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인을 위한 디자인' 강조한 엔조 마리의 철학 바탕으로 대학생들이 상인용 가구 개발
옛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한국 디자인의 전진 기지라고 내세운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들어섰다.
그러나 길 하나 건너 동대문시장으로 가면 '디자인'이란 단어는 무색해진다.
불법 카피 제품이 판치고 , 상인들은 밥 먹을 공간도 제대로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한다.
이곳에서 '삶의 질을 높이는 행위'라는 디자인의 본질적 가치는 그저 딴 세상 얘기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에서 DDP와 동대문 시장에서 일하는 상인을 연결하는 작지만 의미 깊은 디자인
프로젝트가 최근 진행됐다.
디자인 회사 디자인이가스퀘어 기획으로 서울과학기술대 김상규 교수와 디자인학과 학생 12명이
지난해 11월부터 5개월 동안 동대문시장의 상인들이 편리하게 쓸 수 있는 가구 디자인을 개발했다.
프로젝트의 출발은 DDP 개막전의 하나로 소개된 이탈리아 디자인 거장 엔조 마리(82)의
'아우토프로제타지오네'에 담긴 철학이었다.
아우토프로제타지오네는 "디자인은 사회가 진짜 필요로 하는 것을 발견하는 과정'이라고 강조한
앤조 마리가 '디자인 자급자족'을 꿈꾸면서 1973년 선보인 프로젝트다.
나무판자, 못, 망치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탁자와 의자 디자인 설계도면 19개를 제시했다.
상업적인 목적이 아니면 누구나 무료로 사용할수있게 저작권 등록을 하지 않은 '오픈소스 디자인' 이다.
'만인을 위한 디자인'이라는 엔조 마리의 정신을 계승해 학생들은 동대문시장에 가서 상인들과 대화하면서
이들에게 필요한 가구를 고안하고, 원하면 그대로 복제해서 쓸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해서 총 11개의 '상인 맞춤형 가구'가 탄생했다.
난로를 플라스틱 박스 안에 두는 위험천만한 광경을 보고는 전열기구를 넣을 수 있는
다목적 테이블(김예솔.배병선의 '자유자재')을 고안했다.
상인들이 의자 좌판에 도시락을 펼친 채 쪼그려 앉아 식사하는 걸 관찰하고선 탁자로도 쓸 수 있는
간이의자(김성수의 '틈')를 만들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배병선씨는 "상인들이 처음엔 나철어하다 써 보고는 만족한다"며
"상인들이 우리가 제안한 디자인대로 직접 가구를 제작해 쓸 때 비로소 프로젝트는 완성된다"고 했다.
기획애 참여한 큐레이터 윤효진씨는 "엔조 마리는 41년 전 아우토프로제타지오네를 통해 디자이너가
사회를 관찰하고 인간을 배려해야 함을 강조했다"며 "이 정신을 프로젝트에 담았는데
결과적으로 DDP와 동대문시장의 간극을 메우는 데 일조하게 된 것 같다"고 했다.
학생들이 디자인한 가구는 6월21일까지 DDP 전시장에서 열리는 '엔조 마리전'에서 만날 수 있다.
김미라 기자