. 김 회장 후손들은 어머니의 묘비명을 이렇게 적었다. 지상에서 못 다한 사랑 천국에서 이루소서. 아버님, 어머님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오늘 하루가 전부 꽃인 것을'의 책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